◎일제(日帝)의 송탄유(松炭油) 수탈(收奪)◎
쩐번에도 말했었제만 지가 태나고 자란 솔개동리(松峴里)서 읍내짝이로 있넌 젤로 첫 번 차 고개가 송탄재여람짜.
지얏꿀(지끔 늘사랑교회 있넌 자리)로 깔라지넌 앞에 고개 거가 송탄재(松炭岾)로 내나 일제강점기 때 송탄유(松炭油)럴 걱서 맨드니라고 온 까끔에 솔나무랑 솔가지럴 무쟈게덜 항긋 벼다가 짤라서 불로 궈내가꼬 지름(松炭油)얼 걱서 맨들았잉께 그 고개 이름이 그케 송탄재(松炭岾)여라.
그리케 송탄유럴 맨들라고 일제가 시케가꼬 고런 송진 지름이랑 유채(일본식이름 나다네, なたね, 菜種) 지름이랑 모도 공출(供出)이람시로 수탈(收奪)해 가가꼬는 일본군 배랑 뱽기에다가 연료로 썼다고 어런덜께서 그케 말씸덜 하솄어람짜.
고케 솔개동리 송탄재서 만칠로 솔나무. 솔가지럴 짤라가꼬도 송탄유럴 맨들기도 하제만 큰 낭구에다가넌 톱이나 칼로 상처덜얼 허끔덜 내고 짚운 홈을 파놔가꼬 걱서 나오넌 송진이랑 관솔을 짤라가꼬 뇍여서 송탄유럴 맨들기도 했답디다.
송탄유 공출의 상처가 너무 커서 결국 죽은 나무
어지께 지가 가가꼬 봤넌데 홍천 공작산(孔雀山) 수타사(壽陀寺) 문앜에가 안직까장 남어있넌 일제 송탄유 공출 폐해의 흔적이 내나 후자에 방법이로 송탄유럴 맨들았던 그 증거물덜로 일제강점기 공출(供出)하고 수탈(收奪)에 실태럴 걱서 또 실감했구만이라.
한나 둘 다덜 떠나가시넌 위안부함마니덜하고 징용 피해자덜...
그분들과 같은 시대를 젺은 저 솔나무덜...
아직은 저케 상처를 지닌 채로 생명 유지를 하는 노송덜도 있고 또 저케 폴쌔 죽어간 노목에서 그때에 상흔(傷痕)이로 저케 생생하게 남어 있음을 지 두 눈이로 직접 확인해 봤십니다.
인자 찰로 몇 분 안 남으셔가꼬 그 함마니덜께선 돈도 필요 없다고 말씸하시넌데라
그라시넌 함마니덜께 하루빨리
금전적 배상은 소용 없잉께
자신덜네 국가에 책임(責任)의 소재(所在)를 인정하는 진정성을 담어가꼬 <가해자로써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럴 하고 나서
앞이로 다시는 번복(飜覆, 그간에는 계속 그런 사실 없다고 뒤집고 번복해 왔음)하지 않고
선린이웃이로 화목한 한일관계가 되아가꼬 두 나라가 항꾼에 볽운 미래럴 열어 나갈 수 있기럴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제59회 조병현 올림-
첫댓글 추억 속에 잠기어. 옛 길을 더듬어 봤습니다. 봉학동에서 송현저수지로 목욕하기 위해 갔던 길..... 그리고 동학 공동묘지가 어디 있는가를 몰랐는데. 오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