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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그대(지눌)의 주장을 들어보면, “오늘날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날마다 사용하는 자기 무명(無明)의 분별종자(分別種子)를 모든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로 삼고서 그 다음에 성품(性品)을 의지하여 선(禪)을 닦아야 비로소 묘미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한 ‘부동지’의 불과(佛果)는 본각(本覺)에 해당하는 이치로서의 부처(理佛)인가? 아니면 새로 이루어진 현상으로서의 부처(事佛)인가?
② 오늘날 마음 닦는 사람이 반조하는 부동지(不動智)의 부처란 본래 깨달은 이치의 부처(理佛)인가? 아니면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부처를 말하는가? 만일 과지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비록 타과(他果)와 자과(自果)가 다르지만 반드시 원융문(圓融門)의 이치에 따라서 보편이란 의미로 보아야 하며, 또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포섭된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항포문(行布門)에 의거하면,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노사나불(盧舍那佛)과 박지위(縛地位)의 닦지 못한 중생의 경지를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③ 그대(지눌)는 부처와 중생이 동일한 몸(同體)이며, 서로 다른 몸(異體)이 아니라 주장한다. 그런데 오늘날 시방세계에서 몸(正報)과 세계(依報)가 물든 연기(染緣起)와 깨끗한 연기(淨緣起)로서 분명하게 차별이 있어 자타의 상속(相續)이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미 과지(果智)를 성취한 노사나불을 어떻게 한결같이 자기의 부처로 삼을 수 있겠는가?
④ 지금까지 그대(지눌)가 말한 바는 이미 상세히 들었다. 그러나 고금의 선문에 통달한 자는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고 한다. 이것은 성품(性)의 한 측면인 깨끗한 바탕(體)으로서, 모양(相)과 작용(用)을 갖추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⑤ 오늘날 범부가 마음을 깨달아 부처를 성취하는 것은 구경(究竟)인가, 구경이 아닌가? 만일 구경이라면 어찌 처음 마음(初心)이라고 이름하며, 만일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면 어찌 올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이름하는가?
위의 질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묻고 있는 자는 당시 화엄종의 사람이거나 화엄적 교양에 바탕한 사람이다. 대답하고 있는 지눌은 선종의 선사(禪師)의 입장에 서 있다. 즉 지눌은 선(禪)을 당시 화엄이라는 교학적 바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은 당시 불교계의 보편적인 사상이었고, 주류였다. 이점이 중요하다. 지눌은 화엄의 논리로서 화엄의 사상을 논파하고 있다. 이는 화엄사상이 주류인 당시 불교계에 선이 들어설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눌에겐 기존의 화엄사상을 논파하고, 조사선의 돈오(頓悟)를 닦음의 기초로 삼고, 그러한 닦음은 구경각과 다르지 않다는 선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화엄철학이 필요했다. 그러한 고민을 지눌은 이통현의 《신화엄론》을 발견함으로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눌의 말을 들어보자.
논주(論主·이통현)의 취지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요컨대『화엄경』의 큰 뜻을 분석하여 말세의 보살로 하여금 생사윤회의 길 위에서 모든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를 단박 깨달아서(頓悟) 처음 깨달아 마음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므로 두 번째 법회에서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普光明地智)’로써 전각(殿閣)의 이름을 삼아 십신(十信)의 법문을 설하되, 바로 여래의 두루 비추는 밝은 지혜의 큰 작용이 방소(方所)의 한계가 없이 중중(重重)하여 끝이 없음을 보이시어, 이것으로써 믿는 마음을 삼았다. 또 십색(十色) 세계와 십지(十智) 여래와 십수(十首) 보살을 들어 법을 내세워 보이며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그리고 ‘선종에서 견성성불이라 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마음의 체(體) 만을 갖추었을 뿐 상(相)과 용(用)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보조가 말하고 있는 돈오(頓悟)가 과연 구경각(究竟覺)인가?’하는 등의 날카로운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고 지눌은 이통현의 《신화엄론》에 근거하여 선(禪)의 정당성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대답하였던 것이다.
《원돈성불론》은 지눌의 화엄사상을 정초한 것이고, 그의 사상이 선교일치(禪敎一致)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통현의 화엄론을 가지고 당시의 화엄론자를 비판하고 자신의 선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저술이기도 하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선종의 우위 상황에서 선교일치를 바라보면, “선사(禪師)가 교외별전을 고집해야지 왜 화엄을 말하고 나아가 선교일치를 입에 담는가!”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화엄의 절대적 우위 속에 선종이 처해 있다면 ‘선교일치’를 주장하여 사회적 호응을 얻어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눌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지눌이 선교일치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원돈성불론》을 통하여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니며, 선과 교가 올바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지눌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통하여 드디어 간화선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역설하고 화두를 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그러한『간화결의론』의 첫 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위의 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당시 화엄 교가들의 생각에는 법장(法藏)의 화엄교판에서 말하는 돈교(頓敎) 혹은 원교(圓敎)와 특별한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즉 돈교에서도 이언절려(離言絶慮)가 있으며, 화두가 지해(知解)의 병통을 제거하는 것처럼 교설을 비판하여 말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지눌은 돈교와 원교를 차례로 비판하고 간화선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간화결의론》의 마지막에서 지눌은 화엄과 간화선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화두를 드는 방법 중 참의(參意)와 참구(參句)로 구별할 수 있음을 들어 밝히고 있다. 즉 화엄의 방법은 언어를 통하여 이해하는 ‘참의’에 해당하고, 간화선은 의심을 통하여 들어가는 ‘참구’임을 말한다. 그리고 참구만이 활구(活句)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지눌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므로 고덕은 ‘조사의 도를 깨달아 반야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말세에는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 뜻에 의거하면 화두에는 참의(參意)과 참구(參句)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요즘의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은 대부분 참의를 살필 뿐 참구를 얻지 못하므로, 원돈문에 의거하여 바른 이해를 밝혀낸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관행과 용심에 여전히 보고 들음으로써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다.
(물론 이것은) 다만 지금의 문자법사들이 관행문에서 안으로는 마음 있음을 헤아리고 바깥으로는 여러 이치를 구하고, 더욱 이치를 구함이 자세하여 도리어 바깥의 형상에 집착하는 병을 얻는 것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어찌 참구로서 의심을 깨뜨려 직접 일심을 깨달아 반야를 발휘하고 널리 유통하게 하는 사람과 같게 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와 같이 깨달음의 지혜를 드러낸 사람이 지금 시대에는 보기 힘들고 듣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지 화두의 뜻을 살피는 참의에 의지하여 올바른 지견을 밝히는 것만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의 견처(見處)도 물론 교학에 의지하여 관행하면서 정식을 떠나지 못한 사람과는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부디 엎드려 바라건대 관행하여 세상을 벗어나려는 사람은 선문의 활구(活句)을 참구하여 빨리 깨달음을 증득하면 매우 다행하고 다행할 것이다.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에 있어서 지눌의 입장은 ‘선교일치’적인 입장에서 ‘교외별전’ 적인 입장으로 전환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지눌의 진정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석은 학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화엄이 우위에 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두 입장 모두 간화선을 소개하고 정착시키기 위한 데 필요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땅에 간화선을 최초로 소개한 지눌이 화엄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근본적인 방식은 역시 회통적이라 하겠다. 화엄을 인정하고 화엄과의 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두 관계의 회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지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간화선이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퇴옹 성철의 단절적 입장
비움은 가득 참이 있었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선에서는 언어와 논리의 떠남을 추구하지만, 그 떠남은 언어와 논리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전제하고 있다. 또 역으로 언어와 논리를 떠난 자만이 진정한 언어와 논리를 구사할 수 있다. 언어와 논리의 세계인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주는 한계성에 대하여 철저한 자각이 없고서는 선(禪)은 출발할 수 없다.
발심(發心)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선(禪)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떠나는 것이다.
언어와 논리, 일체의 분별을 철저히 배격한 성철 자신의 삶은 오히려 철저히 분별과 논리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선사(禪師)인 성철의 삶에서 주목이 되는 것은 끊임없는 지적 추구이다. 동서철학을 넘나드는 지성과 선·교를 넘나드는 불교 교학에 대한 해박함은 독서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원택은 「성철 스님의 행장과 말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 뒤에 스님의 행장에 대한 자료정리의 중요성을 느끼고, 태어나신 생가에서부터 행적을 더듬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스님의 조카 되시는 분에게서 스님께서 생전에 보시던 책을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책들을 뒤지다가 스님께서 손수 적어 놓으신 책 목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책 제목을 열거해 보면, 행복론·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7대 철인전·민약론·남화경·근사록 ·하이네시집·신구약성서·자본론·유물론 등등 70여 권의 책이었습니다.
성철의 돈오돈수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가 삶 속에서 철저한 논리적 사유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의 떠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철이 화엄과의 단절적인 입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엄 교학 자체를 부정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화엄교학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것의 뛰어넘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성철은 일제시대와 해방이후 분단과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변혁과 혼란의 시기를 살다 갔다. 구한말 불교계는 조선의 억불상황 속에서 종단의 형태조차 희미해진 상황에 처했었다. 식민지 상황 속의 불교계는 피폐해진 불교교단을 다시 새우는 일과 친일불교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일과 불교근대화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의 도전과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불교계는 분쟁과 분열의 과정을 겪었으며, 이러한 와중에서 한국불교의 주도권은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차지했다. 이 일련의 근현대한국불교사의 중심에 성철로 대표되는 선지식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는 종교에 있어서 세속화를 의미한다. 서양의 기독교의 종교개혁이 그러했고, 일본의 불교 근대화가 그러했다. 중국은 공산주의 상황에서 문화혁명을 겪었다. 한국의 불교는 이러한 보편적인 근대화의 과정에서 보면 중세의 복고적 가치의 부활로 설명될 수 있다. 세속화란 이성적 사유와 개인적 욕망에 대한 긍정을 말한다. 서구 기독교의 출현에서 보듯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도 변하기 마련이다.
한국사회가 성철과 간화선 사상에 빠져든 것은 종교사의 흐름에서 보면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어쩌면 일제 식민시대와 분단이데올로기 그리고 군사독재 상황 속에서 한국 사회는 종교의 세속화를 용납하지 않고, 종교가 가지는 성(聖)스러움의 본질을 추구하도록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근대 간화선을 뿌리 내리게 한 것은 경허와 용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현대 한국불교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 원동력은 1947년 성철과 청담이 주축이 되어 ‘부처님의 법대로 살자’는 것을 모토로 한 문경 봉암사 결사와 효봉과 구산으로 이어지는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제2 정혜결사 운동이다. 해방이후 분단과 독재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대처와 비구의 분쟁 속에서 성철은 비구가 중심이 된 선 수행 종단을 세워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에 투철했다. 해방이후 초기 불교계는 지금처럼 비구가 중심이 아니라 대처가 중심이었다.
선(禪)이 중심이 아니라 교(敎)가 중심이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비구 중심의 조계종단이 주도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성철은 이렇게 출발하는 비구 종단을 이끌어가는 중심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선지식으로서의 모범을 보였고 그를 통해 대중으로부터 확고한 존경과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한국불교의 법맥》, 《선문정로》, 《본지풍광》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출현한 것이다.
성철이 간화선사로서 화엄에 대해 드러낸 입장은 부정적이다. 지해(知解)를 조장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화엄’이며 ‘교학’이라고 판단한다. 화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대신 한걸음 더 나아가 지눌의 돈오점수사상을 비판의 중심에 세운다. 화엄사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선문의 이단사설로 취급되어 진다. 한국의 선사상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지눌을 비판의 대상에 올려놓고 선수행자들에게 더욱 철저하고 엄격한 수행을 강요한 것이다.
지눌이 아닌 부처님과 조사들의 경지를 수행의 현실적 목표로 삼게 만든 것이다. 그만큼의 엄격한 수행을 통해서도 한국불교는 제자리를 찾기 힘들다는 성철의 불교계에 대한 인식과 내면적 고뇌를 돈오돈수사상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화엄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선문정로》의 서언에서부터 성철의 이러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지해(知解)는 정법(正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이므로 선문(禪門)의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 지해종도(知解宗徒)라 하면 이는 납승(衲僧)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해를 쫓는 무리들은 바로 화엄을 포함한 교가(敎家)를 말하는 것이다. 알음알이를 통해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를 수 없으니 그 길을 따르는 납자는 이미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성철은 ‘알음알이(知解)=화엄=돈오점수’를 등치시키고 이를 한꺼번에 비판한다. 이는 지해의 병통을 지적하는 지눌의 방식과 사뭇 다르다. 지눌은 화엄에도 알음알이를 벗어나는 길이 있음을 주장하는 교가의 주장을 들어주고 그것을 다시 논리적으로 논파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눌의 《간화결의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 이(화엄에서 말하는) 뜻과 이치(義理)가 비록 가장 완전하고 오묘한 것이지만, 결국은 식정(識情)에 의해서 듣고 이해하여 헤아리는 것이므로, 선문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경절문(徑截門)에서는 불법을 이해하는 지해(知解)의 병통이라고 하나하나 모두 버리는 것이다. 무자 화두는 하나의 불덩어리와 같아 가까이 가면 얼굴을 태워버리는 까닭에, 불법에 관한 지해(知解)를 둘 곳이 없다.
그래서 대혜선사(大慧禪師)는‘이 무자는 잘못된 앎과 지적인 이해(惡知惡解)를 깨뜨리는 무기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깨뜨리는 주체(能破)와 깨뜨려지는 대상(所破)을 구별하고 취하고 버리는 견해가 있다면, 이것은 여전히 말의 자취에 집착하여 자기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어찌 뜻을 얻어 다만 화두를 드는 사람이라고 이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지눌이 지해를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경절문(徑截門)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였지만, 화두를 통하여 지해의 병통을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면에 있어서 성철과 지눌의 견해는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성철은 지눌이 이와 같이 《절요사기》와 《간화결의론》을 통하여 지해의 병통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였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해종도라는 올가미를 쉽게 풀어주지 않는다. 《선문정로》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解悟)인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문의 최대의 금기인 지해(知解)임을 명지(明知)하였으면 이를 완전히 포기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은 추호의 지해도 이를 불조(佛祖)의 혜명을 단절하는 사지악해(邪知惡解)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지해를 권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조는 규봉(圭峯)의 해오사상(解悟思想)을 지해라고 비판하면서도 절요(節要)·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등에서 해오사상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니 보조는 만년에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문이 아님은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원돈사상을 고수하였으니 보조는 선문의 표적인 직지단전(直旨單傳)의 본분종사가 아니요, 그 사상의 주체는 화엄선이다. 선문은 증지(證智)임을 주장한 결의론의 결미에서 원돈신해인 참의문(參議門)을 선양하였으니, 보조의 내교외선(內敎外禪)의 사상은 여기에서도 역연하다.
위의 성철의 입장을 종합해 보면 간화선의 최대의 금기사항은 지해이며, 화엄의 원돈신해는 지해를 표방하기 때문에 선문의 바른 입장은 지해를 표방하는 이러한 화엄사상과는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지눌은 화엄의 원돈사상을 고수하고 있으니 결국 내교외선(內敎外禪)이며, 화엄선의 주창자라는 것이다.
성철이 간화선을 정초하면서 삼은 제1 명제는 ‘불교 수행의 목표는 구경각·증오이며, 그 최대의 장애는 알음알이(知解)다. 그리고 알음알이의 장애를 무찌를 수 있는 최대의 무기가 바로 화두 참구를 통한 간화선이다’ 라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지눌의 입장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쉽게 공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성철의 주장에서는 논리적인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지해와 화엄과 돈오점수를 등치시키고 이를 자신의 설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해와 화엄을 등치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논리체계가 필요하다. 또 화엄과 돈오점수를 등치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논리체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확실히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눌의 사상 속에서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과 경절문과는 다른 사상체계라고 전제한다. 즉 지눌의 사상체계 내에서 경절문은 제외시키고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 만을 지눌의 사상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해오와 증오의 구분을 통해 이해하면, 돈오점수의 돈오가 구경각이 아닌 해오에 해당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해오(解悟)와 지해(知解)와 해애(解碍)를 등치시키는 것은 또 다른 주장이다. 이 또한 논리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는 그 강조점을 수행의 출발에 두는가, 수행의 도착점에 두는가 하는 문제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질문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화엄사상은 꼭 지해의 장애에 걸리고 구경각에 이를 수 없는가?’
‘돈오점수 사상과 지눌은 지해의 장애를 묵과하고 구경각을 목표로 하지 않는가?’
또 ‘지눌의 사상 속에서 돈오점수와 간화선이 모순관계에 있고, 전기와 후기 사이에 사상이 변한 것인가?’
우리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에 말려들지 않아야 한다. 박성배 등이 이미 지적 한 것처럼 지눌과 성철의 수행법은 흡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지눌: 교리학습(불경공부)--> 돈오(해오)--> 점수(만행겸수, 용맹정진)--> 증오
성철 : 백일법문, 삼천배, 불경, (지눌의 해오(돈오)에 해당하는) 어떤 계기--> 간화(삼관돌파)--> 구경각[증오, 성철의 돈오]
따라서 돈오점수가 해오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또 돈오돈수 사상이 자비행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도 공감을 얻긴 어렵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모두 혜능이 단경에 밝힌 돈오(頓悟)를 강조하고 있다. 더군다나 돈오점수가 북종 신수의 점수(漸修)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보조 사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성철은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화엄과는 단절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진의가 과연 어디에 있었으며, 지금의 우리에게 성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우리가 풀어야할 문제이다.
간화선과 화엄, 단절을 넘어 회통으로
지눌과 성철과는 다른 시대적 상황에 도래해 있다. 지눌처럼 강성한 화엄종단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성철처럼 일제불교의 잔재를 의식할 필요도 없다. 간화선은 이제 한국불교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간화선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지금 한국의 간화선은 그것을 감당할 힘이 있는 것인가?
성철이 산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차이가 있다. 더 이상 한국사회는 승가에게 엄격한 성스러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군사정권의 종식과 합리적 사회 여건은 승가를 통한 대리 만족을 필요치 않는다. 자기의 수행과 변화에 더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정보화 사회 속에 자라난 신세대에게 끝없는 인내를 강요하는 것은 어렵다. 신비와 권위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성철이 살던 시대와는 분명 다른 환경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화엄을 비롯한 교학과의 단절과 간화선만이 구경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엄격한 기준은 간화선의 우월성과 그 목표를 분명히 한 점에서는 강점이지만, 그 강점이 최대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 구경각이란 목표를 분명히 하였기에 아무도 간화선에 이의를 달 수 없지만, 그 만큼 선지식이 갖추어야 하는 기준은 엄격해 진다.
성철이 제시한 기준으로 보면 간화선을 지도하는 선지식은 동정일여, 몽중이여,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야 한다. 또한 임제의 정맥을 이어 받은 명안종사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통과한 선지식이 있어야 목숨을 내맡길 수 있다. 자나 깨나 한 점의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 오매일여의 경지가 인간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실적으로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돈오점수 체계에서 구경각은 가능성과 지향성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돈오돈수를 주장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현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며 더군다나 돈오돈수를 통한 간화선의 대중화란 현실적으로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생활화 세계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출가 승려만이 아니라 재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가능하고 솔직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성철이 말한 돈오돈수를 그대로 믿고서 간화선을 수행하려는 사람들은 명안종사를 찾아 가려 할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명안종사를 쉽게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스스로의 수행의 길에 들어서고 자기 수행의 점검기준은 차선책으로 경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인 경전과 선어록에 의지하여 스스로 점검하는 풍토에서는 참구가 아닌 참구를 위한 참의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런데 돈오점수를 기치로 세워 돈오에 입각한 닦음을 강조하고 구경각을 목표로 삼게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직 구경각을 이루진 못했어도 수행에 철저한 선지식이 간화선을 지도할 수 있다. 조사어록과 화엄사상 등을 통하여 구경각의 경지를 객관화 하여 사선과 광선으로 치닫는 폐단도 예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중은 돈오돈수를 추종하고, 그토록 돈오돈수를 주장하던 선지식은 돈오점수를 선택하는 상황이 전개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문제가 아니라, 간화선과 화엄과의 관계 나아가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한 정립문제가 한국불교계에 던져져 있다.
간화선을 체계화한 대혜 종고의《종문무고(宗門武庫)》에는 이통현의 화엄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타나 있다.
도생(道生)·승조(僧肇)·도융(道融)·승예(僧叡)는 구마라즙(鳩摩羅什)의 훌륭한 제자로서 사의보살(四依菩薩)로 불리웠다. 그러나 일찍이 구라마즙과 함께 《유마경(維摩經)》에 주석을 붙이다가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에 이르러 모두 붓을 놓고 말았다. 아마도 이 경계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었기에 한 마디고 붙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장자(이통현)의 화엄론(華嚴論)은 화엄법계에 들어가서 문장을 해석했기에 마치 해와 별처럼 명백하고 얼음 녹듯 의심이 없다. 몸소 확연한 인연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간화선과 화엄과의 관계에 대한 보조 지눌과 퇴옹 성철의 두 입장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한 불교계의 현실 속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아마도 대혜 종고의 마음속에 이통현이 있었듯이, 성철의 마음속에 지눌이 그렇게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어리석은 우리들이 말의 그물에 갇혀 서로 갈라놓고 하나를 선택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간화선과 화엄교학과의 관계가 단절을 넘어 회통으로 나아가기를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김방룡
조계종 불학연구소 상임연구원 .보조사상연구원 기획실장. 전묵대 철학과 원광대 불교학과 졸업. 저서 <한국의 사상가 10인 - 지늘>(공저) 외 논문 ‘보조 지눌과 태고 보우의 선사상 비교’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고찰’ ‘여말 삼사의 간화선 사상과 그 성격’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