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73편 1-3, 16-26절
설교제목 : 주님과 함께라면
품격이 필요한 시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추분의 시간을 지나니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임을 실감케 합니다. 맑고 높은 하늘과 달리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일들로 근심하곤 합니다. 최근 스토킹 문제가 사회 이슈로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스토킹은 끌리는 외부 대상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토킹하는 이들은 이런 집착, 일방적 애착이 거절당하면, 잔인한 야수로 돌변합니다. 스토킹하는 자는 내면의 야수, 광적인 충동의 먹잇감이 되어 그 대상을 향하여 잔인한 폭행을 저지릅니다. 몇 십년 전만 해도 인간이 최소한 품고 살아야 하는 인격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뿌리 없는 의식으로 전통과 금기, 종교성을 상실하여 인간에 대한 최소한 예의조차도 상실하게 하는 무의식의 범람을 경험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려깊게 자신을 관조하고, 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잃고 즉흥적이고, 쾌락적인 소비를 최고로 삼고 매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이웃은 경쟁의 대상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보니 한낱 이용하는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니 삶은 저급해지고, 조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해외에 나간 한 나라의 지도자가 함께 배석해 있는 이들이 있음에도 비속어(욕설?)와 막말을 하는 것은 기본적인 품격의 문제입니다. 습관처럼 비속어를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본적 소양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국 페르조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 인간의 정신적 상태와 태도가 중요함을 일러줍니다. 연금술사들이 그들의 작업에서 고귀한 돌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중시했던 것은 실험자의 심적-정신적 상태의 입장을 강조하였습니다.
“내가 너의 영을 신으로 위해 정화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너의 심장에 있는 모든 부패와 타락을 모조리 청소하지 않는 한, 너는 이 학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떠오르는 새벽빛>에 따르면, 연금술의 지혜의 보고는 열네 가지 주요 덕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건강, 겸손, 거룩함, 순결, 힘, 승리, 믿음, 희망, 사랑, 친절, 인내, 올바른 절도, 영적인 입장, 또는 통찰, 그리고 순종이다.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 융기본저작집 6권, p69]
오늘 우리 모두가 이웃과 자연에 대한 존중함을 지닌 기본적 품격을 함양하고 그 기본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의에 빠져
오늘 시편 73편은 5권의 전체 시편에서 3권의 시작입니다. 표제는 아삽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거만하고, 악인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흔들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1-3).
시인은 부조리한 세상을 목격합니다. 악한 자들, 이기적이고 거만한 자들이 성공하고, 부를 축적하고, 잘되는 것을 보면서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13)” 자문하며, 실망하고 실의에 빠진 것입니다. 매사에 더 많이 누리려는 욕망을 애써 다독이며 살아온 선한 삶에 대해 회의가 들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악착같이 챙기며 살아야지,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아!”라고 비아냥댑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심지어 악한 자들이 죽을 때조차도 고통도 없고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나니, 이렇게 정직하고 정결하게 사는 게 맞는지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런 회의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 나의 인생에 대한 확신을 잃고 비틀거리고 넘어지려 합니다. 우리도 얼마나 이럴 때가 있죠! 그런데 시인은 확신을 잃고, 멀리하는 그 이유를 알아차립니다. 자신이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 속에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심리적 부분을 고려해야 합니다.
왜 거만한 자를 시샘한 것일까요? 왜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하는 것일까요? 시샘, 곧 질투는 거만하고 오만한 자의 심리적 내용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시샘은 무의식적 투사를 통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만한 자, 자기 멋대로 살고 있는 자는 무의식 속에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자기 맘대로 이기적으로 갑의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며 보란 듯이 성공적으로 사는 자를 보면 그들에 대한 시샘으로 마음이 요동하고 흔들리게 됩니다. 줄타기 잘하고, 아부 잘하고, 비상하고 약삭빠른 머리로 좋은 목회지를 찾아가는 동료, 후배들을 보면 어지러울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삶의 방식으로 살면서도 평안함과 형통함을 누리는 있는 자들을 보면 부러움이 일어납니다. 그 부러움은 바로 내 안에 그 악한 자가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무의식적 현상입니다. 악한 삶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너무나 행복하게 사는 악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바로 내가 억제하며 살지 못한 그림자의 측면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질투하고, 부러워할 때 외부 대상이 내 안에 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로 인하여 괴로워할 때 나를 더욱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의를 넘어
시인은 이런 내 안에 얽혀 있는 문제를 풀어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너무나 어려워 문제였기에 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답답함과 얽힘이 갑작스럽게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7).
답답하고 얽힌 마음으로 괴로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장 내밀한 마음의 중심으로 진입하여 주님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진면모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나 또한 그런 악한 자들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22절에 노래합니다.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나의 무지를 깨닫고, 내가 짐승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내가 권력을 탐하고, 사기적인 정신과 쾌락에 빠지는 본능적 충동을 지닌 짐승과도 같은 자임을 아는 자는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탐색으로 흔들려도 다시 자신의 지향을 잃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악한 자들의 종말을 깨닫습니다. 악한 삶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끝이 오고야 맙니다. 악인들이 가진 부와 평안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법니다. 그들이 행복해 보이지만, 일장춘몽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짐을 자각한 것입니다. 인생은 공평합니다. 종말의 시간 앞에 우리 모두는 공정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주를 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야 할 나만의 레이스를 펼쳐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시샘하고 부러워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가다가 뒤돌아 가서는 안 됩니다.
가끔씩 젊은이들의 그림검사를 할 때 특이하게 태양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림에 따라 모두 다르게 해석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태양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해주곤 합니다. 태양은 자신의 궤도에 올라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젊은이에게 태양은 자신의 궤도 올라 삶의 조명하고 펼쳐야 할 필요성을 부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의 부와 성공, 권력에 부러워하기보다 자신의 궤도로 올라가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라면
시인은 인생에 있어서 필수충분조건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오,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25-26).
이 고백은 한편으로 가슴이 벅찬 노래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아쉬운 여운을 남깁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언제든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 되신다는 것은 가장 큰 힘과 위로를 줍니다. 내 인생을 든든하게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용기와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함께라면, 더 바랄 것이 없고, 주님이 내가 받을 몫의 전부라는 것에선 현실적으로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주님이 내가 받을 몫, 인생의 결실의 전부입니다. 주님이 함께라면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전히 아쉬운 것, 빠진 듯 한 결핍을 우리는 몸소 경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시인의 당당한 고백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주님과 함께함은 그분과 동거동락,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생과 내생의 지향점이자 최종 목적입니다. 인생에 아쉬운 것 있고, 결핍이 있고, 세상이 보기에 우러러 볼만한 것이 없다할지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충분해질 수 있습니다. 만족스럽고 여전히 삶은 희망찰 수 있습니다. 저는 분석을 하면서 가끔 이런 얘기를 던집니다. 내 인생에 꿈을 꾸고, 꿈을 분석한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큰 힘과 위로, 충분하다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개인적으로 경청하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고, 여전히 나의 인생을 지탱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무의식과 함께라면, 꿈과 함께라면 충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함께라면 나와 주님 사이에 조율이 일어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충분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입니다(28)”라는 시인의 고백처럼 주님과 함께, 가까이 하는 우리의 여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