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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주교 남산성당 청년회 원문보기 글쓴이: 금샘
11 |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
12 |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
13 |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
14 |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
15 |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
16 |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
17 |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
18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
19 |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
20 |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
21 |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
22 |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
23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
24 |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
25 |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
26 |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
27 |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
28 |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
29 |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
30 |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
31 |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
32 |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해설]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는 최고의 교회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는 이 작품에서 특유의 명암법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 사이의 용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시선 : 아버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선이 없음을 알게됩니다.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멀게된 아버지의 눈은 초점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력을 상실
한 노인은 눈이 멀기까지 기다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버지의 손 :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은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쪽 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의 손이고
오른쪽 손은 매끈한 여자의 손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이 손을 통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
다.
작은 아들의 머리 : 죄수와도 같이 삭발한 작은아들의 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뉘우치는 모습입니다. 그 아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
여다보면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머물고 있는 태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래의 고향인 하느님 품을 전하고 있
습니다.
작은아들의 묵상
아버지에게 돌아온 작은아들은 누더기의 속옷을 걸치고 거의 몸만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 있습니다. 그
가 감옥에 있었던지, 수용소에 있었던지, 이 모습은 개성을 박탈당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황갈색의 찢어지고 핏기 어린 속옷은 그의
참담했던 생활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샌달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달이 겨우 부분적으로 감싸고 있어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렸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작은아들의 머리는 엄
마의 자궁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모양이고 얼굴은 거의 아직 태아의 모습입니다. 램브란트는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인간의 모
습을 엄마의 자궁 속에 있던 아기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품에 안긴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큰아들의 묵상
그는 작은아들의 귀향에 대한 목격자입니다. 이 목격자는 아버지를 아무런 기쁨 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습
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분명 작은아들과 그를 안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큰아들은 이 그림 전체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리를
두고 서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훨씬 아버지를 닮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수염을 길렀고 붉
은 겉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 유사성이 둘 사이의 공감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얼마나 다릅니까?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꼿꼿하게 서있고 긴 단장은 그의 자세를 더욱 강하게 표현해 주
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묵상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 안에 드러나는 신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염을 기른 반 실명 상태의 노인,
황금빛의 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돌아온 자식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절대적인 자애와 조건 없는 사랑, 영원한 용서와
같은 신성의 실재를 보게됩니다. 여기서 인성과 신성,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과 강인함, 늙음과 영원한 젊음이 함께 표현되고 있습니
다. 거의 눈 먼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등을 육체적인 시력이 아니라 내적인 눈으로 보면서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이 손에 모든 빛이 모여있고 이 그림의 다른 두 목격자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습니다. 그 안에서 자비가 육을 취한 의미와 화해와 용서, 치유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아들 뿐 아니라 아버지도 안식을 누릴 수 있
다는 것을 반 장님인 노인이 흐느끼면서 아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상처받은 아들을 축복하는 모습에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권위의 남성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이 그림의 손에서부터 드러나는데 재미있게
도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들의 어깨를 만지는 아버지의 왼손은 매우 강하고 근육질입니다. 손가락들이
펼쳐져 있고 아들의 등과 어깨를 넓게 감싸고 있습니다. 일종의 누르는 힘과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특별히 엄지손가락이 그러합니
다. 그러나 오른손은 얼마나 다릅니까? 이 손은 누르거나 잡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섬세합니다. 손가
락들이 모아져 있고 아주 우아합니다. 이 손은 아들의 둥 위에 부드럽게 얹혀져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도감과 위로를 주는 엄마의
손인 여성의 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