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01
실험모델 Frank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으로 유족들의 동의하에 의식의 복제 연구에 필요한 자원이 되었다. 사고 직후 생존을 위해 빠르게 보존된 두뇌는 육체의 회복을 위해서가 아닌 연구를 위해 동원되었고 물리적으로 해체, 번역된 그의 뇌는 폐기되었다.
어느날 모델 Frank는 정기적인 각성자극에 반응했다. 장치는 4개의 바퀴가 달린 35cm 사각형 차량형 로봇이었다. 처음 그것은 4개의 바퀴를 다르게 움직였다. 조금씩 움직여보고, 계속 움직여보는 식으로 확인하는 듯한 기동을 보여줬고, 이내 앞으로 전진했다. Frank는 전진 중 벽에 충돌했고 얼마간 무의미한 전진과 충돌을 반복한 뒤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연구진들은 그것이 커넥톰을 따라 기계적으로 복제된 인간 의식을 복제하고 이식한 것의 성공적인 사례이며, 예쁜꼬마선충 이후 인간에까지 도달한 오랜 시간의 결실이라며 환호했다. 그들은 이 연구로 수많은 상과 명성을 얻어냈고, 이후 카메라와 마이크를 장착하여 정보 전달, 명령, 소통은 물론 다른 여러 종류의 기계에 이식하여도 동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모델 Frank의 의식은 여전히 인간의 의식이었다.
Case.02
한 생물학 연구팀이 선택한 실험 주제는 쌍생아 소실이었다. 정확히는, 그것을 인공적으로 재현하고 의도적으로 합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연구팀은 한 사람의 난자들에 다른 사람의 정자를 수정시킨 뒤 커다란 인공자궁에 착상시킨 뒤 성장시켰다. 첫 실험은 어느 정도 태아의 모습을 갖췄을 때 이루어졌다. 7명의 태아들은 인공적으로 흡수를 유도했고 최대 4명이 하나의 몸으로 합쳐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거부반응으로 폐사되었고 흡수되지 않은 3명의 태아도 폐기되었다.
21번째 실험은 5개의 수정란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세포의 분열 초기에 강제로 이식되었는데,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흡수 및 분열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정 단계에서 태아의 형태를 갖추기 직전 거부반응을 보이며 사멸했다.
58번째 실험에선 상당한 진전을 얻을 수 있었다. 사용되는 태아는 대개 한 사람의 남녀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 생물학적 형제, 쌍둥이 위주로 구성하였고, 태아간 흡수 단계에서 면역 억제제를 투여하여 거부반응을 최대한 줄이며 최대 6명의 태아를 합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출산 단계에 접어들진 못했고 현재 실험은 진행 중에 있다. 훗날 부모가 다른 태아끼리의 합체 역시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Case.03
인간의 의식을 커넥톰에 따라 기계적으로 복제한 뒤 이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반대로 인간의 뇌를 동물에게 이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인가? 어느 연구소는 이에 대한 연구와 실증을 목표로 삼았다.
조나단은 21살의 대학생이었고 총기난사의 피해자였다. 그는 치료 중 사망했으나 연구소와 협약이 되어있던 병원에선 그의 뇌만큼은 살려서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용액통 속의 뇌에 불필요한 기관들은 제거되었고 생존만을 위한 산소와 영양분만 제공된 뇌는 연구소로 이동되어 실험에 동원되었다.
연구소는 조나단의 뇌를 감싸는 얇은 보관 장치를 만들었고 내부는 생존과 보존을 위한 용액, 외부로 이어지는 관을 통해 산소의 교환과 영양분의 공급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마취한 대형견의 두개골을 열고 뇌를 꺼낸 뒤 심장이 뛰고 있는 동안 조나단의 뇌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장치의 뒤쪽에 있는 커넥터에 신호를 올바르게 주고 받기 위한 어뎁터를 연결한 뒤 개의 척추에 막 이식된 플러그를 꽂았다.
조나단의 뇌를 감싸는 장치는 조나단의 뇌에 전극과 침을 꽂아서 그의 뇌에서 발생하는 모든 신호를 수집했고 이는 전기신호로 번역되어 어뎁터로 전달됐다. 어뎁터는 이 정보를 개의 척추에 꽂힌 플러그를 통해 알맞는 신경에 보내도록 했고 몇분 후 마취가 풀린 조나단은 자신의 의지로 개의 육신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원활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분명 팔이 움직이고 다리가 움직이고 기계적 도움 없이도 호흡하고 안구를 움직이며 턱을 조작하는데 성공했다.
연구진은 그날 밤 작은 파티를 열었고, 여러 권위 있는 상들을 쓸어담으며 명성을 쌓았다. 그들의 연구소는 지원공고를 내자 순식간에 3만:1이라는 경쟁률을 보이는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Case.04
수화를 가르친 70여 마리의 오랑우탄은 현재 인간과 협상 중이었다. 협상이라는 사건은 연구팀이 의도한 것이었다.
오랑우탄에게 처음 수화를 가르친 이후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수화는 그들 무리에서 보편적인 질서가 될 수 없었다. 이는 그들이 언어를 이해하고 수화를 통해 구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적었기 때문이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하여 필요를 주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날수록 수화의 사용빈도는 줄어들고 결국 그들 무리에서 수화를 통한 대화는 사라지게 된다.
이에 영장류학, 생태학, 심리학, 사회학자 등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진이 공동으로 연구한 이 실험은 그들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그러한 언어를 유지해야할 필요성이 그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관찰하는 실험이 되었다.
그들은 오랑우탄에게 언어가 유지될 필요성이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했고, 생존의 위험으로 결정했다. 그들은 총과 마체테를 이용해 오랑우탄 무리의 몇마리를 사살했고, 폭력을 휘둘렀다. 오랑우탄은 이에 대해 항의했고 도망가기도 했으나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통제된 실험 공간 내에서 많지 않았다. 숲을 모사한 공간이었고 규모고 작지 않았지만 어딜 가든 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몇달 간 지속된 침략에 오랑우탄들은 도망과 항복, 사살 되는 과정을 거쳤다. 어느날 오랑우탄 무리의 리더가 자신의 암컷과 새끼를 뒤에 둔 채 총을 든 연구진들 앞에 나왔다. 연구진들은 그의 앞으로 갔고, 우두머리 오랑우탄은 수화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다.
'협상합시다. 살려주십시오. 당신들의 뜻대로 하세요. 살려주세요.'
연구진들은 협상에 응했으나 오랑우탄은 원하는 성과를 온전히 얻지 못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쳐들어와 폭력을 행사했고, 그때마다 오랑우탄은 맞서 싸우다 죽거나 협상하여 일시적인 평화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수화를 할 줄 모르는 오랑우탄은 무자비하게 살해되었지만 수화를 배운 오랑우탄은 대체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약 400년에 걸친 통제된 실험 속에서 오랑우탄들은 모든 자식들에게 인간에게 배운 수화를 가르쳤고, 이후 연구진들은 150년 동안 그들을 공격하지도, 개입하지도 않았음에도 수화는 전통으로 남아 이유도 모른 채 자식들에게 가르쳐지는 것이었다. 본래 큰 무리를 짓지 않는 오랑우탄임에도 200마리의 오랑우탄은 12개~14개의 무리로 구분될 수 있었고, 인간의 공격이 심각하지 않았던 무리일수록 수화의 계승도는 줄어들었다. 반면 인간의 공격과 협상을 많이 경험한 무리일 수록 수화의 계승은 비교적 잘 이루어졌고 협동, 도망이나 교란 등 전술에 대한 교육 역시 진행되었던 것을 확인하였다.
조만간 다시 한번 외부적 압력을 발생시켜 그들에게 수화와 협상 능력이 필요한 상황을 연출할 계획이 예정되었다.
첫댓글 인간의 의식과 뇌의 이식이라는 흥미로운 주제군요. 국민학교때 흥미롭게 읽었었던 한 소설 내용이 생각납니다. 연구목적으로 기증약속이 된 뇌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일으켜 기증대상자를 소생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뒤 기증대상자의 뇌만 챙기는 어느 회사가 소설 소재였죠-이렇게 수집된 뇌는 죽어가는 신체에서 절제되어 컴퓨터 연산에 활용되는.
인간의 뇌는 늘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자 여러 창작매체들의 단골소재입니다. case 1과 case 3 을 읽고 나서 문득 든 생각이, 생명을 향한 무한한 집착을 보이는 생명체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해당 케이스의 의식들은 저런 변형된 형태로라도 존재를 계속 이어나가기를 강하게 바라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어떤 사람은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생을 지속하는 건 그만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신체에 대한 완벽한 구속, 모든 활동의 감시 및 분석이 이루어지며 인간이 아닌 실험체, 자산 정도로 취급받는 건 존중과 안전, 인간성, 변화가 적은 일상의 반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괴로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자유와 의지가 완전히 무시되고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만 하는 육체와 정신이 여러 타인들에 의해 물건처럼 다뤄지는 게 행복할 리는 없지요. 사람이 자살할 때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부정적이고 앞으로도 희망조차 없을 때라는 걸 생각해보면 때론 죽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기도 할 겁니다.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살아서 얻을 수 있는 건 그저 생을 지속하는 것 뿐인데 그게 당사자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연구윤리의 중요성…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