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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방인이 다 이방인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아들로 삼아주셨고 영광이 있으며 언약을 받은 백성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약속이 있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만물위에 계셔 찬양받으실 메시아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슈아를 거절했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진 것이 아닌가?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유효한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씀이 폐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육신에 속한 이스라엘은 거절했지만 영에 속한 이스라엘은 아직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방인도 마찬가지이다. 이방인이 다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롬9:4~6)
2 약속은 믿음에 기반한다.
아브라함의 씨가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다. 이스마엘은 육에 속한 자였고 오직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로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언약의 속성이 나온다. 사라에게 때가 되면 아들이 있을거라는 약속을 받았다. 이처럼 약속은 이루어질거라는 믿음을 포함한다. 이처럼 약속의 자녀는 언약을 믿음으로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믿고 있다면 신뢰함으로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약속의 자녀들이다.(롬9:7~9)
3 믿음이라는 언약을 세우기 위해 복중에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을 하기도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함이다. 복중에 있을 때 말씀하셔야 언약이 된다. 야곱과 에서를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롬9:10,11)
4 언약의 속성은 창조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거라고 말씀하셨다. 말라기서에 여호와께서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언약으로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의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며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한다. 이 뜻은 무엇일까? (롬9:12~15)
5.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유업은 원한다고 해서, 경쟁하듯이 달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입는 자만이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사람의 뜻,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긍휼하심으로 얻는다. 다시 말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아무리 갖고자 했어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사울이 영원한 왕권을 가지고 싶어 다윗을 죽이고자 쫒아다녔어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 없다. 이처럼 원하는 자가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원하는 자, 하나님께서 주기 원하는 자가 얻는 것이다. (롬9:16)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그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해 바로를 세우신것 처럼 하나님은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 어떤 의미일까? (롬16~18)
6 영광에 이르는 그릇과 수치에 이르는 그릇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어떤 그릇은 영광으로 어떤 그릇은 수치에 이르게 하신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유죄를 판결하실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영광에 이르는 그릇과 수치에 이르는 그릇을 만들 권한이 하나님께 있으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영광에 이르도록 할 권한이 있고 수치에 이르도록 할 권한이 있다는 말이지 처음부터 수치를 받도록 지었다는 말은 아니다. 창조주이시기에 우리를 아실 뿐이다. 귀한 그릇이 되느냐 천한 그릇이 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귀한 그릇이 영광에 이르도록 하시고 천한 그릇이 수치에 이르도록 하실 권한이 있다.
('귀히 쓸 그릇'에서 '쓸'은 사실 전치사이다. 형용사로 번역되었지만 전치사로서 '도달되는 지점 ~에로, ~앞으로' 등의 뜻이다. 또한 '귀히'는 명사로 '높은 수준의 위엄, 존귀, 존경 등의 뜻이다. 그러므로 '귀히 쓸 그릇'보다는 '영광에 이르는 그릇'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바람직 하다.) 그릇을 우리가 준비하면 그 가치에 따라 영광에 이르기도 하고 수치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보응이나 보상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롬9:19~21)
7 영광의 풍성함이나 두려운 하나님을 나타낸다
만약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이 있다고 하자.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자신의 진노와 능력을 보이실 수 있다. 수치에 이르게 하심으로 말이다.
또한, 영광의 언약이 이미 있는 그릇이 있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 그릇을 통해 영광의 풍성함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분의 부요함을 나타내실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수치에 이름으로 그분의 엄위하심과 능력을 나타내며 우리가 긍휼하심 안에 거하면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하나님은 영광받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생사화복을 선택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다. (롬9:22~24)
8 죄악으로 벌하셔도 긍휼하심으로 다시 세우신다
사도바울은 영광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설명하다 갑자기 호세아서를 언급한다. 말씀에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시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신다고 하셨다.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아들이 되었다는 말인가? 호세아서를 살펴보자.
여호와께서 더이상 남편이 아니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령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벌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벌을 받은 후 그날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바알이라 부르지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다시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장가들어 영원히 살거라 말씀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주가 되셨다.
호세아 2장은 회개, 돌이킴에 대해 말씀이다. 죄악으로 여호와께 보응을 받았지만 공의로 돌이키고 죄악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오면 다시 긍휼히 여겨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즉, 사도바울은 진노에 이르는 그릇일 지라도 공의와 정의로 돌이킬 때 또 다시 긍휼히 여김을 받은 영광의 그릇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롬9:25,26 호2:2~23)
9 남은 자만 긍휼을 다시 얻는다
사도바울은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을 거라는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영광에 이르는 그릇과 수치에 이르는 그릇을 말하다고 갑자기 남은 자를 거론한다. 그렇다면 분명 남은 자는 영광에 이르는 그릇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사야서를 잠시 살펴보자.(롬9:27)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고 돌아올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 모래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올 것이고 나머지에게는 공의대로 심판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 돌아온 남은 자는 회개함으로 공의를 행함으로 돌아오는 자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불의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호세아 2장처럼 그들이 지금은 진노의 그릇일 지라도 공의를 회복하고 회개한다면 남은 자가 되어 다시 영광의 그릇으로 회복될 것임을 증언하고 있다. (롬9:27 사10:20~22)
10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택하심을 얻지 않는가?
사도 바울은 또 엘리야 선지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엘리야가 모두 죽고 자신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호소할 때 바알을 경배하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7천명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 택하심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행위로 택하셨다면 은혜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면 행위와 은혜가 반대말 처럼 사용되었다. 은혜는 긍휼히 여기심의 의미를 담고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택하시는데 행위 때문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택하심에는 행위가 필요없나? (롬11:3~6)
11 택하심을 받지 않으면 우둔해진다
이스라엘은 영광과 평안을 구했으나 얻지 못했고 그것은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얻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우둔해졌다. 오늘날까지 혼미한 영을 가졌고 영적으로 맹인이며 귀머거리이다. 다윗은 이런 자들을 향해 그들의 식탁이 올무가되고 보응이되게 해달가고 구하며, 맹인이 되고 세워지지 말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를 미워하는 악한 자들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도 바울이 말하는 택함을 받는 자는 행위가 기준은 아니지만 공의에 따라 은혜로 됨을 알 수 있다. (롬11:7~10)
12 행위를 의지하는 게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행위가 아닌 공의를 보고 택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왜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정말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면 율법이 필요없고 삶이 필요없을 것이다. 분명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은 의로운 법을 지켰지만 의로움을 얻지 못했다. (도달하지 못했다) 왜 이들은 의로운 율법을 지키면서 의로움을 얻지 못했을까? 율법이 의롭지 않아서? 아무도 지킬 수 없어서? 그렇지 않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들이 의로와질 수 없었던 이유는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 기준을 행위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의지하다'의 뜻은 원인, 동기, 목적등이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이 행위만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껍데기 신앙은 죄의 기회가 찾아올 때 넘어질 수 밖에 없다. 즉, 부딪칠 돌에 부딪치고 만다.('부딪칠'은 상징적으로 배신의 기회, 범죄등의 뜻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위가 없다면 이 또한 죽은 믿음이다. 마찬가지로 죄의 기회가 찾아올 때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의지하여 순종하는 것이 의로움에 도달하는 방법이고 은혜를 입고 긍휼하심을 얻는 방법이다.(롬9:31~33)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얻는 방법을 헌법과도 같은 십계명에 명시해두셨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게 된다. 행위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고 이유인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 동기가 되어(신뢰함으로) 선한 행위를 갖는 방법이고 은혜로 택하심을 얻는 방법이다. (출20:6)
# 행함이 있고 믿음이 없는 이들을 택하기 위해 행함을 보지 않고 믿음을 보신다면,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는 자들을 택하실 때는 믿음을 보지 않고 행함을 보지 않으실까? 그게 온전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13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왜 스스로 죽고자 하느냐고 책망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돌이키면 얼마든지 살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인이 생명을 얻으리라는 언약을 가지고 있어도 죄악을 행하면 의로운 행위는 잊혀지고 죄악으로 인해 죽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악인이 죽을 거라는 경고를 받고 돌이켜 회개하고 정의와 공의로 행하고 생명의 토라를 지켜 행하여 죄를 떠나면 반드시 살거라 말씀하신다. 죄악이 아니라 공의로 살거라 말씀하신다. 즉, 진노의 그릇과 영광의 그릇이 언제든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광의 이르는 그릇이 될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 확증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그 심판은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않으심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겔33:11~20)
14 다시 영광의 그릇들로 일어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의로운 율법을 행했어도 믿음이 없어 의로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방인은 의로운 율법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믿음으로인해 의로움을 달성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처음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고 언약을 주신 것과 같이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인해 아브라함처럼 접붙힘이 되었다. 그럼 이방인에게 행함이 필요없느냐? 그렇지 않다. (롬9:30)
하나님께는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이 있다. 넘어지는 자에게는 준엄하심이 있고, 긍휼하심 안에 있으면 남은 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부 원가지 처럼 잘려나갈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거 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행할 때 긍휼하심이 있다. 이방인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시작해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행함으로 언약을 성취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신뢰를 회복한다면 다시 접붙여질 것이고 이것은 부활과도 같을 것이다. 이들은 다시 사도 바울처럼 영광의 그릇들로 일어날 것이다. (롬11:21~23)
15 의로움에 이르러 언약을 성취하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의 언약과 이스라엘의 모든 땅에 대한 언약,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의 성취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시작한 우리는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에 순종함으로 아브라함의 유업에 동참하고 함께 언약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창26:4,5)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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