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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묵상글 들 (연중 14주 목요일-복음 선포 지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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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4주 목요일-복음 선포 지침
주님께서 드디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그러시면서
복음 선포의 Guideline, 곧 지침 같은 것을 주십니다.
첫 번째는 무엇을 선포할 것인가, 곧 복음 선포의 내용인데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것이며,
딴 얘기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만 얘기하라는 것이고,
그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도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딴 얘기란 무엇입니까?
자기 자랑이나 자기 지식을 늘어놓는 것이고,
이 세상 처세술이니 심리학이니 인문학을 얘기하는 것이며,
심지어 신학이나 성경을 지식적으로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가 선포해야 할 복음은
주님께서 틈만 나면 가르쳐주신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얘기하고,
그 나라가 주님께서 오심과 더불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전해야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지 이제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방법은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입니다.
이 말씀대로 나도 의사가 되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쳐주며
복음을 선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수도자 성직자들에게 무료로 진료해주시는 신자 의사들을 보며
그것도 교회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이지만 일반 환자들, 특히 비신자들에게
하느님 사랑으로 진료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같은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그게 꿈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분들이 계시고 제가 선교 협동조합을
하며 주말 무료 진료를 조합에서 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거지요.
두 번째 지침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입니다.
그런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은 복음 선포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 자체가 하늘나라의 삶이고 복음적인 생활양식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거저'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주는 것은 받기 위해 주는 것입니다.
거저 받은 경험, 곧 은총체험이 없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체험을 한 사람만이 거저 줄 수 있는데
세 번째 지침,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도 바로 이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여 복음 선포를 위한
무전여행을 한 번이라도 떠난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거라는 체험을 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또 다른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를 돈으로 하지 말라는, 돈에 의지하여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제게 항상 어려움이랄까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제가 어려운 분들을 만날 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많은 분들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쓰라고 제게 돈을 주시고,
제 딴에는 그 뜻에 맞게 쓴다고 생각하는데 간혹 어떤 분이 돈을 바라고
제게 오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될 때 하느님을 돈으로 파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과연 복음 선포를 옳게 하는 것인가 식별의 어려움이 있는 거지요.
끝으로 복음을 선포하면서 머물고 떠나는 것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간혹 개신교 신자들의 경우 열정이 지나쳐 권유를 넘어 강요를 하는데
복음을 선포하면서 강요하지도 말고 질척거리지도 말라는 겁니다.
이 경우 복음 선포는 사랑이 아니가 나의 욕심이 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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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교활동 ♣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는 “평화를 빌어 주어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른,
‘영원하고 참된 평화’입니다(요한 14,27).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려면
나 자신이 그 평화를 이미 받아서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 평화를 받아서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2.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과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은(9절-10절)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믿음만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3. 선교활동의 결과에 대한 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성공과 실패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할 일에 대해서만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은
“예수님의 평화를 얻기를 희망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이라면”입니다.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나더라도,
누군가가 와서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
또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가 좋은 예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렇게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인도하는 활동입니다.>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에는 선교사가 빌어 주는 ‘예수님의 평화’가 내리고”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신앙여정이 시작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마땅하지 않으면”은 “복음을 거부하면”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무시하고 외면하고 거부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선교활동의 현실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의 책임은
거부한 사람 자신의 책임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결과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선교활동은 활동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활동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4-15).”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은 심판 때에 먼지가 털려 나가듯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동이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는 아니고,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만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에는 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기뻐하고, 사람들이 거부할 때에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슬퍼합니다.)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신 것은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8-11).”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업’이 아니라,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을 줄 때에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그냥 주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이란,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것’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즉 ‘빈손’으로 가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이란
‘돈의 힘’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돈의 힘으로 한다면, 돈과 함께 망할 것입니다(사도 8,20).
“그래도 활동비와 생활비는 필요하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활동비와 생활비도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걱정하다가는 그런 것만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하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그냥’ 믿어야 합니다.
자꾸만 토를 달고, 비유니 상징이니 하면서 복잡하게 해석하고,
그래서 본래의 가르침을 왜곡하면, 그것은 정말로 믿음 없는 태도가 됩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걱정은 반대쪽에 있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거든 감사히 받아들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맞아 줄 사람을 찾아내라는 뜻도 아니고,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거든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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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연중 14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삶의 기본자세를 철저한 무소유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도직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아닙니까?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잠시 맡겨 주신 것이니 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고서는 선심 쓰듯이 주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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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새벽을 열며.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빠다킹 신부님.
어떤 자매님께서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다면서 걱정을 하십니다. 분명히 무엇을 하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냥 멍하니 가만히 있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무엇을 하러 주방에 가기는 했는데 기억나지 않아서 그냥 물 한 잔만 마시고서 다시 거실로 나왔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기억나지 않는지, 혹시 치매의 시작이 아니냐면서 걱정을 하시더군요.
기억이 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없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면 답답한 마음만 가득해집니다. 기억이 났을 때, 또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답답함은 사라지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 답답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창조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많습니까? 이런 마음을 벗어던지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는 방법은 주님을 알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의 파견에 사도들은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명령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도 평화를 빌면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사도들의 이 전교 여행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비우는 행동에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 이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모습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제자들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지상의 모든 보물은 주님께로 가는 데 해가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옷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한다면, 내가 버려야 할 이 세상 것은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이것도 가져야 하고, 저것도 지녀야 한다면서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붙잡을 손이 없다며 그냥 주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모든 것을 버려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용기 있게 전할 수 있으며, 내가 세상의 것에서 벗어날 때 주님의 평화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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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보다 더 용기를 주는 것은 없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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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가리고 있는 것은 누구?
이상하게도 졸음이 계속 몰려옵니다. 읽고 있는 책이 지루한 것도 있겠지만,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문이라도 열어 환기하려고 창문을 가리고 있었던 블라인드를 걷었습니다. 그 순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너무나 예뻤고, 그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세 그루의 은행나무는 멋진 조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평상시 햇빛이 들어온다고 블라인드로 가리고 있었던 창문이었습니다. 이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나니 평상시 쉽게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됩니다. 행복했습니다.
이 행복을 그동안 누가 막고 있었던 것일까요? 블라인드를 친 사람이 저였으니 당연히 저입니다. 행복을 스스로 가리고 있던 ‘나’였습니다.
지금 행복을 스스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을 걷어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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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연중 제14주간 목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이 있습니다. 포정이라는 사람은 소를 다루는 백정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백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꾼다고 합니다. 뼈를 베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꾼다고 합니다.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정은 19년을 같은 칼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뼈와 살의 빈틈을 베기 때문입니다. 포정은 소를 다루면서도 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서핑을 처음 하는 사람은 파도를 헤쳐 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위험하기도 하고, 쉽게 지친다고 합니다. 서핑을 잘하는 사람은 파도를 탄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가 오면 파도에 몸을 맡긴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가 지나가면 기다린다고 합니다. 좋은 파도는 또 오기 때문입니다. 포정이 소의 빈틈을 알아 칼을 오래 사용하듯이, 파도를 타는 서퍼가 바다를 즐기듯이 우리는 삶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길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삶의 파도에 맞설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래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려 깊은 식별입니다. 신앙인에게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의 경험입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뒷산의 나무들이 뽑혔습니다. 성당 뒷산과 접한 아파트의 옹벽이 밀려났습니다. 시장도 왔었고, 구청장도 왔었습니다. 뒷산이 있어서 그러니 뒷산의 높이를 낮추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시장도 의견에 동의했고, 구청에서 뒷산을 9미터 정도 깎았습니다. 성당에 작은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마당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이왕에 마당이 생겼으니 조금 더 큰 마당으로 만들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태풍으로 작은 마당이 생긴 것도 감사할 일인데 더 욕심을 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사려 깊은 동창 신부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동창 신부는 제게 ‘마당을 넓히는 과정에서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본당 신자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당이 생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태풍과 뒷산에 빈틈이 있었고 우리는 약간의 비용을 들여서 넉넉한 마당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자존심에 머물렀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명분에 집착했다면 마당은 마련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넓어진 마당에서 윷놀이도 하고, 성모의 밤도 하고, 성탄절에는 따끈한 어묵을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강한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풀잎이 눕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멈추면 풀잎은 언제나 다시 일어섭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풀잎은 뽑히는 법이 없습니다. 커다란 나무는 강한 바람에도 당당하게 맞서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멈추면 뿌리가 뽑히고, 넘어진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라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모임은 자제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풀잎이 강한 바람에 먼저 눕듯이, 코로나19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조심해서 극복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유혹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욕망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원망과 분노의 바람이 불곤 합니다. 풀잎이 바람에 눕듯이 우리는 겸손하게 누워야 합니다. 기도하며 누워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평온의 바다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마음은 큰 숲이 되어 많은 사람이 머물게 됩니다. 나무는 바람에 뽑힐 수 있지만 숲은 바람을 보듬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숲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큰 숲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사(聖事)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가 숲이 되고, 누가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누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은총으로 드러내는 성사가 되어야 할까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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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이영근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마지막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였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입니다. 그런데, 단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만 하지도 않습니다. 그 징표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권능도 주셨는데, 그것을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어라.’ 하십니다.
“앓는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여기에서는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사되고 베풀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나눌 때라야 비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나누고 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신다. 그러니, ‘자신의 것인 양’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다른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받은 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주신 분’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받은 것’을 주며, ‘주신 분’의 사명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포해야 할 나라는 자기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늘나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챙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입을 것, 먹을 것, 그 어떤 안전장치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기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고,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지고,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라 하십니다.
또한,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고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입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받아주든지 않든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마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군말 없이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형제에게 평화의 인사를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마태 10,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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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다운 행복한 삶
-사랑, 회개, 선포-
새벽 인터넷 기사 첫 줄의 문장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선생님은 제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대로 공감이 가는 말마디였습니다. 한결같은 정주의 삶, ‘주님의 전사戰士’로서 하루하루 분투奮鬪의 노력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절로 제정신이 아니라 분투해야 비로서 제정신입니다.
며칠전의 감동이 새롭습니다. 22년전(1998년) 수도원을 취재하면서 사진을 찍었던 수녀님의 근황을 듣고 당시 수녀님이 전해줬던 감사의 편지를 찍어 보내 드렸더니 반가운 답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신부님, 조 멜키올 수녀예요. 신부님의 소식을 듣고 참 반가웠습니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제 마음의 습자지에 화-악 퍼지는 듯합니다. 가끔씩 신부님의 시를 되뇌이곤 합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벌써 22년이 되었다니---”
반가운 소식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한결같은 정주의 분투의 삶이 바로 구원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엊그제 첫 백합화꽃의 발견이 반가웠고, 어제 처음 발견한 능소화 고운 꽃도 반가웠습니다. 참으로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 꽃들이요, 얼마전 써놨던 글도 떠올랐습니다.
-“늘 거기 그 자리
때가 되면 피어나는 꽃들
누가 보아 주든 말든
알아 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하루를 살아도
하늘님 가득 담고 영원을 사는
하늘님만으로 행복한 무아無我, 무사無私, 무욕無慾의 들꽃들인데”-
그러니 사랑하며 하루하루 꼬박꼬박 아름다웠던 추억들 마음에 각인하며 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의 황당했던 일도 잊지 못합니다. 새벽 2시에 시작해 3시 넘어 거의 끝나기 직전에 노트북이 작동을 멈춰 썼던 강론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아, 치매가 이런 것이겠구나! 기억이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정신이 하얘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사랑으로 분투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한결같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치매에 대한 최고의 예방책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첫째, 사랑의 삶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온 마음, 온 정신, 온 영혼으로 온 힘으로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땅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다면 이렇게 살 수 뿐이 없습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해서 살아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도 이런 사랑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 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정통했던 호세아 예언자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분투의 하느님 사랑이 한결같은 정주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재미로, 맛으로,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회개의 삶입니다.
결국 어제에 이어 이런 사랑을 회복하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호세아 예언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자발적 표현이 회개입니다. 사랑할 때 회개요, 결국은 사랑의 회개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앎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시작입니다. 회개없이는 자기를 아는 겸손도, 지혜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해 사랑의 주님을 닮아갈 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참 행복입니다. 연중 제14주간 본기도 내용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가 사랑의 회개로 전 존재를 하느님 향해 활짝 열 때 이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셋째, 선포의 삶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사랑의 회개로 끝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의 복음 선포의 삶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회개의 완성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회개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회개했을 때 영육의 치유에 주님의 권능도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만으로 행복하고 부요한 삶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며, 나병 환자들을 깨끗이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인지요. 회개를 통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최고의 선물은 이런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을 선포하는 것이며 선물하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셨기에 무소유의 홀가분한 행복한 삶입니다.
말 그대로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입니다. 이런 주님을, 주님의 평화를 선물함이 진짜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이런 복음 선포자의 삶 자체가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 나라의 복음이 될 때 저절로 복음 선포입니다. 얼마전 타계한 고매한 분의 진솔한 고백도 심금을 울립니다.
“인생, 그거 너무 이리저리 궁리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다 똑같아요. 다 어린애죠. 이 난경에 처해 보니 뼈저리게 알겠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 사람들에게 충분히 배려하고 관심을 베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여러분은 후회없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욕심없이 평온平穩한 마음으로 사는 게 제일 부럽습니다. 최소한의 생계만 꾸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지나간 날들을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견뎌볼게요.”
후회없는 삶,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제자리에 정주하면서, 한결같이, 제정신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를 평생처럼,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 회개의 삶, 선포의 삶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주님께 다음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십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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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호세아 11,1-4.8ㅁ-9
마태오 10,7-15
가장 가난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언젠가 장장 12~3년이나 되는 오랜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 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분들 앞에서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시설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둘 곳 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오 복음 10장 8~10절)
돌아보니 저도 형제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텐데, 적어도 갈아 입을 여벌 옷 몇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 옷도,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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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호세아 11,1-4.8ㅁ-9
마태오 10,7-15
우리는 자녀 위로 쏟아지려는 유황불을 볼 수 있는가?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 두 명의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 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마르크 슐츠’와 ‘에드워즈 조나단’입니다.
그런데 마르크 슐츠라는 사람은 ‘내가 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 내 자손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도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고 뉴욕에다 술집을 차렸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으니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을 추적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교도소에서 5년 이상인 형을 살은 자손이 96명, 창녀가 된 자손이 65명, 정신이상, 알코올 중독자만 58명,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명, 정부의 보조를 받아서 살아가는 극빈자가 286명이었답니다.
모두 965명이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에드워드 조나단은 당대에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하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낳았습니다.
자손 중에 선교사 목사만가 116명이 나왔고, 예일 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가 86명, 군인이 76명, 나라의 고급관리가 80명, 문학가가 75명, 사업가가 73명, 발명가가 21명, 부통령이 한사람, 상하원의원 주지사가 나왔고, 교회 장로 집사도 286명이 나왔습니다.
모두 816명이 사회의 명망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출처: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부모가 되라’, 다음 블로그, ‘풍성하고 행복하게’]
대통령까지 지냈던 케네디 가문도 사실 술장사를 해서 그런지 자손이 대부분 안 좋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담배 농사로 부를 축적한 조지아주 레스터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개신교 측의 과장된 자료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술, 담배 사업이나 무기 사업, 자연을 파괴하는 사업 등으로 유산을 물려주면 후손이 힘들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것이 믿음이면서도 재물만 물려주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는 개척자의 아내로서 무수한 고난과 빈곤과 싸우면서도 링컨이 9살 때 생을 마감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얘야! 나는 너를 두고 하느님 앞으로 먼저 간다.
나는 네게 좋은 집도, 좋은 땅도, 많은 재산도 물려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네게 이 성경책 한 권을 유일한 유산으로 주고 간다.
너는 한평생 이 가운데 있는 말씀을 보배로 삼고, 재산으로 삼고, 양식으로 삼아 이 교훈대로 살아나가거라.
그러면 네 길이 형통할 것이다.”
링컨은 새로운 엄마 사라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도 대단한 분입니다.
아버지 토마스는 링컨이 장작 패는 일이나 하며 평범한 농부의 길을 걷기를 원해서 ㅣㄱ성경과 책을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때마다 사라는 그의 남편을 설득합니다.
“나는 링컨의 엄마예요. 링컨을 낳아준 엄마 낸시처럼 키우고 싶습니다.
낸시는 성경의 가르침과 책의 가르침을 통하여 아이를 양육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협조해 주세요.”
링컨은 두 어머니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가 잘한 것은 우리 어머니 덕입니다.
두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유산은 성경의 가르침과 책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진정 후손에게 재물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믿음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학원 가는 것은 허락하며 성당 가지 않겠다고 하면 참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물려주지 않으면 그 자녀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 볼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고 믿음만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의 결말을 이렇게 말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제 때에 전하지 못해 자녀가 나중에 유황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그래도 성당이 아닌 학원에 보낼 수 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이는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롯과 아내, 두 딸을 구하기 위해 들어간 두 천사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립시다.
그 천사들은 소돔 위로 막 떨어지기 직전의 유황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과장된 위협이 아닙니다. 무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내 사랑하는 이들 위에 쏟아지려는 유황불을 볼 수 있어야 참으로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도가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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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평화를 주러 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여"(호세 11,1)
제1독서는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왔는지 매우 인간적인 표현으로 생생히 전달합니다. 주님은 마치 부모가 제 속으로 낳은 아기에게 하듯 이스라엘에 온 정성과 사랑을 쏟으셨지요.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호세 11,2).
슬프게도 이것이 그 지고지순한 주님 사랑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은 쏟아지는 주님 사랑을 누리면서도 다른 사랑에 탐닉하지요. 그들을 매료시킨 바알들과 우상들은 당장의 풍요와 쾌락, 권력을 약속하며 이스라엘 안에 자리를 잡아갑니다.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호세 11,9).
성경은 배반한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 분노의 자취들을 감추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달래기도 하시고 호소도 하시다가 분노하여 이웃 나라에 넘기기도 하셨지요.
그런데 지금 주님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당신을 소외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로 다가가지 않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을 지배하는 연민의 사랑이 분노 대신 다른 길을 찾은 까닭이지요.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마태 10,8).
더 이상 분노를 안고 이스라엘에게 다가가지 않겠다고 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당신 아드님을 통해 백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구현이시지요. 예수님은 치유, 정화, 구마, 되살림, 용서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가 사랑과 자비를 쏟아 주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예수님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제자단을 구성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열둘로 구성된 최초의 제자단은 그들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전승되고 확장되어 온 세상에 이르기까지, 세상 끝 날까지 이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당신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한과 능럭을 주시는 동시에 평화의 전파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느 집에 들어가든 평화의 인사를 하는 이야말로 주님의 제자입니다.
분노를 거두신 하느님께서 죄를 묻지 않고 용서를 선언하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 백성에게 다가오셨고, 이제는 제자들을 통해 평화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사실 주님께 배반하던 이스라엘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불충한 우리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안 변하고 못 변하는 죄스런 실존을 인내와 용서로 받아안으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평화의 축복이 되십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마태 10,13).
그런데 그 평화는 마땅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하시네요. 빌어주는 평화가 진정한 축복이 되려면 받는 이도 합당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평화는 일방적으로 강요되거나 주입될 수 없는 덕이니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존재일지 오늘 말씀 안에서 찾아봅니다.
"그들은 ... 알지 못하였다"(호세 11,3).
자신이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은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합니다. 제1독서의 이스라엘이 놓친 부분이지요. 자기에게 쏟아지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총과 돌봄을 알고 감사하는 이는 자기 삶을 계획하고 이끄시는 주님의 주도권과 섭리에 자신을 맡기기에 평화롭습니다. 아니, 그 자신이 이미 평화의 사람이고 평화일지도 모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이 빌어 주는 평화가 이미 우리 집 문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평화는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 제자의 제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오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매일 말씀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의탁의 삶을 살아가는 벗님은 그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이지요. 그 평화를 한껏 누리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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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시각안에서만 바라보면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것도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을 챙겨 준비해야 할 것들이 분명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빈 손으로 떠나라고 하십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선물로 받아서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지향하는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인 작은형제회(ofm)를 창설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전포에만 전념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여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준비하다가 정말 중요한 본질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어디론가 떠날 때는 빈 손으로 떠나야 설레임도 크게 다가옵니다.
그곳에서 주어지는 선물에 대한 기대감 때문입니다.
떠날 때 짐이 많으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많은 짐이 때로는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빈 손으로 가야 그곳에 계신 주님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고, 그래야 또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복음화의 사명을 부여하시고 난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임마누엘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적인 것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임마누엘이신 주님 손 꼭잡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이 되고, 이 복음을 너와 세상에 전하는 또 하나의 사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마태10,7)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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