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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 스님은 … 1976년 인천 부용암에서 육년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79년 통도사에서 비구니계를 받았다. 동국대 철학과와 봉녕사 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일본 릿쇼(立正)대학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고마자와(駒澤)대학에서 화엄학을 공부해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승가대 불교학과와 봉녕사 승가대학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비구니연구소 소장, 화엄장학회장, 샤카디타 코리아 상임공동대표, 조계종 교육원 고시위원, 포교원 포교위원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화엄관법과 기초적 연구〉 〈화엄경십지품개설〉 〈진리의 숲 법구경 이야기〉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공저)〉 등 다수가 있다. 또한 현대불교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8년에는 제6회 대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교육은 백년지대계다 20년간 장학회… 482명 이수 총 3억여원 1년에 두번씩, 40회 자비교육 나눔
젊은이들 위한 교육의 장 펼쳐 금장사서 2006년부터 6년간 방과후 교실 2010년 금륜사 이전… 군 장병 대상 강연
비구니사 정리에 큰 원 세우다 2000년 ‘한국비구니연구소’를 개소 〈근현대 비구니…〉〈비구니와 여성불교〉 출간
청빈낙도의 삶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에게도 몇 가지 애환거리가 있다. 바로 본인의 몸이 아파 치료비가 필요할 때와 학업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때다. 사찰 소임을 맡지 않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스님들일 수록 뒷바라지하는 불자들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특히 주로 불교를 접한 학인 스님들에게 이러한 고민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최근에는 종단차원에서 종립대학에 진학한 사미·사미니 스님에게 지원을 하고 있지만 ‘스님이 무슨 공부냐’며 야단만 맞던 시절에는 수많은 학인 스님들이 이런 남모를 고민을 안고 살았다.
이런 학인 스님들에게 지원을 꾸준히 아끼지 않은 한 스님이 있다. 바로 중앙승가대 교수 본각 스님이다. 3월 24일 김포에 위치한 중앙승가대에 가는 길은 마음을 저절로 차분하게 했다. 안암동 개운사 시절을 거쳐 김포 풍무동으로 옮긴지 15년, 산 속에 자리한 대학은 고요하기만 했다. 간간히 들리는 스님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뒤로 산세를 따라 세워진 수행관 앞에는 인자한 미소를 띤 본각 스님이 기자를 맞았다. 스님은 1995년부터 20년 넘게 학인 스님들을 돕는 화엄장학회를 운영해오고 있다.
20년간 학인 스님들 위한 장학회 운영
본각 스님이 화엄장학회를 운영한 것은 1995년 3월 중앙승가대학의 안암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대학의 요청으로 대학 기숙사 보타사를 맡으면서 부터였다.
“비구니 학인 스님이 거주한 보타사도 엄연한 사찰이기에 많은 절 살림이 있습니다. 법당 부전을 비롯해 절에 불을 때는 화전, 청소 등 모두 학인 스님들이 담당하는데 학내와 달리 이런 소임에는 장학금이 나오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묵묵히 할 일을 하는 학인 스님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장학회를 만들게 됐어요.”
스님은 보타사 신도들과 인연이 있는 불자들을 한데 묶어 장학회를 결성했다. 학인 스님들을 돕는다는 말에 선뜻 동참자들이 늘었다.
본각 스님은 “첫 장학금 수여식 날, 십시일반 힘이 만들어낸 벅찬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20년 동안 화엄장학회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이수한 이들은 482명, 금액은 2억 9400만원에 달한다. 2000년부터는 환경이 불우한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까지 장학 혜택을 받았다.
“십시일반으로 출발했지만 신기하게도 ‘곳간’이 비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6개월간 모아주신 장학금을 3월 봄 장학금 수여식 때 전부 드리고 나면, 다시 차곡차곡 채워졌어요. 모두 불자님들 덕분입니다. 1년에 두 번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마흔 번의 자비공덕을 함께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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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 스님(왼쪽 세번째)이 비구니연구소 회원 스님들과 출간을 준비 중인 비구니사 자료집을 정리하고 있다. 스님은 화엄장학회를 통해 1999년부터 줄곧 연구소 연구지원비를 후원하고 있다. |
아버지 49재 인연이 6남매 출가의 복으로
본각 스님이 학인 스님들을 돕게 된 것은 발심한 후배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불법에 매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스님은 형제자매가 함께 동진출가한 후 청소년기 환속 후 발심, 다시 재출가하기 까지 많은 일을 겪으며 이러한 발심을 키웠다.
1952년 스님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친이 급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큰 오빠인 천제 스님이 먼저 출가를 하며, 스님의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천제 스님이 출가하자 1년 뒤 큰언니 혜근 스님도 출가의 뜻을 비쳤고 이에 본각 스님의 어머니는 가족 모두의 출가를 결심하고 태백산 홍재사로 입산했다.
성철 스님의 맏제자가 된 천제 스님을 비롯해 ‘성종’이란 법명을 받고 입적한 모친과, 큰 언니 혜근 스님, 둘째 언니 적조 스님, 셋째 언니 보명 스님, 둘째 오빠 삼소 스님까지 온 가족이 출가의 복을 지었다. 모친의 입적 이후 세 살의 나이에 스님은 인천 부용암에서 육년(六年) 스님을 은사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성철, 일타(지족암), 법명을 지어 준 전강, 혜암(수덕사), 춘성, 석남사 인홍, 봉녕사 묘엄 스님 등에게서 배움의 길을 닦았다.
“은사 스님은 저에게 어머니 이상인 분이셨어요. 은사 스님은 저를 묵묵히 지켜봐주셨지요. 청소년기에 세상을 경험하겠다고 나설 때도 나무라기는커녕 도와주셨어요. 이런 은사 스님의 따뜻한 가르침에 불교의 참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스님은 동국대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뒤 다시 출가했다. 운문사 강원에서 내전, 치문, 대교, 사집 등을 공부하면서 환희심을 느꼈고, 평생을 공부에 매진해야겠다고 발심했다. 봉녕사에서 3년간 중강 소임을 맡다 1982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가 〈화엄경〉에 등장하는 많은 보살들의 활동상에 이끌려 화엄학을 전공했다. 도쿄 릿쇼(立正)대 석사, 도쿄 고마자와(駒澤) 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스님은 1991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로 강의를 시작해 현재에 이르렀다.
“은사 스님에게 약속했습니다. 유학을 갈 때 돌아와 꼭 강단에 설 테니 그때까지 살아계셔 달라고요. 다행히 제가 돌아와 강단에 서는걸 보셔서 마음의 짐은 덜었지요. 학인 스님들을 돕게 된 것도 은사 스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장학으로 인연을 맺은 대학생들도 사회에서 자리 잡은 뒤 재능기부로 회향을 하고 있습니다. 씨는 뿌리면 열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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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 스님(오른쪽)이 3월 8일 고양 금륜사에서 열린 화엄장학회 20주년 기념법회에서 학인 스님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
인재양성에 우리사회 미래 있어
스님은 불교가 청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소년기 환속기간 동안 외부에서 스님과 불교를 어떻게 바라보는 지를 느낀 것이 소중한 경험이라고 스님은 평소 지론을 밝혔다.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들은 불교에 대해 고리타분하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본격적으로 불교를 접한 학생들은 불교가 논리적이면서도 종교를 넘어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밖에서 오히려 불교의 소중함을 더욱 더 느끼게 됐고 서양철학을 공부하며 불교의 수승함을 알게 됐습니다. 경쟁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가 현재 잃어버리고 있는 공동체로서의 삶, 그리고 생명의 존귀함 등 불교 속에는 삶의 진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를 젊은이들에게 알려야 해요. 특히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보살의 삶을 전파하고 어떻게 하면 불교적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전해야 하겠지요.”
이런 원력 하에 스님은 승가대에서 화엄학을 가르치는 한편 주석하는 곳 마다 젊은 사람들을 위한 교육의 장도 함께 열고 있다. 홍은동 금장사에서는 2006년부터 6년간 방과 후 교실을 열어 초등학생을 지도하기도 했으며, 2010년 고양 금륜사로 사찰을 이전 한 뒤부터는 어린이 청소년 법회와 함께 60사단 권율부대서 매주 장병들을 대상으로 법회와 강연에 나서고 있다.
“문제가 있는 이도 한 마음만 돌이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인성교육을 비롯해 어려서부터 공동체정신 등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스님들은 교육자로서도 사회적인 몫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내 삶 속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구현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많이 듣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여기에는 가르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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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불교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불교진흥원이 수여하는 제8회 대원상 승가부문 대상을 수항한 본각 스님(왼쪽 세번째) |
회향 속에 피어나는 화엄의 꽃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은 한 사람이 아니라 쉰세 명의 보살들이었다. 화엄학을 전공한 스님이 승가대 학인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 ‘내’가 아닌 ‘우리’이다.
“〈법화경〉이 ‘일불승’ 즉 한 송이 백련을 상징한다면 〈화엄경〉은 일 년 내내 피는 수많은 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을 타파하고 깨치는 것이 화엄행자의 도리입니다. 꽃을 보살행에 비유해서 일체 모든 중생의 가치를 꽃으로 즉 보살로 승화시키는 것이 화엄경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자신이 공부한 공덕을 일체중생의 공덕으로 돌리는 것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향이자 보살사상”이라고 했다.
스님이 비구니 스님들의 행장기와 근현대 자료를 총망라하는 아뜩한 일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신의 일로 삼은 것도 여기에 기반한다. 1999년 겨울, 대한매일신문사의 〈근세 여성 종교 지도자 명감〉에 들어갈 자료를 요청 받은 스님은 비구니사 정리에 원을 세웠다.
“당시 자료를 찾아보니 불교계에서 비구니 스님들에 관한 자료는 ‘승적부’가 고작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사의 요청자료인 500명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200명이라도 자료를 모아 보자고 생각해 수행관에 함께 사는 97학번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매진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스님은 2000년 ‘한국비구니연구소’를 개소하고 자료수집과 연구작업에 들어갔다. 2003년에 1차 성과물인 〈신문 기사로 본 한국 근현대 비구니 자료집〉(전6권)과 〈비구니와 여성 불교〉(전6권)를 비롯해 비구니 자료를 지속적으로 펴냈다.
학인 스님들과 함께 1000명에 가까운 비구니 스님들을 전국 사찰에서 취재하고, 자료화 작업을 위해 밤을 새기도 했다. 꾸준한 노력에 ‘비구 스님 연구기관도 없다’며 정식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학 측도 2014년 비구니연구소를 정식기관으로 인정했다.
2004년에는 세계여성불자대회인 제8회 샤카디타 대회의 추진위원장을 맡아 대회를 원만히 치러냈으며 이후 공동대표를 맡아 매 대회마다 스님들을 이끌고 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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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인도에서 열린 샤캬디타 세계여성불자대회에 한국 대표단과 함께 참가한 본각 스님(왼쪽 네번째). 스님은 현재 샤카디타 코리아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
불법의 씨를 뿌리는 농부의 삶으로
정년이 2년 남짓 남은 스님은 퇴임 후 금륜사에서 농부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스님의 농부라는 표현은 불법의 씨를 뿌리는 포교와도 맞닿아 있다. 학기 중에는 일주일에 닷새 씩 연구실에서 연구와 강의에서 매달리던 데서 보다 자유롭게 대중과 접촉하겠다는 의지다.
스님은 사회 변화에 대한 인식을 게을리 한다면 불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찾기 힘들 것이라 여긴다. 금륜사 일대에 주말농장을 개척해 고양시민들이 자유롭게 사찰로 오게 하고, 북까페 ‘다륜쉼터’를 만들어 휴식공간을 제공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주말에는 기도와 함께 요가강좌 등도 마련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불교도 시대에 발맞춰야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절도 바쁜 현대인들이 잠깐 들려 차 한 잔 밥한 그릇 먹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해요. 시민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실 홍은동 금장사에서 고양으로 사찰을 옮기며 이어오던 방과후교실을 문 닫게 돼 마음 한편에 짐이 남아있는데 사찰이 안정화 되면 ‘방과후교실’도 다시 열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끝으로 스님은 2015년 불교계에 안 좋은 일들이 많지만 스님들이 더욱 힘을 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근 답답한 일이 많지만 한 명이라도 불교를 좋아하는 불자가 있으면 승려가 힘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승려는 ‘내 앞에 불자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그 분을 행복하게 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을 갖춘 스님들이 중심이 돼고 불자들이 뭉쳐 부처님 법을 널리 펼쳐야 합니다.”
중앙승가대 마당에는 쌀쌀한 3월 날씨 속에도 겨우내 움츠렸던 푸른 잎들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스님의 말 속에서 긴 겨울을 겪고 있는 불교에도 새 봄이 찾아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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