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끝자락이다. 작렬하던 한 여름의 태양을 온몸으로 받다 못해 바삭하게 말라버린 나뭇잎들이 바람에 뒹군다. 낙엽 쌓인 길은 사색에 깊이 빠지게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을 혼자 걷는다. 그 길은 가을의 처연한 아름다움과 함께 장엄미를 느끼게 하며 발밑에 밟히는 낙엽들은 지난날을 반추하고 숙연해지게 만든다.
유년의 따스한 봄을 지나 치열한 젊음의 열기가 가득했던 여름, 이젠 중년의 모습으로 조락을 두려워 하는 나이가 돼버린 지금까지 부질없는 생각과 일에 매달려 귀중한 삶을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낙엽은 내게 삶의 의미를 물으며 외로움에 아파하는 이는 없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한다.
지난해 시월의 마지막 날 소년원엘 갔었다. 햇볕은 따스했지만 교정 뒷산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한바탕 불꽃잔치를 끝낸 듯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던 스산한 날이었다. 원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개최하고 기숙사와 교실을 둘러봤다.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시설도 깨끗하고 분위기도 차분해 보였으나 정작 애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약하고 어린나무들이 충분한 햇살과 양분을 받지 못하면 잎이 말라버리듯,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던 그 아이들은 푸르게 싱그럽지 못하고 마른 잎으로 서걱거리고 있었다.
누구든 언젠가는 홀로 뿌리내리고 성장해야 하는 시절이 있다. 그 과정은 힘겨운 만큼 값지고 아름답다. 그러나 하늘과 바람과 물이 나무를 지켜주고 성장시키듯이 홀로 가는 애들에게 눈길을 주고 작은 도움이라도 줬더라면 그들의 인생행로에서 비행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한 시절이 정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꿈을 잠재운 아이들의 외롭고 서러운 눈빛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찬바람보다 내 마음을 더욱 시리게 했던 그 날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낙엽 때문일까. 쌓여가는 낙엽 위로 그들의 사연도 쌓이고 있다. 사람이 늙어 죽는 것처럼 어떤 잎은 늙어 떨어졌을 것이고 환경의 갑작스런 변화와 영양상태, 또는 병 때문에 단풍들지 못하고 말라 떨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마른 잎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 모두 다르듯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도 다르다. 나는 스산한 가을과 추운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날이 오면 소년원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다시 새잎으로 돋아나 밝은 삶 속에 마음껏 꿈을 펼치다 오색단풍으로 곱게 물들 수 있는 아름다운 인생여정을 걸어갔으면 싶다. 산다는 것은 그때 단 한번뿐인 늘 새로운 날이기에, 새잎이 낙엽 되어 소멸되면 그 뿐, 삶에 있어서 반복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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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고 또 만나고 』
정 명 숙 수필가
여름이 잔재만 남기고 떠나는 자리에 초가을 잎새가 한 줄기 습기 없는 바람에 흔들린다. 투명한 바람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세상과 마주 서게 한다. 하늘이 파랗다. 자연의 법칙을 근간으로 하는 시간의 흐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고간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의 섭리에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또한 이 우주상에서는 한없이 작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관조나 명상이 아닌 체험과 절규로 절실히 깨닫는다.
지난여름의 긴 장마는 오만한 인간에게 진실 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무더위는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극도의 인내를 요구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이 흘러간 뒤에야 진실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진실이 진실로 드러나기 위해 온갖 험난한 구비를 돌아야 하는 상황, 그 시간의 나이테에는 겸손하고 끈질긴 인내 속에 피와 땀의 숨결이 깃들어야 하지만, 쏟아지는 빗줄기를 원망했었고 견디기 힘들었던 무더위를 탓했다. 그러나 여름은 고난의 시간을 지나온 이들에게 가을의 풍요로움과 더 성숙해지는 삶을 남겨주고 계절의 순환에 순응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치열했던 날들을 뒤로한 채 꼬리를 감추고 있다. 우리의 인생여정도 마찬가지이다. 상대의 행동에 마음상해하고 불면의 밤을 견디다 괴로워하며 끝내 항의하고 다툰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오해를 만들고 마음속엔 원망으로 가득 차 모두를 내 몰아 버린다. 세월이 흘러 그것이 자신에 대한 배려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는 이미 그가 떠난 후일 것이다. 여름이 많은 것을 주고 떠난 것을 가을이 돼서야 아는 것처럼.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고 만나도 떠나가는 인연, 떠났지만 결국은 마주치고, 밉다 해도 한 바람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피 할 수 없는 인생의 한 과정임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사람과의 만남이 그러하고 자연과 사람의 만남이 그러하다. 이 절대적 진리가 상실감, 혹은 스산함의 느낌으로 다가옴은 모든 대상이 내 스승임을 알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영혼이 어두워졌기에, 가을은 더욱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다. 개화와 낙화, 그리고 결실을 수 없이 겪어도 지금의 내가 지난해의 내가 아니듯 다시 만난 가을도 지난해의 가을은 아니다.
새로운 가을에는 맑은 영혼으로 들녘의 곡식과 열매들이 바람과 햇살 먹는 소리에 귀기우리며, 앞 만보고 달리지 말고 옆에 있는 이웃도 돌아보고 친구도 보살피며 함께 가는 진실 된 삶을 살자. 때가 되어 가을이 겨울을 향해 차가운 눈빛으로, 냉담한 무언(無言)으로 이별을 고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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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에 홀로 걷기 』
정 명 숙 수필가
떠나기 싫은 여름은 무더위로 앙탈을 부리는데 이른 새벽 단 잠을 깨우는 소슬바람에는 한기가 담겨 있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 문턱에 이르렀나 보다. 주빛 쑥부쟁이 무리가 앞 다퉈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늦여름과 초가을, 산과 들녘을 함초롬이 수놓는 들꽃, 산들바람에 하늘거리는 자태는 그리움 가득 안은 여인네 춤사위마냥 곱고 애절하다.
가을의 생각 속에는 언제나 모든 것에 가을이 들어있듯이 누구나 가슴속에 비밀스런 길을 하나쯤 담아두고 있다. 내게도 다른 사람과 향유하고 싶지 않은 숲으로 향한 비밀스런 오솔길이 있다. 부모산 정상을 향하는 여러 산길 중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한결같은 행보에만 얽매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할 때 내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사색에 빠지게 하며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추게 하고 발을 옮기지 않으면 내 위치는 한 치도 변하지 않는다며 묵언의 교훈을 주기도 한다. 해질 무렵 가을바람을 느끼며 숲속의 한적한 오솔길을 홀로 걷노라면 때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온 전신에 스며들기도 한다. 지난 과거의 회상, 불투명한 미래, 자신의 인생을 음미하다 보면 세상의 복잡한 인연들 속에서도 결코 혼자인 것을 깨닫는다.
그 순간 밀려오는 고독감은 무어라 형용할 수 조차 없다. 허둥지둥 지나온 인생의 길목에서 놓쳐버린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랑, 미처 가꾸지 못하고 놓쳐버린 인연들이 추억속의 그리움으로 가슴을 시리게도 하며 허무에 빠지기도 한다. 오랜 세월 길은 삶의 은유였다. 길은 삶의 시작과 끝이기도 하며 걷는다는 것은 마음을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수행이다.
좌절의 순간에도 희망을 만나고 분노의 한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화를 만난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산마루에 몸을 누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어느새 내안의 문제들이 별게 아닌 문제가 되고 나는 노을에 물드는 한 그루의 나무와 들풀이 된다.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가을은 찐득한 땀 속에서도 일종의 비애를 느끼게도 하지만 말없이 서 있는 나무들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머지않아 전체를 가리던 무성한 잎을 떨구고 고스란히 가지를 드러내 진정한 자신을 내어 보이며 존재하는 동안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다른 누군가에게 나눠주며 마무리 한다. 그들은 저렇듯 무심하게 ‘살아간다는 것’의 참 의미를 실천하고 있는데 어느 덧 인생의 가을 문턱을 들어서는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얼 하는걸까.
시간이 흐르고 때가 돼 나뭇가지처럼 모두 드러냈을 때, 그때가 돼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숲으로 난 오솔길을 걸을 수 있을까. 가을은 한번쯤 더 생각하고 뒤 돌아 보게 하며 마음을 깊고 고요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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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2007년제144호)에 실린 정명숙 선생님의 대담 내용을 읽어 보면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실여 봅니다.
늦가을이 겨울로 접어드는 날, 서울 방배동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실에서 수필가 [정명숙] 교수님을 만나 한국수필의 진로에 대한 이모저모를 들어 보았다. 칠순 후반기에 들어섰지만 꼿꼿한 자세에 젊었을 때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따뜻하고 중후한 모습은 사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이철호].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여전히 건강하시고 밝은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저희도 마음이 밝아집니다. 건강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정명숙] . 소식을 합니다. 음료수는 탄산음료는 절대로 안 먹고 주로 음료를 만들어서 먹고 녹차를 많이 마십니다. 영감이 있을 때는 고기를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채소와 생선을 많이 먹습니다. 그리고 생활 주변에 관심을 갖고 시간이 나면 혼자서 영화도 보고 서점에도 가고 책을 많이 읽습니다.
[이철호]. 정명숙 교수님을 보면 부군 조흔파 선생님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 문단에는 부부 문학인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김동리, 손소희 소설가도 후배문인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조흔파 선생님과의 관계도 부부로서만이 아니라 부부 문학인으로서는 어땠습니까.
[정명숙] . 그분은 내가 방송이나 문예지에 글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내가 글을 쓸 때에는 많은 면박을 받았습니다. 문법이 틀렸고 글 쓰는 게 그리 쉬운 줄 아느냐고 하면서 써 놓은 글을 붉은 줄을 치면서 다시 써라 면서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시인이 되려는 문학소녀였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육필 노트를 갖고 있지만 처음에 알리지 않고 여성동아에 이야기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는 새빨갛게 밑줄을 그으면서 이따위로 쓰느냐고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먼저 세상을 뜰 것을 알고 나를 야단치면서 단련시켰나 생각을 합니다.
[이철호]. 감회가 새롭습니다. 선생님과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와 인연을 맺은 동기라던가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 말씀 해 주세요.
[정명숙] . 제가 1967년에 여성 제1호 장관을 했든 임영신이 사장으로 있는 여성계 잡지에 주간으로 일 하시는 조경희 여사님께 남편의 원고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는 월간지 꾸리기가 힘들 때라 원고료를 잘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원고료 받기가 어려웠을 때였지만, 남편은 원고료를 주지 않으면 글을 주지 않고 선불로 받을 때였습니다. 어떤 땐 원고료는 주지 않고 젊은 여기자들에게 ‘애들아 조선생 껴안아 주라.“ 하면서 농담으로 넘겨 버리자 조흔파 선생은 생각 끝에 나를 보냈습니다. 조경희 전 이사장은 조흔파 선생과 동갑이고 또 같은 한양 조씨라서 친하게 지냈습니다. 조흔파 선생은 생일이 정월입니다. 본래 정월생은 기가 쌥니다.
[이철호]. 맞습니다. 저도 정월생입니다. 정월생은 드셉니다.
[정명숙] . 저는 정월 초닷새입니다.
[윤원행]. 저의 생일도 정월 대보름입니다.
........모두 하하하 웃음...
[윤원행]. 정명숙 교수님은 조경희 전 이사장님을 ‘왕고모’라고 불렀다는데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습니까.
[정명숙] . 70년대에 조서방이 자주 속을 섞였습니다. 한번은 우리 영감이 가출도 한 적이 있을 때 조경희 선생이 집안일에 깊이 개입하는 그런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조서방이 애를 먹일 때마다 나는 화가 나서 막말을 하고 욕을 했습니다. 그때 조경희 선생님이 나를 나무라기도 했지만 내 편을 들어 주면서 훈수를 하고 조서방을 야단쳤습니다. 그런 일로 해서 왕고모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웃음) 그리고 여성동아에 주부라는 이름으로 ‘오는 정, 가는 정‘으로 글을 실었는데 어느 날 조경희 선생님이 ”야, 남편 이야기를 그렇게 발가벗겨도 돼냐?“ 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최일남 소설가가 주간으로 있을 때였어요. 그 당시 주부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펜레터를 받기도 했는데 글을 잘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윤원행]. 조흔파 선생님은 육이오 전쟁이 끝난 직후 그 당시 중고등 학생들에게 ‘알개전’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1954년쯤에 학생잡지 학원에 연재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중학생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얄개전을 읽으려고 월간지 학원이 나오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얄개전의 제목은 정교수님이 지으셨다 던데 사실입니까.
[정명숙] . 예 사실입니다.
처음엔 ‘도련님’이라고 지었는데 저는 함경도 출신입니다. 함경도에는 야사리꾼이라고 사고는 치지만 밉지 않은 말썽꾸러기를 얄개라고 합니다. 이분이 제목을 짓지 못해 화장실에 들어가서 끙끙 거리고 있을 때 그 생각이 떠올라서 내가 “여보여보 얄개전이라고 하면 어때요.” 라고 했더니 조선생이 손뼉을 치면서 바로 그거다 했습니다. 얄개는 함흥 사투리인데 그 후에 얄개라는 말이 국어사전에 올랐습니다.
[이철호]. 수필작가도 나름대로 혼란기를 겪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초기장르의 혼란기를 지나 성숙기와 절정기. 완숙기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정명숙] . 저는 일본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일본에서도 처음엔 작가의 사생활이나 에피소드를 수필이라고 주로 썼습니다. 배우, 의사, 화가, 음악가, 기자...별별 사람이 수필을 썼습니다. 1980년대가 수필의 전성기였습니다. 수필이 대접을 받기 시작한 때가 그때부터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때부터 수필이 본격문학으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철호]. 세계를 많이 다니면서 다른 나라 작가들과 교류도 하셨을 줄로 압니다. 앞으로 한국 수필가협회가 한국수필의 세계화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정명숙] . 좋은 번역이 우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번역자가 드뭅니다.
그래서 아직도 문학 노벨상이 요원합니다. 일본 문학가들은 가끔 나에게 말을 합니다. 당신네 나라의 문학작품은 왜 일본에서 보기가 힘드냐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번역가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서 좋은 번역자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철호]. 요즘 한국 문단의 일각에서 벌어지는 위계질서의 파행적 행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명숙] . 일본 문단도 시끄러운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본 문학사를 가르치면서 문단 이면사를 알게 됩니다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닙니다. 문단이라는 게 다 그런데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가 심합니다. 앞으로는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철호]. 끝으로 한국수필의 미래를 위해 후배 수필가들에게 남기실 말씀이 있다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정명숙] . 지금 여성들은 옛날과 달리 대단히 활발해 졌습니다. 활발한 기운으로 글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남의 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독서는 글쓰기의 기본입니다. 좋은 글을 만나면 칭찬을 하면 좋겠습니다. 칭찬은 엔돌핀입니다. 저는 60년대 70년대에 글을 왕성하게 쓸 수 있었든 에너지는 독자들의 칭찬 때문이었습니다. 칭찬은 좋은 글을 쓰는 힘이 됩니다. 문학인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글만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남의 글에도 칭찬을 많이 하면 좋겠어요. 좋은 글을 읽으면 반드시 칭찬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철호]. 독서 없이는 문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저는 선생님이야말로 독서가 일상이구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첫댓글 춘주문학회 별하나님! 좋은 읽을거리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자료에 훔뻑 빠졌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