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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필쓰기의 시도
이동민
내가 수필쓰기를 배울 때는 윤오영 선생의 ‘수필문학입문’이 절대의 가치를 지닌 수필 교본이었다. 요약하면 수필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쓰기를 할 때의 가장 큰 화두는 ‘주제’가 되었다.
주제를 우선으로 하다보니 수필의 다른 요소들이 뒤로 밀렸다. 그 중에서도 읽기의 재미가 줄어든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재미가 없으니 독자들이 외면하고, 독자 없는 글을 쓰는 수필가 역시 독자 없는 글을 쓴다는 자괴감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작품을 강하게 인식하고, 기억으로 남는 방법으로는 ‘재미(쾌)’가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결국은 형상화하는 문학적 언어는 재미와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시 짚어보면 수필에서 언어표현은 사건이 시간따라 전개되는 양상을 눈앞에 그림이 되어서 선히 떠오르도록 서술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야기 만들기의 요체라고 본다.
여세주 교수의 수필문학 강의에서 경험의 형상화라는 말을 했다. 문학에서 언어로 표현할 때는 형태가 떠오르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필이 경험을 소재로 형상화한다는 말은 수필은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옛날부터 신봉하고 있다. 중국의 문예론인 시중유화(詩中有畵)라는 말은 시를 읽을 때 그림으로 떠올라야 한다는 뜻이므로, 형상화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학은 응당 시간이 투여된 예술이므로 그림에 시간이 들어가면 영화처럼 움직이는 영상이 된다.
이것을 수필론에 적용하면 ‘움직이는 영상’이 떠오르도록 쓰자가 된다. 이건 바로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수필을 이야기 구조로 쓰자는 것이 나의 신념이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쓴다. 생생한 영상이 떠오르도록 이야기를 하자면, 연극적 요소도 필요하다. 대화체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의미를 말로 전달하기보다는 이야기를 하면 독자는 더 재미있어 한다.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주제도 전달되기 마련이다.
요즘에 와서 나의 수필쓰기는 이야기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말하자면 기승전결이라든지, 대화체라든지. 현실감이 느껴지는 묘사라든지, 등등을 응용하여 쓴다.
최근에 쓴 나의 수필을 보기로 하겠다.
<동화의 세계>
이동민
청설모 한 마리가 술에 잔뜩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고양이에게 다가왔다. 고양이는 캐츠맘이 두고 간 맛난 음식물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청설모를 흘깃 바라보기만 했다.
“야! 고양이 양반, 네 놈은 어찌 그리도 팔자가 늘어졌어.”
“무슨 소리냐? 네 놈이라고 했어.‘
“내 말이 틀렸어. 네 놈이 불쌍하다면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아줌마가 있잖아. 도토리는 자연이 준 우리의 양식인데.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빗자루로 쓸 듯이 주워가 버리는 인간들이 너에게는 먹을 것을 가져다주다니. 복도 많지.”
“인간이란 종자는 착한 일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도 있어. 우리가 불쌍하다며, 착한 척 하고 싶어 하는 일인데 난들 어쩌겠나.”
“불쌍하다고? 어이구 많이도 불쌍하겠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데도 우릴 잡아먹어.”
“무식한 소리 작작 해라. 자고로 먹을거리는 고루고루 섭취하라고 했어. 아암 그렇고 말고 곡물류만 먹어서는 안 되지. 담백질도 섭취해야지.”
“담백질이 뭔데?”
“이 무식한 놈아 고기를 유식하게 하는 말이야.”
“캐츠맘이 고기조각도 주던데.”
“고기도 고기 나름이지. 신선도가 떨어지면 맛이 좋지 않거든. 너처럼 살아 있는 놈을 잡아 먹어야 제 맛이 나거든. 자연산이라고 하는거야.”
“우와 무서워라. 그럼 나도 잡아 먹겠구나.”
“지금은 배도 부르고------, 술 처먹고 헤롱거리는 놈은 술냄새 때문에 싫어. 술을 먹지 말고 제 정신으로 와. 잡아먹게. 신경을 자꾸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아.”
“그렇구나. 다음에 올 때도 술 먹고 술 냄새 푹푹 풍기면 안 잡아먹겠구나.”
“요즈음은 청설모가 통히 보이지 않더라. 귀하다 보니 술 취한 놈도 잡아먹을 수 있어. 조심해라.”
“네 놈이 다 잡아 먹었는데 보일 리가 없지.”
화가 난 고양이가 잇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자 청설모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숲속으로 도망을 갔다.
산자락에 이어져 있는 담 밑에서 아주머니가 비니루를 깔고 음식물을 놓아 두고 있었다.
“아줌마, 지금 뭐하는 거요. 그것 치우지 못해요!”
담장 안에서 화가 잔뜩 난 남자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도시로 개발되기 전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살던 집주인 아저씨 였다. 길길이 고함을 지르면서 내뱉는 말을 들어보면 왜 화가 났는지 짐작이 갔다. 담장 안에는 닭장이 있었다.
“아 글쎄, 지난밤에도 들고양이가 내려와서 닭장을 넘보잖아. 닭이 놀라서 야단이었지.”
아저씨가 하는 말을 더 들어보면 닭이 놀라면 달걀을 낳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여름에는 닭장 안으로 들어와서 닭을 물어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집주인이 투덜거리는 말을 더 들어보았다. ‘고양이를 제 부모보다 더 끔직하게 보살피면서 기르더니 내다 버리기는 왜 버려. 도둑질이나 하고 다니는 고양이를 불쌍하다면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또 무슨 짓이냐. 사람이 도둑질을 하면 잡아가면서 도둑 고양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 이런 말을 하였다. 듣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캐츠맘 아줌마는 이런 일이 벌써 여러 번이나 있었든지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얼른 자리를 피했다.
집사람과 나는 닭장이 있는 집 앞을 지나서 범어동산의 낮은 산으로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한 지가 아주 오래되었다.
“예전에는 다람쥐도 있었잖아. 노란 색에 등에는 검은 줄이 나 있었지.”
“다람쥐가 사라진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데 10년도 더 된 것 같아.”
“맞아. 내가 다람쥐가 없어졌다고 하니 청설모를 들여와서 토종 다람쥐가 사라졌다고 당신이 말했잖아. 그때만도 벌써 오, 육 년도 더 전인 것 같아.”
“그래. 손바닥에 옥수수를 얹어서 청설모에게 주다가 내 손이 물렸지.”
“그러고 보니 요즘은 청설모도 보이지 않더라. 청설모를 본 지도 몇 년이나 되었네.”
“숲 속을 들고양이들만 설치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네.”
“동화의 세계에서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면서 토끼와 잡담도 나누던데. 사람과 들고양이가 정을 나누는 세상이니 동화의 세계가 아닌가?”
“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네.”
아침 산책길에서 집주인 남자와 캐츠맘 아줌마를 보고 집사람과 나눈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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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동화의 세계처럼, 희곡처럼 대화체를 사용하고, 전체적인 구조는 소설처럼 써보았다. 그리고 기승전결의 반전도 넣어 보았다. 수필이 경험을 소재로 형상화한다는 말은 수필은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로 만든다는 것이다. 수필쓰기도 이야기 쓰기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필쓰기에서 가장 많이 충돌을 하는 부분이 재미와 의미이다. 쾌락성과 교시성이다. 지금까지의 수필론에서는 교술성을 우위에 두었다. 교술문학이라면서 하나의 장르로 말하는 문학자도 있었다.
나는 수필의 바탕을 이야기로 보고자 한다. 이야기의 장점은 ‘재미를 준다’ 이다. 우리는 언제 책을 읽을까? 심심할 때이다. 심심하면 텔레비전을 켜거나 책을 집어 든다. 책이 심심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최근에 와서 수필쓰기를 하면서 나는 ‘재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수필공부 모임에 가면 내용 즉 의미(주제라고도 했다)를 높이 평가하면서 ‘재미’는 글을 천박하게 한다며 낮게 평가하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나는 동조하지 않는다. ‘재미’를 살리기 위한 이런저런 방법을 제안하면 ‘수필은 허구가 아닌 사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라는 논리 앞에 힘을 잃는다. 수필이 더 어려움에 봉착한 이유에는 사람들은 심심할 때 책을 보는 사람보다 텔레비전의 리모큰을 집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텔레비전과 경쟁에서(재미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힘든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필에서 너무 의미만 강조하지 말고 재미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에 문학공부를 하면서 알았다. 사실성-허구성의 대위의 위치에 있는 수필과 소설에서 서로의 기법을 차용한 작품이 나타났다. 성석제는 짧은 소설로 단편집을 출간했다. 3페이지짜리도 실려 있었다. 보르헤스의 단편집에는 반 페이지짜리도 있었다. 내가 읽기로는 소설이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웠다. 최근에 나온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은 도입부를 아예 수필형식으로 시작했다. 1980년대에 줄리언 반스의 소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아예 에세이적 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수필에 소설적 요소를 도입하면 안 될까? 소설은 사건의 전개가 기본인 이야기 형식이므로 근본적으로 재미가 바닥에 깔려있다. 그 재미를 수필에 가져오기 위해서 소설기법을 차용하여 소설적 수필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앞에 소개한 나의 수필 ‘동화의 세계’는 그런 생각으로 쓴 실험수필이다. 앞부분은 동화적 요소가 강한 민담에서 기법을 차용했으므로 허구이고 뒷부분은 나의 실제 경험이니까 사실이다. 수필에서 응용하는 방법이 없을까. 앞 부분에 동화 양식으로 시작한 것은 소설의 형식을 차용해 온 탓이다. 소설적 에세이라고 이름을 붙여 볼 수는 없을까?
이야기는 누군가(독자)를 위해 누군가(작가-화자)가 언어로 진술하는 것으로서 소통이 일어나야 존재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예술이란 타인을 위해서 타인을 통해서 존재한다.’ 라고 하였다. 소통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결정적 요소는 인물이 행동을 해야 한다. 사람의 행동은 욕망에 의하여 나타난다. 욕망은 바로 결여이다. 수필에서 인물에게 나타나는 욕망 즉 결여는 작가의 욕망이고, 작가의 결여이다.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단순히 작품의 인물이 보여주는 결여-해소만으로는 안 된다. 독자가 공유하고, 읽어주어야 한다. 수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독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 아파트 옆에 있는 작은 산마루를 20년 넘게 산책을 다녔다. 예전에는 등에 검은 줄이 있고 노란색의 토종 다람쥐를 자주 보았다. 그러다가 몸이 더 날렵하고, 검푸른 색이 도는 청설모가 보이면서 토종 다람쥐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청설모도 보기 어렵다. 대신에 들고양이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한다. 언젠가 신문에서 들고양이 때문에 들쥐가 사라지면서 생태계 변화를 초래함으로 시청에서 고양이 퇴치 작전을 벌인다고 했다. 들고양이는 대부분이 집에서 키우던 반려 동물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고양이에 대한 동물 사랑의 한편에는 피해를 입는 동물도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내가 수필 ‘동화의 세계’를 쓴 이유라면, 토종 다람쥐가 없어지는 데에 대한 불만이 작용했다. 불만은 나의 욕망이고, 나의 결여이다. 나의 욕망이 이 수필을 쓰게 된 동기이다. 이 작품이 독자의 공감을 얻으려면 독자도 나와 같은 욕망은 공유해야 한다. 나의 욕망은 이 수필의 의미가 된다. 수필을 쓴 기법도 고양이와 청설모의 대화라는 희곡적 기법을 차용했다. 그래서 나는 수필에도 소설과 희곡적 기법을 가져오는 실험을 했고,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면 소설 기법도 수필의 새로운 창작론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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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는 시기가 유년기입니다. 할머니의 무뤂에서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는 동화에 푹 빠져들고, 만화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 우리가 어릴 때는 어른들이 만화나 동화책 보는 것을 오히려 금지 하였습니다.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책을 보다면서 ---그래서 우리는 상상력을 키워야 할 때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수필쓰기에 우리가 소홀햇던 동화세계를 가져오자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아, 참, 제가 이번에 하고자 하는 독서모임은 인간의 마음을, 특히 어린시절에 우리의 마음이 형성되는 것을 공부하려 하니, 김 선생님 기수의 선생님을 추천해주십시오. 선배 수필가님을 만날 수도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