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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김홍도, 알아보자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31 14.04.27 21: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KBS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한국사전>이란 프로그램에서 단원 김홍도에 관한 쉽고 명확하게 전달해준 것이 있어서 편집해 자료를 올려놓는다. 저작권 한국방송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용주사. 이곳 대웅보전에는 특별한 불화 한 점이 있다. 1790년에 그려진 후불탱화. 그런데 불화 속 인물들은 전통불화 속에서는 볼 수 없는 명암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일반불화와는 달리 인물을 서양화법으로 그려 숱한 논란을 낳았던 작품, 그런데 이 불화를 그린 사람이 바로 단원 김홍도다. 그는 어떻게 서양화법을 구사한 독특한 불화를 그리게 된 것일까?

 

■ 조선의 르레상스를 그리다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 우린 그를 조선시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씨름>, <서당> 그리고 <우물가> 등 당시 서민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그림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합니다. 그런 그가 불화가 그렸다는 사실 그것도 서양화법으로 그렸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오늘 한국사전에서는 단원 김홍도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중인출신에 미천한 출신이었던 김홍도, 김홍도는 일개 화원에 불과했지만, 조선시대 여느 양반 못지않은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전하는 그림만 300점이 넘는데 당시 김홍도의 유명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김홍도는 처음 어떻게 그림을 접하게 됐을까요?

 

경기도 안산시. 이곳에선 건물 외벽에 그려진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지난 2001년에 조성된 단원조각공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조형물로 만들어 전시회 놓았다. 또한 매월 10월이면 단원 미술제가 열린다. 안산과 김홍도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표암 강세황이 쓴 책에 그 단서가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김홍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안산이다. 김홍도는 젖니를 갈 때부터 안산에 머물던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공부했다.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1712~1791). 그는 뛰어난 문인 화가이자,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다. 많은 명화의 품평을 남겨 좋은 그림을 가진 이들이 앞 다투어 그의 글을 받아가길 원했다. 어릴 때부터 단원을 지켜봤던 강세황은 그를 천부적 재능을 가진 화가라 극찬했다.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단원은 못하는 것이 없어 대항할 자가 없다’고 평했다.

 

이후 김홍도의 행적이 공식적으로 확인 되는 건 21살 때이다. 영조 칠순을 기념해 그린 경현당수작도. 그림은 사라지고 글씨만 남았는데 글은 김상복, 그림은 화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적혀있다. 한성대 회화과 강관식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영조 임금 등극 40주년을 기념해서 열렸던 행사 내용을 그린 궁중 기록화이다. 정조가 세손시절에 영조한테 간청하다시피해서 열린 행사이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 다음 그것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발의하고 주관한 것은 영의정입니다. 그때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21살 밖에 안 된 김홍도가 그것을 대표로 그렸다는 것은 당시 김홍도의 실력이 화원계에서 최고로 평가받았다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도화서는 왕실에 관련된 모든 그림을 그리는 공식 기관이었다. 통상 서른 명 정도의 화원으로 꾸려졌는데 이들은 시험을 통해서 선발돼 직업화가로 활동했다. 김홍도는 이미 이십대 초반에 왕실 전속 기관이 도화서 화원으로 뽑혀 다양한 그림들을 그렸다. 서울대 박물관 학예사로 근무를 하고 있는 진준현씨의 말을 들어보자.

 

“화원들은 그림에 관한 모든 일을 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초상화나 일반적인 회화를 포함해서 또한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기록을 그리고 의궤도 포함한다. 그리고 각종 문양이 있습니다. 왕실의 의복이라든지 가마라든지 또는 옥자 뒤에 일월오병 병풍이라든지 다 도화서 화가들이 그리고 가끔씩은 임금의 특명을 받아서 지방에서 가서 지도를 그려오기도 하고 풍속화를 그려오기도 한다.”

 

그중 도화서 화원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김홍도는 불과 29살의 나이에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어용화사로 뽑혔다. 어진을 그리는 작업에는 여러 화원들이 참여하는데 당시 김홍도는 곤룡포를 입은 왕의 몸체를 그렸다. 어용화사가 된다는 건, 최고의 영예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임금의 초상을 그릴 때에는 ‘터럭하나라도 다르게 그려서는 안된다’는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김홍도는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만큼 초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김홍도가 삼십대 초반에 그린 <송하맹호도>. 호랑이 몸에 줄무늬와 털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이 그림을 본 유경종은 ‘터럭무늬의 호랑이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해 동네 개를 잡아먹을까 걱정될 정도’라고 시를 읊었다.

 

1776년. 정조가 왕으로 즉위했다. 등극과 동시에 정조는 규장각을 건립하고 향후 국정에 중심축으로 삼고자 했다. 이때 김홍도에게 규장각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그리게 했는데 이후 그에게 많은 그림을 맡겼다. 정조에 명에 따라 김홍도는 궁궐 외벽에 해상군선도라는 대작을 그렸는데 그림은 전하지 않고 당시 기록만 남아 있다.

 

“정도 임금이 <해상군선도>를 그릴 것을 명하셨는데 관모를 벗고 옷을 걷어 올린 채 비바람 몰아치듯 붓을 휘둘러 몇 시간 만에 이루어 놓았다” 조희룡 <김홍도전> 중에서

 

당시 그림을 짐작케 하는 여덟 폭의 병풍 그림이 남아 있다. 신선들이 동자를 데리고 잔치에 관한 행렬을 그린 것으로 거친 듯 휘몰아친 필치가 김홍도의 젊은 기백을 느끼게 한다. 김홍도는 대부분 도화서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여유가 있을 때에는 사가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33살 때에는 중부동 강희연의 집에서 동료화원들과 함께 민간에서 주문받은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림 중 하나가 여덟 폭의 <행려풍속도>다. 여행길에 만난 농촌풍경을 해악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여덟 번째 그림 훔쳐보기 편에는 젊은 여인을 훔쳐보는 양반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이 그림을 본 스승 강세황은 “행색이 초라하건만 무슨 흥취로 아낙네를 눈여겨보냐며(破顔興趣)” 풍자했다. 이러한 풍속화로 김홍도는 이미 삼십대 중반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의 집 앞은 항상 그림을 얻으려는 이들로 넘쳐났다고 기록은 전한다.

 

“김홍도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을 금치 못하여 그림을 구하려는 자들이 무리를 지었다.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사람들이 문을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단원의 그림이 당시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서유구에 임원경제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김홍도가 여염의 일상 풍속을 그렸는데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한번 보면 모두 턱이 빠지게 웃으니 고금의 화가 중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적혀 있다.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임금의 어진을 그려서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어용화사가 됐고, 삼십 대에는 세상에 풍속화로 이름을 알린 김홍도. 이 김홍도는 중인의 신분으로 드물게 유명세를 타다 보니 여러 가지 의혹 또한 끊이질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일본에 건너가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출간된 책 <또 하나의 샤라쿠(東洲齋寫樂)>. 저자는 일본의 유명한 샤라쿠가 김홍도가 동일인물이라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림의 필선이 비슷하고 샤라쿠가 활동했던 시기에 김홍도의 행적이 불분명함을 들었다. 그러나 샤라쿠의 그림과 김홍도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필치와 기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김홍도의 행적에도 아무런 공백이 없다. 진준현씨의 말을 들어보자.

 

“소설로서는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미술사학자들은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샤라쿠라는 사람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가장 일본적인 판화 화가로서 일본의 연극배우들의 얼굴들을 아주 희화한 판화를 그린 사람으로 그것은 아무리 천재적인 김홍도라도 그저 잠깐 몇 개월, 1년 가 있다고 해서 그릴 수 있는 성격의 그림이 아니다. 가장 일본적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김홍도가 한 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본에 갔다는 또 다른 기록이 전한다.

 

“김응환은 무신년(1788)에 금강산을 그려왔다. 이듬해 일본에 가서 몰래 지도를 그리려 했으나 부산에 이르러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김홍도가 홀로 대마도로 가서 지도를 그려바쳤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홍도는 1788년에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에 다녀와서 그림을 완성시키고 이듬해인 1789년에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록이 과연 사실일까요. 당시 이들의 행적을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정조의 어명을 받은 김흥도 김응환은 긴 여정에 올랐다. 이들은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날 때마다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동행한 김응환은 도화서의 동료 화원이자 스승으로 김홍도보다 세 살 더 많았다. 도화서 화원들은 지역을 돌며 지도를 그리기도 했는데 증경산수화풍의 회화집 지도가 주를 이뤘다. 금강산에 다녀와 그린 또 다른 그림의 이 같은 특징이 발견되는데 사진에 가까울 만큼 필치가 섬세하다.

 

당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금강산으로 향한 두 사람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해운정. 당시 강원도를 찾은 유력 인사들이 꼭 들르는 장소였다. 강릉시립박물관에는 해운정을 다녀간 사람들의 방명록이 남아 있다.

 

이 방명록 속에 김홍도와 김응환 두 사람이 1788년 8월 9일에 그림을 그리러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김홍도와 김응환 두 사람이 금강산에 함께 갔다는 김씨 가보 속에 기록과 연도가 일치합니다. 강릉을 거쳐 금강산에 다녀온 두 사람은 이듬해 대마도에 가서 지도를 그려오라는 정조의 어명을 받게 되는데요. 그렇다면 당시 정조는 왜 대마도 지도가 필요했던 것일까요.

 

당시 일본은 막부 장군이 바뀌면서 정치적으로 변화를 겪던 시기이다. 보통 막부장군이 바뀌면 조선의 통신사 파견을 요청해왔는데 오랫동안 통신사 요청이 없었다. 정조는 내심 일본의 나라 안 정세가 궁금하던 차였다. 홍선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타격의 전쟁을 당했었기 때문에 일본에 남전사라고 그런 일본의 동차라던가 그런데 민감하게 주목을 하는 상황 하에서 장군이 바꿨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사절단에 대한 초청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채집하기 위해서 대마도에는 주로 역관들을 중심으로 해서 왕래가 있었는데 거기에 어떤 좀 더 시각적 자료라고 할까 이런 것들까지 포함한 그런 정보수집차원에서 김홍도를 보낼 수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금강산에 다녀온 두 사람이 정조의 명에 따라 대마도를 향한 것은 그 이듬해다. 이들은 대마도를 가기 위해 영남지역으로 향했는데 이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유재건의〈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는 두 사람이 1789년 영남지방을 두루 다니며 명산을 그렸다고 전한다.

 

경남 양남에 있는 통도사. 이곳에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 한 점이 있다. 통도사 전경도. 낙관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김홍도가 이곳을 다녀간 건만은 분명하다. 절 입구 바위에는 통도사를 방문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김홍도와 김응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곳 통도사 바위 위에 새겨진 글자는 이들이 대마도로 가기 전 남긴 흔적으로 보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은 김홍도가 대마도에 갔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대마도로 가기위해 양산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부산에는 왜관이 설치돼 일본인들이 수시로 오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김응환은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김홍도는 홀로 대마도로 향했다.

 

아쉽게도 김홍도가 그린 대마도 지도는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 기록이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김홍도가 부산을 거쳐서 대마도로 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실제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들은 지도를 비롯해서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따라서 화원인 김홍도도 기록화, 풍속화, 산수화 등 그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그림을 그렸는데 김홍도가 그린 그림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용주사.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절이다. 그런데 이 절의 일주문은 다른 절과 달리 삼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과 연결되는 천보루는 두 좌우에 긴 행랑채가 이어져 있고 건물의 기둥은 궁궐에서나 사용되는 당대한 돌로 세워져 있다. 정조는 이같은 구조로 절을 지은 것일까. 권중서씨의 말을 들어보자.

 

“정조대왕이 아버지를 위해서 이곳에 사도세자의 궁궐을 지은 것입니다. 사도세자가 부처님의 힘으로 왕생극락하기를 바라면서 또한 이러한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사후에라도 왕의 지위에 올라서 이런 궁전에 ‘계십사’하는 그러한 효심을 담고 있습니다.”

 

 

사찰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법당에는 특별한 그림 한 점이 있다. 용주사 후불탱화다. 가로 3.5미터, 세로 4.4미터의 대형 통비단에 그려진 이 불화는 절에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석가모니 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이 위시해 있어 「삼세여래체탱」이라 부른다. 그런데 다른 불화와 달리 하단 중앙에 축원문이 쓰여 있다. 왕과 왕의 어머니인 자궁, 왕비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후불탱화가 왕실을 위해 조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후불탱화를 그린이가 바로 김홍도라고 용주사 사적지는 전한다. 화순들의 전유물이 불화를 과연 김홍도가 그렸을까. 많은 미술 사학자들은 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손이나 옷 선에 처리 등을 볼 때 김홍도의 필치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또한 얼굴부분에서 일반 불화에서 볼 수 없는 서생화적인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 역시 얼굴에 기다랗게 표현한 김홍도의 화풍과 같다. 최완수 씨의 말을 들어보자.

 

“사가들이 인물화를 그릴 때 아무리 남의 초상을 그린다 해도 자기 얼굴이 상당히 반영이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단원이 얼굴이 갸름하고 아주 청순하게 생긴 얼굴입니다. 그리고 코가 높고 그래서 단원 그림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은 한결같은 그런 특징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높고 또 옷자락을 표현하는데 이게 산들바람 맞아서 한올 한올 휘날리는 그런 표현 같은 것들이 단원에 특징적인 표현, 그런게 여기 다 반영되어 있습니다.”

 

김홍도가 그린 이 불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화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을 보면, 이마와 뺨 등에 조명이 들어간 것처럼 입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사천왕상을 보면 명암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런 예는 전통불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해에 그려진 다른 불화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그래서 한 때 김홍도의 그림이 아니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발견된 국가 공식 문서 수원지령등록에도 김홍도가 불화제작을 총감독했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홍도는 서양화법을 어떻게 알고 그렸을까.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성원이 아뢰기를 김홍도와 이명기를 동지사행에 데려가야 하는데 마땅한 직책이 없습니다. 이에 김홍도를 군관자격으로 이명기를 추가정원으로 데려가고자 합니다’하니 윤허하셨다.”

 

후불탱화를 그리기 몇 달 전 정조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김홍도를 별도직책까지 마련해 보낸 것이다. 여기에는 정조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당시 청나라 수도 연경은 서양문물이 대거 유입되고 있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천주당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면서 연경을 찾은 조선 사람들에 큰 이목을 끌었다. 그중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천주당 성화는 당연 볼거리로 사신들을 통해 정조에게도 알려졌다. 한양대 회화과 김관식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정조는 자기가 총애하고 키워냈던 자기 취양으로 자기가 지향하는 데로 키워냈던 최고의 측근 궁중학을 했던 김홍도와 이명기에게 그것을 그릴 계획을 세워놓고 사도세자의 산소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나서 바로 다음 달에 이 두 사람을 북경에 보내서 북경의 천주당에 있는 성화를 보고 오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바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키는 불교성화이기 때문에 북경에 있는 천주당 기독교 성화에 버금가는 우리 나름대로의 불교성화를 그리기 위해서 정조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특별히 지시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당시 조선에도 새로운 화풍에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서양화법이 들어간 책걸이 그림이었다. 기록에는 서양화법을 구사한 책걸이 그림을 김홍도가 잘 그렸다고 전한다. 정조의 오랜 준비 그에 따라 김홍도가 익힌 서양화법 이 모두가 총망라돼 탄생한 작품이 바로 용주사 후불탱화인 것이다.

용주사 후불탱화. 사실 이것은 정조에 치밀한 프로젝트 아래 완성된 작품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용주사를 건립한 정조는 이 절에 봉안하게 될 후불탱화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미리 화원을 청나라에 보내서 서양화법을 익히게 할 정도로 정조는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총감독을 김홍도에게 맡겼습니다. 김홍도는 용주사 후불탱화를 그린 이듬해에는 정조의 어진을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벼슬 직을 하사 받는데 충청도 연풍 지역의 현감이라는 자리였습니다.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흔치 않는 높은 직책에 오른 김홍도. 화원이 아닌 행정 관료로서의 김홍도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1791년 12월. 김홍도는 충청도 연풍지역에 현감으로 부임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인 정6품 벼슬 직에 오른 것이다. 김홍도가 현감으로 있었던 연풍지역은 충청도 괴산군에 속한 작은 산골마을이다. 연풍초등학교 자리에 당시 현청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헐리고 건물 중 하나인 풍락헌만 남아있다. 당시 이곳은 疊疊山中(첩첩산중)으로 인구가 적었다. 경석준 씨의 말을 들어보자.

 

“연풍현이 당시에는 지금 연풍면과 수안보면, 장일면 3개의 면이 합쳐서 연풍현이 되어 있었는데 그때 여기는 소백산맥 전형하에는 아주 산골이라 아주 가난한 현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가구 수는 대략 1100호, 인구는 약 32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습니다.”

 

김홍도가 연풍현감으로 부임한 그해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극심했다. 그때 김홍도는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현청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고 죽을 끊여 나누어 먹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김홍도의 선행은 <일성록>에 잘 나타나 있다. 김홍도는 나라 곡식에 의존하지 않고도 굶주린 백성을 살려냈다는 내용이다. 이후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김홍도는 소령산 중턱에 있는 방암사라는 절을 찾았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자식을 갖게 해달라는 개인적인 소원도 빌었다. 기도덕분인지 김홍도는 연풍에 와서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에 나이 마흔 여덟에 얻은 아주 귀한 아들이었다. 훗날 화원이 된 아들 김양기는 아버지의 시문을 모아 <단원유묵첩>을 만든다. 연풍에서도 김홍도는 그림 활동을 활발히 했다. 지역에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는 한편 인근에 빼어난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연풍에서 가까운 단양지역에 절경을 그린 그림이 전한다. <단원절세보첩>에는 단양지역을 그린 도담삼봉, 옥순봉 등이 그림이 남아 있다.

그런데 부임 3년 째 되던 해 김홍도는 현감생활에 큰 위기를 맞는다. 홍대엽이 단원 김홍도의 실정에 대해 상소를 올린 것이다.

 

“김홍도는 고을의 수장인 몸으로 즐겨 중매나 행하고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하고 사냥이나 즐겨하여 원망과 비방이 자자합니다.” <일성록>중에서

 

“그때 김홍도를 탄핵하는 사유라는 것들을 보면 사냥을 했다든지 백성들의 중매를 섰다든지 이런 것들인데 사실은 그런 것들은 별 죄가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백성들의 중매를 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백성들을 배려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사또가 되가지고 사냥 한 두 번 안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그것을 보면 일종에 편견일수도 있고요, 중인 출신인 사대부에 대한 편견일수도 있다.” 진준현 씨의 말 중에서

 

홍대엽이 올린 상소로 인해 김홍도는 연풍 현감 직에서 파직당하고 의금부로 가서 문초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김홍도에 대한 정조의 믿음은 한결 같았다. 의금부에서 잡아오지 못한 죄인을 사면하라는 명을 내려 김홍도를 구제해 주었다. 정조에 배려로 의금부로 압송되는 사태는 면했지만, 김홍도의 현감생활은 삼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끝이 나고 말았다.

 

연풍현감 김홍도에 대한 기록은 충분치 않아서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목민관으로서 그리 훌륭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감 삼년에 임기를 거의 다 채웠고 파직된 직후 정조가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 것을 보면 그 죄가 크지 않았음을 추측케 합니다. 도화서 화원으로 복귀한 김홍도는 그해 왕실 최대 행사를 기록하는 총책임을 맡습니다.

 

1795년 2월. 정조는 수원 화성에 준공을 앞두고 왕실에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 자신이 즉위한지 2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였다.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화성행차와 회갑연이 마련되면서 행사 전반을 기록하는 의궤 청이 세워졌다. 그리고 의궤 속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는 총책임을 김홍도가 맡았다. 행사에 모든 과정은 김홍도의 책임아래 그려졌다. 그중 <화성원행반차도>라 이름 붙여진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은 마치 기록사진을 보는 듯하다. 길이 15미터가 넘는 방대한 그림 속에 당시 행사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말이 끄는 정조의 가마, 그 뒤를 따르는 호위무사와 궁녀들 모습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주요행사의 모습을 여덟 폭에 병풍(원행을묘의궤도병풍)으로도 남겼다. 노량진에서 배로 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주교도>와 행렬이 막 시흥행궁에 다다른 모습을 그린 이 그림들은 우리나라 기록화에 금자탑이라 불릴 만하다. 대규모 행렬과 수많은 구경꾼들을 생생하게 그린 이 그림에는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당시의 시대상이 잘 드러나 있다. 김관식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내용이 행사 기록화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풍속화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당시의 궁중풍속이면서 주변에는 구경나온 백성들을 굉장히 많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굉장히 해악적으로 그렸습니다. 따라서 정조가 이상적으로 꿈꿨던 왕실과 백성과의 소통을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내용들이 정조대에 발달되었던 서양화의 원근법과 투시법까지 반영된 그런 사실적인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굉장히 현장감 있게 다가옵니다.”

 

당시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해 완공한 수원화성은 정조가 집권 후반기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건설 사업이었다. 정조는 화성건설의 모든 과정도 꼼꼼히 기록하게 했는데 여기에도 김홍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단원은 정조를 위해 화성일대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렇듯 오십대 초반의 김홍도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빠짐없이 기록하며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거기에는 김홍도에 대한 정조에 각별한 신뢰와 지원이 있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정조의 글이 남아 있다.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을 안지 오래다. 삼십년 전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후로 무릇 그림을 그리는 일은 모두 홍도에게 주관케 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가 길지 않았다. 정조가 마흔 아홉의 나이로 돌연 승하한 것이다. 그에 죽음으로 규장각을 이끌던 많은 개혁파들이 힘을 잃었다. 그들 속에 김홍도도 있었다. 정조라는 거대한 날개를 잃은 김홍도는 초야에 묻혀 말년을 보냈다. 그 쓸쓸한 생활 속에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그림이었다.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듯한 이 그림(포의풍류도)은 자신의 심정을 담은 화제가 적혀 있다. 그가 말년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세속과 담을 쌓은 듯한(소림명월도, 염불서승도) 소탈한 심정이 잘 들어난다. 당신 단원은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궁핍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녹아에게

날씨는 차가운데 집안은 편안하고 너의 공부는 한결같으냐?

너의 선생님에게 보내는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한탄스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김홍도가 언제 생을 마쳤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늦가을에 쓸쓸한 정취를 그린 <추성부도>. 노년에 비애를 느끼게 하는 이 그림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불세출에 화가 단원 김홍도.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을 통 털어서 최고에 태평성대였고 예술 활동이 활발했던 문예부흥 기었습니다. 김홍도는 그 변화의 시대를 기록한 화가이자 새로운 화풍으로 조선에 르네상스를 이끈 실력이었습니다. 시대에 요청에 한 치의 모자람 없이 그것도 종래에 화법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한 김홍도. 그의 그림 속에는 그가 살았던 세상에 태평한 기상과 문화를 존중하는 그 시대에 자긍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백년이 흐른 지금 김홍도가 남긴 다양한 그림들은 그 어떤 사료나 기록보다 지난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이 되고 있습니다.

 

<추성부도>

<염불서승도>

<소림명월도>

<포의풍류도>

<김홍도가 연풍현감 시절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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