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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대협(大俠)의 길
저택이라고 불릴만한 건물의 대문은 클 수밖에 없고 또한 튼튼할 수밖에 없다.
사공탁의 저택 또한 그러하여 참나무로 만든 대문은 곳곳에다 철판으로 도배를 하여
무슨 성문과 같았다. 터억하니 문의 양쪽에 나눠붙은 철판은 불쑥 호랑이의 형상으로
튀어나와 아가리에다 둥근 고리 하나를 물고 있다.
네가 감히 이걸 두드릴 수 있느냐는 듯.
가히 철벽을 보는 느낌.
하지만 베옷의 청년은 그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손으로 밀었다.
장난이라도 하는가?
하지만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보던 사람들은 그 순간에 자신의 귀를 때리는 벼락치는
굉음을 들어야 했다.
쾅!
청년이 문을 밀자 문에서는 벼락치는 굉음이 터졌고, 그 거대한 문은 무슨 볏집과 같이
뒤로 무너지고 말았다. 사위가 그 충격에 진동하면서 자욱히 흙먼지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무, 무슨 일이야?』
호원무사들이 황급히 뛰어나왔다.
청년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표정이 되어 입을 딱 벌린 유가정을 보면서 물었다.
『부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후, 후원에 있다고만…』
청년은 고개를 돌려 뛰쳐나온 호원무사를 보면서 물었다.
『이 사람의 부인이 후원 어디에 있느냐?』
그의 음성은 침착하고도 조용했다.
『무슨 이런 미친 놈이…!』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졸지에 대문이 짚단처럼 무너지는가 싶더니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나타나서 돼먹지 못한 아가리를 놀려대고 있다.
내 이 미친 놈을 단매에… 하지만 그는 채 말도 맺지 못하고서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숨이 막히고 부릅뜬 눈에 대번에 핏발이 섰다.
디밀고 있는 목을 잡은 것처럼 그 청년이 간단하게 그의 목줄기를 움켜쥔 것이다.
『내가 미친 것은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네가 할 일은…』
켁켁거리는 그의 목을 움켜쥔 청년.
뒤에 있던 유가정이 놀라 소리쳤다.
『위험…!』
청년의 손에 제압당한 호원무사와 같이 달려온 나머지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달려드는 것을 본 까닭이다.
하지만 그 소리는 채 제대로 터져나오지도 못했다.
호원무사들이 청년을 덮치는 것을 본 그가 막 소리를 치고자 할 때, 그 호원무사들이
일제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다.
『네가 할 일은 이 사람의 부인이 어디 있는지 안내하는 일이다.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쳐다보지도 않고 그들을 처리한 청년의 눈에서 싸늘한 신광이 쏟아졌다. 남들이 보면
눈에서 빛이 인다고 느끼겠지만 청년의 손에 목줄기를 잡힌 무사는 그 눈빛을 받자
공포로 가슴이 떨렸다.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아, 안으로…』
『허허, 아직도 내외냐? 이리 오너라』
사공탁은 술상 앞에 앉아서 매수련(梅水蓮)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물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계집이란 돈만 갖다 주면 끝이고 정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이 계집만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가 말을 들어먹지를 않았다.
성질 같아서는 단칼에 어떻게 해버리고도 싶지만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없도록
아까웠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을 때에도 절색임은 알아봤지만, 치장을 시켜놓고 보니,
과연 양귀비가 저럴까 싶었다.
게다가 강제로이지만 그녀를 취하고 보니, 몸마져 천하의 명기(名器)였다.
그것이 틈만 나면 그가 후원으로 찾아드는 이유였다. 오죽하면 지금도 외출했다가
바로 이곳으로 찾아들었을까.
『이리 오너라!』
그가 매수련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목을 끌리면서도 자세를 꼿꼿이 유지한채로 버팅긴다. 고개를 숙인
채.
뵉? 그년 고집도 세군 그래. 넌 이미 내 계집이야. 그런데도 고집을 피워서 뭘
어쩌자는 게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는 와락 그녀를 품었다.
돌처럼 굳은 몸이었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손으로 다 쥐기 어려울만큼 풍만한 가슴이다. 게다가 아직 애를 키우지 않은 싱싱한
가슴이었다.
그녀가 몸을 틀었다.
세찬 반항이 느껴졌다.
『이것이 아직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을 피떡으로 만들어서 네눈 앞에다 걸어놓으랴?』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여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몸에 힘을 풀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그 무능한 놈이 어디가 그렇게 좋단 말이냐?』
그녀를 위협해 그녀를 취하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열이 받친다.
그런 거렁뱅이 같은 놈보다 내가 못하단 말인가?
내 품에 안겨서 그렇게 죽도록 시달렸음에도?
놈이 그렇게 힘이나 쓸 수 있어?
와락, 그는 그녀의 옷을 잡아벌렸다.
둥근 어깨가 빛을 뿜으며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시게 흰 목덜미에서
동산처럼 탱탱한 젖가슴까지, 놀랍게도 그녀는 안에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사공탁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그녀를….
그는 사납게 그녀를 그 자리에다 쓰러뜨렸다.
바로 그 순간이다.
『대, 대야!』
다급한 외침이 그의 다음 행동을 묶었다.
『무슨 일이냐?』
사공탁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가 여기 온 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호랑이 간을 삶아먹지 않은
다음에야 그 기분을 건드린 다음에 어떤 상을 받을지 잘 아는 놈들이 그를 건드릴 리가
없는 것이다.
『크, 큰일났습니다!』
『큰일?』
『그렇습니다! 어떤 괴, 괴상한 놈이 다짜고짜 대문을 부수고 난입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에 잔뜩 긴장했던 사공탁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런 망할 놈들! 호원무사들은 뭘하기에 그런 일을 나한테 읊어댄단 말이냐? 당장
가서 놈을…』
『아이고오…!』
느닷없이 들려온 비명.
그리고 조용해진 주위.
사공탁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전신이 굳어졌다.
그는 누르고 있던 매수련의 위에서 몸을 일으켜 왈칵,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기에…』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있는 후원 청월헌(淸月軒), 그 앞에 쓰러진 관사 진자방과 그 위에 엎어져
허우적거리는 호원무사 하나. 그리고 그 좌우에 낙엽처럼 널부러져 있는 자들은 그가
고용한 호원무사들이었다.
그 가운데 맑게 빛나는 눈을 가진 청년 한 사람이 우뚝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사공탁이오?』
『누구시오?』
사공탁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수, 수련!』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사공탁은 그 청년의 뒤에서 유생 하나가 미친 듯이 달려나오다가 그 청년에 의해
저지됨을 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유생은 유가정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번 감이 왔다.
『이 사람의 부인이 여기 있다기에 왔소. 돌려주시오』
『그건…』
『죽고 싶은가?』
청년이 문득 싸늘히 물었다.
크지 않은 소리지만 고막을 울리고 가슴이 떨리는 힘을 가진 음성이었다.
순간, 주춤하던 사공탁의 눈에 빛이 일었다.
청년의 뒤에서 소리도 없이 다가오고 있는 두 명의 중년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천금을 주고 초빙한 중주쌍검(中州雙劍)이었다.
『죽는 것은 네놈이다!』
그것을 본 사공탁이 코웃음쳤다.
볼値? 여보오…!』
유가정이 통곡을 하면서 달려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주저앉아 있는 매수련을 부둥켜
안았다.
그럼에도 감히 사공탁은 움직일 수 없었다.
『으악!』
딱 한마디의 비명.
그처럼 믿었던 중주쌍검이 단 일합에, 그것도 허수아비처럼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사공탁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청년은 거대한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쳐다보지도 않을 수수한 베옷에다 평범한 장검 한자루를 허리에
걸고 있지만, 그 검마저 아예 빼지를 않았다.
『무사하셨군요…』
유가정을 본 매수련이 참혹하게 웃었다.
『다, 당신… 당신…』
모든 것을 짐작한 유가정이 턱을 떨었다.
『못할 짓을 했군』
청년이 사공탁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싸늘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사공탁은 전신이 굳어졌다.
『이들에게 어떻게 보상을 하겠나? 당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그때였다.
『소원이 있습니다!』
매수련이 구르듯 달려가 청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치마가 젖혀져 눈부신 허벅지가
드러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어나십시오. 부인』
『저 악마를 죽여주십시오!』
『그건…』
청년이 흠칫했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사공탁이었다.
『그를 그냥 두면, 은공께서 가시고 난 다음에 그는 다시 불쌍한 사람들을 해칠 겁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요! 부탁합니다!』
『부인!』
청년이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매수련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가슴에는 은장도 하나가
자루도 보이지 않게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입에서 피를 흘리면 다시 말했다.
『부탁합니다. 저 악마를…』
『수련! 수련! 이게 무슨 짓이오? 여보오!』
유가정이 피를 토하듯 외치며 그녀를 부둥켜 안았다.
그녀의 눈까풀이 가늘게 떨렸다.
『당신에게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다고 해서… 죄송해요. 내세에서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때는…!』
그녀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수려언! 안돼! 안돼애…』
유가정이 절규하며 그녀를 흔들었다.
『헉?』
사공탁은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고 있던 그의 눈앞에 청년이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다.
대체 언제 거기에 나타난 것일까.
『미, 미안하오. 이, 이렇게 될줄은… 소, 소협. 아니 대협! 무슨 일이든지 하라면 다
하겠소』
『자진(自盡)하면 시체는 보존시켜주겠다』
『그, 그건…』
청년이 한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사공탁은 거대한 산이 다가와 자신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에 숨이 답답해졌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제, 제발… 돈, 돈을 주겠소! 한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무, 무엇이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줄테니 제발…』
『여인을 살려낼 수 있겠나?』
차가운 청년의 말.
죽은 자를 어떻게 살려내란 말인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 말에 사공탁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청년이 다시 한걸음 다가왔다.
『가, 가까이 오지마!』
발작적으로 소리친 사공탁은 별안간 난간을 짚고 훌쩍 청월헌의 아래 마당으로
뛰어내리더니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예의 눈빛으로 그를 볼 뿐이었다.
사공탁의 저택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고개를 빼밀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퍼져서 부서진 대문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평소에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사공탁인지라 감히 안으로 들어가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웅성거림이 일었다.
유가정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부인을 안고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가슴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그의 옷을 적시고 땅으로 흘러내리지만 그는 그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였다.
『아이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의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달려갔다.
『에구, 저런… 부인이 죽었군!』
누군가가 유가정의 부인 매수련을 알아보고 탄성을 올렸다.
죽은 며느리를 부둥켜안은 채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노모를 내려다 보고 있던
유가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사공탁은 죽었습니다』
『주, 죽어? 그 악마가? 그럼 그분이? 그분이 그 놈을 죽였느냐? 아이고, 이런 일이…
하늘이 무심치 않았구나. 아이고…』
꺼이꺼이 울고 있던 노모가 땅을 쳤다.
『사공탁은 죽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지금
안으로 들어가서 필요한만큼 가져가셔도 됩니다. 광이 열려 있습니다』
『재, 재산을?』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인가.
한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여있던 사람들이 벌떼처럼 앞을 다투어 사공탁의
문안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혼란은 사공탁의 집안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는 걸 보고 달려온 관아의 포졸들이 도달해서야 끝이 났지만 남은 것은 거대한
저택이 아니라, 불탄 폐허뿐이었다.
사공탁은 그간의 죄상을 사죄하는 유서를 남기고 대들보에 목을 매고 죽었다.
그리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타났던 협객이 바로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포의신검협이라는….
여기저기에서 이야기꾼들이 침을 튀기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베옷을 대강 걸치고
나무막대기를 허리에다 꽂고서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이틀후부터였다.
포의신검협의 이름은 이미 아이들의 우상이었다.
* * *
장안성에는 수많은 고적들이 즐비하다.
당대(唐代)의 그 숱한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비림(碑林)이나 대안탑(大雁塔),
와룡사(臥龍寺)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공탁이 죽음을 당하던 바로 그날 밤.
왕승고는 와룡사의 객방에서 신력대도 정규를 만나고 있었다.
『주공에 대한 소문이 불붙듯이 퍼지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칭찬하는 소리가 일고 있나?』
『그렇습니다』
정규의 대답에 왕승고의 고소가 떠올랐다.
『그걸 바라고 하는 짓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주공께서는 그들의 어려움을 구해주시고 악덕도배를
징치하셨습니다』
『그런가…』
왕승고는 조용히 중얼거리고 입을 닫았다.
뜨락에는 달빛이 밝다.
하지만 거기 선 그의 마음은 그리 밝지 못했다.
소문대로 사공탁을 처리한 청년은 그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나다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한 것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
아니었다.
무림맹주.
그 거창한 감투를 위해서 계획된 일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미 강호상에는 그가 귀왕혈을 쫓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의 행로를 조금씩 흘리면서 계속 서진(西進)하고 있었다. 그 행로의 와중에서 그는
눈에 띄는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약자를 보면 손을 써 도왔고, 악을 보면 반드시
응징했다.
문자 그대로의 행협(行俠)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은 금곡노야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그 행위 자체가 조작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행하고 있는 일은 다분히 그의
지시를 따르고 있음이 사실이었다.
『강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판이다. 가장 빠른 시간내에 가장 빠른 평판을 얻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것이 제일… 너는 가는 행로에서 만들어서라도 불의를 보면 참견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여론 조작을 하라는 뜻이다.
불의를 보고 응징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부러 그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선(僞善)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왕승고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곡노야의
지시를 따르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힘없어 핍박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니 이렇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스쳐가는 바람을 그저 바람으로 여기면 될 터인데, 굳이 그 바람에 의미를 부여하니
아직도 나의 수양은 멀었구나』
한참을 묵묵히 서서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고 서 있던 왕승고는 조용히
울림을 떨어내고 있는 처마의 풍경(風磬)을 보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갈등을 빚고 있지만 화산에서 강호를 진동한 포의신검협이라는 이름은 그의
행협으로 인해 점점 더 명성이 높아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스스로의 신분을 감추어도 그 일은 곧 소문이 났다.
노야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그 일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렇게 풀이되었다.
그것이 그를 곤혹케 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공』
뒤에서 정규의 음성이 들려왔다.
『귀왕의 소식이 있소?』
『그렇습니다』
『종남파에?』
『아직 발표가 된 것은 아닙니다만… 귀왕혈의 잔도(殘徒)들이 종남산에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노야께서 전해오셨습니다』
『갑시다』
말과 함께 왕승고가 그 자리에서 몸을 날렸다.
『이런…』
그가 그렇게 바로 자리를 뜰 줄 미처 생각지 모했던 정규가 놀라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떠나면서 남긴 것은 한가닥 긴 휘파람소리. 무림중에서 장소(長嘯)라고 불리는 그
휘파람소리는 자신의 위세를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오직 한가지,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만 쓰인다.
* * *
종남산(終南山).
따로이 진령(秦嶺)이라고 불리는 섬서(陝西)의 대산맥. 예로부터 신선에 관한 전설이
줄을 잇는 그 종남산이 무림중에 유명한 것은 여기에 무림 구대문파중의 하나인
종남파(終南派)가 있기 때문이다.
그 종남산은 장안으로부터 불과 50여리 떨어져 있지만 종남산 자체가 팔백리에
면면하여 누워있으니 지척이면서도 지척이 아닌 곳이 또한 종남산이었다.
어둠에 묻힌 종남산은 거대했다.
왕승고는 정규와 함께 그 종남산에 도달해 있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종남파의 본거지인 상청궁(上淸宮). 일대는 종남파의 제자들이
번을 돌고 있지만 향화객(香火客)들을 받아들이는 도관(道觀)인 만큼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후면 태화전(太和殿) 일대만 경계가 삼엄할 뿐, 다른 무림의 방파처럼
사방에 불을 밝혀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숨죽이고 기척을 살피던 정규가 전음지술로써 물었다.
『다녀오겠소』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던 왕승고는 몸을 일으켰다.
맘諍霽?가시려고?」
정규가 놀라 그를 보았다.
『귀왕혈이 다녀간 것인지 알아보러』
『어, 어떻게요? 종남파가 현문(玄門)의 덕으로서 여타 도관처럼 외관(外觀)이야
열어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파의 중지인 태화전 일대까지 허술히…』
정규는 말을 다하지 못했다.
왕승고가 태연하게 몸을 드러내어 상청궁의 문 안으로 훌훌 몸을 날려 들어가는 것을
본 까닭이다.
뭐라고 할 여가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가 입을 딱 벌리는 순간에 이미 왕승고의 모습은 상청궁 안으로 사라진 다음이었던
것이다.
근래에 들어 수난을 당했다 하더라도 이곳은 구대문파, 무림을 지탱하는 아홉개의
기둥 중 하나가 있는 본거지인 것이다. 만만할 리가 없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겐가?」
속이 탔지만 따라갈 수는 없었다.
왕승고의 신분은 철저한 비밀이어야 하고 그러기에 그는 늘 홀로 떠도는 협객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 위에서 날아내려 담을 넘은 왕승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바람처럼 몸을 움직여 담장 위를 밟으며 태화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무인지경(無人之境).
아무도 그의 종적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경비 자체가 없는 것인지 그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량수불… 시주, 걸음을 멈추시오!』
낮고 강한 음성.
그가 태화전 앞에 도달하자 침중한 음성과 함께 중년의 도사 서너명이 좌우에서
그림자처럼 솟아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생은…』
그들이 나타날 것을 알았던 것처럼 왕승고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서 그들에게 포권을
해보였다.
『돌아가 주시오. 시주께서 무엇 때문에 왔는지 모르지만 본파는 이미
봉문(封門)하였으니, 강호상의 누구와도 왕래하지 않으며 향화객도 받지 않습니다』
앞선 중년도사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난날 화산에서의 잘못으로 인해 황운자가 자결을 하고 그 뒤를 이은 고운도장이
십년봉문을 선언한대로 종남파는 봉문하고 무림과의 왕래를 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밤중에 무단으로 문파의 중지(重地)에 침입한 자에게 대하는 그의
태도는 과연 명문정파의 전통(傳統)을 느낄 수 있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소생은 향화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고운 장문인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장문인?』
중년도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급히 뵙게 해주십시오. 혹, 장문인께 무슨 일이 생겼을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이라니?』
『소생은 귀왕혈의 종적을 쫓다가 그들이 귀파의 장문인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내고
여기에 당도했습니다. 만약 시간이 늦는다면 천추의 한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시주는… 뉘시오?』
그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듯 중년도인의 음성이 달라졌다.
『장문인께 화산에서 만났던 사람이 찾아왔다고 전하시면 알 겁니다. 속히 통보해
주십시오』
그때였다.
『으앗?!』
안쪽에서 경악에 찬 음성이 어둠을 뚫고서 들려왔다.
찰나, 일진 바람이 이는 것과 함께 왕승고의 신형이 중년도인 등의 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시주, 멈추시오!』
놀란 그들이 주위를 돌아보는 순간에 그들은 왕승고가 어느새 그들을 스쳐지나 담장을
넘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 외쳤다.
『경보를 울려라!』
중년도인이 다급히 소리치고는 왕승고를 따라 몸을 날렸다.
뎅뎅….
경(磬)소리가 날카롭고도 촉급하게 어둠을 뚫고서 울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의 도관(道觀)은 그 규모가 웅장하다.
상청궁은 종남파의 본관인 만큼 당연히 그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고, 그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태화전 또한 웅위화려(雄偉華麗)했다.
고요함 가운데 급촉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혼란이었다.
몇사람의 도인이 이리뛰고 저리뛰는 모습.
어둠이 놀라서 춤을 추고 있었다.
왕승고가 날아들자 노호가 터져나왔다.
『악적! 검을 받아라!』
동시에 세찬 검빛이 왕승고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의 움직임이 날카로운 것을 본 왕승고는 그것이 이내 종남파가 자랑하는 삼십육수
천하검법(天河劒法)임을 알아보고는 착지하려던 몸을 빙글 돌리면서 반장가량 옆으로
이동했다.
『억?』
놀람에 찬 소리와 함께 왕승고는 찰나간에 그를 스쳐서 이미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적당이 침입했다! 막아라!』
왕승고를 공격했던 삽십대의 도사가 일순 멍청했다가 다음 순간에 고함을 치면서 그를
따랐다.
앞쪽에서 두명의 도인이 검을 휘두르면서 튀어나왔다.
『물러나시오! 난 적이 아니오!』
왕승고가 소리쳤다.
그러나 사방에서 경종(警鐘)이 울리고 도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그러한 외침이 통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도인들을 보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질풍처럼 계속해서 안으로 전진하고
있으니, 그 말을 믿으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감히 그따위 소리로 누굴 속이려는가?』
『당장 무릎을 꿇어라!』
도인들이 일제히 고함치며 검을 더욱 세게 휘둘렀다. 살기가 등등한 검세.
하지만 왕승고는 그 검세를 보지 못한 듯이 그대로 그 검세를 향해서 몸을 들이밀었고,
그것은 얼핏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한 형국이었다.
그가 이렇게 나올 것은 미처 상상치도 못했던 도인 둘의 검세는 부지중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왕승고를 막는 것이 목적이었지, 그를 이 자리에서 참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찰나간의 멈칫거림은 이미 왕승고가 짐작하고 있었던 것. 그는 상대 검세의
틈을 보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어 상대의 완맥(腕脈)을 가볍게 찍고
지나갔다.
『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두 도인은 일제히 검을 놓치고 말았다.
왕승고는 이미 그들을 스쳐지나 태화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실로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 도대체?』
거의 허수아비처럼 왕승고를 통과시키고 만 도인들이 실성(失聲)을 흘려냈다.
『으음…!』
태화전으로 들어선 왕승고가 신음을 흘렸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살아날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칠공으로 피를 흘리는 모습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을 긁어대어 가슴이 온통 피투성이.
그 숫자는 적지 않아서 열서너명은 실히 되어 보였다.
『독(毒)이란 말인가?』
왕승고가 신음했다.
그때, 그의 뒤에서 날카로운 검세가 엄습해왔다.
십여명의 도인이 떼거리로 그를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눈빛이 흉흉한 것이
사생결단의 태도였다.
『답답한! 아직도 모르겠소?』
왕승고가 공력을 끌어올려서 고함쳤다.
가히 날벼락과 같은 사자후(獅子吼)!
『멈춰라, 그분은 포의신검협이다!』
그것과 함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어쩔 수 없이 검을 잡았던 왕승고는 그 외침에 따라 손을 거두며 시선을 돌렸다.
『기억하시겠습니까? 화산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중년도인 한사람이 그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고운도장에게 종남검결을 되돌려줄 때에 옆에 있었던, 황운자의
제자라던 종남파의 이대제자였다. 남명(南明)이라고 했던가?
『맙소사, 이건?』
종남파의 이대제자인 남명의 안색이 돌변했다. 태화전내에 벌어진 참극(慘劇)은 그도
미처 알지 못했던 상황인 듯했다.
『장문인께선 어디 계시오? 귀왕혈에서 장문인을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왕승고의 말에 남명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그럼 이 일이 귀왕혈? 맙소사! 어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남명이 다급하게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대전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다시 작은 전각이 나타났다. 그 앞에도 두어명의
도인이 엎어져 있었다. 그들이 공연히 땅에 엎어져 있을 리는 없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땅에 흘러 있는 피.
『장문인! 장문인, 어디 계십니까?』
남명이 앞에 있는 전각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장문인의 거처인 천하궁(天河宮)이었다.
숙위하던 도동(道童) 둘이 목을 움켜쥐고서 쓰러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방이 죽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형상의 참혹함은 지난날 장군부의 몰살에 못지 않았다. 좀전에 누군가가 놀란
외침을 터뜨린 것은 바로 이러한 죽음을 발견한 때문이리라.
하지만 장문인 고운의 종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장문인! 장문인을 찾아라!』
사방이 발칵 뒤집혔다.
고운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채 반각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측간에서 그야말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전신의 모든 피를 다 쏟아낸
듯한 모습, 무리도 아니었다. 밑에서부터 하체가 위로 거의 반으로 잘려 있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으며 몸속에 있던 피가 다 쏟아지지 않겠는가.
측간에서 반쯤 기어나온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죽어 있었는데, 정황으로 보아
볼일을 보다가 밑에서 기습을 당해 항문에서부터 산적 꿰듯이 검에 찔린 것 같았고, 그
순간 반항을 한 것 같지만 그때는 이미 대항할 능력을 상실했던 듯, 거의 가슴까지 몸이
갈라져 있었다.
흉수는 측간의 통속에 몸을 숨기고서 기회를 기다리다가 손을 쓴 것으로 후일
조사되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왕승고는 남명을 보았다.
『적이 장문인의 마지막 일격에 상처를 입은 것 같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저, 저도…』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겁니다. 어쩌면 귀왕은 다른 문파도 습격할는지도 모릅니다.
놈을 막아야 합니다』
『다른 문파라니?』
묻던 남명이 문득 길게 한숨 쉬었다.
『어쩌자고 본파에 자꾸 이런 참괴(慙愧)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인지… 으으…
대체 놈들이 우리와 무슨 원한을 졌다고 이렇게까지… 종남파의 문인이 하나라도
살아있는 한, 결코 귀왕혈과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습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하는건데…』
그가 이를 가는 것을 본 왕승고가 진심으로 탄식했다.
훌륭한 사람이었었다.
고운은… 어쩌면 그의 죽음은 그의 탓일 수도 있었다. 대업이라는 명제(命題)하에
진행되고 있는 일을 위한 희생들.
왕승고는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떠났다.
경종(警鐘)이 날카롭게 사방으로 고함치면서 야기(夜氣)를 떨어울려 소스라치게
깨우고 있었다.
『놈들이 성공한 모양이로군요?』
그가 돌아온 것을 본 정규가 말했다.
『갑시다』
왕승고가 짧게 말하고는 몸을 날렸다.
흠칫, 한 정규는 이내 그 뒤를 따랐다.
『뭘… 찾으십니까?』
왕승고가 간간이 주변을 살피면서 전진하고 있음을 본 정규가 물었다.
『핏자국이오』
『핏자국? 놈이 상처라도?』
『그런 것 같소』
『그럼 이대로 따라가서 잡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공동파에…』
정규는 말문을 닫았다.
왕승고가 무섭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의
그러한 눈빛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볼섶璨〈?많은 삶이 있소』)
왕승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삶을 살도록 이 세상에 각자의 운명을 지고서 태어났을 것이오.
나도 그중 한사람이고 정대장도 마찬가지요. 어쩌면 그중에서도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특별한 것일 수도 있소.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법이오』
『공자! 한사람의 장군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졸(將卒)의 피를 필요로
합니다. 그들 모두를 돌봐야 한다면, 어떻게 대업을…』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게요? 내가 나약해 보이오?』
왕승고의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오』
그가 정색을 했다.
『정말 필요하지도 않는데, 그저 나를 위해서 정대장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으라고
한다면 어떻겠소? 그것이 필요없는 개죽음인데도』
『!』
흠칫하는 빛이 정규의 얼굴에 스쳐갔다.
개죽음이라, 말 그대로 가치없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언제든 원하시면 목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원하는 분이 공자시라면』
어쩌면 무리도 아닐 터이다.
주군(主君)을 위해서 목을 내놓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때다. 더구나, 정규는 복국을
위해서 그 날만을 기다리며 사는 고려인이었다. 듣건대, 그의 집안은 고려의 무너짐과
함께 이성계 일당에게 멸문을 당했다 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걸주(桀紂)가 왜 두고두고 폭군으로 불리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소?』
『그건…』
『군주는 천하에 군림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오. 만백성을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펴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선택된 사람이지. 그래서 그를 천자(天子), 하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하는 자가 과연 군주의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공동파가 귀왕혈에 당하지 않아도, 놈들을 그 전에 잡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한 것은 이룰 수 있소』
그 말을 끝으로 왕승고는 몸을 날렸다.
『…』
정규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훈훈한 웃음이었다.
쏴쏴아….
세찬 물살이 포말을 일으키면서 계곡을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다.
왕승고는 그 계류(溪流) 앞에 미간을 찡그린채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뭔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종남파의 상청궁에서 울리는 경종소리는 어둠을 뚫고서 종남산 일대를 급촉하게
흔들고 있었다.
『바보들, 저러면 놈들이 놀라서 더 다급하게 도망할텐데…』
정규가 혀를 찼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종적을 놓쳤소』
왕승고가 굳은 얼굴을 들었다.
『뭘 따라 오신 겁니까?』
추적에는 달인(達人)중 하나인 정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왕승고의 뒤를 죽어라고
따라오긴 했지만 여가가 없어서 그가 뭘 따라오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핏자국 같은 거라면 그도 알았을 터인데 핏자국이나 흔적 같은 것은 처음부터
보이지를 않았다.
『냄새요』
『냄새?』
『그렇소』
귀왕혈이 청성파를 습격한 것은 악독하고도 치밀한 계획하에 시행되었다.
귀왕으로 짐작되는 자객은 측간의 똥통 속에 자신을 묻고서 고운이 큰 것을 보러 올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변을 보고 있는 틈을 노려 밑에서 검을 디밀었다. 검은
산적 꿰듯이 고운의 항문을 통해서 그의 가슴까지 뚫고 들어갔고, 그 순간에 고운은
일신의 모든 공력으로 자객을 공격했다.
자객은 분명히 상처를 입은 듯했지만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이미 그를 막을
종남파의 도인들은 모두 중독사한 다음이었던 것이다.
독을 뿌리는 작업은 고운이 측간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시작되었다.
고운이 마지막 순간에 반항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객은 장문인과
그 주변의 고수들을 몰살시키고 유유히 사라졌으리라.
『맙소사! 그럼 놈이 똥통에 들어있었던 그 구린내를…』
문득 정규가 생각이 미친 듯 입을 딱 벌렸다.
『놈이 거기에서 고운도장을 기다렸다면 몸에 냄새가 밴 것은 필연! 내가 지금까지
따라온 것은 그 냄새였소』
『놈이 물에 뛰어든 겁니까?』
『그렇소. 어쩌면 우리가 뒤를 쫓는 걸 눈치를 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물에
뛰어들어서 냄새를 씻으려 작정했었겠지』
왕승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요. 주변을 수색하게 그들을 부르시오』
『알겠습니다!』
정규가 다급히 신호를 보냈다.
그들을 따르고 있는 부하들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상류로 갔을까, 아니면 하류로 떠내려갔을까. 계류의 수량(水量)은 상당하여 아마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남의 눈에 띄기도
쉽다. 올라간다는 것은.
왕승고는 정규와 헤어져 하류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을 나누어 적의 종적을
찾기 위해서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문득 앞쪽에서 신호탄이 터지면서 낮은 호통소리와 함께 격렬한 싸움소리가 들려왔다.
『발견했군!』
왕승고는 다급히 땅을 박찼다.
콰콰콰아….
세차게 포말을 부숴 퉁기면서 흘러가는 계류는 기암괴석이 제멋대로 몸을 굴리고 있는
계곡에서 길이 막혀 거세게 포효하고 있다.
싸움은 바로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칠팔 명의 회의인들과 황의인 한 사람이 어울려 싸우고 있는 가운데로 정규가
달려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회의인들은 정규의 수하들. 그들은
오로순행조에서도 추려낸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협공하고 있음에도 피를 뿌리며
몰리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정규가 다급히 달려든 것 또한 그 이유.
황의인은 날카롭고도 무섭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미 서너명의 회의인들이 쓰러져
있었고 그를 향해 달려드는 정규를 향해 슬쩍 몸을 돌리는 순간에 별빛과 같은
검망(劒芒)을 폭출시켜 그를 휘감아갔다.
『맙소사, 멈춰라!』
그러나 그 황의인을 본 왕승고는 안색이 달라져서 크게 부르짖으며 그 자리로
날아들었다.
쨍, 쨍….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불똥을 튀겼다.
『이게 누구야?』
난데없는 방해자로 인해서 충격을 받고 뒤로 물러나던 황의인은 강적이 나타났음을
알고 검을 고쳐쥐다가 왕승고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어떻게?』
왕승고가 어이없는 듯이 그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로군…』
황의인이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을 풀면서 마주 대꾸했다.
그의 앞에는 방금 그와 일격을 나눈 정규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지난날 한번 만난
적이 있던 상대였다.
귀왕혈의 본거지인 북망산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냉면검신 자의후인 것이다.
『귀왕혈이 종남파에 나타나서 장문인을 해쳤소. 그 뒤를 쫓던 중이오』
왕승고가 그를 막기 위해 뽑은 검을 거두면서 말했다.
『귀왕… 아직도 놈을 쫓고 있나?』
『당신은?』
『난… 좀 묘한 놈들을 쫓고 있지』
자의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왕승고의 뒤에 늘어서 있는 회의인들을 쓸어보았다.
『놈들을 찾았다 했더니, 잘못 짚은 모양』
그는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또 귀왕혈에 당했다고? 봉문을 한 상태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종남파의
명운(命運)은 이제 다한 모양이로군…』
그가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본 왕승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를 쫓고 있소?』
쿠쿠쿠쿠….
폭포소리가 길게 지축을 울리듯 산속의 어둠을 울린다.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놈들이야』
자의후가 말했다.
그는 여전했다. 모습도 말투도 행동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냉막한 표정이나
황야의 이리와 같은 묘한 고독까지도.
『놈들은 이미 이십년 전부터 강호상에서 암약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말을 하고 있는 자의후의 눈빛은 얼음과 같았다.
『내가 그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은 이미 삼년째인데도 놈들의 명확한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으니 실로 대단한 놈들이지. 뒤를 쫓으면서도 가끔 허깨비를 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딸랑.
맑은 음향과 함께 그와 마주앉은 왕승고의 앞에 손바닥에 들어가고도 남을 작은
원형의 동패(銅牌) 하나가 떨어졌다.
「광명천하(光明天下)」.
가운데 선명히 새겨진 네글자를 중심으로 빗살무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고 그
뒷면에는 「현자십일호(玄字十一號)」라는 다섯글자가 다시 새겨져 있었다.
『놈들의 신표(信標)야. 본 적 있나?』
자의후의 물음에 왕승고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건데, 무엇 때문에 이들을 쫓고 있소?』
『글쎄… 꼭 무엇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면 조금 난감하군. 하지만 이들의 행사는 매우
신비한 데다가 그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족히 관심을 가질 만하지. 내가 귀왕혈을
쫓았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난 이 신비집단이 귀왕혈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그 순간, 앞쪽에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종적을 발견한 모양이군!』
왕승고가 앉은 자세에서 구름이 떠오르듯 둥실,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바위 밑으로
곤두박질치듯이 내려갔다.
일종의 부운어기(浮雲御氣)와 창응박토(蒼鷹搏兎)의 신법을 하나로 구사하는 것을
보고 자의후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군…』
얼마전까지만 해도 백면서생이었던 그의 그러한 진경(進境)은 참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나직이 신음하던 그는 산자락 아래의 숲에서 계속해서 호각소리가 들리고 그것이
빠르게 멀어짐을 깨닫고는 몸을 날렸다.
종남산은 거대한 산맥이다.
산속에서 사람을 추적한다는 것, 특히 이런 밤에 무림중의 고수를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추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인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였다.
왕승고는 비스듬히 깎아지른 절벽에 자라난 소나무를 밟으면서 호각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일직선으로 덮쳐내려갔다. 그 형상은 과연 창응박토, 하늘의 독수리가 토끼를
보고 내려꽂히는 것에 다름이 아닐 정도로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다.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벽을 가로질러 백여장가량을 곧장 날아내리자 바로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회색인영 일곱.
무섭게 얽혀 돌아가는 그들의 옆에는 이미 두 명의 회의인이 쓰러져 있는데, 모두가
회의를 입고 있어서 누가 적이고 아군임을 분간하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가까이 도달하자 적과 우군은 분명해졌다.
적은 회색복면까지 하고 있어서 손과 두 눈밖에 드러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승고가 무섭게 바람을 가르며 덮쳐오는 것을 본 것인지, 회색복면인 둘은
전권(戰圈)에서 몸을 빼내면서 손을 저었다.
펑!
연막이 그 손짓에 따라 크게 일며 일대를 단숨에 뒤덮었다.
『흥!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왕승고의 눈이 차갑게 빛을 뿜었다.
검이 그의 손에서 빛을 끌면서 연막 안으로 날아들었다.
땅! 따당….
날카롭게 고막을 울리는 소리.
『크흑?』
회의복면인이 경악한 빛으로 연막 속에서 비틀거렸다.
왕승고가 거침없이 연막 속으로 날아들어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의 공세는 가히
바위가 날아올랐다 떨어지듯이 강렬무비하여 그는 두어차례의 부딪힘을 견디지
못하고 수중에 들었던 검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혼비백산한 그가 황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으나 놀랍게도 왕승고의 검은 거의
어른의 몸통만한 그 나무를 간단하게 베어넘기면서 그에게 날아들었다.
『크으으…』
회의복면인이 신음했다.
나무를 바람처럼 돌아나간 그의 앞에 어느새 왕승고가 우뚝 버티고 서서 그를 향해 쭉
팔을 뻗고 있는데, 그 손에 들린 검이 한기(寒氣)를 뿜으며 그의 목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신형을 세우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목에 구멍이 뚫렸을 상황.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일었다.
왕승고가 잘라버린 그 거목이 요란한 소리를 질러대면서 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십장여나 되는 높이의 거목이니 그 기세가 범상하랴.
쿠쿠쿠쿠우….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사방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이
꺾어져 퉁겨졌다. 그 바람에 일진 질풍이 일면서 회의복면인이 터뜨렸던 연막이
모조리 흩어져버렸다.
바로 그 순간에 왕승고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의 검에 제압되어 있던 그 회의복면인이 그 순간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왕승고의 검에다 자신의 목을 들이밀어버린 것이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
왕승고는 그가 기습을 하려는 것으로 생각해 검을 곧추세우려다가 자신의 검이 그대로
상대의 목을 꿰뚫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돌변했다.
『이럴 수가…』
왕승고는 자신의 발아래, 눈을 부릅뜨고서 죽어넘어져 있는 회의복면인을 보고
망연자실(茫然自失), 굳어졌다.
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회의를 붉게 물들이면서 콸콸 쏟아져 나와서
땅바닥을 적셨다.
왕승고의 뒤를 따라온 자의후는 그것을 보고 놀란 빛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다른 하나의 회의복면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설명이야 긴 듯하지만 실제로 그 일들은 거의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해도 좋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왕승고가 물었다.
옆으로 다가온 정규에게 왕승고가 물었다.
『귀왕혈의 살수를 발견하고 놈을 공격해 거의 제압했는데, 그 순간에 저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놓쳤다고 합니다』
『이들도 귀왕혈인가?』
『그들은 내가 쫓던 자들이야』
대답은 왕승고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자의후가 천천히 사라졌던 숲에서 걸어나왔다.
『쫓던 자들이라면?』
『내가 말한 그들… 역시 내 짐작대로 놈들이 귀왕혈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군!』
자의후가 침착하게 말하면서 쓰러진 회의인의 품속을 뒤졌다.
그 품에서 나온 것은 좀전에 자의후가 왕승고에게 보여준 그 작은 동패.
거기에 새겨진 것은 지자구호(地字九號).
그들이 같은 무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도마뱀과 같은 놈들이야. 절대로 남에게 제압을 당하지 않아. 어떻게 다룬 것인지는
몰라도 상대에게 당하게 되면 그 순간 죽음을 택해서 절대로 증거를 남겨두지 않지』
자의후가 말했다.
왕승고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혀 뜻밖의 사실을 목도하게 된 까닭이다.
귀왕혈이 단순한 살수조직이 아니었더란 말인가.
『이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소?』
왕승고가 물었다.
『나도 알지 못해』
자의후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봉絹湧?쫓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삼년째라고…』
『내가 쫓고 있었다고 해서 다 안다고 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 놈들은 그렇게 만만한
자들이 아니야』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들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쫓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오?』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인 왕승고의 물음에 자의후가 문득 웃었다.
늘 차가운 얼굴, 그 얼굴에 떠오른 웃음마저 서늘해보였다. 하지만 거기에 서린 것은
적의가 아니었다.
『흥미로우니까』
간단히 대답한 그는 문득 안색을 굳혔다.
『놈들은 신비해. 그리고 가장 무서운 점은 놈들의 존재를 무림이 전혀 모른다는
것이지. 무림에 존재하는 집단이 무림에 전혀 그 이름을 알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는 법이지. 그게 뭘까?』
자의후가 되물었다.
『난 그게 궁금해서 놈들을 쫓고 있어』
『귀왕혈이 이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오?』
『내 짐작이야. 귀왕혈이 단순한 살수집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로 무림중의
요인들을 암살하고 있었다면 상당히 흥미롭잖나? 그 의도가?』
왕승고의 미간이 문득 찡그려졌다.
갑자기 상황이 묘하게 복잡하게 얽혀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무림제패(武林制覇)!』
『무림… 이들이 무림에 군림하려 한다는거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
『곧 알려지겠지. 알려지는 그 순간은 아마도 이들이 완벽한 준비를 갖춘 다음일
것이고… 그 뒤야 어차피 정해진 수순대로 가지 않을까?』
문득 자의후가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그건 내추측이지만』
우우우….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굶주린 늑대나 아니면…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노리는 것은 늘 먹이지. 늑대가
바라는 것은 고기이지만 인간들이 바라는 것은 다양해. 가장 추악한 것이 더러운
욕망(慾望)일테고』
자의후의 말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묘한 인연이었다.
잊어버릴만 하면 만난다.
이 드넓은 강호에서 그것도 한곳에 있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세상이
좁다는 듯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뇌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한 말들이었다.
과연 귀왕혈에 배후가 있는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귀왕을 찾아서 그에게서 직접 듣는 것이었다.
귀왕혈의 종적을 놓친 이상, 갈곳은 한군데 뿐이었다.
공동산.
귀왕혈의 다음 목표가 될 공동산으로 가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늦는다면 허탕을 치게 된다.
공동산과 종남산은 수천 리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섬서에 있는 종남산과는 달리
공동산은 감숙성 윗쪽에 자리했고 그 가운데에는 황하가 누런 물결로 넘실거렸다.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공동산으로 향하는 길에 자의후는 동행하지 않았다.
왕승고도 굳이 권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가자는 말에 그는 피식 웃었었다.
혼자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의 대답이었었다.
황하를 건너고 공동산이 가까워 오면서 경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보아오던 푸르름이 조금씩 누렇게 변했다.
풍물도 중원의 것에서 이국(異國)적인 느낌이 들기 시작해서 과연 감숙성이 멀리
떨어진 곳임을 느낄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귀왕혈이 종남을 습격한 것은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그들이 가는 도중에도
소문은 무성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공동산쪽에서 귀왕혈의 종적이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긴 종적이 먼저 보일리야 있을까.
구대문파(九大門派).
아홉 개의 거대한 문파라는 뜻 그대로 당대의 무림을 지탱하는 아홉개의 기둥과 같은
큰 문파다. 무림이란 세계는 무(武)를 숭상하고 연마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을
일컫는다. 그러한 사람들이 어찌 하나 둘이며 천하에 널린 문파가 하나 둘일까.
그럼에도 그 가운데 우뚝 솟아 아홉개의 문파라고 불릴 수 있음은 결코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일 리가 없다. 소림의 역사가 천년에 이르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구대문파의 역사는 전통(傳統)의 역사이다.
감숙성(甘肅省) 궁벽한 곳에 위치한 공동파가 구대문파의 일원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일
리가 없는 것이다.
황제(黃帝) 헌원(軒轅)과 관련이 있다는 이 도가(道家)의 성지(聖地) 공동산에 자리한
공동파는 삼십육식 복마검법(伏魔劒法)으로 이름높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그처럼 찬란했던 금벽(金碧)도 빛을 잃는 것은 세상의 이치.
근년에 들어 그처럼 굳건했던 구대문파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동파의 장문인 함상진인은 화산의 대회 이후에 문중의 제자들을 모두 본산으로
불러들였다.
구대문파의 영광은 이미 빛바랬다.
그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지나간 영광을 다시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진다. 그것이 그의 판단이었던지라,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 문중제자들을 모두
본산(本山)에 불러들이고 재질이 뛰어난 제자들을 추려내는 등 어떻게 보면
일대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노을이 짙다.
산중의 노을은 밤을 재촉하면서 참으로 붉었다.
구름이 온통 불타오르는 듯 그렇게 산 전체를 덮고 공동산 자락에 위치한
복마관(伏魔觀)을 붉게 물들인다. 공동파의 본산(本山)인 복마관은 공동파의
중지(重地)였다.
그 노을빛보다 더 붉은 핏빛으로 전신을 휘감은 사람 하나가 복마관에 나타난 것은
노을빛이 스러지고 있을 때였다.
『사숙(師叔)!』
지객(知客)을 맡고 있는 청수자(淸水子)가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노도인을 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가슴팍에는 칼이 꽂혔다. 반백발의 머리카락은 이미 도관(道冠)조차
어디론가 없어져 온통 산발. 너덜너덜해진 도포는 피로 물들었고 그의 걸음걸음은 곧
혈적(血跡)이었다.
『어, 어서 나를 장문께…!』
청수자가 부축을 하자, 피투성이의 함연진인(函緣眞人)은 괴로운 얼굴로 쥐어짜듯이
말했다. 그것조차 무리인 듯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빨리 장문인께 알려라!』
어쩔줄 모르던 청수자는 일방 소리치면서 함연진인을 부축한 채로 안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공동산이 이내 발칵 뒤집혔다.
함상진인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석과(夕課)를 막 마친 다음이었다.
근래에 들어 그는 공동 검학(劒學)을 연구키 위해서 석과를 마친 다음에는 바로
장로들과 모여서 검을 대련하거나 논검(論劒)하는 것이 일과였었다. 오늘도 그는
석과를 마친 다음에 복마전(伏魔殿)으로 가기 위해서 막 장문인의 거처를 나서다가 그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그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피투성이가 된 함연진인을 부축한 청수자가 그리로
들이닥쳤다.
함연진인은 공동파가 공동산에다 펼쳐놓은 일곱개의 지관(支觀)중 복마관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영보관(靈寶觀)의 관주이자 현 장문인 함상진인의 사형이었다.
그러한 그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는 일.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함상진인은 황급히 그를 자리에 뉘려 했지만 함연진인이 안간힘을 다해 몸을
버둥거렸다.
『그,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자, 장문인 이, 이리로…』
그가 버둥거리자 함상진인은 그를 부축한 사람들에게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말씀하시오. 사형…!』
말하던 그의 눈에 갑자기 놀람이 퉁겨져 올랐다.
봉? 이걸…』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하던 함연진인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 박혀있던 검을
번개처럼 뽑아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거기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흠칫, 함상진인이 놀라는 순간에 함연진인은 자신의 가슴에 박혀있던 검을 벼락같이
지척에 와 몸을 구부리고 있던 함상진인의 가슴에다 찔러넣었다.
『흐윽!』
함상진인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창졸간에, 거의 본능적으로 그가 일장을 쳐냈지만 함연진인은 이미 바닥을 한번 굴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오?』
『사숙!』
놀람에 찬 소리가 분분히 일면서 경악했던 청수자를 비롯한 몇몇 도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함연진인은 방금까지 거의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몸놀림으로 찰나간에
반장쯤 미끄러지면서 손을 쳐들었다.
『으악!』
『으아악!』
비명이 일었다.
그의 소매에서 한망(寒芒)이 쏟아져나가 그들을 뒤덮어버렸던 것이다.
참혹한 비명과 함께 곁에 있던 도인들이 채 손을 쓸 여가도 없이 얼굴을 감싸쥐고서
나뒹굴었다.
가히 찰나간에 일어난 일.
『무슨 짓인가, 당장 멈추지 못할까?』
함상진인이 노호하며 함연진인에게 일장을 갈겨냈다.
쾅!
그의 공력은 심후하여 장세가 이르는 곳에 있던 탁자와 의자가 산산조각 박살이 났다.
『크흐흐흐… 그렇게 발악하면 추심지독(追心之毒)이 더욱 빨리 발작하게 될걸?』
하지만 함연진인은 이미 그 장세의 범위를 벗어나 음악(陰惡)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 어디에도 부상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보니 너는 함연사형이 아니로구나!』
함상진인이 가슴을 움켜쥐면서 비틀거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가슴에 박힌 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검에는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는 것이다.
『크크크… 너무 늦게 알았다!』
가짜 함연진인은 음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청부자가 네 목을 원하니, 빌려야겠다!』
가짜 함연진인이 함상진인을 덮쳐갔다.
그가 나타나서 일이 벌어지고 진행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찰나간이라고 해도 좋았다.
『청부? 그럼?』
경악이 함상진인의 눈에 떠올랐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상대의 공세가 이미 그의 앞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다급한 것은 무의식중에 상대와 맞서려고 하자 이미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크으!』
신음이 일었다.
함상진인에게서 괴로운 신음이 터졌다.
상대와 맞설 수가 없자 몸을 날려 피하고자 했지만 상대는 이미 그것조차 감안한 듯, 그
움직임은 일개살수의 것이 아니었다.
장문인의 거처는 산사(山寺)와 같이 방장(方丈)의 크기가 아니었고 함상진인의 거처인
태상궁(太上宮) 후전은 그리 작지 않았다. 그러므로 몸을 움직여 피할 여지는 있었지만
이미 그럴 힘이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 몸을 비튼 함상진인을 상대의 경력이 스치고 지나가며 그는 피를
토하면서 나가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후전의 문이 박살이 나 터져나가면서 인영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귀왕!』
가짜 함연진인은 서릿발 같은 검기가 빛을 끌면서 자신에게로 날아듦을 보고 이를
갈았다.
『밥통들! 일처리를 어떻게 한거냐!』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 그는 함상진인의 목을 따기 위해서 내디뎠던 오른발 끝에
힘을 주어 바닥을 굴렀다.
그의 신형이 구름처럼 훌쩍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흥!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냉소가 터지면서 검기가 서리서리 구름처럼 퍼져나가 일대를 온통 뒤덮었다.
쨍! 쨍그렁….
고막을 찢는 날카로운 금속성.
검광과 검날이 맞부딪히면서 튀는 불똥이 가히 용이 신음하고 범이 포효하듯
굉량(宏量)한 힘으로 태상궁 후전을 떨어울렸다.
가짜 함연진인은 강력한 충격에 다시 바닥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악한 눈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자를 쏘아보았다.
질끈 동여맨 긴 머리에 평범한 베옷을 입은 젊은이였다. 단아한 얼굴이나 눈빛이
섬광과 같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그 눈빛보다 더 무서운 검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방금의 격렬한 일차 접전에서 상대의 무서움은 이미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부딪힘이 있고 나면 순간적으로 잠시 물러나면서 상대의 허점을
탐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면 당연한 일이고 나보다
약자라는 판단이 선다고 하면 급할 일이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상대는 그러지 않았다.
손목이 저릴 강력한 격돌이 일며 서로 물러난 순간에 이미 검을 들어 다시금 그를
공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비스듬히 검을 쳐오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 검은 가장
단순하게 가장 직선의 거리를 일자로 가르면서 가짜 함연진인에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왕승고.
종남산을 떠난 왕승고가 적시에 도착한 것이다.
『미친…!』
신음같은 외침이 가짜 함연진인에게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는 손을 휘둘렀다.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섬광(閃光)이 일었다.
그것과 함께 그는 둥실, 뒤로 물러났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이상 굳이 이곳에서 상대와
싸우면서 퇴로가 봉쇄되도록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파파파!
왕승고는 찔러가던 검을 쥔 손목을 가볍게 떨었다. 검끝이 흔들리면서 검광이
폭죽처럼 일었다. 그의 신형이 묘하게 한바퀴 회전을 하는 순간에 날아오던 암기가
모조리 그의 검에 걸려 날아갔다.
그것은 멋진 춤사위처럼 보이는 한 순간이었지만 그 찰나간에 파팡! 하는 굉음과 함께
일진 폭발이 일어날 것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암기는 한가지가 아니었다.
첫번째 날린 눈에 보이지도 않을 가는 침(針)이 섬광을 끌고 날아오는 그 뒤를 바짝
따른 검은 구슬(黑珠)이 검과 부딪히자 그대로 폭발을 하고 만 것이다.
화약연기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음산한 웃음소리가 대전을 감돌았다.
『놓칠 것 같으냐?』
그 웃음소리가 이미 대전을 벗어나고 있음을 깨들은 왕승고가 이를 갈았다.
검이 첫번째 검은 구슬을 치는 순간, 그는 이상함을 경각했고, 이내 경력을 뿜어내어
그것을 내치면서 바람처럼 뒤로 물러나 화약의 폭발에서 몸을 빼냈지만 낭패한 모습
자체를 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무림중에서 무섭기로 이름난 추혼벽력주(追魂霹靂珠)로서 충격을 받으면
화약이 터지면서 그 안에서 수백개의 쇠털과 같은 침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 사오장
이내의 모든 생령(生靈)을 쓸어버린다는 공포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암기의 공습조차도 지금의 왕승고를 상해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무공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호신(護身)의 강기가 그의 전신을 보호하고 있어서 웬만한
도검으로도 그를 상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막 땅을 박차던 왕승고는 꿈틀거리는 함상진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구면인 사람이었다.
『장문인!』
그는 내심 한숨을 쉬고는 함상진인을 부축했다.
『누, 누구?』
『접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일그러진 얼굴로 왕승고를 바라본 함상진인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누구? 신검… 대협이시오?』
『제가 늦어서 이런 일을 당하게 했군요!』
왕승고가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고 길게 탄식했다.
왕승고가 함상진인을 부축하고 있는 순간에 태상궁의 바깥에서 고함소리와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 놈이…』
함상진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데려온 사람이 놈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놈을… 그를 잡으시오』
함상진인이 괴로운 빛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자, 장문인!』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다급한 외침과 함께 일단의 도사들이 화급하게 나타났다.
『가보겠습니다!』
그들을 보자 왕승고는 함상진인을 벽에 기대 눕히면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장문인을 부탁하오!』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이미 태상궁을 벗어나고 있었다.
태상궁의 바깥에는 검은 하늘이 어둠에 잠기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붉었던 노을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붉은 빛 구름 한가닥이 길게 하늘을 달리고 있어서 그 잔적(殘跡)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공동파의 중지.
복마관 태상궁의 앞에는 얼마전 종남파와 마찬가지로 참혹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도사들의 모습.
그것은 왕승고가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그 일
또한 독에 의한 것임을 아는 데는 별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하독(下毒)을 위해서 이곳에 숨어든 귀왕혈의 살수를 발견한 것은 정규와 그
수하들이었고 그 처리는 돌아볼 여가도 없이 왕승고는 이곳에 도달하자마자
태상궁으로 날아들었었다.
밖으로 나온 왕승고는 격렬한 싸움 소리가 태상궁의 후전 숲속에서 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신형이 그곳을 향하여 날았다.
공동산 자락을 따라 지어진 복마관은 웅위하였지만 그 일대를 모조리 담장으로 휘감은
것은 아니었다. 본전인 복마관만 하더라도 십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산속에
묻혀 있다 할 수 있었다.
후전 숲은 바로 공동산의 중지인 조사동(祖師洞)이 있는 곳으로 외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날아든 왕승고는 거기에서도 쓰러진 도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쓰러진 형상은 일견해도 무엇인가를 막으려 하다가 당한 것이 역연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나 부러진 나뭇가지들, 그 진행경로의 앞쪽에서 싸움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과 몇장을 나가지 않아 백의의 무사 하나가 쓰러져 있음이 보였다.
정규를 따르는 수하.
왕승고는 바람처럼 몸을 날리는 가운데, 마침내 숲속에서 정규와 가짜 함연진인이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짜 함연진인은 연달아 손을 휘저어 암기를 쏟아내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고,
정규는 대도를 휘둘러 그것을 물리치거나 피하면서 그를 따라붙고 있는 중이었다.
검광이 일면서 왕승고의 신형이 그곳으로 날아들었다.
함연진인은 이미 그가 나타난 것을 보고 그가 날아들자 순간 손을 휘둘러 잇달아
암기를 발사해냈다. 그의 전신은 온통 암기로 가득찬 듯 암기가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왕승고는 이미 쓴맛을 본 적이 있어 쳐낸 암기를 함부로 할 수가 없어 몸을 틀어 그것을
흘려보내면서 그를 공격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서 연막이 터져 하늘을 가렸다.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왕승고가 냉소를 터뜨리면서 연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공자를 호위하라!』
정규가 고함치면서 같이 연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방에서 백의인들이 벌떼와 같이
날아들었다.
연막 안에서 갑자기 격렬한 싸움소리가 일면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검빛이 번뜩이고 도광이 빛을 뿜을 때마다 선혈이 튀었다. 암기가 날면서 신음이
꼬리를 물었다.
연막이 터지면서 장내의 상황은 급변했다.
숲 여기저기에서 녹의(綠衣)를 입은 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왕승고와 그 수하들의
전진을 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귀왕혈이로군!』
왕승고가 나직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신형은 조금도 쉼없이 움직였다. 연기 속을 질풍처럼 가르며 검이 춤을
추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던 녹의인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나타난 녹의인은 검으로 그의 검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검이 두동강나면서 가슴이
갈라져 거꾸러지고 말았다.
과드드드….
아름드리 나무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온통 나뭇잎들을 흩날렸다.
그렇게 되면 싸움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일대 혼란이 이는 순간에 왕승고는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불과 일장여 앞을 달리는
함연진인을 덮치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무섭게 따라붙은 것은 정말 의외인지라 슬쩍 뒤를 돌아본 함연진인의
얼굴에 경악이 짓쳐올랐다.
그리고 그는 채 피하지 못하고 왕승고의 일검에 격중되었다.
도포(道袍)가 두쪽이 나서 날아갔다.
괴이하게도 그럼에도 피가 튀지 않았다.
왕승고는 함연진인을 두쪽으로 만들자마자 그대로 몸을 뒤집어 반바퀴 회전하면서
다시 검을 쓸어냈다.
파아앗!
스산한 소리가 일면서 그의 앞에 있던 나무 대여섯그루가 한번에 두동강이 났다.
왕승고의 신형이 그곳으로 바람처럼 날았다.
희끗한 인영이 보인다.
검이 나가는 순간, 인영이 아름드리 나무의 뒤로 돌아갔다.
찰나, 왕승고는 나직이 고함치면서 손으로 그 나무를 쳤다.
쿠웅….
지축을 울리는 음향이 일면서 아름드리 나무가 전신을 뒤틀었다.
『윽!』
나무 뒤쪽에서 신음이 들렸다.
왕승고는 나무를 친 탄력으로 땅을 박차면서 나무를 돌아나갔다.
회색빛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비틀거리다가 그를 보며 굳어졌다. 얼굴은
함연진인이다. 하지만 옷은 날렵하기 이를데없는 경장(輕裝)이다. 그는 다급한 순간에
옷을 벗어 금선탈각(金蟬脫殼)의 신법으로 눈을 속이면서 나무 뒤로 숨었지만
왕승고는 그에 속지 않고서 격산타우의 신공으로 나무를 격하고 내경(內勁)을
쏟아냈고 설마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가짜 함연진인은 그 일격에
격중되어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는 누구냐?』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귀왕(鬼王)인가?』
왕승고가 그에게 검을 겨누며 싸늘히 입을 열었다.
검끝에서 검기가 안개처럼 일고 있었다.
『포의신검협?』
그를 보고 있던 가짜 함연진인이 그의 행색에서 생각이 미친 듯 미간을 굳혔다.
『너를 잡고나서 말을 하겠다!』
왕승고는 뒤쪽에서 싸움소리가 계속 들리고 귀왕으로 추측되는 함연진인의 뒤쪽에서
녹의인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시간을 끌 수 없다고 느끼고는 공세를 발동했다.
검이 춤추듯 흔들리면서 함연진인을 덮쳐갔다.
그가 손을 쳐들자, 다시 암기가 날아왔다.
하지만 왕승고는 그것을 보지 못한 듯이 그대로 그를 덮쳐갔다.
경악한 빛이 함연진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왕승고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세차게 일면서 석자의 검신이 갑자기 배나 쭈욱
늘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검강?』
찰나, 그 검기의 덩어리가 무서운 위세로 암기를 쳐흩뜨리면서 그의 가슴을 갈랐다.
그가 대경실색하여 전력으로 몸을 뒤로 날렸지만 그 검기(劍氣)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검강은 검에서 일어나는 무형의 검기를 유형화시켜서 형체를 갖춘 것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기를 형상화시켰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범상치 않은 일이니 그
위력이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검강에는 절금단옥(切金斷玉)의 놀라운 위력이 있는 것이다. 비록 그 검이 세상에
이름높은 절세의 보검이 아니라 할지라도.
『크으으…!』
신음이 터졌다.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듯 함연진인은 물러났지만 창졸간에 무찔러 들어온 그 가공할
검강지기를 온전히 피해낼 수는 없었다.
가슴이 갈라지면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찰나, 좌우에서 음산한 살기가 덮쳐왔다.
왕승고의 신형이 버들가지가 춤을 추듯이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으악!』
『으아악…』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함연진인의 좌우에서 녹의인들이 날아들면서 그를 공격해오다가 왕승고의 검에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그들의 무공은 격식(格式)을 배제한 것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살인검(殺人劒)이었다. 살수에게 있어서 두 번의
기회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배운 무공 또한 그러한 것일 터였다.
목을 내놓고 달려드는 자들이 상대하기 쉬울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가 비슷할
때 통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왕승고의 무공은 일반적으로 보자면 실로 비정상적인 진경(進境)을 보이고 있어
얼마전까지 무공을 모르던 백면서생이라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지난날 귀왕혈의 총단을 공격할 때와는 또 다른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정말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습도 아니고 정면승부라면.
그들이 던져낸 암기는 검에서 일어난 경기(勁氣)에 휩쓸려 날아갔고, 그들의 검은
왕승고의 검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부러져나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찾아든 것은 죽음.
뒤를 이어 달려든 다섯 명의 녹의인은 앞선 자들과 달리 검이 부딪힌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도 피를 뿌리며 쓰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승고의 신형이 마치 춤을 추듯이 휘청거리는 가운데 그들을 베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백제 의자왕의 무덤에서 얻었던 황창랑의 검이었다.
그것은 천부신공과 결합하여 그와 하나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형(形)이 있으되 형이 아니고, 격(格)이 있으되 격이 아니며, 술이 존재하되 술이 아니라
도(道)에 이르는 최상의 경지를 향해서 하루하루 달라지면서 완성으로 가는 상태가
지금의 그가 도달한 경지였다.
그러므로 그 움직임은 정말 자연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원래 그는 손을 씀에 있어서 이처럼 혹독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눈앞에서 귀왕이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의 머뭇거림은 일순간에 일곱 명의 귀왕혈 살수를 처리했음에도 이미 귀왕,
함연진인의 모습은 찰나간에 십여 장이나 떨어진 숲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부상을 입었음을 감안한다면 실로 놀라운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은 그 순간에 일어났다.
『무량수불! 악도(惡徒)! 물러나지 못할까?』
노기가 깃들인 침중한 호통이 함연진인이 사라진 숲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크으으…!』
신음과 함께 함연진인이 퉁겨지듯이 숲에서 물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검을 든 노도인 한 사람이 바위 같은 얼굴로 나타났다.
『수라신도(修羅神道)?』
그를 본 함연진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와 함께 숲속 여기저기에서 도인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곳은
공동산이었다. 장문인이 살해당했음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그들은 구대문파일
수 없으리라.
다급한 종소리가 공동파를 흔들고 있었다.
수라신도라면 바로 당대 공동파의 장문인인 함상진인의 사숙(師叔) 배분인 공동파의
어른이었다.
성정(性情)이 불과 같고 악을 원수처럼 미워한다고 하여 수라신도라고까지 불리던
그는 공동파의 일대 기재였었다. 그는 이미 은퇴하여 공동산에서 일어나는 일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수도에 전념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오다가 경종(警鐘)소리를 듣게 된 것은 함연진인으로서는 불행한 일일 것이었다.
『누구냐? 네놈은?』
수라신도가 무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사, 사숙!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저 악적에게 쫓겨서…』
『함연사질은 내 수하에서 일년 동안 지냈었다. 그것을 알고도 네가 요행수를 바랄
터이냐? 말하라! 함연사질은 어디 있느냐?』
수라신도가 검을 겨누자 검기가 무섭게 일어나 함연진인을 덮어갔다.
함연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신음처럼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신형을 차돌리면서 땅을 쳤다.
펑!
격하게 연막이 일었다.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냉랭한 음성이 그 연막 안으로 날아들었다.
『으악!』
비명이 연막 안에서 터져나왔다.
수라신도는 그 자리에서 횃불 같은 눈으로 연막을 쳐다보면서 찰나간에 사오장 범위를
뒤덮은 연막을 향해 손을 들었다.
순간, 그의 소맷자락이 거세게 펄럭이는 가운데 태풍 같은 기세가 일어나 그처럼 짙게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연막을 단숨에 쓸어냈다.
그리고 연막 안의 상황이 드러났다.
한가닥 놀람의 빛이 수라신도의 눈에 떠올랐다.
『…』
함연진인은 거대한 소나무등걸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몸을 바짝 붙인 채인데,
일그러진 얼굴에는 당혹한 빛이 역력했다.
그의 목에는 서릿발 같은 검기를 뿜어내고 있는 왕승고의 검이 바짝 붙어 있었다.
손을 쭉 뻗어 그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왕승고의 얼굴은 얼음처럼 찼다.
『마침내 너를 만나게 되었군…』
『너… 넌 누구길래?』
『잊어버렸나? 하긴 북망산 총단에서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도주했었으니 몰라볼
수도 있겠지』
『총단이라면?』
함연진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럼, 네가 그때의 그…?!』
팡!
폭음과 함께 함연진인의 입에서 피분수가 터져나오며 그의 신형이 거세게 패대기쳐진
듯이 그가 기대고 있던 나무등걸에 등을 부딪혔다.
『다른 짓은 용납하지 않겠다. 네게서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왕승고가 쳐든 손을 거두며 냉랭히 말했다.
그의 손에는 방금 함연진인의 얼굴에서 벗겨낸 그야말로 매미날개처럼 투명하고도
엷은 가죽이 들려있었다. 그는 찰나간에 함연진인의 가슴을 침과 동시에 그의
얼굴가죽을 벗겨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함연진인의 얼굴은 전혀 달랐다.
살이 없어 광대뼈가 드러난 얼굴은 강퍅했고 날카롭게 찢어진 눈꼬리와 매부리코는
그의 성정이 표독함을 의미하는 듯하였다.
나이는 오십대쯤으로 보였다.
『이 자가 귀왕혈의 우두머리인 귀왕인가?』
옆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수라신도였다.
왕승고는 그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포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싸움은 거의 끝이 나 가고 있었다.
공동파의 도사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고 매복하고 있던 귀왕혈의 살수들은
중과부적. 속속 쓰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정규가 왕승고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와 그의 수하들은 공동파의 도사들에게 귀왕혈의 살수들을 맡겨두고 하회를
지켜보다가 싸움이 끝나는 것을 보고는 자리를 뜬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다.
고즈넉한 산의 밤안개가 아스라이 공동산을 덮었다. 언제나 그렇게 자연은 변함없지만
변함없이 자리한 복마관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참혹한 변고(變故)가 공동산을 쓸고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누구에게서 청부를 받았나?』
왕승고가 물었다.
그의 앞에는 귀왕으로 짐작되는 가짜 함연진인이 눈을 내리감은 채 나무등걸에 기대
앉아있다.
왕승고는 수라신도에게 자신이 잠시 귀왕에게 알아볼 것이 있으며, 그것을 알아본
다음에 귀왕을 그에게 넘겨주겠노라고 양해를 구한 다음이었다.
귀왕은 왕승고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눈을 감은채 그를 보지 않았다.
『네놈이 분근착골에다 오귀수혼(五鬼授魂)의 맛을 봐야 눈을 뜰 모양이로구나?』
옆에서 정규가 냉소를 터뜨렸다. 오늘의 일전에서 그는 수하들을 세명이나 잃어 화가
나 있었다. 부상도 다섯이나 되었다. 비록 상대는 스무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했지만
그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놈은 죽도록 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네놈이 고통을 모르는 동신나한(銅身羅漢)이라고는 믿지 못하겠다…』
말과 함께 정규는 귀왕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간단히 잡은 듯한데도 순간적으로 우두둑, 소리가 들리면서 귀왕의 어깨뼈가 탈골이
되면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곽자, 천자, 수자를 쓰는 곽대장군의 아들이다. 북망산에서 헤어진 뒤 끊임없이 널
찾았다』
『…』
귀왕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일까.
『다시 한번 묻겠다. 곽대장군 일가의 죽음을 청부한 것이 누구냐?』
『청부자가 누구냐고?』
귀왕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귀왕혈은 청부자의 신분을 묻지 않아. 모른단 말인가? 귀왕혈은 청부금액을 처음에
일시불로 함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기에 청부자가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그가 눈을 떠 왕승고를 보면서 코웃음쳤다.
『길게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왕승고가 말했다.
우두둑!
뒤에서 정규가 손에 힘을 주자 귀왕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한 듯 얼굴이 일그러지고 진땀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귀왕혈은 암중에 상대의 청부를 조사한다고 들었다. 그래야… 상대의 의도를 안다고
하던가? 어쨌든 그 내정(內情)을 내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청부자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것을 말해야 하나? 그것을 말한다면 놓아주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쉽게 죽게 해주겠다』
왕승고가 차갑게 말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강하게 부딪혔다.
귀왕의 눈 깊은 곳에서 흔들림이 일었다.
상대의 눈에서 무서운 원한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러한 원한을 가진 사람은,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무슨 짓이던 할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누구냐?』
왕승고가 다시 물었다.
귀왕은 눈을 감았다.
말을 않겠다는 의미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왕승고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가 검을 드는 순간이었다.
『포의신검협이십니까?』
그의 뒤에서 정중한 음성이 들렸다.
중년의 도사 한 사람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공동의 청유(淸幽)입니다. 장문인께서 대협을 청하고 계십니다』
도사가 그에게 합장해보였다.
『장문인께서?』
함상진인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숨이 끊어질는지 알 수 없는 상태.
검이 심장을 찌르고 있는데다가 그 검에 발린 것은 추심지독. 이 독은 피를 따라 심장을
공격하는 무서운 독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심장의 기능을 무력화시켜 심장마비를
초래케 하는 독이었다.
그러한 추심지독이 심장을 공격함에도 그가 즉사하지 않고 있음은 오로지 그의 일신에
깃든 두터운 내공의 힘에 의지함이 다름이 아니었다.
난장판이 된 장문인의 거처로 돌아와 그의 상태를 본 왕승고는 내심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간의 간난(艱難)을 겪으며 그는 의도에 조금 눈을 뜬지라, 함상진인이
회생불능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본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이 그를 죽인 것과 다를바가 없기에.
공동파의 장로 두 사람이 그를 돌보고 있었다.
도를 닦고 수도를 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선(仙)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장수불노의 연단지술(練丹之術)을 연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도교인 공동파
또한 의도에 밝은 도인들이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것은 함상진인의 상태가 왕승고가 본 것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포의신검협께서 오셨습니다』
청유자의 말에 함상진인은 눈을 떴다.
『귀왕을… 잡았다구요?』
『그렇습니다. 미리 도착하지 못해서 이런 변을 당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왕승고의 답에 그늘진 웃음이 함상진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능력이 모자라 이런 변을 당하니, 조사영령을 뵐 낯이 없구료. 그나마 대협이 적시에
와주지 않았다면 함상은 이미 고혼이 되었을터… 공동을 대신하여 다시 한번… 대협께
감사를 드리오』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억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왕승고의 말에 함상진인이 쓰게 웃었다.
『말하지 않는다고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소? 무능한 함상으로 인해 공동이
치욕을 당했으니…』
『장문사질이 죽도록 버려두지 않겠다』
나타난 것은 수라신도였다.
『적도의 손에 공동의 장문인이 죽는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수치. 어찌 내 생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 있으랴? 장문사질은 걱정말라』
수라신도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 왕승고가 손을 쳐들었다.
한쪽 구석에 있던 은그릇 하나가 그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그릇을 받쳐들자 왕승고는 자신의 손목을 쳤다.
마치 칼로 짼 듯이 살갗이 갈라지면서 핏줄기가 솟구쳐 은그릇으로 흘러들었다.
피가 한그릇쯤 되자 왕승고는 지혈을 함과 동시에 그 그릇을 공동파의 장로에게
내밀었다.
『소생은 심한 중독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 독기는 가히 독중지독인지라, 제 몸에
있는 피는 아직도 강한 항독(抗毒)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문인께 드리십시오』
『장문인께서 중독된 것은 추심지독인데…』
『멍청한! 빨랑 장문사질에게 복용시켜라!』
수라신도가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그의 성정이 불과 같다는 것을 공동파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고맙네! 언제 어느때라도 공동파는 자네의 도움을 잊지 않겠네』
수라신도는 함상진인이 그 피를 다 마심을 보자 함상진인의 등뒤로 가서 그의 명문과
머리위 천령에다 손을 올려놓고서 운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황망한 빛으로 중년의 도사, 좀 전에 왕승고를 안내해왔던 청유자가 뛰쳐들어왔다.
『무슨 짓이냐?』
공동의 장로, 함명진인(函冥眞人)이 눈쌀을 찌푸렸다.
『크, 큰일났습니다! 귀왕이 죽었습니다!』
『귀왕?』
순간, 왕승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귀왕은 눈을 부릅뜨고서 쓰러져 있었다.
가슴을 움켜쥔채로.
그의 입에서는 선혈이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당혹한 표정으로 정규의 수하이자 부대장격인 원충도(袁忠道)가 서 있었다.
『정대장께선 암습자를 쫓아가셨습니다!』
정규가 귀왕을 문초하고 있는데, 암습자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때, 왕승고는 죽은 줄 알았던 귀왕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림을 발견했다.
볍沽?』
왕승고는 다급히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던 귀왕의 손이 떨어졌다.
그곳에서 핏줄기가 은은히 보였다. 어떤 절독(絶毒)한 암기가 파고든 흔적인 듯했다.
『끄…』
미약한 신음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말해! 누가 당신을 해친건가?』
왕승고는 그의 명문혈에다 손을 대고 일신의 천부신공을 그의 심맥에다 밀어넣으며
소리쳤다.
초점이 맞지 않는 귀왕의 눈이 가늘게 경련했다.
『과, 광… 명…』
끝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던 그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살아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정규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정규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된건가?』
『놈을 문초하고 있었는데…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쪽을 경계하는 순간에 반대쪽에서
암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있었던 것 같다고?』
『속하가 무능하여… 적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귀왕이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에 귀왕은 이미 암습을 당한 다음이었고 그 뒤를 쫓아갔지만 숲이 무성해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
귀왕의 가슴을 확인해본 결과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아주 미세한 은침이었다. 아니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가는 실 같은 침인데, 길이가 다섯치나 되었다.
손에 들자 휘청거려 실처럼 늘어질 정도로 가늘었다.
『이런 암기를 날려 사람을 죽일 수있다니?』
왕승고가 신음했다.
그 의미는 고심(高深)한 내가의 상승공력으로 침을 날려 적을 암습한다는 뜻이니,
이렇게 가는 침이 밤중에 날아든다면 거의 방비하기가 불가능할 터였다. 게다가
이렇게 가늘다는 것은 그만큼 예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정말 무서운 암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찾아내기 전에는 이런 것을 암기로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건 경혼은사(驚魂銀絲)인 것 같군』
말소리가 들려왔다.
수라신도가 나타났다.
『장문인께선?』
『잘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 같네. 자네의 피가 그런 영약일 줄은… 추심지독이 그
피로 인해서 해독이 되었네』
『다행입니다』
『하지만 귀왕이 죽었으니 누가 청부자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군! 귀왕혈은 청부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인데…』
수라신도의 중얼거림에 왕승고의 내심에 경련이 일었다. 겉으로야 드러나지 않을
수양을 가진 그였지만 심중까지 편안할 수야 없는 일인 것이다.
『경혼은사가 어떤 것입니까?』
『경혼은사는 천수인마(千手人魔) 가무정(賈無情)의 독문암기일세. 그의 경혼은사는
놀라운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손을 쓰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지. 그런 그가
강호상에서 사라진 것은 이미 이십년 전인데…』
수라신도가 말끝을 흐렸다.
『천수인마라면 암기에 조예가 깊었던 모양이군요』
『그렇네. 사천의 당가를 제외한다면 개인으로선 그가 가장 독보적이라 할 수 있지』
귀왕은 그야말로 전신이 암기의 덩어리인 것처럼 암기를 사용했었다.
그렇다면 그와 천수인마 가무정과는 어떤 사이였던 것일까.
「광명(光明)…」
왕승고는 귀왕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서 침음했다.
광명이라면, 무슨 뜻일까.
그는 암중에 품속에 있는, 자의후가 자신에게 건네준 그 철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새겨진 「광명천하」와 이 광명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의
말대로 귀왕혈이 어떤 집단과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 이제 그 말을 부인할 수는 없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왕승고는 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산정(山頂).
그곳에서 개방주 사공관은 말했었다.
『이번 사건을 뒤처리하면서 나는 다시 의문을 가져야 했네. 과연 홀가적 혼자서 이런
일을 해냈을까 하는… 그렇게 모든 일을 정교하게 처리하는 것이 놈의 혼자 힘으로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아』
그의 말은 적중했었다.
과연 홀가적의 뒤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금곡노야.
실로 상상하지 못했던 존재.
그가 그 뒤에서 천하의 막후(幕後)를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놈들이야』
종남산에서 만났던 자의후의 말이 뒤이어 스쳐간다.
『놈들은 이미 이십년 전부터 강호 상에서 암약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그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은 이미
삼년째인데도 놈들의 명확한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으니 실로 대단한 놈들이지. 뒤를
쫓으면서도 가끔 허깨비를 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남겨놓은 동패에 새겨진 글자는 「광명천하(光明天下)」였다.
그들의 신표라는 그 동패에 새겨진 글 「광명」을 귀왕은 죽으면서 말했었다.
결코 우연일 수 없는 일.
『난 이 신비집단이 귀왕혈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의후의 말이 다시 귓전을 울린다.
『설마…』
왕승고는 신음했다.
그 신음은 실로 거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개방방주 사공관이 말한 그 배후인 금곡노야가
자의후가 말한 신비집단과 같은 의미라면… 귀왕혈 또한 금곡노야의 하수인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승고는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양부(養父) 곽천수는 금곡노야가 말한 대업에서, 아니 어머니 구대부인이
평생염원으로 추진하고 있는 고려복국에 있어서 축을 이루는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고려복국의 대업에는 크나큰 차질이 빚어졌다.
금곡노야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집단이 있다는 뜻인가?』
문득 왕승고가 부지간에 신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인가?』
옆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수라신도였다.
찰나지간 흔들림이 왕승고의 눈속에 스쳐갔다. 실태(失態)를 보인 것을 경각(警覺)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전과 다름없이 침착했다.
『귀왕이 죽기 전에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왕승고의 간략한 설명에 따라 수라신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귀왕혈에 배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럼 이 자가 본파를 습격한 것도 단순한 청부가
아니고…』
『아직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인된 바가 없으니까요』
왕승고는 침중한 음성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 일이 자신으로 인해 비롯되었음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귀왕혈의 발호를 알고도 막지 못해 이런 피해를
보게 했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하면 우리 공동파는 들 낯이 없지 않겠소? 명색이 구대문파의
하나라면서 본산(本山)에서 일개 자객집단에 이런 변고를 당하다니…』
수라신도는 왕승고의 손을 잡았다.
『그 나이에 그처럼 당당한 풍도를 보니 정말 탄복을 금할 수가 없소! 언제라도,
공동파는 대협의 일이라면 일비지력(一臂之力)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필요하면
연락을 주시오!』
노도인의 눈은 신뢰로 빛나고 있었다.
금곡노야가 의도했던 것은, 생각했던 것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왕승고가
원하건 아니건간에.
아미산(峨嵋山).
사천성에 위치한 이 산을 일컬어 사람들은 아미천하수(峨嵋天下秀)라 한다.
비폭심담(飛瀑深潭)에 기봉돌기(奇峰突起)하며 계간심학(溪澗深壑)하니 보이느니
창송취백(蒼松翠柏)이라, 왜 아미산에 천하수라는 이름이 붙었는좌고는 침중한 음성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 일이 자신으로 인해 비롯되었음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귀왕혈의 발호를 알고도 막지 못해 이런 피해를
보게 했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하면 우리 공동파는 들 낯이 없지 않겠소? 명색이 구대문파의
하나라면서 본산(本山)에서 일개 자객집단에 이런 변고를 당하다니…』
수라신도는 왕승고의 손을 잡았다.
『그 나이에 그처럼 당당한 풍도를 보니 정말 탄복을 금할 수가 없소! 언제라도,
공동파는 대협의 일이라면 일비지력(一臂之力)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필요하면
연락을 주시오!』
노도인의 눈은 신뢰로 빛나고 있었다.
금곡노야가 의도했던 것은, 생각했던 것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왕승고가
원하건 아니건간에.
아미산(峨嵋山).
사천성에 위치한 이 산을 일컬어 사람들은 아미천하수(峨嵋天下秀)라 한다.
비폭심담(飛瀑深潭)에 기봉돌기(奇峰突起)하며 계간심학(溪澗深壑)하니 보이느니
창송취백(蒼松翠柏)이라, 왜 아미산에 천하수라는 이름이 붙었는? 금정(金頂)이다.
그 금정봉의 정상에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여승(女僧) 한 사람이 단좌하여
있었다.
회색의 승복이긴 하지만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긴 머리는 아침바람에 나부끼지만 단정히 해를 보고 앉은 그 승복의 여인은
조각이라도 해놓은 사람인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가부좌(結跏趺坐).
이마와 벌린 두 손과 두 발의 바닥이 하늘을 향한 모습은 경건하기 이를데 없다. 단순히
아침해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승복의 여인은 내가의 연기공부(練氣功夫)를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은은히 여인의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내가의 기공이 겉으로 드러나 형체를 보일 수 있다 함은 일신의 내공이 이미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린 듯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뜻밖에도 이십대 전후.
문득 일대의 경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처럼 황홀하기조차 했던 날씨가 먹장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면서 다가오던 아침을
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함치는 천둥소리!
느닷없이 세찬 바람이 여인의 승복을 찢어놓을 듯이 펄럭이고 돌가루가 날아올랐다.
뒤이어 한두방울,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그 빗방울은 모습을 보인다 싶은 순간에
이내 세찬 빗줄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쏴쏴아아….
승복의 여인은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정말 석상(石像)이라도 된 것일까.
여인의 몸이 휘청인다.
이제보니 놀랍기 이를데 없게도 여인이 앉아있는 것은 산봉의 바위가 아니었다.
산봉에 가로놓인 노송의 가냘픈 가지.
어린아이도 걸터앉기 힘든 그 가지 위에 여인은 앉아있었고 그 나뭇가지는 돌풍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여인은 조용한 처음의 태도 그래도 눈을 감은채 선정(禪定)에 들어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좋다! 이제 대정신공(大靜神功)이 경지에 들어섰구나. 장하다…』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에 여인은 조용히 눈을 떴다.
움직임만큼이나 조용한 눈빛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머리를 깎지 않은 채, 승복을 입은 그녀의 이름은 방약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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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보았읍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봅니다.
감사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