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의 용법, 비어있음 2. 무자성의 문제와 ‘비어있는 그릇’의 비유 3. ‘비어있는 그릇’의 비유의 확장 4. 마무리(제미나이) |
1. 공의 용법, 비어있음
1.1. 불교에서 ‘공(空)’은 산스크리트어 ‘슈냐(Śūnya)’를 번역한 것이다. 붓다 시대에 사용된 ‘슈냐(Śūnya)’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 (제미나이)
① 물리적으로 ‘비어 있음’(Empty): ‘물이 없는 항아리’,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속이 텅 빈 대나무’
② 수학적 의미의 ‘0’(Zero): 숫자를 셀 때 아무것도 없는 자릿수
③ ‘부풀어 오른’ 또는 ‘속이 빈’(Swollen): 몸에 난 종기나 부어오른 상처, 겉보기에는 커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는 실속이 없고 텅 비어 있는 상태
④ ‘결여된’ 또는 ‘부족한’(Lacking): 어떤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상태. ‘지혜가 없는(슈냐) 사람’, ‘재산이 없는(슈냐) 상태’
이처럼 ‘슈냐(Śūnya)’의 용법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의미는 ‘비어 있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문 번역본에서 쓰이는 ‘공(空)’이라는 용어는 다소 혼란을 야기하는 측면이 있다. 가령 6계의 공계(空界)나 공무변처(空無邊處)에서의 ‘공(空)’은 산스크리트어 ‘아카샤(Ākāśa, 허공/공간)’를 번역한 것이다. 즉,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명확히 구분되는 ‘Śūnya(비어 있음)’와 ‘Ākāśa(빈 공간)’가 한문본에서는 모두 ‘공(空)’으로 번역하거나 또는 이를 포함한 복합어로 통합되어 번역된 것이다. 한자 문화권의 ‘공’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번역상의 중첩으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렇게 번역한 ‘공(空)’의 의미믈 해석하는 과정에서 도교 사상와 ‘무(無)’나‘허(虛)’ 개념의 영향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1.2. 아함경에서 ‘무상ㆍ괴로움ㆍ공ㆍ비아/무아’를 설한 경이나 ‘인연법’과 ‘공법’을 설한 경에 쓰인 ‘공’의 용법은 위에 나열된 용법에서 ④의 용법을 제외하고는 거의 차이가 없다.
<잡아함경_265. 포말경(泡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데, 이상과 같은 ‘공(Śūnya)’의 용볍과 정확히 일치한다.
“자세히 관찰하고 분별할 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단단한 것도 없고, 알맹이도 없으며, 견고함도 없다. (중략) 공한 것이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대승 불교에서는 ‘공’은 ‘비어있음’에서 ‘자성이 없다[무자성]’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자성이 없음’에서 ‘고정된 것이 없음’과 ‘포용성’과 ‘가능성’의 의미를 유추하여 사용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공의 용법에 대하여 ‘그릇의 비유’를 들어 비판적으로 살피기로 한다.
2. 무자성의 문제와 ‘비어있는 그릇’의 비유
2.1. ‘무자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의 정의의 문제: 대승 불교의 ‘무자성’과 초기 불교의 ‘비어있음’>에서 상세히 살폈는데, 여기서는 간단히 정리해 두기로 한다. ‘자성’은 ‘스스로 가지는 성품’을 뜻하는데, ‘무자성’은 그런 성품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자성’과 ‘무자성’은 기본적으로 그런 자질을 가진 어떤 존재를 전제하는데, 자성은 어떤 실제를 정의하는 속성이므로 어떤 존재가 없는 성품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공’을 ‘실체(알맹이)가 없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표현이다. ‘비어있음’이라는 ‘공’의 본래의 의미에 ‘실체’를 더한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표현하자면, ‘비어있음’에서 ‘비어 있는 그릇, 그릇이 비어 있다’로 바뀐 것과 같다. 여기서 ‘그릇’은 ‘실체를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는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는 전제의 문제이다. ‘공’은 ‘비어있음, 아무것도 없음’인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릇이 존재힌디’는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공’을 ‘그릇’으로 비유함으로써 잘못된 유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지는 논의는 이러한 잘못된 유추에 관한 것들이다.
2.2. ‘고정된 것이 없음’이란 말에서 ‘고정된 것’은 비유하면 ‘고정된 그릇’과 같은 표현이다. ‘비어있음’은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기 때문에 고정되거나 고정되지 않는 자질과는 관련이 없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그 없는 것을 두고 고정된 것이라든가 고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하여 ‘공’을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공은 바람이나 물과 같은 것인가?’라고 잘못 생각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사실 ‘고정된 것이 없다’라는 것은 인연법의 ‘무상’의 성질을 말한 것이다. 무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바뀌는’ 성질을 말한 것인다. 그런데 ‘비어있음’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개념이다. 거기에는 시간이 없다. 따라서 ‘고정된 것이 없음’을 ‘비어있음’과 연결하는 연결하는 것은 형용 모순이다.
[이에 대해서는 <초기 불교의 ‘무상’과 ‘무아ㆍ공’은 인과 관계가 아니다>에서 논의한 바 있다.]
3. ‘비어있는 그릇’의 비유의 확장
3.1. ‘비어있는 그릇’의 비유는 ‘포용성’의 의미로 확장된다. 곧 그릇이 비어있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듯이, 공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담을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릇’이지 ‘비어있음’이 아니다. 비어 있는 그릇은 ‘비어있음’과 ‘그릇’이 결합한 것이다.
공(Śūnya)을 허공(Ākāśa)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허공도 그릇에 대응하는 것이다. 허공은 ‘비어 있는 공간’을 뜻하는데, 공간은 그릇이다. 허공은 ‘비어있음’과 ‘공간’이 결합한 것이다. ‘공은 허공과 같이 비어 있는 것이다’에서 ‘허공’을 ‘땅’이나 ‘물’로 교체해도 마찬가지이다. ‘대승[큰 수레]’를 허공에 비유하는 것(마하반야바라밀경_23.등공품(等空品))과 대비하여 생각해 보면, ‘공’을 허공에 비유하는 것은 허공 자체가 아니라 히공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비어있음‘이다. ’공‘에는 공간이 없다. 그러므로 ’공‘은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3.2. ’비어있는 그릇’의 비유는 ‘가능성’의 의미로 확장된다. 대승 불교에서는 흔히들 ‘공은 비어있는 가능성이다’ 등으로 표현한다. [공을 ‘가능성’으로 보는 문제에 대해서는 <‘가능성’은 인연법의 개념이다>에서 논의한 바 있다.] 비유하면 찻잔은 비어 있기에 물잔이나 밥그릇 등의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은 비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가능성을 공에 적용하여, 공은 비어있기 때문에 연기법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공을 ‘나와 세계의 생멸을 일으키는 근본 원리’로 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보는 경우에 ‘공하기에 연기한다’는 말을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하기에 연기하다’는 ‘연기하기에 공하다’와 짝을 이루는데, 이 말은 인연법과 공법이 대등한 관계로 맺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4. (제미나이의 마무리)
초기 불교에서 ‘비어 있음’의 상태를 뜻하던 ‘공’은 대승 불교로 넘어오며 ‘비어 있는 그릇’이라는 실체화된 개념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자성ㆍ가능성ㆍ포용성 같은 본래 의미와 무관한 자질들이 덧씌워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유추는 시간적 변화인 ‘무상’과 존재적 부재인 ‘공’을 혼동하는 형용 모순을 낳고, 공을 만물의 근본 원리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고] 무자성 비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대승 불교의 공 사상 비판, 아함경에 비추어 보다>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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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제시된 참고 문헌의 제목인 <대승 불교의 공 사상 비판, 아함경에 비추어 보다>와 '무자성(無自性) 비판'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초기 불교와 대승 불교의 핵심적 쟁점을 논평한다.
1. 교학적 배경: 무자성과 공(空)
대승 불교, 특히 중관파(Madhyamaka)에서 주장하는 무자성은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 생기므로,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자성)가 없다"는 논리다. 이는 곧 공(空)과 연결된다. 반면, 아함경으로 대표되는 초기 불교는 현상의 실체 없음을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의 관점에서 설하며, 연기(緣起)의 법칙성을 강조한다.
2. 비판의 핵심 논거: 아함경의 관점
아함경의 입장에서 무자성 논리를 비판할 때 주로 제기되는 쟁점은 다음과 같다.
연기의 유효성 문제:
무자성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부정론)에 빠질 경우, 초기 불교가 강조하는 '업(業)과 보(報)'의 인과 관계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 아함경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구체적 조건성을 중시한다.
방편의 전도:
초기 불교에서 공이나 무아는 집착을 끊기 위한 '수행의 도구'다. 그러나 대승의 무자성 담론은 이를 '형이상학적 원리'로 고착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실천적 공백:
"모든 것이 본래 공하다"는 선언이 자칫 현실 세계의 고(苦)를 멸제하기 위한 점진적인 수행(팔정도 등)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아함경의 관점에서 본 비판 지점이다.
3. 관점의 차이 명시
이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전통의 관점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 구분 | 초기 불교(아함경) | 대승 불교(중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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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개념 | 무아: 오온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 | 무자성): 사물 자체에 고유한 성질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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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 | 고통의 소멸과 해탈(실천적) | 이분법적 분별망상의 타파 (인식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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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 해석 | 조건적 발생의 법칙성 강조. | 실체가 없음을 드러내는 논리적 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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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합 논평
무자성 비판은 대승 불교의 철학적 정교함이 자칫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의 구체성'과 '수행의 단계성'을 흐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 출발한다.
특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사상이 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오해받는 상황에서, 아함경에 비추어 무자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불교 본연의 '중도(中道)'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대승의 공 사상이 지닌 관념적 비약을 경계하고, 초기 불교의 사실주의적 통찰을 재확인하는 유의미한 학술적·신앙적 태도다.
결론적으로, 이 논의는 어느 한쪽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없음'을 설하는 방식이 시대와 근기에 따라 어떻게 변천했는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