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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빨갱이논란
안기부 문건의 기록에 의하면 1950년 6월 27일 한국 전쟁 발발 직전 보도연맹에 체포되어 미국 육군특무대(CIC)에 의해 아군 후퇴시 사살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목포상고 선배인 김진하의 호명 착오로 구명되었다고 한다. 목포인민위원회 창설 활동, 부채 및 체불된 노임 횡령 혐의로 목포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9.28 수복시 탈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9] 하지만 6월 27일엔 한반도에 군사고문단 이외 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6월 30일 한.미해군은 북위 37도 이북의 해상은 유엔해군이, 그 이남은 한국 해군이 담당키로 합의했으므로 미해군은 당시 서남해상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전쟁 발발 3일만에 미군이 함정에서 좌익이라는 혐의만으로 타국민을 사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주한미대사관은 이를 공식부인했다.[24]
안기부의 내부 문건이라 알려진 이 문건은 1987년도 작성 된 문건으로 87년도 안기부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여러 대책 문건과 “상록사업”이라는 이름의 정치 공작을 시행 중이었다. 그 내용 중에는 흑색선전을 비롯한 각종 관권 선거 관련자료가 포함되어 있었다.[25] 그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당시 안기부에서 조직적으로 과거 김대중 관련 자료들을 파기, 분소했다는 정황증거가 알려져 있어 그 이후 공개된 위 문건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26] 또한 안기부가 작성한 위의 문서에는 김대중을 “광주 사태의 배후 조종자”, “북한 연방제 추종자” 등으로 묘사하고 있어 이미 검찰과 법원의 재심에 의해 밝혀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27]
당시 안기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 대해 북풍을 노리고 조작한 것이라며 신뢰성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1997년 대선당시 가장 큰 이슈였던 북풍사건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저지시키기 위해 안기부와 북한이 공조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검찰 수사에 의하여 밝혀진 바가 있다. 또한 ‘오익제 편지’ ‘김병식 편지’ ‘이대성 파일’ 등 선거 때면 언론은 김대중과 관련해 사상 의혹들을 봇물처럼 쏟아내곤 했다.[28] 그 의혹들은 거의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북풍 공작에 뒷돈을 댔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안기부 전 1차장, 대공수사실장 등 안기부 고위 간부가 줄줄이 구속됐다.[29]
또한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였으며 한국 문제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1980년대 CIA 공작원이었던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 행적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 전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어 안기부 문건의 신빙성에 의문점을 던지고 있다. [30]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시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간구한다"고 밝혔다.[77]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애도 성명을 통해 "용기있는 민주화와 인권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슬픔에 빠졌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어 오는데 목숨을 바쳤다"면서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인 희생은 고무적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무부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이언 켈리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한국 국민들과 함께 애도한다"면서 "유가족과 한국 국민에게 조의를 전한다"고 밝혔다. 켈리 대변인은 이어 "김 전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에 영감을 일으킨 지도자이자 상징이었다"면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여로 200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부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빌 클린턴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며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게 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을 닦고 국제적으로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렸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며 "햇볕정책이 한국 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영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부인 힐러리와 나는 우리의 좋은 친구였던 김 전 대통령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78]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워싱턴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대표 에드윈 퓰너는 "김대중은 진정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오늘 한국은 거인을 잃었고, 나는 절친했던 벗을 잃었다."며 애도를 표했다.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은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라며 "비단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뿐아니라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한 삶 전체가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러처드 소장은 또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보여준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역사적인 평양방문은 그가 남긴 현란한 유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전 주한 미국대사인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그의 서거 소식에 큰 슬픔을 느낀다"면서 "50여년간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 3명이 바로 김 전 대통령과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 강력한 민주주의를 가져왔고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화해를 향한 중대한 진전을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79]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는 "평생을 민주화와 한국의 발전 그리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분"이라며 "노벨 평화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삶 자체가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으며, 특히 수십년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며 투옥도 당하는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고, 영웅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매우 슬픈 일"이라고 추모했다.[80][81]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조문에서 "김 전 대통령의 1998년 런던 방문과 그다음 해 이뤄진 저의 공식 방한 당시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며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마틴 유든 주한 영국대사는 이날 이희호 여사에게도 개인적인 위로 메시지를 전달했다.[82]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며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아시아 금융위기 시에는 한국의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라고 애석해했다. 브라운 총리는 또 "김 전 대통령은 2000년도에 한반도 평화 조성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최근에도 김대중 평화센터를 통해 세계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며 "영국 정부를 대신해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말했다. 아소 총리는 이어 김 전 대통령과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합심해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포함해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며 김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했다.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은 "한일 관계를 비약적으로 진전시킨 대통령"이라고 애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고 문화교류를 진전시켰다"고 회고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애도사를 통해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일본 국민을 대표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이를 계기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일 양국의 외교관계 개선에도 큰 기여를 했다"며 거듭 애도를 표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성명을 내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하신 분"이라며 "김 전 대통령의 비보를 듣고 놀라움과 슬픔을 가눌 수 없다"고 애도했다.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은 담화를 통해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였다"면서 "서거 소식을 들으니 매우 유감이다"라고 애도했다.[83]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친강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라면서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은 조전을 보내 "김대중 선생님은 나의 오랜 벗으로 중한관계 발전을 위한 그분의 공헌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애석해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조전을 통해 애도를 표시하며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민주주의자였다"면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이어 "독일과의 오랜 인연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독일연방공화국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면서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양국관계의 심화와 교류강화를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김 전 대통령의 40년 지기인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쓰라린 아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연합뉴스에 "나의 오랜 친구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쓰라린 아픔으로 작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불굴의 용기,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한민족 전체의 평화를 위한 탁월한 기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됐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정부는 베르나르 쿠슈네르 외교부 장관 명의의 성명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쿠슈네르 장관은 성명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쳐 지칠줄 모르고 투쟁한 용기있는 정치인이었다"면서 "또한 인권과 평화를 위해서도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고 애도했다. 인권 운동가 출신의 쿠슈네르 장관은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밝혔다.[77]
199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서한으로 "저명한 정치인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어 매우 애통하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친필로 서명한 이 서한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형성, 한반도의 평화조성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평화,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랬기에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오래전부터 김 전 대통령을 알아왔고 그의 용기와 선견지명을 매우 높게 사 왔다"며 "그는 대통령 임기 말 건강에 문제를 겪으면서도 한반도를 재결합시키면서 남북문제 해결책을 계속해서 찾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은 우리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포럼 공동 업무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며 "김 전 대통령의 유족과 지인들, 모든 한국 국민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덧붙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대외 창구인 만델라 재단은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우리는 그가 인권을 위해 싸우고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기억한다"면서 "유족과 한국 국민에 위로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만델라 재단은 성명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대해 애도한다"면서 이같이 말하고, "만델라 전 대통령은 지난 2001년 3월 김 전 대통령과 만난 적이 있으며, 당시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평화공원으로 전환하자는 만델라의 아이디어에 공감을 표시했다"고 소개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5월 대선을 앞둔 김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셋째 딸 진드지 여사 부부를 보내 자신이 27년 동안 옥중에서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선물하며 승리를 기원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다. 이에 당시 김 전 대통령도 유신 체제와 망명 시절을 거치며 20년 동안 간직해온 낡은 가방을 답례품으로 전달했다.[88]
국장 기간 중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기남 조선노동당 비서를 단장으로 한 특사 조의조문단을 비롯 미국, 중국, 일본 등 11개국이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세계 언론들도 서거 및 국장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85] 이에 대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문정인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제적 비중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라며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지도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주요 대기업들은 김 전 대통령이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시스템을 도입, 기업의 체질개선 등에 큰 역할을 했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경제 단체들도 외환위기 극복에 공헌했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일제히 깊은 애도를 표했다.[78]
2009년 8월 18일,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KRB 한국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로 얼어붙은 북미관계를 풀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조선 방문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오바마 대통령에게 난항을 겪고 있는 북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조언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김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이에 따라 지난 5월 북조선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편지가 전달됐다는 것이다.[63][64] DJ 사후 이희호 여사와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에 의하면 김대중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하기 전 "미국의 (대북) 정책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김 전 대통령께서 늘 하셨던 일을 발판 삼아 했을 뿐이고,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영광이었다"며 최근 방북으로 억류됐던 여기자 2명을 데려온 것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했다. 이어 클린턴 전 대통령은 "그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나를 지원해준 친구였다"고 애도를 표하고는 "김 전 대통령을 평생의 친구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65]
2009년 8월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미국·일본의 지식인들이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를 촉구하는 3개국 지식인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평화선언을 제안한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성명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당시 북한의 로켓 발사와 유엔 제재 등 악순환이 이어지자 3국의 지식인들에게 공동선언을 제안했다. 지식인들이 호응했고 곧바로 문안 작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문안 합의를 위한 지식인들의 토론이 길어지면서 문구 수정 작업에 반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와다 교수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인 후 꾸준히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대표적인 지한파다.[6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8201758015&code=940100
2009년 11월 13일, 김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가 일본 도쿄 아사히신문사에서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시절과 대통령 재임시 인연을 맺은 일본 정계, 학계, 종교계 인사와 교포 등 20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임’이 주관했다. 한·일 양국의 정·관계, 학계, 종교계 인사 40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김 전 대통령 추모영상 상영과 추도사, 성경 낭독과 기도, 헌화 순으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일본 측에서는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과 센고쿠 요시토 행정쇄신상이 인사말을 하고,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와 이토 나리히코 주오대 교수가 추모사를 했다.[88]
2011년 미국의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김대중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평가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는 김대중을 "세계적으로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 외교 정책의 모든 측면에서 능숙했다"고 평가했다.[219]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218]
2009년 12월 19일, 뉴스위크 인터넷판이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저명인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해 전 세계 36명의 명사를 선정해 소개했다. 뉴스위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삶을 시작할 수 없다”는 미국의 성직자 헨리 반 다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 연예계, 학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저명인사 36인은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의 뇌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뉴스위크는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군부 독재에 항거하고 망명과 투옥, 납치, 암살 위협 등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야권 지도자”였다고 소개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재임시 남북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170]
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노무현은 그가 김구 선생과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92]
또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93]
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가 있다.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에이펙이나 아셈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김대중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고,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다.[94]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증진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역대 정권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권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이라는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대외 지급능력을 의미하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선전했다. 그러나 경제가 파탄 난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기조 탈피 등 미완의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권이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98~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1천400만달러로 가장 많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경상흑자에 따른 외화 유입 증가로 외환보유액도 많이 늘어났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말 204억600만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말에는 1천214억1천300만달러로 늘어나면서 5년간 1천10억700만달러 증가했다. 이로 인해 세계 4대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연평균 증가액은 202억100만달러로 노무현 정부의 281억6천200만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물가 상승률은 노태우 정부 때 7.4%로 가장 높았고 전두환 정부 6.1%, 김영삼 정부 5.0% 등이었다. 외환위기에 따른 기업 부도 등의 여파로 경제성장률과 고용률은 이전 정권들보다 크게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 증가율은 연평균 4.5%로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높았지만, 전두환 정부(8.7%), 노태우 정부(8.4%), 김영삼 정부(7.1%) 등에 비해서는 낮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성장률이 -6.9%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998년 이후 성장률은 1999년 9.5%, 2000년 8.5%, 2001년 4.0%, 2002년 7.2% 등으로 4년 평균 7.3%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로 전두환 정부의 47.2%보다 높았을 뿐 김영삼 정부(60.3%), 노무현 정부(60.0%), 노태우 정부(58.4%)보다는 부진했다. 하지만 연간 고용률 추이를 보면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56.4%까지 떨어진 후 2000년 58.5%, 2001년 59.0%, 2002년 60.0%로 매년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국제거시금융실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경제 환경에 대응해 대외적인 안정에 신경을 쓰면서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고금리 여파로 물가도 비교적 안정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개방을 확대한 여파로 경기 변동성이 커지자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서 성장 잠재력이 줄어들고 고용이 감소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적 성과를 꼽으라면 단연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했다는 점으로 평가된다.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술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8개월 만에 말끔히 갚을 수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중화학 공업과 IT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 고환율과 선진국 경기 호조라는 유리한 여건을 십분 활용한 게 IMF 조기졸업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IT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해 IMF 졸업 이후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며 "외신들이 한국을 'IMF 모범생'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서 큰 버팀목이 됐다. 한국 경제에 대한 각종 위기설이 불거질 때마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은 루머를 일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황 연구원은 "당시에 외환보유액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지난해 금융위기 때 다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최악의 국면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로 혹독한 감원과 구조조정으로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국민이 이를 감내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한 데 모을 수 있도록 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선임연구원은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하고 순식간에 1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재앙'이 덮쳤는데도 사회적인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조기에 수습한 것은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설득의 리더십' 덕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밖에 기업 재무구조, 고용 유연성, 공공부문 개혁 등 우리 경제의 구조를 개선한 점도 김 전 대통령이 거둔 큰 성과로 꼽혔다.[95]
2004년 감사원은 당시 정부가 투입한 164조원의 공적자금이 IMF경제위기 극복은 물론 경제회복과 성장에 큰 도움이 됐던 것으로 감사원 감사결과 드러나, 공적자금 투입은 적절한 정책이었던 것으로 평가했다. 감사원이 밝힌 공적자금 관리실태 감사결과에 따르면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결과 부실채권 규모는 98년 3월 112조원에서 지난해 6월엔 39조원으로 줄어들었으며, 은행 BIS비율은 같은 기간 7%에서 10.5%로 높아지는 등 금융기관이 크게 건전해졌다.[273]
아울러 98년 1월 11.7%에 달했던 은행금리는 지난해 6월 기준 6.24%로 낮아졌고, 회사채수익률도 외환위기 당시인 97년 12월 23.36%에서 지난해 6월엔 5.45%로 낮아져 금융시장이 크게 안정됐다. 또 실물경제 회복도 두드러져 설비투자증가율이 98년 마이너스 38.3%에서 2000년엔 35.3%로 높아졌고, 제조업도 같은 기간 마이너스 7.4%에서 15.9%로, GDP성장률은 마이너스 6.7%에서 9.3%로 높아졌다.
이와 관련 감사원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우리나라 국가신인도가 투자부적격에서 투자적격으로 높아지고, 외환보유액도 97년 외환위기 당시 39억 달러에서 지난해 6월엔 1천317억 달러로 늘어나게 됐다"며 "이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3년 앞당겨 2001년 8월 IMF를 조기 극복하는 동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공적자금지원을 통해 GDP 626조원, 재정수입 134조원의 증대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274]
한국금융연구원은 공적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1998년 GDP는 △12.7%, 1999년에는 △22.0%, 2000년에는 △34.9%로 계속 급락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공적자금투입의 성과는 커, 정책은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275] 이어 98년 1차 공적자금 64조 원의 투입으로, 2001년까지 금융위기에 따라 900조 원 가까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손실이 295조5천억 원에 그친 것으로 추정했다.[276]
이명박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실은 특별기고문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업적을 극찬했다.[96] 이 대통령은 이 기고문에서 지난 97년 한국이 IMF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경험담을 자세히 국제사회에 소개했다.[97] 중앙일보는 '경제고비마다 직접 뛴 DJ'제목으로 10년전 외환위기를 맞아 당선 사흘만에 데이비드 립튼 미국 재무부차관을 만나 정리해고가 포함된 IMF협약 플러스 개혁추진을 약속하는 면접 시험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낸 점이 외환위기 극복의 전기가 된 것으로 분석하였다. 또한 국민과의 대화를 마련,진솔하게 국민을 설득시켜 개혁동참과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는등 국민적 힘을 결집시키는 한편 코드 상관없이 이규성 재정 경제부 장관,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등 능력위주 경제팀을 구성하고 금융,기업,공공,노동등 4대부문 개혁을 전투처럼 밀어 붙여 취임1년 반만인 1999년 8월15일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하였다며 김대중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말 발행된 중앙 선데이에 '97년 외환위기때 이회창 도운 과거 안묻고 코드 버렸던 DJ'제목으로 된 장문의 기사를 통해 97년 외환위기 진행및 극복과정과 관련하여 김대중이 보여준 뛰어난 환란극복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98]
1997년12월 김영삼정부와 IMF의 이면계약서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47252
1997년12월3일 김영삼 정부와 한나라당이 국가부도 맞아 폭락한 주식시장을 그냥 열어준 한나라당 얼마나 불러댔으면 심지어 김대중 지지자들도 이노래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을 정도다. ◆노동시장 유연화 : 정리해고 제한 완화, 파견근로제 도입 ◆퇴출정책 : 9개 부실 종금사 정리, BIS기준에 미달하는 은행은 증자나 M&A를 통해 구조조정 이런 한심하고 멍청한 경제항복문서를 한나라당에게서 그러나 한심하고 멍청한 경제항복문서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여소야대 였던 김대중 시절 무능한 한나라당은 해당조문의
IMF 사건의 내용과 진행과정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4&dirId=409&docId=33747755
MB “한국,금융위기 극복 비결은” WSJ에 기고
또한 문화산업 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 연예인 뿐만 아니라 해외 스타들도 만나 대중문화의 발전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서태지의 음악성을 비롯해 그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며 공개석상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가수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당시 문화예산 비중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았고, 그 예산을 통해 김대중 정부 시기를 지나면서 문화산업의 각 분야는 크게 발전했다. 그리고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은 지난 10년간 한국의 문화산업이 발전하고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특히 재임 당시 일본 영화 및 음악 등 대중문화 개방을 단행해 한일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스크린쿼터를 잘 지켜내 영화인들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99]
미국의 정치학자 마이클 그린은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라 극찬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였으며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한미관계연구소장를 맡고 있는 한국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 "1980년 필자의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이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터뷰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80년대 말 CIA 전문 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기술하였다.
미국의 작가·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전화를 통해[모호한 표현] “아내 하이디와 저는 대통령께서 최근에 아프시다는 소식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쾌차하셔서 내외분과 저희 부부가 다시 만찬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수년전 대통령과 가진 첫 만남 이래 대통령님을 계속 깊이 존경해 왔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을 세계의 모범국가로 변화시키신 분이다. 무슨 일이든 저희 부부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주저 없이 불러주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MIT 언어학과 교수 노엄 촘스키는 “오래 기간 존경해왔다”며 “그는 남다른 용기를 갖고 일관되게 한 생을 산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한국과 세상 모두에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 대 명예교수는 “햇볕정책을 만들어낸 비전, 남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서구 세계와의 화해 추구 노력을 존경한다. 김전 대통령은 우리시대의 진정한 위인 가운데 한 분이다”고 강조했다.
로버트 루빈 전 미 재무장관은 “한국이 1997년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고 극찬했다. 최근 미국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타개하는데 정치 시스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의 리더십을 상기하며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면 어떻겠느냐?”는 말도 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김대중을 “위대한 비전, 위대한 상상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다이안 파인스타인 미 상원의원은 “역사 속의 인물인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비전을 가진 분을 지도자로 가진 한국민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은 “김 대통령은 비전이 있고 그것을 조직적 방법으로 추진하는 뛰어난 인물로 자신의 업적 위에 우리가 대북관계를 쌓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평가했다.
제임스 울펀슨 전 세계은행 총재는 김대중에 대해 “엄청난 탄압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뤄낸 김대통령은 만델라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민주화뿐 아니라 경제의 재구축에 성공하고 있는 김대통령은 세계를 감동시키는 지도자 입니다”라고 평가했다. 미셸 깡드시 전 IMF 총재는 고별기자 회견에서 “한국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두고 있다는 자체를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경제위기를 맞아 몇가지 고비가 있었지만 IMF와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 전반은 김대통령을 믿고 한국을 밀어준 측면이 적지 않은게 사실입니다”고 밝혔다. '레이건 신화' 주역 마이크 디버 전 대통령 특보는 “김대통령은 메이크 업이 필요 없는 논픽션 드라마의 인생을 살아왔다”며 “이름 석자만 갖고도 국제사회에 영향을줄 수 브랜드”라고 극찬했다. 미국 망명 시절에 하버드대학교에서 펴낸 《대중경제론》과 《3단계통일론》는 하버드대학 교재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리오넬 조스팽 전 프랑스 총리는 "김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라고 극찬했다. 요하네스 라우 전 독일 대통령은 "김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대북정책에 대해 “김대통령은 지금 한반도의 정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전주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김대통령의 일관된 비전과 강인한 의지는 이를 성공작으로 만들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방예산을 줄여 사회복지를 늘릴 수 있겠지요”라고 평가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대중에게 “나에게 1년이라는 시간만 더 있었다면 한반도의 명운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고 밝혔다. 한종우 시라큐스대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하셨고,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시고, 북한과의 교류를 탄탄대로에 올려놓으셨다”고 평가했다.
일본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미국 UCLA대학 교수는 "김 대통령처럼 한국 경제에 공헌한 대통령은 없기 때문에 한국민은 떠나가는 김대중씨를 마음으로부터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에서 단임 5년에 지금처럼 많은 변화를 이뤄낸 대통령은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며 "5년사이에 한국경제를 V자 회복 시킨 김 대통령은 희대의 명대통령"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어 한국과 일본 경제를 비교, “한국은 혼미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뒤로 하고 여러 분야에서 전망이 좋아졌다”면서 “장거리 트랙경기로 친다면 일본보다 2 바퀴정도 뒤쳐졌던 한국이 거의 어깨를나란히 할 정도로 다가온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살아남아 더욱 강해진 재벌의 총수들은 결코 김대중씨에게 감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100]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는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블룸버그는 "77세의 김대중씨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지도자의 업적을 이뤘다"며 극찬했다.
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김대중이다. 바이든 부통령은 햇볕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황태자는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그 자체를 살아오신 분”이라고 평가했다. 에리크 손하임 노르웨이 환경개발부 장관은 “저의 개인적 영웅이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못했던 평화에 대한 많은 일을 하셨다”고 평가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 교수도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이며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친구를 넘어 인류애를 갖춘 인격자”라고 김대중을 평하곤 했다. 노르베르트 람머트 독일 국회의장은 김대중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에서 당신만큼 영향력 있는 한국인은 없다”고 거듭 밝힌바 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국민과 유가족들이 김 전 대통령의 삶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는 용감했고 민주주의를 위해 계속 투쟁했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는 한편 햇볕정책을 통해 대북관계에 큰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에곤 바르 전 독일 경제협력부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지구 상에 마지막 남은 최악의 분단을 극복해 냉전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평화와 긴장완화,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한국인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어 “남한과 북한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는 김대통령의 끈기에 탄복했다”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의 증표라고 덧붙였다. 하르트무트 코쉭 독일 연방하원의원은 김 대통령의 개혁 성과, 남북화해를 위한 기여를 기리고자 책자를 발간하게 됐다면서 퇴임 후 적절한 시기에 독일과 유럽을 방문해 강연 등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김 대통령에 대한 평가 글을 쓴 필자들에는 요하네스 라우 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의 정치, 경제, 학계, 언론계 등의 주요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곧 퇴임해 권력을 잃게 될 한국 대통령의 생애와 철학, 정치 등에 관해 평가하는 글을 이토록 많은 유명 인사들이 원고료도 받지 않은 채 기고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독일 국방장관을 지낸 폴커 뤼헤 하원 외무위원장은 “유럽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될만한 인물은 하벨과 바웬사 정도일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들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김 대통령이 일관된 원칙을 세워놓고 꾸준히 추구해온 김 대통령의 인생에 관해 엮은 이 책을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뮌헨 대학교 정치학과의 고트프리트 카를 킨더만 교수는 “지난 2000년의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 교류 및 공동사업을 위한 희망찬 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킨더만 교수는 “최근 한국 내에서 김 대통령이 이 획기적 계기 마련을 위해 물질적 수단을 투입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나 과거 서독 정부도 동서독 관계를 완화하고 생활수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독에 물질적 지원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대중을 만나 대화를 나눴던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는 김대중에 대해 “분명한 분석, 설득력 있는 주장에 놀랐다. 많은 정치가들을 만나보았으나 이렇게 명확한 비전을 가진 분은 만나지 못했다” “완전히 설득당했다”다고 평가했다.[101][102][103][104][105]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DJ 정권은 최초의 개혁정권”이라며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소외계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했다”며 “그 전까지만 해도 복지문제는 유럽처럼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방적 개념에 머물렀다”며 “복지증진을 경제성장, 경쟁력 향상과 동시에 추구, 과거와 차별화한 정책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고인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적 반열에 선 지도자였고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성균관대 김성주 교수는 “전직 대통령을 포함,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DJ는 국가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국난 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결과 2년 만에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는 IMF 관리체제 극복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한 김대중 정부와 노사 간 화해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DJ는 국민화합을 위해 용서와 화해의 정치를 폈다.”고 평가했다.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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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에 대한 문민통제를 생각한다-'제1연평해전' 당시 사령관의 인터뷰를 읽고 http://blog.ohmynews.com/cjc4u/284312
후광 김대중 평전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category/18205
[20회] 해상방위대 부사령관으로 활동 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9045
[225회] 해상방위대 근무 입증, 병역문제 밝혀져
DJ를 보내드리기 전 벗겨드려야 할 오해 5가지
김대중 시대의 공과 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당파성을 떠나 역사의 법정 앞에서 바르고 공정하게 평가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 세력의 극단적 왜곡에 따른 잘못된 정보와 평가가 유통되는 것 같습니다.
1. “햇볕정책이 북한의 핵무기를 만들었다?” 웃기는 소리다
임동원 장관의 8월 20일자 인터뷰입니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현대가 소위 7대 경제협력을 위한 선불금으로 지급한 것이라고 다 나와 있다. 정부는 송금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이다. 정부가 세금을 쓴 일이 없다. 재판 기록과 검찰 공소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팩트는 팩트대로 얘기해야 한다.”
4. “김대중은 친북좌파다?” 이제 더 이상 색깔론은 그만
5. “수조원대 비자금이 있다 더라” 천만에
김대중의 비자금에 대한 의혹도 수차례 제기되었다.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되자 김대중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그때 그는 국민회의 총재의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기자들과 만난 "귀국 후에 밝히려 했으나 언론에 터무니없는 일이 자꾸 보도돼 어쩔 수 없었다. 또 연희동측이나 여권이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 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며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분명히 20억 원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 조건도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고 밝혔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김대중이 노태우의 돈 20억원을 받았다고 먼저 발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금액이 20억인지 200억인지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이와 관련 "김영삼 대통령 먼저 자신과 관련한 모든 정치자금 의혹을 명백히 밝혀야만 한다"며 나는 20억 원을 받았지만 김대통령은 당시 노씨는 물론 각계로부터 엄청난 돈을 지원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초점을 나에게 맞추고 김 대통령의 대선자금문제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권의 강삼재 등은 ‘20억+알파’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추가 수뢰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검찰은 '20억+알파'설도 김대중의 관련성은 부인했다.[113] 그 외에 주장된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닌것으로 확인되었다.[114]
검찰, 김대중 비자금 의혹사건 무혐의 결정[황외진] 1998년 02월 19일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1980030_6202.html
죽어서도 못 뗀 빨갱이 딱지
김 전 대통령을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그를 ‘빨갱이’ ‘지역감정의 주범’ ‘급진주의자’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몰아세우는 기득권층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195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 이상적인 정치 세계 유토피아(Utopia)를 꿈꾼 잉글랜드의 대법관이자 정치인 토머스 모어는 교회의 수장령을 거부하다 처형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자서전>에 “세례명을 주신 신부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토머스 모어만큼이나 김 전 대통령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겨울을 견디고 꽃을 피우는 인동초(忍冬草) 같았다”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였다. 특히 ‘김대중 죽이기’는 한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을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그를 ‘빨갱이’ ‘지역감정의 주범’ ‘급진주의자’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몰아세우는 세력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사회 기득권일수록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 최 아무개씨는 “김대중을 잡거나 최소한 괴롭히기만 해도 출세를 보장받았다. 제도권에 있는 사람일수록 반김대중 논리를 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다. 1970~ 1980년대 대부분을 범법자로 보내며 사형선고까지 받은 DJ를 금기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권총을 들고 김 전 대통령을 체포했고, 이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했다.
살해 위협, 감옥 그리고 망명
‘김대중 죽이기’가 본격 시작된 것은 1971년 대선에서 DJ 바람이 일면서부터다. 1971년 4월 대선은 DJ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비롯한 국가와의 싸움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선거공약을 발표하는 날마다 간첩 사건이 터졌다. 1971년 3월24일 경북에서 간첩 체포. 4월9일 거물간첩 체포. 선거 나흘 전 중앙정보부는 “김대중 후보의 남북교류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의 공약을 북한이 지지했다”라고 발표했다.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예비군 폐지는 김일성 남침 촉진을 유도하는 이적행위다”라고 말했다.
대선에서 DJ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했다. 하지만 차세대 지도자라는 DJ의 후광은 영남 패권주의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으로 근무했던 강창성 전 한나라당 의원은 “원칙대로 투·개표를 했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라고 증언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박 정권을 실제적인 위협으로 몰아넣었던 김대중은 체제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국가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1971~1987년은 DJ 인생의 암흑기였다. DJ를 제거하려는 공작이 이어졌다. 6년간 투옥됐고 10년간 55회 가택연금을 당했다. 첫 고비는 1971년 5월에 당한 교통사고였다. 전남 목포에서 총선 지원유세를 마친 DJ의 자동차는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14t 덤프트럭을 피하려다 논에 처박혔다. 이 사고로 DJ는 골반을 크게 다쳐 지팡이를 들어야 했다. 사고 트럭이 공화당 의원 소유였다는 게 밝혀졌지만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위기는 계속됐다. 1973년 8월 DJ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됐다. 요원들은 DJ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북공작선 용금호에 태워 대한해협에서 수장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DJ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서거 직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김 전 대통령이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 소설의 한 페이지에 나올 법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라고 보도했다.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건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다고 밝혔다.
납치 사건 이후 DJ는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가택연금과 징역살이를 번갈아 해야 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DJ에게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는 1980년 5월18일 DJ에게 총을 겨누었다. 군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이 DJ의 지령에서 시작됐다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DJ는 군사재판 1·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구명운동을 벌여 DJ는 목숨을 건지고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81년 1월25일 당시 ‘김대중 사건의 청산’이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사설이다. “김대중 사건은 전두환 대통령의 감형 조처로 일단 원만한 끝막음을 보게 되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 감형 조처가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통치체와 그 지도자의 폭넓은 금도와 포용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 뉘우치는 자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푸는 것이야말로 다스림 중에서도 가장 차원 높은 경지인 것이다.” 이 사설은 <조선일보 명사설집>에 실려 있다.
1985년 귀국해 민주화의 봄을 이끌었지만 DJ는 군사정권과 패권 세력이 쳐놓은 덫과 평생을 싸워야 했다. 그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은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DJ는 자신의 책 <평화로 가는 길>에서 “박정희씨가 유신을 원치 않으면 통일을 원치 않는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했다”라고 썼다. DJ가 독재에 항거하거나 통일을 외치면 공산주의자가 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언론은 사상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색깔론을 덧칠하기에 바빴다. 대선 직전인 1997년 12월11일 중국 베이징에서 재미동포 윤홍준씨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정일이 보낸 선거자금이 김대중 후보에게 전달됐다”라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며, 김일성의 육성 녹음이 비밀 보고서에 담겨 있다는 내용의 김대중 X파일도 이어 나왔다. 여기에 ‘오익제 편지’ ‘김병식 편지’ ‘이대성 파일’…. 선거 때면 언론은 DJ와 관련해 사상 의혹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그 의혹들은 거의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후신)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북풍 공작에 뒷돈을 댔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안기부 전 1차장, 대공수사실장 등 안기부 고위 간부가 줄줄이 구속됐다.
DJ에 대한 색깔론은 그 뿌리가 깊고 넓다. DJ는 측근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즐겨 사용하던 ‘동지’ ‘대중’ ‘민중’이라는 단어조차 북한을 추종하는 증거가 됐다. 그가 주장한 공화국연방제는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과 비슷하며, DJ가 세운 아태재단은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매도당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나중에 그런 용어를 그대로 쓸 줄 귀신이 아닌들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용어만 가지고 용공이라고 뒤집어씌운 것은 정말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1996년 12월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윈(WIN)>은 ‘5공 신군부의 김대중 죽이기 언론공작 전모’를 보도했다. 1980년 7월20일 배포된 이 홍보 문건은 DJ를 ‘북괴와 통하는 공산주의자이며 폭력주의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김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못한 16년 동안 군인과 대한민국의 공무원을 총동원해서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교육했다. 중학교 미술교사인 집사람도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교육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1949년 남로당에 가입하고 반란을 꾸민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익 행위에 대한 비판은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과 대비된다.
DJ라면 무조건 색안경
빨갱이라는 굴레만큼이나 DJ를 괴롭힌 것은 지역감정의 골을 깊게 팠다는 비난이다. 1990년 11월 국회 대표연설에서 DJ는 “박정희씨의 최대의 죄악, 영원히 역사에 용서받지 못할 죄악,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죄악은 이 지방색의 조성이다”라고 말했다. DJ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측이 만들어낸 지역감정에 발목 잡혀 대권을 놓쳤다. DJ는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호남의 확고한 지지에 힘입어 다시 일어섰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보수 언론은 3김이 지역을 볼모로 토호정치를 한다는 비판에만 천착한다.
1987년 대선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자 비난의 화살은 DJ에게 쏟아졌다. DJ가 YS를 지지했다면 지역감정 구도를 넘어섰을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에 두고 있다. 비단 수구 기득권만의 비난이 아니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신의 책 <97년 대선 게임의 법칙>에서 “‘전라도 혐오증’ 또는 패권적·반사적 ‘지역주의’는 ‘반김대중 정서’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라고 적었다. DJ는 “당시 여론은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나에게만 돌렸다”라고 괴로워했다.
호남의 정서는 지역적 패권적 지역주의가 아니라 저항에 가까웠다. 특정 지역에서 20년 넘게 한 사람에게 90% 넘는 몰표를 던졌다는 것은 지역정치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한화갑 전 대표는 “표가 적은 지역은 지역주의를 조장해서 대결하면 무조건 불리하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DJ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가”라고 말했다.
DJ에 대한 가장 흔한 비방 중 하나는 대통령병 환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자리를 지키기 위해 18년간 독재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12년간 독재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 이러한 비난은 없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DJ를 반대만을 일삼는 과격한 사람으로 묘사한 측면도 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영국의 BBC 방송은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수십년 동안 한국에서 위험한 급진주의자로 통했다”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1991년 6월23일 ‘김대중 총재의 거취’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의 정치는 반대와 공격, 타협과 술수로 대변된다. 그는 반대와 강성을 선명의 지름길로 삼아왔다”라고 적었다. 조선일보가 독재세력과 군사정권이 과격하다고 지적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독재세력과 군사정권에 항거한 것을 두고 반대와 강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거 직전까지 김 전 대통령이 부르짖은 것은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였다. 이를 가로막는다며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한동안 거두었던 DJ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김대중씨’라고 호칭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을 지지하는 모임인 ‘전사모’는 “김대중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자살을 하라”는 성명을 냈다.
DJ 죽이기에 나선 것은 역시 보수 언론이었다. 지난 7월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김 전 대통령의 비판이 “노정치인으로서는 타락한 모습이었고,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금도를 넘어선 일탈이었다”라고 썼다. 김 고문은 DJ에 대한 인신공격도 빼놓지 않았다. “DJ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때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추종자들을 용도가 폐기되면 가차 없이 버렸다.”
동아일보는 “민중을 선동하는 것은 민주화 역사를 역류하는 죄짓기임을 DJ는 깨달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사경을 헤매는 김 전 대통령에게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남긴 국가적 갈등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중앙일보 문창극 대기자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비판이 비자금 문제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문 대기자가 근거로 삼은 <월간조선> 기사는 법원과 검찰에서 근거 없다고 결론이 난 내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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