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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향하여 출발
연일 기온이 30도 중반에 육박하여 폭염주의보 알림 메시지가 수시로 날아든다. 지리산 산행 대장정을 위해 21:30경 집을 나섰다. 지리하게 머물던 장마전선은 물러갔고 한 두 시간 전부터 가늘게 내리던 비도 그쳐 다행이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동서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동행할 친구들도 목동, 화정, 일산에서 각각 출발한다는 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약 한 달 전에 친구들과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 산행 날자를 잡았었다. 이번 산행의 코스는 성삼재를 출발하여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주 능선을 거쳐 대원사로 내려서는 이박삼일 일정의 소위 '성대종주' 산행이다.
지리산 첫 종주산행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대학 친구들과 함께 화엄사를 출발해서 중산리로 내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장터목에서 추위와 싸우며 야영을 했던 처절한 기억과 쏟아져 내릴듯 밤하늘을 가득 빛나던 황홀한 별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한 차례 더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에 올랐으나 정상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뿐 산행 기록을 남기지 않아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 때문인지 30여년 만에 다시 지리산 종주산행을 결행하기로 하고 D데이를 기다리며 마음은 한껏 기대와 설렘에 부풀었다. 지리산 종주산행이 처음이라는 H와 B도 기대가 남다를 것이다.
한편으론 무거운 배낭을 매고 긴 시간 먼 거리를 무사히 종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출발하는 날을 기다리며 장거리 산행에 필요한 큰 용량의 배낭, 에어매트, 버너 등 장비와 삼일 간의 식량 등을 틈틈이 준비했었다. 가급적 최대한 줄이려 했지만 배낭 무게는 10kg을 훌쩍 초과했다.
동서울 터미널에 여유롭게 들어서서 먼저 도착한 M과 H, 뒤이어 도착한 B와 합류했다.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비도 제법 내리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전국 각지로 떠나는 버스의 출발지인 동서울 터미널은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편의점 식당 등 여객 편의시설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의 목적지 지리산 성삼재로 가는 23:00 발 버스가 출발하는 34번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남녀노소 삼삼오오 모여든 승객들은 하나같이 크고 무거운 배낭을 버스 화물 칸에 넣고 차에 올라 빈 좌석을 거의 다 채웠다. 버스는 지리산 산행을 가는 승객을 태운 등산버스인 셈이다. 뇌우를 동반하는 빗속으로 나선 버스는 쉼 없이 밤길을 달려 다음날 02:40경 지리산 성삼재(性三峙)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종주산행 첫째날
첫날인 오늘 산행은 성삼재를 출발해서 노고단, 임걸령, 노루목, 반야봉, 삼도봉, 화개재, 토끼봉, 연하천 대피소, 형제봉을 거쳐 벽소령대피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튿날 코스는 벽소령을 출발해서 선비샘, 칠선봉, 영신봉, 세석평전, 촛대봉, 삼신봉, 화장봉, 연하봉을 거쳐 장터목대피소까지로 계획했다. 마지막 날인 3일째는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이른 새벽 장터목을 출발해서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을 오른 후, 중봉을 거쳐 대원사로 이어지는 하산길에 오를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해발 1,102m 성삼재에 발을 디디니 팔에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옅은 구름이 잔물결 치는 검푸른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뭇별들이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던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지리산은 이번 산행의 첫 대면부터 총총 빛나는 별들이 가득히 밤하늘에 대한 고대를 십분 충족시켜 주었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올라 휴게소로 이동해서 일단의 산객들과 어우러져 떡과 음료 등으로 이른 아침을 들었다. 휴게소와 붙어 있는 24시간 무인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반바지를 긴바지로 갈아 입고 윈드자켓을 꺼내 입는 등 산행 채비를 했다. 일행과 함께 주차장 가장자리 한편에 서있는 지리산 깃대종 반달이 동상 앞에서 인증 샷 한 장을 남기고 03:40경 성삼재를 뒤로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성삼재에서 2.7km 거리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산길이라기 보다는 느슨한 오르막으로 비포장 도로에 가깝다. 앞서 출발한 M을 뒤쫓아 나머지 일행 셋은 해드랜턴에 의지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짊어진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지지 않은 어깨는 힘겨워 하지만, 노고단에서의 일출을 보리라 계획했던 터라 일출 시각까지는 여유가 있어 걸음은 느긋하다. 밤새 소나기가 내렸는지 등로 곳곳에 만들어진 물웅덩이를 피하며 무넹기를 지나고 나무계단길, 자연석을 깐 너덜길 등을 거쳐 다섯 시에 못미쳐 노고단 고개에 도착했다.
고개 한편에 배낭을 내려 두고 노고단으로 향했다. M이 미리 노고단 출입신청을 해둔 터라 인원 확인 후 입구로 들어설 수 있었다. 노고단을 오른쪽으로 휘돌아 오르는 나무 데크 길 주변은 키 작은 관목과 초목만 무성하여 시원스레 전망이 트였다. 고개를 젖히니 능선에 걸려 있는 오리온 자리와 그 위쪽의 카시오페아 등 익숙한 별자리들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별들은 여명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검푸른 하늘 속으로 하나 둘 모습을 감춘다.
이십여 분 만에 노고단에 올라서니 키를 훌쩍 넘어서는 높이의 노고단 표지석과 그 뒤로 기단처럼 돌을 쌓아 올린 원뿔꼴 모양의 탑이 맞이한다. 노고단 아래 우뚝한 송신탑은 눈에 띄는 유일한 인공물이고 온 골짜기를 채운 운해 사이로 구례 화엄사 쪽 마을의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너울처럼 새하얀 운해 위로 다도해의 섬처럼 드러난 능선이 겹겹 펼쳐져 있고, 일출 시각이 가까와질수록 여명이 시시각각 어둠을 몰아내며 동편 능선과 하늘 사이에 수평으로 길게 그은 가는 붉은 빛 노을을 점점 더 하늘로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많은 산객들이 일출 시각에 맞춰 속속 노고단 정상으로 모여 들었다. 기다리던 일출 시각 05:45이 가까와지고 사방을 훤히 분간할 수 있게 될 즈음 반야봉 뒤로 겹겹 늘어선 능선 위로 태양이 홀연히 붉은 빛을 뿜으며 노을을 뚫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노고단 일출은 동해 해변의 일출에 비해 태양의 크기는 구슬처럼 작아 보였지만 그 빛은 그 어디에서 보던 일출보다 더욱 영롱하고 강렬했다. 일출을 보고 대피소로 되돌아 내려오는 길엔 어둠이 완연히 물러나고 시야가 더욱 트여 운해의 장관이 더욱 선명하게 눈 앞에 다가왔다.
산행 첫날 시작부터 노고단 일출과 더불어 지리산 10경 중 제3경인 '노고단 운해'를 직접 보는 행운까지 누리는 셈이다. 지리산 제5경 '벽소령 명월'은 초승달이 뜬 하늘이 대신하겠지만, 날씨와 시각이 맞아 떨어진다면 제1경 '천왕봉 일출'과 제8경 '연하선경'도 눈앞에 목도하는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 시경 노고단 출입구로 되돌아 내려와서 지리산 주 능선을 따라 임걸령으로 향한다. 이처럼 이른 시각에 마주오는 산객이 있어 어디서 오냐고 물으니 노고단 인증 스탬프를 찍으러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경사가 거의 없는 너덜길과 관목 숲길 등이 길게 이어진다. 저번 주 고도가 이곳과 비슷한 계방산에서 눈마춤했던 동자꽃 모싯대 등 들꽃들이 이곳 등로 주변 곳곳에서 눈에 띈다. 관목이 다하고 돌탑이 나타나는 곳에 산림청 백두대간 식생조사단원들이 내어준 자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등로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산너울 사이 수많은 골짜기들은 여전히 운해에 잠겨 있다. 평탄한 돼지령과 피아골삼거리를 지나 07:30경 임걸령에 닿았다.
임걸령의 샘물은 듣던 것과 달리 끊길듯 끊기지 않으며 간질나게 졸졸졸 흘러 내린다. 물주걱에 물을 받아 물통을 채우고 있던 젊은 남녀 산객 한 쌍이 자리를 비켜주며 주걱를 건네는 아량을 베푼다. 줄어든 물병을 채울 마음을 접으며 노루목으로 향한다.
매년 두어 번 지리산을 찾았다는 M의 말대로 노루목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노루목으로 향하는 길 좌측 앞쪽으로 반야봉의 원만한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노루목에 올라서서 바위 무덤 주변에 배낭을 내려두고 지리산 제3봉인 반야봉으로 향한다.
반야봉 정상까지는 가파른 비탈이 계속 이어진다. 등로 옆으로 고사목들이 얼굴에 홍조를 띤 시골 처녀처럼 생긴 동자꽃 군락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광경이 스쳐 지난다. 산정에서 내려오는 두 젊은 여성 산객에게 산정 위로 비둘기 날개처럼 펼쳐진 구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고 발길을 재촉했다.
높게 떠오른 태양은 뜨겁고 달아오른 몸은 땀이 비오듯 하지만 수목 사이로 난 그늘진 등로를 지날 때면 선선함이 느껴진다. 반야봉 정상은 그 턱밑에 가파른 나무 계단을 내놓으며 산객을 맞아준다.
복슬강아지의 꼬리처럼 생긴 산오이풀이 반기는 산정의 저쪽 끝에서 반야봉 정상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등로 쪽으로 무채색 구름이 노고단을 넘어서 천군만마처럼 능선을 집어삼키며 엄습해 와서 제3봉인 반야봉은 넘보며 눈 아래 운해를 펼쳐 놓았다. 천왕봉 쪽 능선은 피어오른 흰 뭉게 구름이 한 폭 그림을 펼쳐 보이며 손짓한다.
노루목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삼도봉까지 약 1km 이어지는 바위 너덜길에 발목과 무릎이 힘겨워한다. 정상 아래로 마중나온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날라리봉으로도 불리는 삼도봉에 올라섰다. 넓고 평평한 바위 봉우리 위에 한 면에 각각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라고 적힌 삼각뿔 형 표지석이 놓여 있는 삼도봉 정상은 이 지점이 3개 도의 경계가 맞닿는 곳임을 알린다. 여름이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고 시위하듯 고추잠자리 떼가 어지럽게 군무를 추고 있다.
앞에 화개재 고개와 토끼봉이 기다린다. 화개재로 내려가는 계단은 땅속으로 꺼질듯 끝이 없을 듯 아래로 이어진다. 등로 옆 넓고 평평한 능선에 잡초 사이로 원추리 등 들꽃이 만발한 화개재를 지난다. 이곳 화개재는 장터목, 벽소령과 더불어 각각 전라 경상 충청의 내륙과 삼한시대 때부터 장터 구실을 했다는 온갖 물산의 집결지 화개(花開) 장터를 연결하는 교역의 통로 역할을 오랫동안 담당해 왔을 것이다.
눈에 익숙한 동자꽃은 등로 주변에 지천이고 이질풀, 벌개미취, 꽃며느리풀꽃 등도 가끔씩 눈에 띈다. 삼도봉을 타고 넘어며 뒤쫓아 오는 구름이 무거워진 발길을 재촉했다.
무성한 구상나무와 전나무 숲 사이로 급경사 등로가 길게 이어지는 토끼봉 오르는 길은 버겁기만 하다. 쉬지 않고 토끼봉으로 먼저 직행한 H의 체력에 혀를 내두르며 나머지 일행은 그 중턱에서 휴식을 취했다. 등로 주변에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자꽃을 지개꾼 삼아 비탈을 오르면 좋겠다는 어쭙잖은 생각이 들 지경이다. 화개재부터 40여 분을 토끼봉 비탈과 씨름하며 그 위로 올라서니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듯 흠뻑 젖었다.
해발 1,534m 토끼봉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력을 충전했다. 시각은 정오가 지나 오후 1시로 향하고 우리 일행은 3km 거리의 연하천대피소로 향한다. 임걸령 샘에서 물을 확보하지 못해 수통에서 간당거리는 물이 신경을 그슬리며 발길을 재촉한다. 앞서 치고 나아가는 동행을 쫓아가지만 B와 나는 걸음이 자꾸 뒤쳐지며 걷다가 쉬기를 반복했다. 명선봉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에 털썩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해는 구름 속에 숨었고 바람은 간간이 불어 이렇게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발 1,583m 명선봉 너머에 숨어 있을 대피소에 먼저 도착했다는 M의 연락에 B가 물이 간절하다는 회신을 하고 발을 옮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하천대피소에서 물병을 들고 명선봉까지 되돌아 올라온 M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생명수를 만난듯 갈증을 달래고 나무계단을 따라 400여 미터를 내려가서 연하천대피소에 닿았다. 뒤돌아보니 고통스럽게 넘어온 명선봉 위로 그림처럼 목화꽃 같은 새하얀 뭉게구름이 걸려 있다.
다른 대피소에 비해 샘물 맛이 좋기로 소문난 연하천대피소는 노고단고개에서 10.5km, 천왕봉까지 15.4km를 남긴 지점에 위치하여 정통적인 2박 3일 지리산 주능선 종주의 첫 숙박지로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연하천대피소에서 한 시간가량 머물며 물을 끓여 B가 준비해온 건식 즉석 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들며 이른 새벽부터 10시간가량 이어진 긴 산행의 피로도 조금 누그려뜨렸다.
지친 다리는 무겁기만 한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으니 한발 한발 걷다 보면 오늘의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벽소령대피소까지의 거리가 3.6 km라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15:40경 연하천대피소를 뒤로한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700m를 전진하자 지도 앱에 삼각고지로 표기된 지점에 음정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제 형제봉을 넘어서면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벽소령대피소가 나올 것이다.
해발 1,452m 형제봉 봉우리 위에 도착할 즈음 어느 방향에선가 시나브로 밀려온 안개구름이 주위 숲을 뒤덮으며 시야를 가두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위가 자리한 정상부를 지나 내리막 비탈을 조금 내려오자 거대한 암벽 두 개가 등로 옆을 가로막고 우뚝 솟아 있다. 필시 이 두 개의 바위를 두고 형제봉이라 이름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형제봉을 넘어서며 금세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했던 벽소령대피소는 한 시간 가량 더 절치부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17:58경에 홀연히 닿았다.
노고단과 천왕봉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하여 지리산 주 능선의 허리에 해당하는 이 대피소는 수용 가능인원 63명으로 개별난방이 되는 수면실, 조리실, 급수대, 순환수세식 화장실 등을 구비하고 있다. 아무리 시설이 좋다고 해도 대피소에서는 비누나 치약을 사용할 수 없고 세수할 곳도 없어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수습하여 하루 저녁을 넘기는 일이 고역이다. 수면실을 배정받고 배낭을 내린 후 물 티슈로 몸과 머리의 땀을 닦아 내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저녁을 준비하여 고픈 배를 달랬다.
일행은 다들 각기 준비해온 음식물을 서로 먼저 소진하여 배낭 무게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줄여 보려 안달이다. 가져온 음식물의 포장지 등 쓰레기는 되가져 가야하고 갈아 입고 벗은 옷가지는 땀에 젖어서 배낭의 무게는 좀체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을 든 후 잠시 수면실에 몸을 뉘였다가 밖으로 나가 어두워진 서쪽 하늘에 가늘게 뜬 초승달과 온 하늘에 총총 빛나는 별을 눈에 가득 담았다. 오후 9시가 되자 대피소 수면실은 소등이 되었다. 침상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가 멀어지는 듯 꿈나라 속으로 빠져들며 길고 길었던 산행 첫날이 지나갔다.
종주산행 둘째날
벽소령대피소에서 산행 이튿째 날을 맞이했다. 작은 창틀이 뚫린 복층 구조의 목재 건물인 대피소 수면실은 많은 산객을 수용한 탓인지 열기로 잠을 설치게 했다. 자정 쯤 잠에서 깨어 바깥으로 나가서 서늘한 공기에 손으로 팔을 감싸며 잠시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눈에 담아 보았다.
새벽 세네 시부터 대피소 수면실 여기저기에서 짐을 챙기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온다. 2박3일의 여유로운 일정으로 급할 것이 없는 우리 일행은 느긋하게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을 준비해서 들고 7:35경 장터목 방향으로 길을 잡아 출발했다.
오늘은 벽소령대피소를 출발하여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 연하봉을 차례로 거쳐 장터목대피소까지 약 10km를 이동할 예정이다.
출발한지 얼마지 않아 뒤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호기롭게 다가오는 젊은 산객 일행 세 분에게 길을 비켜주고 오버 페이스하지 않으며 진행한다. 금세 땀이 온몸을 적시는데, B 처럼 어제 입고 물에 헹구어 놓아 여전히 축축한 셔츠를 다시 입고 온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벽소령대피소에서 구(舊)벽소령길 이정표까지 1.1km는 기대하지 않은 흙길 등 평탄한 등로가 이어져 순식간에 지나왔다. 기실 구벽소령길은 1971년에 준공된 군사작전 도로로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벽소령 종단도로였던 것이다. 1987년 국립공원공단 설립 후 벽소령대피소에서 이곳까지 구간은 폐쇄되고 현재는 자연회복 중이라는 안내문 설명이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출발한 지 1시간만에 해발 1,478m 덕평봉을 지나고, 08:50경 봉우리 아래 호젓하게 자리한 선비샘에 도착하여 앞서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H와 합류했다. 넓적한 바윗돌로 단정하게 단을 쌓고 대나무 파이프로 샘물이 흘러 내리게 한 샘은 그 이름처럼 단정하고 물맛도 청량하기 그지없다. 이 샘에는 그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유래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평소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던 덕평골 화전민 이씨 노인이 죽어서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자신을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은 그의 유언을 따랐고, 그로부터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샘터 물을 마실 때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구부려서 무덤에 절을 하는 형상이 되어 남들로부터 존경 아닌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_출처: 선비샘처 안내문
다시 몸을 추스리고 마음을 다잡아 길을 재촉한다. 힘겨운 산행 중 동행자와 서로 주고받는 격려의 말은 큰 힘이 된다. 이야기는 어쩌다가 학창시절 학폭과 체벌, 군 복무 시절 고참들의 괴롭힘, 직장 상사의 갑질과 하급자의 을질에 까지 미쳤다. 대학동창인 우리 일행은 하나같이 그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당해 본 세대이다. 갑질 당한 얘기에 빠져들어 잠시 가파른 비탈 등 험한 등로도 힘든 줄 모르고 올랐다.
끝이 없을 듯 치고 오르던 칠선봉으로 가는 비탈길 중간쯤 넓고 평편한 능선에 앞쪽으로 툭 트인 조망을 펼치는 전망대가 자리한다. 그 위에 자리한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을 찾아보세요!' 제하의 안내판에 표시된 촛대봉, 영신봉, 세석평전, 연하봉, 장터목, 천왕봉, 제석봉, 중봉 등이 머리에서 잠시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밀려온 안개에 묻혀 버린다.
지리산은 면적 약 483km²로 경남 하동, 산청, 함양,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등 3개도, 1개시, 4개군, 16개 읍ㆍ면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군이다. 지리산 산행 중 잠시라도 정신을 팔다 보면,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어디쯤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잃어버리기 쉽상이다. 우리 일행은 이번 종주산행에서 1,400미터가 넘는 봉우리 15개를 거쳐 가야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봉우리들을 지나왔고 앞으로 넘어야할 봉우리가 무엇무엇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해발 1,552미터 칠선봉 정상부에는 훤칠한 암봉들이 서로 널찍한 거리를 두고 군데 군데 자리하는데, H와 나는 그 이름처럼 덩치가 큰 암봉만도 일곱 개는 될 것이라는데 서로 맞장구를 쳤다.
칠선봉 정상부를 지나니 앞쪽에 낙남정맥의 출발점으로 도깨비 뿔처럼 생긴 암봉을 호위무사처럼 전면에 내세운 영신봉(靈神峰)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봉우리가 만든 안부로 내려와서 영신봉의 뿔처럼 생긴 봉우리 좌측으로 휘돌아 난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랐다. 앞쪽 멀리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능선과 오늘 하룻밤을 묵을 벽소령대피소가 눈에 들어와 반갑기 그지없다.
나무계단 길을 통해 뿔처럼 생긴 암봉을 휘돌아 거대한 바위들이 우뚝 우뚝 어우러져 여러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정상부로 올라섰다. 멀리 지나온 능선에는 안개구름이 산줄기를 타고 넘으며 뭉개구름을 하늘로 피워 올리고 있고, 앞쪽 능선은 호시탐탐 넘보는 구름을 막아서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산오이풀이 암봉 틈새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붉그레한 꽃을 피운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봉우리 아래 등로 옆에 서있는 해발 1,652m 영신봉 표지석을 스쳐 지났다.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며 세석대피소로 가는 능선을 내려서는 등로는 한결 활달하여 앞서 걷는 일행들의 웃음 섞인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정오 쯤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여 점심을 들고 패트병에 물을 보충했다. 세석대피소의 샘터 샘물은 선비샘보다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도 그만이다. 샘터로 내려가는 입구의 이정표가 샘터 쪽 6km와 10km 지점에 각각 거림마을과 청학동이 있다고 알린다.
풀었던 배낭을 더디게 다시 꾸리고 있는 B와 진주서 오셨다는 노부부 산객과 마주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M에 앞서 먼저 출발한 H를 뒤쫓아서 12:45경 세석대피소를 뒤로했다.
대피소 쪽에서 한참동안 뒤따라오는 M의 목소리를 들으며 촛대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석평전은 과거 산불로 훼손된 후 구상나무와 같은 침엽수림 아래 자라던 여러해살이풀인 호오리새가 여러 종류의 들꽃, 키작은 나무, 교목 등과 섞여서 가장 넓게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등로 옆에 씨앗 포집용 망태기를 쓰고 있는 야초들이 눈길을 끈다. 온몸이 햇빛에 드러나는 등로를 따라 걷자니 서늘했던 고원에서 한여름으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다.
촛대봉 정상은 생태복원을 하기 위함인지 통로를 막아놓아 그 아래 쪽에 솟아 있는 암봉 위로 올라섰다. 암봉에서의 전망은 거칠 것 하나없이 사방이 트였고, 능선을 타고 넘는 서늘한 바람에 온몸을 적신 땀과 열기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릴듯 기분이 상쾌하다.
촛대봉에서 삼신봉, 화장봉, 연하봉으로 이어지는 등로 또한 도처가 힘겨운 고비이다. 그 초입 우측 능선에 키작은 관목 숲 사이에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는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기이한 경관을 그려내고 있다. 삼신봉을 지나 화장봉 위에 올라서니 연하봉이 더욱 가까이 다가섰고, 구름이 걷힌 천왕봉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을 펼쳐 보인다.
"세석고원과 장터목 사이 연하봉에는 청암절벽이 솟고 철따라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고사목과 어우러지고, 촛대봉 북사면의 한신계곡을 넘어온 운무가 이 봉우리에 잠시 머물면, 신선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날것만 같은 꿈같은 선경이 펼쳐진다."
연하봉은 지리산 제8경 연하선경을 묘사하는 내용 그대로의 장대한 풍경을 펼쳐보이며 산객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는다. 정상부에 피라미드처럼 생긴 암봉이 자리한 연하봉이 구상나무 숲 위로 우뚝 솟아 있고, 그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길게 뻗은 능선 위에 장군총 무덤을 닮은 꽁초봉도 또렷이 모습을 보인다. M의 말에 따르면 옛 산객들이 힘든 산행 끝에 꽁초봉에 올라 꽁초 담배를 피우면서 감상하는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연하선경은 그 속에 들어가서 보아야 그 진면목이 보인다는 M의 채근에 일행은 아쉬운듯 촛대봉을 뒤로하고 연하봉으로 향한다. 연하봉에 올라서니 제석봉과 천왕봉이 더욱 선명하고도 눈앞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천상의 화원처럼 키가 작은 낮은 관목숲 사이에 꽃이 만발한 능선 사이로 난 등로를 따라 15:40경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침상을 배정받고 배낭을 내렸다.
힘겨웠던 첫날에 비해 이튿날은 약 12km 8시간에 걸친 적당한 산행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피소로 천왕봉 일출산행의 전초기지인 이곳에 안착하여 피곤을 풀며 내일 산행을 준비할 수 있어 다행이다.
종주산행 사흘째
산행 세째 날이다. 잠이 깨어 시각을 보니 여느날보다 이른 자정이 조금 지났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복도로 에어매트를 들고 나와 미리 접어 두었다. 후끈하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대피소 실내와 달리 바깥은 한기가 느껴질만큼 서늘하다.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스마츠 폰으로 담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눈을 크게 열고 마음에 담아 본다.
일출 시각은 05:40경이지만 새벽 세 시 반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장터목 대피소를 출발해서 1.7km거리 천왕봉으로 향한다. 랜턴으로 등로를 밝히며 제석봉으로 오르는 걸음이 가파른 비탈에 익숙해졌는지 덤덤히 받아들인다.
몇몇 산객들도 눈 띄는데 배낭을 짊어진 산객이 있는가 하면 스틱만 짚고 오르는 산객도 있다. 많은 산객은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나 대원사 쪽으로 내려가는 험로를 피해 벽소령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쉬운 등로로 하산하는 코스를 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터목에서 출발한 지 20여 분쯤 거리에 '제석봉 고사목' 제하의 안내판과 그 뒤로 고사목 몇 그루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인다. 1950년대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숲이 울창했는데,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려 불을 질러 지금처럼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제석봉 고사목 지대가 장관이라고 하지만, 어둠으로 인해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이 초래한 광경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뒤로 걷는 동행의 랜턴 불빛이 발밑으로 향할 때마다 하늘에서는 점점 밝게 빛나는 별무리가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과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외로이 서있는 한 그루 고사목은 가지마다 초롱초롱한 별을 가득 달고 서있다. 바윗돌 덮개가 덮인 암벽 사이로 철계단이 놓인 통천문을 통과하면 천왕봉 정상이 지척이다.
여명이 채 밝아오기 전 어렴풋이 사방이 분간될 즈음 천왕봉에 올라섰다. 일출까지는 한 시간여가 남았다. 정상 바로 밑 옛 성모상(聖母像)을 모신 신당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널찍한 평지에 올라 나란히 서있는 '천왕봉 성모상', '천왕봉의 의미', '지리산 천왕봉' 제하의 안내문을 랜턴 불빛에 비추어 읽어 보았다.
지리산 성모는 천왕(天王), 천왕할매, 마고(麻姑)할매, 마야부인(摩耶夫人) 등으로도 불리는 지리산 수호여신이다. 1970년대 초까지 천왕봉에 있다가 없어진 것을 1978년 혜범(慧凡) 스님이 다시 찾아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벌써 올라와 있는 산객은 족히 3~40명은 되어 보이고 삼삼오오 끊이지 않고 속속 정상으로 모여든다. 등 뒤편 올라온 등로 쪽에서 불어오는 이른 새벽 바람이 매섭고 차다. 일출 시각까지는 한참이 남았지만 차츰 여명이 희미하게 밝아 오자 정상 표지석 주변에는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산객들이 하나둘 모여 든다.
표지석 앞면에 '智異山 天王峰 1915 M' 뒷면에 '韓國人의 氣想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글귀가 각각 쓰여 있다. 뒷면 '韓國' 글귀가 흐릿한데 그 연유를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1982년에 새로 세운 이 표지석 뒷면의 당초 글귀는 '嶺南人의 氣想 여기서 發源되다'이었다. 뒷면의 글귀 중 '嶺'자가 '慶'자로 바뀌었다가 '慶南'이란 글자가 누군가에 의해 망실이 되었다. 그후1980년대 중반 산악인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慶南'이란 글자 자리에 '韓國'이하는 글자를 다시 새겼다."
_출처: 100san.tistory.com '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변천사'
일출이 시작되기 전 잔잔한 수면처럼 평평한 구름의 바다 위로 노을이 긋고 있던 일직선 붉은 선은 점점 더 두터워 지며 푸르스름하게 밝아 온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산 아래 안긴 마을의 불빛이 골짜기를 따라 길게 이어졌고, 오른편 능선 가운데 갇힌 구름은 하얀 눈으로 덮인 호수를 연상케 한다.
2024년 8월 8일 05시 43분, 여기저기서 산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며 천왕봉의 일출이 시작되었다. 해변이나 다른 산의 산정에서 맞이하던 일출에 비해 태양의 크기는 더 작고 옹골차고 밝기는 수십 배는 더 밝고 강렬해 보인다. 이박 삼일 종주산행의 정점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지리산 제1경을 이렇게 목도하게 되니 감흥이 남다르다. 천왕봉에서의 해맞이가 누구나 경험할 수 없고 오죽 힘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맞이할 수 있다고 했을까!
선인들도 사랑한 지리산
두륜산, 방장산 등으로도 불리는 지리산은 한반도 남부 민족의 영산이라 여겨져 많은 이들이 찾아왔고 고려 때 이인로, 조선 때 이륙,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조식, 유몽인, 조위한 등은 지리산에 관한 시문도 남겼다.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1472년 음력 8월에 조위, 유호인 등과 함께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천왕봉에 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새벽녘에 해가 동녘에서 솟아오르려 하자 노을이 영롱하게 빛났다. 일행 모두 내가 매우 지쳐서 재차 천왕봉에 오르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나는 '여러 날 동안 날씨가 계속 흐리다가 갑자기 맑게 개니 하늘이 나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많구나. 지금 천왕봉이 지척에 있는데 힘써 다시 올라보지 않는다면 평생 답답한 마음을 끝내 말끔히 씻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서 석문을 통과하여 위로 올라갔다. 성모묘에 들어가 다시 술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확 트인 것은 진실로 신명의 은택입니다. 참으로 매우 기쁘하며 감사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아무리 높이 나는 기러기나 고니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 날 수는 없을 것이다."
_심경호의 ≪산문기행≫ '김종직의『유두류록(遊頭流錄)』中
일출이 끝나고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이리저리 오가며 산정이 선사하는 장관을 만끽하며 욕심껏 사진도 남겼다. 하산을 채근하며 B와 함께 앞서 길을 잡는 M와는 달리 향도를 맡아 산행을 이끌던 H는 사진에 집착하며 한참 더 나를 붙잡아 둔다. 평소처럼 날씨, 코스, 교통편 등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산행대장 M은 대원리로의 긴 하산 길과 원지에서의 서울행 차편 등을 감안하여 길을 채근했을 터이다.
천왕봉에서 6시경 출발했다. 중봉, 써리봉, 치밭목대피소 등을 거쳐 유평리로 이어지는 약 12km의 하산길 등로가 기다리고 있다. 당초 나는 천왕봉에서 5.4km 거리로 짧은 코스인 중산리로 내려가는 소위 '성중종주'를 생각했으나, 하나같이 급경사를 걱정하며 보다 느슨한 경사의 '성대종주'를 원한 동행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주 능선의 여러 봉우리들 보다 볼거리가 많지 않고 길고 지루하기 때문인지 대원리 코스에서 눈에 띈 산객은 같은 방향의 부자(父子) 산객 한 팀과 무제치기 폭포 부근에서 올라오는 만난 산객 두 분이 전부였다.
가파른 비탈을 치고 오르자 해발 1,874m로 지리산 제2 고봉인 중봉은 정상 턱밑에서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터를 내어준다. 중봉을 지나자 강렬한 태양이 따갑게 내려쬐고 이제나저제나 하는 써리봉은 나타날 줄을 모른다.
종주산행의 말미는 늘 악전고투다. B는 지난 유월에 다녀온 설악산 공룡능선 종주 산행 때 양폭대피소에서 천불동계곡을 거쳐 신흥사로 이어지는 하산길을 천신만고 끝에 내려온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는가 보다. 설악산을 오르다 보면 아름다움을 볼줄 아는 안목이 생기고, 이처럼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한 번이라도 해보면 여리던 심지(心志)도 더욱 단단하고 굳세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 구름이 타고 오르는 천왕봉의 장관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주는 써리봉을 지나고 치밭목대피소를 향해 매진한다. 치밭목대피소를 목전에 둔 등로 옆 듬성듬성 자리한 바위 뒤에 걸터 앉아 숨을 골랐다. 이정표가 해발 1,623m라고 알린다. 천왕봉에서 출발한 지 2시간 20분이나 지났는데 고도는 고작 300m 가량 낮아진 것이다.
치밭목 대피소에서 유평마을로
아홉 시경 치밭목대피소에 도착해서 그 아랫 쪽 100여미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샘터에서 간단히 건식 식사를 라고 유평리 쪽으로 출발했다. 대피소의 하산길 등로 옆에 서있는 이정표가 대원사까지 7.7km, 대원사주차장까지 9.8km라고 알린다.
이정표를 보고 등로에서 84m 떨어져 있다는 무제치기 폭포로 달려간 H는 뒤처져 따라오던 M과 B와 거의 동시에 폭포 쪽에서 되돌아왔다. H가 찍은 3단 너른 폭을 타고 내라는 폭포 동영상은 호쾌하고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마음을 다잡고 계곡 옆으로 난 너덜길을 오르내리며 걷는 길 땀은 비오듯 쏟아지며 눈으로 흘러들어 눈물인지 땀인지 구분이 가질 않을 지경이다. 계곡은 등로 아래 멀찍이서 물소리만 요란할 뿐 좀체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 비탈길 암벽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에 쪽세수로 땀을 씻어 본다.
앞서 간 H가 유평리 마을에 도착하기 약 1km 전쯤 등로 옆 계곡에 몸을 담그고 우리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주저없이 계곡으로 내려가서 발과 몸을 담그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 입었다. 한결 몸이 가벼워 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듯하다.
유평마을이 가까와지자 매미 떼창이 계곡 물소리와 함께 요란하다. 천왕봉에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 끝 유평마을 후면으로 내려서며 길고도 힘들었던 2박3일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무리 한다.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한 민박 집 입구에 걸려 있는 '무릉도원'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여 학문을 몰두했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지리산을 사랑해서 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 하며 17번이나 올랐다고 한다. 남명은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듯이 어렵고 악을 따르기는 무너져내리듯 쉽다."고 했다.
실로 산을 오르는 일은 선(善)을 행하는 일처럼 어렵고도 힘들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을 메고 시시각각 짓눌러 오는 고통을 견뎌내며 지리산 주 능선의 수많은 비탈을 오르내리는 산행은 오죽하랴. 지리산 산행을 하듯 세상을 대하면 세상의 어떠한 나쁜 유혹이나 고난도 감당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인들이 즐겨 산을 찾은 이유를 갈파한 어느 작가의 글이 마음에 닿는다.
"오늘날에는 지리산 종주 및 등반 코스가 선인들의 유람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길들에서 선인들이 산에 올라 정신세계를 확충하였던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기에 외줄기 길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산수를 그린 그림에 외줄기 길이나 외나무다리가 종종 나오는 것은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_심경호 ≪산문기행≫ 중
유평마을로 내려섰다. 앞장 서서 걷던 H가 히치하이킹을 해서 대원사길을 따라 유평마을에서 대원사로 향하는 트럭을 불러 세웠다. 인심 좋은 기사분을 만난 덕에 우리 일행은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대원사 버스정류장까지 약 4km를 도보로 이동하는 고역을 피할 수 있었다. 때마침 B는 완전히 떨어져 너덜대는 등산화 한 쪽 밑창을 뜯어 버리며 트럭을 얻어 타게 된 것이 천운이라며 안도한다.
대원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지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고, 짐칸에 배낭을 넣고 버스에 오르니 모든 근심이 날아간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 졌다. M은 예매해 두었던 15:50 원지 발 서울남부터미널 행 버스표를 14:40 출발편으로 바꾸었다.
원지(院旨)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 입고 정류장 건너편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으로 허허로워 하는 속을 달랬다. 국밥에 '지리산 단성 생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니 달아올라 식을 줄 모르던 몸의 열기가 일거에 날아가 버린 듯하다.
지리산 종주산행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때때로 환희와 안도의 순간도 있지만 길고 지루하고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치는 순간 대부분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마음 먹기 일쑤다.
그렇지만 한 번 지리산 종주산행을 다녀왔다고 해서 로망을 이룬 것은 아닐 것이다.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이상'이라는 말뜻처럼 로망(roman)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꿈꾸고 체험하고 싶어하는 미래희망형이기 때문이다.
가물거리던 청년시절 지리산 종주산행의 기억을 아쉬워하며 30여 년 만에 다시 지리산 종주산행을 결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산행을 함께한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또 다른 로망을 함께 하길 고대한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