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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가을집회]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
2. 예수 그는 누구인가?
2021. 11. 3. 이현래 목사
내 일생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다. 오래 전부터 ‘예수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꼭 한 번 쓰고 싶었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그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꼭 써야 될 그런 책이다. 언제 한 번 보니까 <부처 그는 누구인가?>라는 책이 있었다. 그래서 그 때 문득 생각난 것이 <부처 그는 누구인가?>라는 책은 있는데 ‘예수 그는 누구인가?’라는 책은 왜 없는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일생의 주제가 ‘예수 그는 누구인가?’이다. 기독교의 주제도 바로 ‘예수는 누구인가?’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보다도 ‘예수는 누구인가?’이다. 예수 때문에 기독교가 생겼다. 유대교만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 인간에게 이적을 행하시고 때에 따라 혜택을 주시는 그런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왜 필요한가? 이것이 내 인생의 의문이었다. 기껏 그 길로 왔는데, 길은 분명히 그 길이었는데, 그 길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몰랐다.
충주에 있을 때 길이 막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10년을 설교 했었는데,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하다가 충주에 와서 처음으로 10년 만에 그것을 느꼈다. 나는 캄캄하구나. 충주 형제들이 나에게 아주 큰 공을 세웠다. 한 번도 어디 가서 설교를 하면서 막혔거나 답답한 것을 못 느껴 봤는데 충주에 와서 처음으로 그것을 느꼈다.
엑스폴로 74를 지난 후에 C.C.C.에서도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자. 그래서 회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자는 공지를 받았다. 그리고 C.C.C. 김목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셔서 열심히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반응이 없을까? 그때 직원이 제천으로 이사를 가고, 나는 하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혼자 깊이 생각을 해 봤다. 왜 이럴까? 내 나름대로는 연구하고 마음 써서 했는데 왜 이렇게 밖에 반응이 되지 않는가?
그때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생들이고 전문대 학생이 있었다. 이것도 원인이 있겠지만 또 충주 사람의 기질도 있었다. 좀처럼 자기표현을 잘 안 하는 것이 충주 사람의 독특한 기질이다. 대구 사람과 기질이 비슷하다. 나는 꼭 그런 데만 갔다. 거기서 그것을 느꼈다. 그럴지라도 반응이 좋았으면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했을 것인데 전혀 무반응인데 오기는 꼭 온다. 그게 충주 사람들의 기질이다. 모이자고 하면 싫다는 사람이 없다. 그 시간이 되어 봐야 아는데, 그 시간이 되면 꾸역꾸역 다 온다.
그런 말이 있다. 외상을 가지고 가면 언제 갚을지 모르는데, 절대로 떼어 먹지는 않는다고 한다. 언제 가지고 와도 가져 온다고 한다. 그런 지역이 충주 지역이다. 왜냐하면 삼국이 만나는 지역이라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삼국 시대에 거기가 삼국이 만나는 자리다. 중원탑이라는 것이 거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중앙이 바로 충주다. 그래서 인심이 그렇게 정해졌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에게는 큰 벽이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워치만니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경을 더 깊이 알려고 생각했던 그것이 사람을 아는 기점이 되었다. 내가 그 책을 여러 사람에게 권해 보았는데 별 다른 반응이 모두에게 없었다. 그분의 책 중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로마서 강해가 있다. 이 책은 너무 유명해서 워치만니를 아는 사람치고 그 책을 안 본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본 책은 『주의 형상을 닮아』였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되었다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 책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다. 모든 것을 뒤바꿔 놓은 책이다. 거기서 나는 사람이 길인 사람을 발견했다. 아,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가시는구나.
창세기는 뒤로 그분을 통해서 본 창세기다. 그때 나는 아, 사람에 따라서 성경을 보는 것이 달라지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령을 받고, 성경 연구를 많이 하고, 주석을 많이 보아야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구나.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저렇게 보이기도 하는 책이구나. 이것을 처음 발견했다.
세상에 일반적인 책은 그렇지 않다. 누가 봐도 다 같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이야기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문제를 취급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볼 수 있다.
서양 문명의 발단이 이것이다. 객관주의다. 무엇이든 객관화 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객관화 한 것이다. 그래야 이 사람들은 무엇이 파악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도 파악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특별한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런 게 없다.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다. 유일신 신앙이다.
희랍인들은 그렇게 안 된다. 하나님은 누구이고, 예수는 누구이고, 성령은 누구인가? 이것을 골몰히 연구한 사람들이다. 분석한 것이다. 과학을 하듯이 분석한 것이다. 그래서 그 구조를 자기들이 아는 대로 만들어놓은 것이 삼위일체론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겼다,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 놓은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에 계속 해서 연구를 했다. 300년을 연구했다. 마지막에 400년을 연구해서 교리가 설정되었는데 그래도 아무리 해도 시원치가 않았다.
마지막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어거스틴에게서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지 이성으로만 다 알 수는 없다는 단서를 붙여놓았다. 천만 다행이다. 다 알았다 했으면 큰일 났을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했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 때문에 죽은 사람이 수 없이 많다. 추방당한 사람도 수 없이 많다. 거기서 조금만 잘못하면 다 이단인 것이다. 중세 때는 이단은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이 안 되었다. 그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주장하고 있다.
생명은 개미 한 마리도 구조적으로 연구할 수가 없다. 개미 한 마리를 잡아다 놓고 그것을 분석하면 그것은 개미가 아니다. 손가락이 몸에 붙어 있을 때는 몸이다. 그런데 떨어져 나가면 시체인 것이다. 한의학에서 우리 몸은 어디든지 일체라고 한다. 하나다. 수지침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손가락 하나로 치면 이 손가락 안에 우리 몸의 혈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 끝 부분만 남았다면 여기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은 다 하나니까 분석을 할 수가 없다. 발과 손은 너무 다르다. 그런데 발과 손은 한 몸이다. 발이 아픈 데 손이 안 아프겠는가? 생명과 과학은 아주 다른 것이다. 과학은 분석해서 지금 이렇게 과학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 지금 끝없이 발달하고 있다. 어디까지 갈지도 모른다.
늘 이야기 하지만 인간의 과학적인 두뇌는 참 너무 놀랍다. 장미향을 맡아 보고 그 향을 화학적으로 분석해서 다시 장미향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창조한 장미향이다. 하나님이 만든 장미향이 있고, 인간이 만든 장미향이 있다. 그게 구별이 안 될 만큼 그렇게 연구해 놓았다.
이 향을 누가 구별할 수 있겠는가? 벌이 안다. 최고의 향수는 자연 향이라고 하는데, 진짜로 자연 향을 얼굴에 바르고 나가면, 벌에게 쏘여서 어찌할지 모르게 된다. 가짜이기 때문에 벌이 안 온다.
라면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라면이 나빠서 먹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인공조미료가 들어 있어서다. 사람만 둔해져서 모르는 것이다. 동물들은 감각으로 알기 때문에 그것을 다 안다. 죽지 않으려고 안 온다. 아무리 벌꿀 냄새를 만들어 놓아도 벌이 안 온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쓴다. 옛날에 가짜 꿀을 많이 먹었다. 사람이 만든 꿀이 영락없이 똑 같다.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지혜는 놀랍다. 지식은 놀랍다.
생명에 대해서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참 다행이다. 왜냐하면 생명과 같은 것을 만들어 버리면 사람이 필요 없어질 것이다. 사람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면 창세기에 있는 말씀이 다 틀리고 말 것이다. 성경 말씀이 다 가짜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다는 말도 소용이 없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 노릇을 다 하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지구상에서 사람이 못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한 가지 절대로 안 되는 것이 생명이다.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것은 생명이다. 만일 과학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이 물러가야 한다. 사람의 지식은 놀랍다. 다행이 우리가 그 지식에 죽지 않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원자폭탄은 지식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 떨어지면 개미새끼도 못 산다.
지금 우리는 북쪽에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터지는 날이면 다 죽는다. 그게 다 터지면 잘나고 못나고가 없이 다 없어질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에게도 핵폭탄 하나 던지면 하나님이 죽을 정도고 없어질 정도이니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예수는 누구인가?
서양 문물이 그렇게 발달하고 신학이 그렇게 발달했는데, 왜 예수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지 못한지 정의를 확실하게 내릴 수가 없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가 누군가를 알아야 한다. 모르면 안 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세상에 위인은 많다. 훌륭한 분들은 많다. 인류를 지도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가 아는 대로 공자와 석가다.
공자님은 어떻게 공부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게 없다. 공부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문이 잉어 잡이를 하던 사람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무당이었다고 한다. 공자는 예와 악을 좋아했다. 풍류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 출신이 아닌가 하고 도올이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제자들은 생이지지(生而知之) 했다고 한다. 그분은 배운 게 아니고 나면서부터 다 알았다고 말한다. 놀랍다는 그 말일 것이다.
언젠가 어디서 배웠다는 데가 없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예수님도 어디 따로 공부한 데가 없다. 어떤 점에서는 공자님과 통하는 데가 있다. 공부를 못해서 그런지 통하는 데가 있다. 공자사상은 천리를 따르자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자. 하늘의 이치를 따라서 살아야 된다는 것이 도다. 이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라는 것이다. 덥고 춥고, 길고 짧고, 밝고 어둡고, 이 모두 하늘의 이치다. 태양이 있기에 그늘이 있다. 달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이 있다. 이것이 서양에서는 대립적 관계인데, 공자사상에서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고 조화를 이루는 관계다.
우리나라 국기가 태극기다. 태극기는 태극이 아니고 음양이다. 음과 양이니까 서양에서 본다면 분리된 것이다. 옛날에 나는 우리나라가 국기를 잘못 선택해서 남북이 갈라졌다고 생각했다. 태극기를 자세히 보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국기를 바꿔야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서양적인 생각이다. 분리적인 생각이고 동양적인 생각은 조화다. 둘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맞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다른데 조화가 된다. 다른 것끼리 조화되는 것이 조화 세상이다.
중국사상을 중화사상이라고 한다. 화자가 지금은 빛날 화(華)자를 쓰고 있는데 원래는 화할 화(和)자라고 한다. 무엇이든지 그 사람들의 사상은 중화사상인데 이것도 지금은 변질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못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와 통하는 데가 많다.
석가는 다르다. 이 사람은 깊은 수양을 통해서, 죽을 지경까지 가서, 죽기 직전까지 가서, 수양한 사람이다. 깨달은 사람이다. 우리말로 불이라는 말이 깨달을 각자와 같은 말로 해석이 된다. 나무아비타불이란 무량수강, 가없는 목숨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나무아미타불 할 때도 마찬가지로 불자는 각자다. 석가는 깨달은 사람이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다 깨달은 사람이다. 깨닫고 보니까 뭐가 남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이 남았다.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내가 제일 높다거나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고, 나 밖에 없더라는 말이다.
이 나는 누구인가? 나, 너 하는 나가 아니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나다. 대아라고 할 수 있고, 무아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나다.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내가 소나무를 보고 소나무라고 하기 때문에 소나무라는 것이다. 내가 잣나무라고 하면 잣나무가 되는 것이다. 소나무라는 것도 없고, 잣나무라는 것도 따로 없다. 내가 그것의 이름을 짓는 것이다. 내가 이름 한 것이다.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그 아만 남았다는 것이다. 놀라운 깨달음이다. 완전히 사람 중심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개에게 개라 하면 개고, 소라하면 소다.
옛날에는 애완견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좋아하다 보니까 요즘에는 반려견이라고 한다. 애완이라는 말은 내가 가지고 논다는 말로, 개를 너무 무시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반려견이라고 한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서 애완견이라고 하면 큰 실례다. 그 개가 그 사람의 반려자라는 말이다. 반려니까 같이 잠도 자고 뽀뽀도 하고 별 것 다 한다. 애완이 아니고 반려다. 애완이면 싫을 때 발로 차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개를 발로 차면 큰 일이 난다. 반려자를 차는 것이다. 보통일이 아니다. 그래서 법제화 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보신탕 먹지 말자. 대통령께서 연구를 해 보라고 제안했다. 먹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없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아마 법이 생길 것이다.
사람의 깨달음이란 대단하다. 눈 감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눈만 감으면 생각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부처가 깨달은 깨달음이다. 나와 같이 있었던 스님이 그랬다. 사람들이 왜 미국을 가려고 비행기를 타고 그러는가? 눈만 감으면 가 버리는데 무엇 하러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고 했다. 내가 20살 때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참 신기한 말씀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허황한 말씀으로 들렸다.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요란하게 말을 한다. 하나님이다, 하나님 아들이다, 위인이다. 성자다. 별 말을 다 한다. 물론 다 근거가 있기 때문에 한 말일 것이다.
나에게는 오로지 우리 인간을 구속하신 분이다. 그 외에는 다른 데도 다 있다. 사람을 구속하신 것을 빼면 다른 곳에도 다 있다. 지혜를 얻으려면 어딜 가면 되고 이치를 깨달으려면 어딜 가면 되고 다 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혜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혜택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찾으면 되지 예수를 안 찾아도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혜택을 줄 수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면 무엇을 주겠는가? 기도를 하려면 천지를 창조하신 분에게 기도해야 한다.
나는 분명히 내 일생에서 내가 만나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그런 어떤 힘이 내 인생을 구원해 주었다. 죽을 자리에서 나를 살려 준 것도 그렇고, 집을 떠나 나오게 된 것도 그렇고, 그 이후에 내 길이 형통했던 것도 그것이다. 환경이 그렇게 형통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때그때 다 어떻게 딱 맞는 사람을 주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서 위기를 넘고 했던 것이다.
내가 대구까지 올 때, 많은 단계를 거쳐서 왔다. 그냥 온 게 아니다.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었고 대구를 알아서 온 것도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여기까지 밀리고 밀려서 왔다. 밀어낸 사람들도 보통 일이 아니고,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는 아주 귀중한 역할을 했던 분들이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진 그 하나님이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게 구별이 잘 안 되니까 예수님께 기도하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 기도하려면 하나님께 해야 된다. 예수님께 해 봐야 못 준다. 좀 극단적인 말이지만 자기도 못 내려온 분인데 무엇을 주겠는가?
성경에 보면 내 아들이 당장 죽게 되었다고 했더니 가라, 네 믿음이 살게 하였느니라고 해서 가 보니까 살았더라는 것이다. 이런 게 많다. 바울도 이런 일이 있었다. 베드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 인생을 위해서 내가 정말 위기에 몰렸을 때 누가 날 건져 주겠는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나는 내일 일을 모르지만 내일 일을 아시는 분, 지금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분이 나를 도와 주셨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딱 갈라져 있다.
어느 날 생각하니까 예수는 왜 필요한가? 이 문제가 나에게 큰 문제가 되었다. 하나님만 있어도 기독교생활, 교회생활, 종교생활을 잘 할 사람이다. 문제없이 잘 할 사람이다. 그때 처음으로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무릎을 꿇고 나니까 교회생활이 너무 잘 되었다. 교회에서 하라는 것이 있으면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다 옳게 받아들여졌다. 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시골의 조그만 교회니까 그렇지만 젊은 전도사님이 별로 재주가 없어서 주일학교도 내가 맡아서 했다. 전도사님이 좋아했다. 자기가 못하는 것을 내가 잘해 주고 내가 너무 잘 하니까 집사도 하라고 해서 했다. 그것도 하니까 좋았다. 내가 집사 생활을 하면서 그 전도사님을 많이 보호해 주었다. 다른 집사들이 내보내자고 하는 것을 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나오자마자 쫓아냈다. 내가 있었더라면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내가 모범적인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예수를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렇게 되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나를 구속하신 분이다. 근원으로 나를 데리고 가신 분이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다른 것도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구별하는 말을 해서 그렇지 다른 것도 없겠는가? 말씀도 놀라운 말씀이 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 같은 것이 그냥 공으로 한 것이겠는가? 나도 그때 따라다녔더라면 그런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눈을 열게 해 줄 수 있고, 내가 죽은 나사로였다면 나를 살려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으면 떡 한 조각이라도 주실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을 못한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그분만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를 구속하는 일이다. 유일한 일이다. 다른 것은 다 못해도 된다. 내가 장님이 되었는데 눈을 못 뜨게 해주어도 상관이 없다. 내가 배가 고파 죽게 되었는데도 밥을 안 주어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나를 구속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자리로 옮겨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이 한 사람 밖에 없다. 공자님도 안 되고 석가모니도 안 된다. 아무도 안 된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기로는 이런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유일하신 분이다. 구속의 주님으로서 유일하신 분이다. 아주 명백해진다. 그 사람을 신이라 하든지 인간이라 하든지 나는 상관이 없다. 그것을 가지고 다투고 싸울 필요가 없다. 나를 구속하신 분이다.
그런데 구속을 하려면 사람이어야 한다. 신으로서는 나를 구속할 수가 없다. 혜택을 줄 수는 있지만 구속은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유의 구속자다. 한 말로 하면 그렇다. 만유를 다 원위치로 되돌려 놓은 사람이다. 지금 이 헝클어져 있는 만유를 원위치로 돌려놓은 제자리로 돌려놓는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지 크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리다.
사람은 지금 자기 자신이 통일되지 않는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내 속에서 통일이 안 된다. 그런 인간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헝클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주도하고 있는 모든 세계가 다 헝클어져 있는 것이다. 나도 안 되는 데 어떻게 주인이 되어 해결할 수가 있겠는가? 나도 헝클어진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로 하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나를 원위치로 되돌려 주면, 인간의 원위치로 돌려놓으면, 모든 것이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한다. 만물이 다 참된 데 오직 사람의 마음만 심히 부패 했다고 한다. 사람만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개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고, 소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왜 길가에 똥을 싸고 돌아다니느냐고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아니면 만유가 다 제자리에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인데, 만유의 주인 노릇하는 사람이 헝클어져 있으니까 다 헝클어지는 것이다. 거기서 그것을 바르려고 하니까 되겠는가? 헝클어진 사람이 헝클어진 것을 바르려 하면 되겠는가? 정신을 똑 바로 차려도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려면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도 정리가 안 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주변을 정리하겠는가? 내 주변에 일어난 일은 다 나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다.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 곳에 가면 저절로 풍파가 생긴다. 왜? 원래 풍파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풍파가 있는 곳에 가도 조용해진다.
그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다. 바람이 일어서 죽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고 한다. 그 풍랑 속에서도 이런 바람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시느냐고 했더니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니까 조용해지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헝클어져 복잡한데 예수님이 내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서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화가 나서 누구와 법원에 가니 어쩌니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더니 원인무효가 되어서 그냥 사그러져서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미쳤었나한다. 사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싸움도 사람이 만들어 내고, 심지어는 사랑도 만들어 내고, 별거 다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람이다. 장미향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뭘 못 만들겠는가?
세상은 정치인들이 어떻게 확 하고 나면 요동을 친다. 히틀러 한 사람이 나와서 전 유럽을 헝클어 버렸다. 사람은 아주 무서운 존재다. 자기만 그런 게 아니고, 남까지도 다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 자기만 헝클어진 사람이 아니고, 남까지도 다 헝클어버린다.
독일은 합리주의로 유명한 곳이다. 서양 역사에서 합리주의가 가장 발달한 곳이 독일이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했다. 동양에서 제일 합리적인 나라는 일본이다. 그런데 여기서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독일은 루터 교인이 국민의 85%였다. 루터교를 믿는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들 85%가 몇 명 안 남겨 놓고 다 하이 히틀러를 했다. 히틀러를 지지했다. 사람이라는 게 대단히 무서운 존재다. 자기 생긴 대로 세상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냐에 따라서 내 주변 사람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 주변 세상을 이렇게도 만들 수 있고, 저렇게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의 위치가 너무 중요하다. 다 그렇게 안 하고 싶을 것이다.
히틀러가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자기는 유럽의 평화를 가져오겠다고 한 것이다. 일본의 도조 히데키도 동양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겠는가? 동양평화를 위해서, 내가 태어나던 37년에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고 일본사람들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래서 동양에는 태평양전쟁까지 가게 된 것이다.
사람이 된 대로 한다. 사람이 무섭다. 옛날 말이 호랑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섭다고 한다.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사람을 원래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였다. 보시기에 심히 좋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만들어 놓았으면 하나님이 정말 안 된다. 우리가 원자폭탄을 던져서라도 하나님을 없애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 상태로 되돌려주시는 분이 예수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그 사람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구속이다. Redemption이 그런 뜻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한 말로 말하면 나를 구속하신 분이다. 인류를 구속하신 분이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고를 치는지 모른다.
히틀러도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면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큰일을 벌렸다. 그렇게 큰일을 엄청난 일을 벌렸다. 유럽에 전쟁이 일어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겠는가? 연합국이 참전해서 겨우 독일을 멸망시켰다. 히틀러는 도망가서 어디 가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유럽이 쑥대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유럽에서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치렀다.
못 박으면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사고를 이렇게 친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인데,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서 만유를 책임진다. 이것은 하늘과 땅처럼 먼 이야기다. 이것이 은혜고 은혜 중의 은혜다. 복음 중의 복음이다. 이런 인간이, 세계 대전을 일으킬 만큼 사고쟁이가 하나님의 신임을 받아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이 되어서 만유의 구속자가 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냥 동화 이야기가 아니고 신화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그 증명이 된다. 내 인생이 구속되면 내 주변이 조용해진다. 시끄럽지 않다. 싸우던 사람이 싸우지 않게 된다. 사고를 치던 사람이 사고를 치지 않게 된다. 모든 질서가 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만 보더라도 사람들이 다 이렇게 되면 세상도 그렇게 될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가 오는가? 행복을 외친다고 행복이 오는가? 외칠수록 더 불행해지고 외칠수록 더 불평이 생긴다. 사람은 단체로 단합하자고 하면 분열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세계 기독교 연합회다. 세계의 기독교가 다 연합을 해서 한 길로 가자고 회의를 했더니 이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그 큰 장로교가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WCC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지금도 안 되고 영원히 통합이 안 된다. 십자가에 오지 않으면 둘이 통합이 안 된다. 같은 장로교인데 원수처럼 생각한다. 차라리 회의를 하지 않았다면 하나로 있었을 것인데,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그 회의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사람은 회의를 하면 할수록 분열되고 만다. 가만히 있으면 차라리 괜찮은데 잘 해보자고 회의를 하면 분열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가 교회에서 회의하지 말라는 말이 그 말이다. 교회에서 회의를 하면 잘 해보자는 말이다. 회의해서 뜻을 모아서 잘해보자는 뜻이다. 취지는 좋은데 잘못 모여 놓으면 갈라져 버린다. 세계기독교지도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거기서 갈라지고 말았다.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십자가는 구속을 통해서 이것을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하였다. 구원의 지혜는 예수에게 있다는 말이다. 선한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악한 데 있는 것도 아니고, 구원의 능력은 예수에게 있다.
학식으로 보면 예수는 공자보다 훨씬 못하다. 어록으로 보더라도 공자어록이 훨씬 더 많고 더 유명한 것이 많다. 깨달음으로 본다면 석가모니만한 사람이 있겠는가?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고 깨달았는데, 고정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다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이다. 오직 남은 것은 그것들을 인식하는 나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지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주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사람이다. 쥐었다 폈다 하는 사람이다. 눈을 감으면 우주가 내 안에 있고, 눈을 뜨면 내가 우주 안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해결해 버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게 잘 안 돼서 그렇지만 너무 간단해진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동산에 관리자로 임명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동산이라는 말은 사람들처럼 같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형상, 실재와 형상, 이것이 연합하는 그런 동산이라는 말이다. 흙과 씨가 연합하는 그런 동산을 말한다. 그런 세계다. 생명의 세계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애기를 낳는 그런 세계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 않은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이게 근본이다. 이게 없으면 인류가 없지 않은가? 결혼은 신성하다는 말이 그 말이다. 지저분한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혼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지저분하거나 말거나 결혼은 있어야 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동산을 관리하도록 맡겼다. 그런데 사탄에게 속았다. 이것은 속았다는 말 밖에 못한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신성한 위임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보다 더 큰 위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이것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길로 간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그 길을 찾아 가 버렸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사탄이 했다고 한다. 아담 스스로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스스로 자기 혼자서는 이런 개념이 없다. 누가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마귀라고 한다. 마귀가 눈에 보이는가? 안 보인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일 자체가 마귀가 아니고서는 할 자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일을 하도록 유혹한 자가 있으면 마귀라는 말이다. 마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다. 도저히 나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속아서 했다. 뒤로 생각해 보니 내가 미쳤나? 내가 돌았나? 이렇게 생각하는 일을 사람이 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마귀가 날 속였다고 할 수 있다는 그 말이다. 우리가 모르고 하는 일도 많다. 잘한다고 했는데 엉망이 되는 일도 많다.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랬는가? 마귀에게 속아서 그랬구나. 그 속이는 자를 마귀라고 한다. 거짓말하는 자고 속이는 자라고 계시록에 나온다. 내게 누군가가 와서 귀에 속삭였다.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일생동안 월급 받고 일을 해서 연금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연금으로 살면 편안하게 살지 않겠는가? 그런데 누가 와서 속닥속닥해서 반을 쪼개서 투자를 했다. 그래서 생활비도 안 나오게 되어 버렸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까 자기도 모르니까 그랬다고 한다. 알고 하겠는가? 상의하고 하지 그랬냐고 하니까 상의하면 못하게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이게 솔직하게 사람의 마음이다. 나쁜 마음이 아니다. 사람이 다 그렇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남에게 안 물어본다. 내가 할까 말까 할 때 물어보지 내가 하기로 딱 결정하면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물어보면 여러 가지 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되니 안 되니 하니까 안 되겠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해버리는 것이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다.
아담도 그래서 이 신성한 위임을 포기했다. 스스로 포기했다. 위임을 포기하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되겠는가? 사람은 위임에 달렸다. 무엇을 위임 맡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결정이 된다. 그런데 사람이 이 귀중한 위임을 버렸으니까, 자기 위치가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짐승만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오늘까지 대장인 사람도 뭘 잘못해서 대통령이 나가라고 해버리면 졸병만도 못하다. 졸병이면 그래도 월급이라도 나온다. 거기서 쫓겨나면 퇴직금도 연금도 다 없어져 버린다.
인간에게 주어진 위임을 상실하고 나면 아무 것도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물보다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도 난 사람이다. 아니다. 사람이라고 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라고 할 게 뭐가 있는가? 다른 짐승과 뭐가 다른가? 사람이 짐승만 못한 것도 많다. 포악한 짐승들은 배고플 때만 잡아먹는다. 배가 부르면 자기 앞에 노루가 지나가든 뭐가 지나가든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데 배가 고프면 잡아먹는다.
지난번에 누가 페이스 북에 기이한 것을 올려놓았다. 표범이 노루인지 뭔지 모르는 새끼를 키운다. 자기 앞에 보따리를 내놓고 도망 가 버렸다. 인간 같으면 그냥 곰탕 해 먹을 것인데 산후 수발을 다 해주고 자기 새끼처럼 길렀다. 이 새끼는 맨 처음 본 게 표범이기 때문에 그 표범이 자기 엄마인 줄 안다. 커도 졸졸 따라다닌다. 떼어 놓아도 도로 쫓아온다. 큰 개가 있는데 고양이 새끼를 가져다가 처음부터 주어서 키웠는데 자기 새끼처럼 키운다. 한 입감인데 말이다. 먹이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새끼로 생각하고 키운다. 개가 끌어안고 입 맞추고 같이 잠자고 별 것 다 한다. 개와 고양이는 원수 간이라고 한다. 만나면 물어 죽인다. 그것을 보면서 신기하다. 짐승이 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도 있구나.
갈매기가 한 번 짝짓기를 하고 나면 평생을 동반자로 산다고 한다. 헤어져서 하나는 남태평양에 있고, 다른 하나는 북태평양에 있다고 해도 짝짓기 할 때는 다 한 곳에 모인다고 한다. 모이면 짝짓기 하던 그 짝을 찾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찾는다고 한다. 만일 한 짝이 중간에 사고가 나서 죽어 버려서 못 온다면 평생 울다가 죽는다고 한다. 그게 사람보다 낫지 않은가? 사람은 그렇게 못할 게 아닌가? 사람이 잘났다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자연은 이렇게 참 잔인한 것 같은 데도 이렇게 자비로운 데가 있고, 다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위임을 버려 버리니까 하나님의 경륜에 이상이 발생했다. 사람이 고장 나니까 다 고장이 나 버렸다.
기계도 고장 나는 것을 보면 한 군데 고장 나면 다 고장 나 버린다. 전에 우리가 쓰던 차가 가다가 덜커덕덜커덕 하다가 멈춘다. 그래서 여기저길 가 봤는데 다 모른다. 원인을 잘 모른다. 이렇게 해 봐도 안 되고 저렇게 해 봐도 안 된다. 그런데 어딜 가서 아주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이 안에는 전기 배선이 많은데 그게 엔진에 눌려 버렸다. 전기선인데 무거운 것이 눌려 버리니까 전기가 제대로 안 간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전기가 제대로 안 가니까 차가 가다가 멈췄다고 한다. 그것만 풀어 주니까 아무 고장이 없다.
인생이 고장 나 버리면 모든 것이 고장 나 버린다. 인생에 달려 있는 모든 것이 다 고장 나 버린다. 가장 한 사람이 잘못 되어 버리면 모든 게 고장 나 버린다.
하나님의 경륜에 이상이 발생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잘못되어 버리면 아들들이 다 잘못되어 버린다. 어떤 경우에 아들이 오히려 잘 되고, 어떤 아이들은 잘못된다. 가장의 책임이 굉장히 중요하다. 가장이 그 집안의 그리스도다. 기름부음 받은 자다. 위임을 받은 자다. 그런데 위임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으면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자기 위임을 버렸기 때문에 우주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다. 스님들에게 물어 보라. 원래부터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없다고 한다. 법륜스님의 즉문즉답을 보니까 사람들이 와서 그런 질문을 한다. 아무개가 미워 죽겠다거나 시동생이 미워 죽겠는데 못 참겠다고 하니까 미움이 어디 있어요? 내놓아보라고 한다. 원래 없던 게 아닌가? 없던 것인데 발생한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내놓아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버렸다.
혹시 분노가 나거나 화가 나면 언제부터 그랬는지 생각해 보라.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가? 그게 아니다. 무슨 일로 그게 발생했다. 발생한 것은 곧 없어진다. 하늘에 구름이 끼었지만 곧 사라진다. 거기에 매여 살면 안 된다. 이런 것은 불교에서 훨씬 더 깊게 가르친다. 제행무상,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다. 사람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한다. 아침에 만난 사람과 저녁에 만난 사람이 똑 같다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 않은가? 그것에 너무 집착을 해서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된다. 저녁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게 엄청난 사고이다. 우주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창조주와 피조물이 불화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이것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화가 되었다. 이게 엄청난 사건이다. 이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일이 또 이루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분이 죽으심으로 인해서 뭐가 생겨났는가? 하나님과 사람이 확실하게 구별이 되었다.
무슨 말인가?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 해서 사람 속에는 계속 신성에 대한, 신격에 대한 동경을 할 수가 있다. 사람인데 엉뚱한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했겠는가? 사람이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한 것이다.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유혹이 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사람에게 그런 성향이 없으면 그런 유혹을 할 수가 없다. 다 근거가 있으니까 유혹을 하는 것이지 그냥 하겠는가?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왜 그랬겠는가? 자기가 다 하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려도 안 죽고 싶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러면 우리에게 좀 보여 주라. 우리도 그렇게 살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된 것 같지만 구별이 안 된다. 구별이 안 되니까 걸핏 하면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한다. 기회만 있으면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한다. 확실히 구별이 되면 못한다. 그런데 긴가민가 한다. 어쩌면 이렇게 해도 될 것 같고, 어쩌면 저렇게 해도 될 것 같은 것이 사람이다.
인간 세상에 신이 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시저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때는 그런 제왕들을 보고 신이라고 했다. 신의 아들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천자, 하늘의 아들이라고 했다. 유럽에서는 바로 신이라고 했다. 시저를 보고 신이라고 했다. 또 한쪽에서는 신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양아들 브루트스가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시저를 찌르니까 시저가 하는 말이 브루트스 네가 누구냐고 하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로마를 더욱 사랑합니다.’ 하고 자기 양아버지를 찔러 죽였다. 왜? 신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 신이 되고 싶으면서 남이 신이 되는 것은 절대로 못 봐준다. 참 이상한 것이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이 대통령이 되는 꼴을 못 본다. 지금 서로 치고 박느라 난타전이 벌어졌다. 내가 되고 싶지 않으면 난타전을 할 것이 없다. 해 먹으라고 놔두지 뭐하러 가서 붙어서 오만 비리 다 파헤치고 하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하려고 하니까 그렇다.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부자 됐다고 내가 배 아플 일이 뭐가 있는가? 사돈이 논 사는데 배 아플 일이 뭐가 있는가? 그런데 부자 되면 배가 아프다. 왜?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 못하기 때문이다. 전부 다 이런 문제이다. 인생 문제라는 것이 치사하고 더러운 문제가 많다. 고상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이 안 되어서 그렇다. 과장과 계장이 구별이 안 되면 직장에서도 싸우는 것이다. 사장과 종업원이 구별이 안 되면 싸우는 것이다. 나는 이 회사에 녹을 먹고 있는 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없다. 월급만 주면 된다. 그런데 월급만 받아서는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월급 준다고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월급을 거기서 받으면서 회장을 쳐내려는 사람이 생긴다. 왜? 내가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면 오를수록 불안하다. 누가 쳐들어올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바닥에서 올라가서 서울에 갔는데 조그마한 세계이지만 거기서 목사님에게 인정을 많이 받았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이 유일하게 인정을 받았다. 나는 은혜로만 생각하고 감사만 했는데,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본다. 그때 나한테 일어난 사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그런 일이다. 그분도 내 사건으로 망했다. 그런 일을 저질렀다. 70평생을 성경만 가르치던 분이고, 아주 반듯한 분이고, 안동 사람이고, 점잖고 완전히 유교적인 교양을 갖춘 분이었다. 그분이 나를 아주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셨다. 그러니까 누군가 질투하는 사람이 생긴다.
나는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저 양반이 누구에게 모함을 받았구나. 그분이 나를 그렇게 했다고는 지금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올라가면 안 된다. 올라가면 위험하다. 올라갈 사람이 올라가면 괜찮은데, 나같이 못난 사람이 올라가니까 누가 볼 때 이 사람이 별것이 아닌데, 정말로 어떤 사람이 하면 아무도 못 하는데, 아무리 봐도 안 그럴 것 같은데, 저런 총애를 받는다든지 잘나간다든지 하면 속으로 은근히 시기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올라갈수록 주의가 된다. 이번에 아들이 뭐가 됐다고 하길래 내가 주의를 시켰다. 올라가면 좋은 것만 아니고 아주 위험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총을 매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이 안 되니까 사람과 사람이 또 구별이 안 된다. 과장과 계장이 구별이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맨날 직장에 가서 쫓겨나기 마련이다. 계장이면 계장으로 알아야 되고, 과장이면 과장으로 알아야 되는데, 이것이 구별이 안 되니까 치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쫓겨난다. 똑똑하려면 아주 똑똑하거나 나같이 어중간한 사람이 똑똑했다가는 대번에 낙동강 오리알로 떨어지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사람이 하나님같이 되려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이 파괴되어 버렸다. 여기서 예수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이것이 회복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갈라졌다. 구별됐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함을 통해서 별것을 다했어도 사람은 사람이다.
물 위로 걸어가기도 하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기도 하고, 소경을 눈뜨게도 하고, 별것을 다했다. 그럴 것 같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냥 죽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만큼 놀라운 일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다.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 무엇을 해도 도로 사람이다.
밭에서는 옥수수가 나왔든지 포도가 나왔든지 요즘 말로 하면 비싼 과일이 나왔든지 흙은 그냥 흙이다. 그런 것이 나왔다고 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흙은 여전히 흙이다. 주인이 수확하고 나면 여전히 도로 흙이다. 그게 사람의 위치다. 사람을 사람대로 아는 위치다. 흙을 흙으로 아는 위치였다. 그 흙이 내가 옥수수 밭에서 천 톤 만 톤을 생산했다고 해서 나는 만 톤을 생산하는 흙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만들어놓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을 때 천 톤을 생산했든지 만 톤을 생산했던지 그것은 흙이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이 말이 그냥 나온 말이겠는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때 하나님이 아무 대답도 안 하신다. 왜 대답을 하시지 않았겠는가? 사람이 사람으로서 죽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가? 해줄 수도 없다. 대답을 못 하신 것이다. 나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누가 하면 내가 대답을 안 한다. 아무 말도 못 한다. 자신이 없으니까 약속을 내가 잘 못한다. 나도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지 않겠는가?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이 되고, 사람과 사람이 구별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언약이 내려진 것이다. 이렇지 않으면 언약을 맺을 수 없다. 예레미야 31장에서 분명히 예언을 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생각)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앎이니라).”(렘31:33,34)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 그날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어린 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고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예언이 생긴 이후로 몇 백 년이 지났지만 그런 사건이 생기지 않았다.
왜 그런가? 계약 당사자가 없다. 그것을 계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계약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약속은 했지만 언약이 안 된다. 언약은 쌍무적인 것이라 서로가 책임이 있다. 계약서를 쓴 것은 상대방이 서로가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생각)에 두며~”는 참 좋은 말인데 아무데나 줄 것 같으면 약속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아무데나 줄 수가 없다.
씨가 아무리 좋다고 해서 아무 데나 던지면 나오는가? 그 씨에 맞는 흙에 심어야 나온다. 미나리를 아무데나 심어놓는다고 미나리가 되는가? 미나리는 꼭 시궁창에 심어야 된다. 그래야 미나리가 제대로 큰다. 미나리 씨를 가진 사람은 시궁창을 찾아다닌다.
대구에서는 한재 미나리가 최고 미나리라고 한다. 한재 미나리는 논에서 키운 미나리이다. 아무 논에서나 다 키운다. 진짜 미나리 큰 것을 보면 한재 미나리는 미나리도 아니다. 풀이다. 지금 서울 근교에서도 봤고, 김해 근교에 가면 미나리 밭이 있다. 미나리 밭은 완전 죽탕이다. 수확할 때 보면 고무 옷을 가슴까지 올라오는 것을 입고, 물이 가슴까지 올라온다. 그렇게 깊다. 미나리가 얼마나 크게 자라는지 아는가? 엄청나게 크고 두껍기가 손가락 굵기만큼 두껍고 얼마나 부드럽고 맛있는지 모른다. 한재 미나리는 논에서 나오기 때문에 깨끗하기는 한데 뻣뻣하고 거기에 비하면 미나리도 아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어떻게 생겼나하고 봤더니 옛날 진짜 미나리 먹어본 것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된다.
씨는 합당한 밭을 만나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씨를 약속했지만 미나리 씨인데 시궁창이 없다. 생땅, 좋은 땅, 더럽지 않은 그런 땅만 있고 더럽고 시궁창인 이런 땅이 없다. 그래서 안 된 것이다. 그 좋은 흙에는 무엇을 심어놓으면 자라지 않는다.
효령에 땅을 정리하느라 언덕을 깎았는데, 속에 노란 생땅이 나왔다. 거기에 개나리를 잘라 심어놓았다. 몇 년을 가도 고만하게 죽지 않고 살아있다. 커지지 않는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그런 땅은 소용이 없고, 썩고 똥 갖다 붓고 해서 그 땅이 시커멓게 된 그런 데서 농사가 잘된다.
땅이 너무 오래돼서 농사 못 짓는 땅은 없다. 오래될수록 땅이 좋다. 사람은 늙을수록 안 되는데, 땅은 늙을수록 좋다. 더 좋다. 더러울수록 더 좋은 것이 땅이다. 참 역설이다. 깨끗한 흙에는 무엇을 심어놓으면 살지 않는다. 못 산다.
시골에 살 때는 아직까지도 금비가 없이 똥을 사용하던 때이다. 밭에 일 년 내내 썩힌 똥을 갖다 붓는다. 거기에 보리도 갈고 고구마도 심는다. 볕에 마르고 나면 냄새는 다 나가고 땅이 부들부들해진다. 냄새도 다 나간다. 거기에 농작물을 심으면 잘된다. 요즘에 금비를 사용하니까 그런 것을 못 봤을 것인데, 나는 똥물을 갖다 퍼붓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것이 농촌에서 큰 행사이다. 그것을 장군이라고 등에 매는 거기에 넣어서 그때 남자들이 일을 한다. 섬에 가면 남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데, 그때는 남자들이 아니면 안 된다. 똥 장군이라고 하는데, 거기 넣어서 가서 땅에 퍼붓는다. 그런데 그 땅이 그렇게 좋다. 참 이상한 것이다.
생명의 씨는 왜 그런 데서 자라는지, 왜 골짜기에서 생명이 자라는지, 왜 그런 지저분한 데서 생명의 씨가 나오는지,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예레미야 31장 32절에 있는 이 말씀이, 이 약속이 너무나 놀라운 약속이다. 율법을 바깥에서 지키려고 해도 아무리 해도 못 지킨다. 그래서 마지막 나온 것이 안 되겠구나. 저 사람 속에 율법을 지킬만한 성향이 없구나. 내가 저 생명 속에 법을 주어야 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왜 몇 백 년이 흘러도 안 되었는가? 그 밭이 없어서이다. 하나님은 그 밭을 찾아다닌다. 농사짓는 사람은 흙을 찾아다닌다. 씨만 가졌다고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다.
새 언약,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기 때문에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생각)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라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다. 내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생리적으로 지켜지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생리적으로 율법이 저절로 지켜진다면 이것이 평화 아닌가!
그런데 왜 되지 않았는가? 그 씨에 맞는 토양이 없어서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심에서 새 언약이 세워졌다. 새 피조물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새 피조물이 다른 것이 아니다. 새 언약의 그 사람이 새 피조물이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약속은 언약으로 성취가 되었다. 쌍방계약이 되었다.
약속은 있었는데, 은행에서 돈을 주려고 창고에 돈을 다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길바닥에 퍼주겠는가? 누구한테 주겠는가? 계약 당사자가 있어야 돈을 준다. 절대로 그냥 주는 법이 없다. 쌍무적이다. 언약은 쌍무적이고 약속은 일방적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 일도 있고, 약속으로 한 언약도 있는데, 대부분은 성취되려면 언약이 되어야 한다.
성경을 Testament, Government로 번역한 이유가 그것이다. 언약서라는 것이다. 이 책은 언약서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이다. 성경 말씀이 있다고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복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복이 안 되는가 하면 언약이 안 되어서다. 성경 자체는 완전하지만, 아무리 완전해도 언약이 안 되면 성취가 안 된다.
씨는 절대적으로 완전하지만 그 흙을 만나지 못하면 안 된다. 미나리는 절대적으로 완전하다. 그렇지만 시궁창을 만나지 못하면 한재 미나리가 된다. 그러면 미나리가 굉장히 맛있다는 말을 하겠는가? 안 한다. 김해 농장에서 나오는 미나리를 보면 이게 진짜 미나리로구나. 대구지방에는 한재 미나리밖에 없으니까 그런 미나리를 못 먹어 보았다. 언제 김해 가서 먹어보라. 물속에서 나온 것이다.
쌍무적인 것이다. 쌍무적으로 하나님과 사람도 쌍무적으로 모든 일이 성취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100살에 아들을 준 것이다. 약속은 진즉 했다. 그런데 이 계약을 맺을 당사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100살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야곱은 왜 그렇게 될 때까지 참 우여곡절의 인생을 겪었는가? 이 계약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계약 당사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형상과 연합한 연합체, 우주 만물이 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러분이 자연 세계를 보면 전부 연합을 통해서 한 실체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혼자,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 아기 낳고, 혼자 아기 키우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똑똑해도 여자가 있어야 아기를 낳는다. 똑똑하다고 여자 없이 아기를 낳겠는가? 우주를 보라. 다 똑같다. 다 똑같은데 인생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되겠는가? 당연히 그런 것인데 사람은 유별나게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혼자 뭘 해보려고 생각한다. 혼자, 홀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흙에 씨를 심어서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오늘 우리 교회 복음은 무엇인가? 흙에 씨를 심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그런 말이다. 고상한 말이 아니다. 우리 교회에서 내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인가? 남자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아기를 낳는다는 그 말이다. 너 쉽다. 이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에 안 된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 아신다. 인생을 아시는데 사람이 못 할 일을 만들어 놓으셨겠는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만들어놓았다. 안심해라. 하나님이 못 할 일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라.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을 보니 잘하더라. 쉬운 것이다. 그것이 훈련소 갔다 와야 되는 것인가?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이 훈련소 갔다 와야 되겠는가? 저절로 좋아하는 것이다. 말 안 해도 저절로 약속하고, 저절로 설계도 하고,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아주 쉬운 것이다. 둘이 좋아하면 됐지 거기에 뭘 보태서 어떻게 하려니까 복잡하다. 둘이 좋아하면 결혼하면 되고, 아기 낳으면 된다.
내가 말한 복음은 그것이다. 천재들이 오히려 잘 못 듣는다. 너무 어려운 것을 생각하니까 잘 못 듣는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아주 쉽다. 자기 된 대로 그만큼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람이다. 더 이상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사람은 보고 듣고 만진 것을 인격화하는 그런 놀라운 기술이 있다. 보고 듣고 만졌는데 그것을 인격화한다. 그것이 신기한 것이다. 흙은 자기 앞에 들어온 씨를 무슨 씨가 되었든지 다 열매로 만든다. 또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진 것을 인격화 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대로 만들어 내버리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한 사람은 100원짜리 만들어내고, 한 사람은 1000원짜리 만들어내고, 한 사람은 만 원짜리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노력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 된 대로 만들어진다. 노력해서 만들라고 하면 다 가짜를 만들어내고 만다. 노력해서 만든 것은 다 가짜다. 인격만큼 사람만큼 만들어 낸다.
흙은 포도를 먹으면 포도 열매를 생산할 수 있는 나무를 만들어 낸다. 포도 씨를 주었는데 나무를 만들어낸다. 신기한 것이다. 눈도 코도 없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재주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을 형상화한다. 인격화한다는 말이다. 똑같은 말씀을 먹어도 인격화 할 때는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어떤 사람은 저렇게 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그 씨만 확실한 것을 먹었으면 모양은 달라도 상관이 없다.
천사는 반대로 능력이 하나님과 비슷하다. 방불하다는 말은 비슷하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비슷하고 죽지도 않는다.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은 능력이 아무리 있어도 죽으니까 천사와 다르다. 그런데 사람은 이 죽음을 통해서 온전하게 됐다. 히브리서에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히2:9)라고 한다. 이상하다. 죽임을 당하는데 거기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권이 온전하게 되었다.
거기서 참사람이 나타났다. 죽는 자리에서 비로소 참사람이 나타났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이것은 참사람이 하는 말이다. 당연하다. 하나님이 대답 안 하시니까 하는 말인데, 그것이 너무 당연하다. 이것을 인해서 하나님에게는 완전한 승리를 돌려드리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이 있냐, 없냐를 찾다가 하나님은 못 찾고 내가 내일 일도 모르는구나. 실제로 그때 내가 내일 내가 밥을 먹을 것인가 못 먹을 것인가를 몰랐다. 거기서 나는 아, 나는 피조물이구나. 그것이 내가 찾던 하나님에게 완전한 승리를 돌려드린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승리를 해버렸다. 내가 굴복하니까 하나님이 승리한다.
사람이 사람 자리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당연히 승리하신다. 사람이 사람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계속 고난당해야 한다. 송사를 받아야 된다. 천사에게 송사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 당신이 전능하다고 하더니 뭐가 전능합니까? 저 인간을 보십시오. 이럴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승리를 돌려 드릴 수도 있고, 하나님께 패배를 돌려드려서 조롱을 당하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인권의 완전한 회복이고 성취다. 말 타고 성취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취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말 타고 와서 성취가 되었으면 우리는 거기에 참여가 불가능하다. 말 타고 온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 더 못한 자리에 가서 하나님께 승리를 드렸다. 우리가 할 말이 없다. 내가 이것이 안 되어서 그렇다거나 내가 이것이 모자란다고 할 수가 없다.
나도 젊은 날에 나와 스스로 많이 싸웠다. 나는 거기서 인간은 참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것은 쓸데없는 싸움을 하느라고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안 것이 다행은 다행이지만 나는 천사 앞에서 연약하다. 천사는 안 죽는데 나는 죽으니까 그랬다. 이*철씨도 별수 없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 되니까 인생을 방황했다. 그때 차*혁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이다.
죽음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노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재산이 있다고 자랑을 하겠는가? 계급이 있다고 자랑하겠는가? 권력이 있다고 자랑이 되겠는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런데 거기가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고 회복하는 데가 거기다.
예수님 당시에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와서 은혜를 입었다. 장관이 와서 은혜를 입었는가? 제사장이 와서 은혜를 입었는가? 아니다. 참 이상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예수 그 사람은 지질이 못 난 사람들만 데리고 다니면서 교주 노릇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다. 갈릴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 어부들이다. 갈릴리는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 가장 변방에 있는 촌이다. 경계선에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변방이다. 그 사람들이 거기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거기서 태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우리의 구속자가 되겠는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속자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갈 때 경교가 되었다. 당 태종에게 들어갔다. 얼마나 조건이 좋은가. 임금이 믿어버리니까 저절로 신하들은 믿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얼마 못 가고 없어졌다. 경교는 지금 자취도 없이 다 없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뿌려진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왜 그런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유명한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으니까 안 되는 것이다. 이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더 많다. 우리 교회도 보라. 잘난 사람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더 많다. 이것이 역설이다.
그 마지막 자리에서 회복이 되니까 모두가 제 자리로 돌아온다. 잘난 자리에서 돌아오려면 돌아올 사람이 몇 명 안 된다. 그런데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회복이 되니까 모든 것이 다 회복이 된다. 전에 노아의 날에 방주를 예비할 때, ‘불순종하던 영들에게’라는 것은 구제불능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구제불능이다. 구제불능의 인간까지 내려갔다는 말이다. 그냥 여행 갔다 온 것이 아니다. 거기까지 내려갔으니까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인간이었든지 간에 다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꼭 어느 정도 조건을 갖춰야 되는 것이 아니고, 전혀 아무 조건이 없어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자리가 예수 자리다. 예수님이 있는 자리가 그 자리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는 영광스런 자리가 아니다. 위대한 자리가 아니다. 다 버리고 갔다. 다 안 되겠다고 버리고 간 자리, 거기서 하나님 경륜이 성취되었다. 만유의 회복이 만유를 포함하는 사건이 거기서 발생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는 것이다.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땅에는 평화가 되었다는 이 말이다. 종교적인 세계 안에서는 하늘에는 영광이면 땅에는 멸망이다. 땅이 영광이면 하늘이 멸망인 이런 상태이다.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한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다. 이렇게 시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시원한 세계가 어디 있는가? 시궁창에서 가장 좋은 미나리가 나왔다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잘난 사람이 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실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지금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 그래도 다 가능하다. 길이 다른 길이다. 전혀 길이 다른 길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창조한 모든 생명체는 다 이 사람 안에 포함된다. 개미도 여기도 포함되고, 지렁이도 여기 포함되고, 다 포함된다. 만유가 포함되어야 된다. 지렁이도 하나님이 만들고, 개미도 하나님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어디 포함될 데가 있어야 된다.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면 그것도 자기 권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 정체성이 확실하게 어디 가도 부끄럽지 않게 되어야 된다. 그러려면 이 사람 안에 포함되어야 된다.
옛날에 누가 잘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리셉션 하는데 초청장이 왔다고 하면서, 갈까 말까를 묻길래 가지 말라고 했다. 가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옛날에 아니까 마지못해 초청장을 보낸 것이지 지금 가서 나이도 많고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여 가지 않았다. 그때 갔으면 반갑다고 악수는 했을 것이다. 과거에 낚시도 같이 했다고 한다. 그런 사이인데 갈지 말지를 물어서 가지 말라, 가 봐야 도움이 되겠느냐고 했더니 가지 않았다. 가봐야 개밥에 도토리다. 자기 있을 데 있어야 한다. 거기 갔다고 내가 대통령 리셉션 하는데 갔다왔다는 것이 밥을 주는가? 옷을 주는가? 여비만 들고 만다.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만유를 포함했다.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와서 편히 쉬게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어떻게 편히 쉬게 하겠는가? 그 자리가 그렇게 되니까 편안한 것이다.
어떤 집에 가보면 편안한 집이 있다. 어떤 집에 가보면 좌불안석이다. 앉아야 되나 서야 되나 이런 집이 있다. 어느 집이 좋은 집인가? 깔끔하게 단장하고 있으면 보기는 좋은데, 그런 집에 들어가려면 아주 곤란하고 난처하다. 혹시 실수하면 어쩌나, 혹시 때 묻으면 어쩌나 하고 앉아 있으려면 불안하다. 그런데 그냥 평범한 집에 가면 내 집처럼 앉을 수 있다.
누구를 원하는가? 내가 가서 편히 쉴 수 있는 분을 원하는가? 아니면 바깥에 나가 자랑할 분을 원하는가? 간단한 문제이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하다 보니 어려운 것이다. 앉아야 될지 서야 될지 모르는 거기를 갔다 와서 나는 아무개 집에 갔다 왔다고 할 것이다. 그 한마디 속에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지 아는가?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련한지 아는가? 그것을 모르고 다 거기 기어들어 가려고 생각한다. 뭐 될 줄 알고 그러는데 뭐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상속자. 이 사람이 상속자다.
왜? 하나님이 개미도 만들고 지렁이도 만들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것을 다 맡겨야 되는데, 비까번쩍한 사람한테 이것을 다 맡길 수가 없다. 이것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이 지저분한 것들을 어디다 맡기겠는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것을 맡아야 할 자인데 누구한테 이것을 맡기겠는가?
내가 자식이 10명이 있는데, 한 명은 좀 작고 모자란다. 이것을 누구에게 맡겨야 한다. 자식 중에 누구한테 맡기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인데,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맡겠는가? 잘 생각해보라. 못 맡긴다. 그런 집에 못 맡긴다. 누구 집에 맡기겠는가? 제일 허물없는 사람, 이물 없는 사람, 그 아들에게 맡기면서 이 동생을 네가 책임지고 하라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어머니를 맡겨야 하는데 세상에 어디 맡길 데가 없었다. 3년 동안 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맡아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때 얼마나 옹색했던지 모른다. 그런데 아주 수더분한 사촌 형수가 있다. 밥을 지으면 평생을 지어도 밥은 항상 삼층밥이다. 그분에게 가서 내가 맡겼다. 비까번쩍하고 반듯한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다. 내 어머니를 3년간 맡겨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맡길 데가 없다. 물론 돈도 없지만, 돈을 준다고 해도 맡지 않는다. 그런데 평생 삼층밥밖에 할 줄 모르는 그 사촌 형수한테 맡겼다.
하나님이 자기가 지은 만물 가운데 아주 좋은 것만 있으면 상관없다. 반려견만 있으면 누구나 맡으려 할 것이다. 만일 지저분한 돼지 새끼를 어디 맡기겠는가? 만날 똥이나 쌀 것인데 좋은 아파트에 누가 맡으려 하겠는가?
하나님이 누구한테 자기 모든 것을 맡기겠는가? 생각해보라. 지혜로운 분은 다 생각해보라. 이것이 지혜가 아니겠는가.
내가 잘 아는 광양의 장로님이 있는데, 대단히 똑똑하신 분이다. 젊었을 때 전도사도 하고 별것을 다 했다. 선교사들과도 친하고 다한다. 아들이 3~4명인데, 위에 아들들은 다 잘 나가는 아들들이다. 하나는 고등학교 교장이고, 하나는 장로교 목사다. 그런데 맨 밑에 아들은 농사짓고 산다. 학교 공부하고 싫어서인지 농사짓고 산다. 속으로 항상 무시한다.
큰아들 오면 최고로 대우하다가 막내아들은 시시하고 찌꺼기다. 마지막에 중풍이 걸려서 그 아버지를 모실 사람은 그 아들밖에 없다. 그 아들 밑에서 돌아가셨다. 3년 동안 말도 못 하고 계시다가 그 아들이 편하니까 그 집에 찾아갔다. 그러고도 큰소리 빵빵 치고 있다. 소변을 지리니까 옷을 제대로 못 입고 기저귀를 차고앉아서도 할 말을 다 하고 산다. 언어가 막혀서 입으로 말을 못 한다. 그것을 보면서 병신이 효자라더니 그 말이 맞구나. 잘나가는 아들 집에는 못 간다. 하나님도 사람과 똑같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다 할 줄 알지만 안 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해도 내가 싫으면 안 하는 것이 사람이다.
자기의 만유를 맡겨야 되는데, 좋은 것만 맡을 사람은 많다.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서 좋은 것이 많다. 그 좋은 것은 다 가져가고 없다. 지금까지 놔두었겠는가? 만일 거기에서 좋은 것이 나왔다면 다 가져가버리지 우리한테까지 오겠는가?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 그래서 내 차지가 된 것이다. 여러분 차지가 된 것이다. 내가 뭐 잘나서 가진 것이 아니다. 다 남이 버리고 가니까 청소라도 해 드려야지 된다. 내가 이 청소를 하다가 복권을 맞았다. 쓰레기 청소하다가 누가 버리고 간 복권을 얻었다.
우리 교회 어떤 자매가 결혼식 할 때, 패물을 많이 받았다. 패물을 가지고 있자니 불안했다. 장롱에 넣어 놓아도 불안하고, 농 밑에 넣어 놓아도 불안하여 시아버지에게 맡겼다. 시아버지는 참 효부라고 생각했다. 패물을 시아버지에게 맡기는 며느리가 어디 있겠는가? 점수를 많이 땄다.
시아버지가 이것을 맡고 나니까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이것을 품고 잘 수도 없고, 어디 넣어 놓자니 그것도 불안하여 지혜를 짜냈다. 옛날 연탄 창고가 있는데 쓰레기도 두었다가 버리는 곳이다. 거기에 라면 박스에 넣어서 쓰레기처럼 놔두었다. 설마 거기는 도둑놈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레기 처리하는 사람이 와서 전부 치워버렸다. 그날 쓰레기 치우러 가는 사람은 횡재했다. 쓰레기 치우러 온 사람이 왔는데 시어머니가 모르니까 갖다 치우라고 한 것이다. 창고가 연탄만 남고 깨끗해졌다. 그때 그 보물이 없어졌다.
밭에 묻힌 보화가 이것이다. 이런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보물을 얻겠는가? 이런 횡재가 아니면, 이런 기회가 아니면, 못 얻는다.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가. 좋은 것은 다 가져가 버리고 없다. 쓰레기통에 놔둔 것인데 이것을 찾은 것은 굉장한 것이다.
시궁창에서 미나리가 산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이것은 내 얘기하는 것이다. 시궁창에서 미나리 난 것은 내 얘기이다. 보통 얘기가 아니다. 내가 왜 이 얘기를 재미있게 하겠는가? 이것은 내 얘기이니까 재미있게 하는 것이다. 남의 얘기 같으면 재미있게 하겠는가?
만유의 주가 되었다. 예수는 만유의 주다. 무슨 주인가? 구속의 주다. 만유를 회복하신 주님, 만유를 만유답게 제자리로 회복하신 주님이다. 이것은 공자도 안 되고, 석가모니도 안 되고, 소크라테스도 안되고, 아무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도 못 한 일이다. 왜 못하는가? 시궁창이 안 되니까 할 수가 없다.
자기들도 인류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애를 썼다. 공자님도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바르게 해보려고 임금들을 다 만나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안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제자들을 교육하고 돌아가셨다. 좋은 일은 하려는 사람이 아주 많다. 그래도 안 된다. 그런 분들은 하늘의 뜻을 따르려고 애를 쓰고, 어떻게 하면 사람이 올바르게 될 것인가, 이것밖에 그분들에게 소원이 있겠는가? 그런데 안 된다. 밭에 묻힌 보화를 모른다. 발견할 수가 없다. 예수를 발견한 사람도 기이하게 이렇다.
예수는 누구인가?
나를 원위치로 데려가신 분이다. 나는 거기 있는 것이 나인 줄 몰랐다. 그것이 나인 줄 몰랐다. 그것은 남인 줄 알았다. 거기는 쓰레기들만 가는 데인 줄 알았다. 나는 거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끌고 가서 거기에 놔둬 버린다. 거기에서 먹을 것을 뒤져보니 박스 안에 보물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왜 유명한지 아는가? 주제가 대부분 이런 주제니까 재미있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 드라마를 보면 지루해서 못 본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남녀 간에 둘이 연애하면서도 맨날 생각한다. 무슨 재미로 연애를 하겠는가? 정신이 빠져야 재미가 있는데 이놈의 정신이 빠지지 않고 계속 생각한다. ‘강가에’라고 한다. ‘강가에’가 생각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왜 세계대전을 일으켰는지 모르겠다. 사람 뜻대로 안 된다. 그렇게 냉정하고 그렇게 합리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일으켜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죽였겠는가?
우리가 지금 다른 세상이다. 딴 세상에 지금 와 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것은 딴 세상에 와 있다. 천당이 여기다. 다른 데가 아니고 천국이 여기다. 잠시 동안 여러분이 산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잠깐 살았지만, 이 잠깐이 잠깐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