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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빛나는 자유
(사도행전 21:17-26)
[ 서론 ]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권리는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공평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좋은 사회일수록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겠지요. 노력한 만큼 공평한 결과가 나와야 억울하지 않습니다. 또 누군가는 안전해질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을 가장 중요하게 꼽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을 보신 적이 있나요? 헌법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국민의 권리는 ‘자유’입니다. 그만큼 침해받기도 쉽고, 가장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이겠지요. 좀 많지만, 헌법에 나오는 자유들을 들어보십시오.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등등. 많기도 하지요?
우리는 숨 쉬듯이 당연하게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유가 없다면 어떨까요? 배우자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과 외모를 가진 사람과 평생 함께해야 한다면 말이지요. 나의 적성이나 흥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직업을 평생 가져야 한다면 어떨까요? 싫어하는 음식만 매일 먹어야 한다면요? 자유가 없는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복음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했지요. 특히 율법에 얽매이거나, 다른 사람을 율법으로 얽매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온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면서 자유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전도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무언가에 강하게 얽매이는 비자유인과 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주는 자유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며, 복음으로 빛나는 자유에 관해 세 가지로 말씀을 듣겠습니다. 자유의 두 가지 특징과 자유를 주신 분입니다. 말씀을 통해 참 자유를 깨닫고 누리시길 바랍니다.
[ 얽매이지 않는 자유 ]
복음으로 빛나는 자유의 특징 첫 번째입니다. 복음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줍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시작한 곳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총 세 번에 걸쳐서 전도 여행을 떠났는데, 1차, 2차 전도 여행은 모두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번 3차 전도 여행에서는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바울은 왜 자기 본교회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왔을까요? 예루살렘에는 이미 교회가 굳건하게 서 있었는데 말이지요. 여기서 바울이 누렸던,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18절을 보시면 바울 일행은 야고보와 장로들, 즉 직분자들을 만납니다. 공식적인 교회 회의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선교 보고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바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습니까?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멋지게 이기기도 하고, 병든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많이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핍박과 고난을 겪었지요.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하고, 줄을 타고 내려와서 도시를 탈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릴 것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렸지요. 그런데도 지금 예루살렘에 와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로마 제국의 변방 식민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선교 보고를 할 의무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급’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바울이 이 모든 일을 이루신 분이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의 사역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께 주목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나!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도 복음을 전하는 나!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낸 나!’ 그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어떤 말씀이었을까요? 사도행전 1:8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바울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서 땅끝까지 이르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쩌다가 한 번 선한 일을 해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이루거나 가진 게 많아질수록,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우리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나보다 많이 이루거나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성취와 소유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만큼 선해 보이지 않거나, 성취와 소유가 적은 이들을 은근히 깔보기 쉽습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얽매인 노예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면 어떻게 됩니까? 2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누구도 질투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과시하거나 남을 깎아내리지도 않지요. 오직 송영과 찬양만이 남습니다. 자기를 잊어버리고, 서로 ‘급’을 따지며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높이며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입니다.
바울이 얽매이지 않은 또 다른 대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반응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바울이 굳이 예루살렘에 온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4:17에 따르면, 바울은 자기 민족을 구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수년 전 유대에 큰 흉년이 들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고 목양한 이방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할 것들을 모아서 온 것이지요. 로마서 15:25-27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은 여러 지역을 돌면서 수고하며 구제비를 마련해 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런 바울의 섬김을 잘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로마 교회에 기도 요청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로마서 15:31 하반절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자, 이렇게 수고하고 기도하며 모아온 구제비를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오늘 본문 20절부터 그 내용이 나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답게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문제는 21절에 나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헛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모세의 율법이 가리키는 바로 그 구원, 할례가 가리키는 바로 그 언약의 성취, 유대인의 관습이 내다본 대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쳤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또, 이방인들이 회심했을 때 그들에게 유대인의 법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한 모함과 헛소문이 퍼졌고, 유대인 신자들은 그런 소문을 듣고 바울에게 의혹을 품고 있었습니다.
기껏 수고해서 돈을 모아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돕기 위해 왔더니,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계하고 의심하는 반응이었지요. 앞서 13절을 보시면, 바울은 죽을 각오까지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면, 바울 자신의 수고가 아무 쓸모 없었다고 생각할 만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생색도 내지 않고, 도리어 형제들이 불편한 마음으로 구제를 받지 않게 기도하며 행동합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위기에 빠진 그분의 자녀들을 도우신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이 이루어지는 것에 집중하십니까, 아니면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하십니까?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마음을 고치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십니까, 혹은 우리의 호의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주목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행하는 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 하반절입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반대로 우리를 통해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마태복음 6:4 하반절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주목할 때,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분의 자녀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반응이 우리의 순종과 선행을 결정하게 두지 맙시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에도 얽매이지 맙시다.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자신과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목하게 합니다. 이 복음이 주는 자유!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 얽매일 수 있는 자유 ]
복음으로 빛나는 자유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복음은 기꺼이 얽매일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은 자유 그 자체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 줍니다. 바울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었지만,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에 바울이 기꺼이 따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형제에게 얽매일 수 있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이 22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면 어찌할꼬”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의혹을 가진 유대인 신자들이 시험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따랐던 것 율법, 할례, 관습을 완전히 부정하는 바울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하겠다고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오해를 풀자고 제안합니다.
23-24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서원한 네 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실인 서원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헌신하겠다는 서원입니다. 최소 30일부터 삼손처럼 평생 나실인 서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서약을 하는 기간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에 칼을 대지 않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았습니다. 서약이 끝나는 날 머리를 자르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나실인 서원은 아주 경건한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장로들은 바울이 이 서원을 한 사람들과 함께 결례, 즉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행하라고 제안합니다. 서원을 한 사람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의식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랜 기간 이방에 있었기 때문에 정결예식을 행한다면, 그가 유대인의 관습과 율법을 존중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또한 나실인 서원이 끝날 때, 머리카락을 자르고 제물을 바치는 법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한 사람당 드려야 할 제물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를 포함하여 꽤 비용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나실인 서원을 하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따라서 이 비용을 대신 지불해 주는 사람은 아주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바울이 사비를 들여서 서원을 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비용을 대주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기준으로도 아주 경건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지요.
사실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잘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왔던 또 하나의 이유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편, 바울은 율법과 관습이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았습니다. 바울 자신은 율법과 유대인의 관습을 존중하되, 전혀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요.
그런데 바울은 기꺼이 공개적으로 정결의식을 행하고, 비싼 값을 주고서 서원한 사람들의 제물 값을 대어 주었습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고, 쓸 필요가 없는 돈을 쓰면서 바울은 기꺼이 얽매였습니다. 바울에 대한 소식 때문에 근심하고 시험에 들 수 있는 형제들! 바로 그들에게 얽매인 것이지요. 형제들의 오해를 풀어 주고, 교회를 굳건하게 세울 수 있다면 바울은 얼마든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정도로 자유로웠습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는,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기꺼이 얽매일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하는 방식, 말할 때 쓰는 표현, 일상의 습관 등등. 그러면서 정작 소중한 형제자매, 중요한 관계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때로 나의 어떤 점이 누군가에게 시험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해일 수도 있고, 정말 시험 거리가 될 만한 것일 수도 있지요.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사소한 것에 신경 쓰냐며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이용하십니까? 상대방이 스스로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오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소위 “쿨한 관계”를 맺는 것이 세련되고 좋아 보입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말고” 하는 식으로 관계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이지요. 상처받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주는 자유는, 형제자매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도록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분명히 알고, 덜 중요한 걸 포기하는 자유이지요. 분명,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복음이 주는 자유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9-23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이랬다가, 저런 사람에게는 저랬다가 하는 계산적인 모습인가요? 아닙니다. 기꺼이 자기를 상대방에게 묶어 매는 모습, 참으로 자유로운 모습입니다.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자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얽매일 수 있는 자유로운 모습입니다.
사실 바울이 계속 오해를 받는다면, 바울이 세운 유럽과 아시아의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분열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를 위해 기꺼이 얽매이는 자유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얽매일 수 있는 자유를 사용할 때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한 신학자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우리는 복음이라는 본질의 일치를 위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얽매일 수 있는 자유를 사용합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이 얽매인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기꺼이 얽매일 수 있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예루살렘 장로들은 바울에게 이런 제안을 한 뒤에, 곧장 25절의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이전에 이방인 선교에 대해 교회가 결정했던 내용을 변경하지 않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곧장 장로들의 권면을 따릅니다. 26절을 보시면 “이튿날” 바로 그들의 말을 따릅니다.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바울에게는 앞으로 해야 할 또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5:28를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갈 소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스페인은 “땅끝”과도 같았습니다. 세계의 중심 로마에 있는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땅끝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기로 결단했습니다. 사도행전 20:22-24에 하나님께 얽매인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께 얽매인 자유를 가진 사람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바울은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신 사실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일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형제들의 권면을 따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 매일 때 우리는 상황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취와 소유뿐만 아니라 실패와 가난 모두를 통해 그분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 매여 참 자유를 누리며, 그분의 나라를 세워 갑시다.
[ 종이 되신 만유의 주 ]
이제 마지막으로 이러한 자유를 주신 분에 대해 들읍시다. 바울은 어떻게 이처럼 얽매이지 않으며, 동시에 기꺼이 얽매일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종이 되신 만유의 주님으로 인해서입니다. 바울은 원래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반응에 얽매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고, 출세가도를 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자유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유를 빼앗았지요.
바울은 자유로운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노예였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반응, 두려움과 욕망의 노예 말이지요. 그런 바울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습니다. 어떻게 사로잡으셨습니까? 물론, 극적인 회심 사건이 있었지요.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빛과 음성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15-16입니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 중에 괴수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긍휼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죄와 자기 자신, 사람들의 반응에서 자유로워진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세계 곳곳에 퍼졌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빌립보서 2:5-8입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종이 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에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그분은 종이 되셨습니다. 종이 되어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손과 발에 모든 자유를 결박당한 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히브리서 2:14-15입니다.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묶어 매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에게 자신을 묶어 매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정한 자유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중력에, 우리의 욕망에, 불안과 두려움에, 죄와 죽음에 얽매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줄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는 자유케 하시는 주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이라는 가장 큰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과 사람들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형제자매들에게 자신을 묶어 맵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매여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이, 오직 복음만이 빛내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 결론 ]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분제도 없고, 법적으로 보장된 자유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속박은 더 많아졌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성취와 소유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또는 손쉽게 관계를 끊고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다른 이들의 삶에 자기를 묶어 매지 못합니다. 잘 깨닫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시대에서는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도, 사랑할 자유도 점점 사라져갑니다.
하지만 온 세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기꺼이 종이 되어 우리와 그분 자신을 묶어 매시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다른 이들의 아픔과 기쁨, 삶에 뛰어들어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십시오!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그리고 한껏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유인으로서 살아가시길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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