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부에 들어서니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 같다. 지난 저녁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돌아다녔는데도 춥지 않았다. 오늘 아침도 날씨는 역시 흐렸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날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 해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마음이 우울해지고 있었다.
후에도 큰 도시답게 아침 출근길은 매우 번잡했다. 후에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31일 베트콩의 전면적인 구정(뗏 Tet) 공세에 의해 베트콩에게 함락되었던 도시로 함락되었던 여러 도시 중 가장 늦게까지 저항하다 다시 미국에게 함락되었다.
펑크 나고 펌프와 브레이크는 망가지고
지난 1주일 사이에 펑크가 너무 자주 났다. 그것도 한 자전거에서 심지어 네 번까지 났던 적도 있다. 오늘만 5번의 펑크가 나, 지금까지 매일 평균 3차례 펑크가 났다.
바람이 빠져 튜브를 교환할 때 반드시 타이어에 뾰족한 것이 박혔을 경우를 대비해 항상 타이어 안쪽을 세밀히 쓰다듬어 봐야 한다. 분명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어 튜브를 교환했지만 달리면 한참 가다 또 바람이 샌다. 이러길 세 번째, 아예 타이어를 빼고 세밀하게 검사했다. 타이어의 한 작은 구멍을 파헤쳐보니 아주 날카로운 유리가 박혀있었다. 겉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속으로 박혀있었다. 이것이 달리면 압력을 받아 조금씩 올라와 아주 작은 구멍을 내 바람이 서서히 빠진 것이다. 타이어를 까뒤집으며 속에 있은 유리를 모두 파냈더니 그 다음부터는 괜찮았다.
네 명 모두 공기펌프를 가져갔으나 첫날 한 펌프가 고장 나고, 다음 날 또 다른 펌프가 고장 났다. 둘 다 산 지 오래되어 자연히 망가진 것 같았으나 하필 여행 중에 망가지다니. 다른 두 펌프는 크기가 작아 바람 넣기가 힘들었다. 그 뿐 아니라 튜브의 노즐을 잡아먹어 세 개의 새 튜브를 아예 못쓰게 만들었다. 성치 않는 펌프에 여유분이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아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당장 우리 자전거에 맞는 26인치 튜브와 펌프를 구해야 했지만 일반 자전거 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두 대의 자전거는 흙탕길을 헤쳐 오느라고 그랬는지 브레이크까지 고장 났다. 자전거에는 앞뒤 두 개의 브레이크가 있어 한 쪽을 제거하여도 운행에는 지장이 없지만 내리막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700km 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고개, 하이반
하노이를 떠난 지 700여 km 만에 처음으로 고개가 나타났다. 후에까지는 거의 평지였고 후에에서 45km 지점에 처음으로 해발고도 54m, 59km 지점에 64m 정도인 고개이다. 그것도 오르막이라고 처음으로 내리막을 달려봤다. 10km 더 진행하니 왼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오른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있는 곳에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에 터널로 가는 길은 최근에 완성되었는데 자전거는 갈 수 없다.
해발고도 5m인 고개 입구에서 굽이굽이 굽은 고갯길을 올라간다. 고개를 오르면서 처음으로 바다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1번 국도는 동쪽 해안가를 따라 내려가지만 바다에서 좀 떨어져 있어 바다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올라가면서 아름다운 해변가와 멀리 남중국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 굽이 넘어가면 또 다른 오르막이 나오는 것을 반복하니 멀리 다낭 시내가 보인다. 이 고개가 바로 하이반(Hai Van) 고개이다. 해발고도는 475m 정도로 입구부터 고도차는 약 470m 정도이나 그 거리는 10km 정도 되었다.
하이반 고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던 곳으로 한국군이 전투에 참여한 곳이기도 하다. 고개 정상에서 베트남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출발하려는데 펑크가 또 난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펌프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주변 상인들이 갖고 있는 펌프를 빌려 간신히 바람을 넣고 오랜만에 내 달렸다.
투박한 튜브 그러나 성능 좋은 펌프
다낭은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 십자성 부대가 주둔한 곳으로 베트남 제4의 도시로 매우 큰 도시이다. 그래서 우리가 찾는 튜브와 펌프가 있을 것 같았다. 주변 자전거 가게에서 물어보니 자전거 부품을 파는 도매상의 약도를 그려주어 우선 찾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없고 베트남산 튜브는 매우 투박하고 크기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여분의 튜브도 없고 펌프도 모두 고장 나 필요하면 튜브를 잘라서 사용할 것을 각오하고 튜브와 펌프를 구입했다. 다행히 펌프는 프레스토 타입인 튜브에 연결할 수 있는 어댑터를 함께 구할 수 있었다.
튜브와 펌프를 산 것은 마치 보험을 들은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 거의 펑크가 나지 않았다. 우리가 산 베트남 튜브는 사용도 못하고 호치민에 도착하면서 용도폐기 되었으나, 펌프는 가격에 비해 너무도 바람이 잘 들어가 갖고 왔다.
다낭 시내로 계속 직진하며 들어가니 한(Han) 강이 나왔다. 강 주변에는 많은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별 세 개의 고급호텔에서 묵었다. 숙박비가 좀 싸다했더니 역시나 강가에 있음에도 우리가 묵은 방은 조그만 창문조차 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시설은 아주 좋았고 다음날 아침 식사는 매우 근사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아침상을 받고 오랜만에 아침을 즐겼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비가 오지 않았고 해를 볼 수 있었다.
퐁니마을 민간인 학살
다음 날 꽝남(Quaung Nam)성에 들어섰다. 베트남에서 우리 군인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주로 일어난 지역으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지역은 디엔반현 디엔안싸에 있는 퐁니마을이다. 이 마을은 당시 미 해병대 캡소대와 자매결연까지 맺은 안전마을이었으나 1968년 2월 12일 구정공세 반격작전을 하던 청룡부대가 퐁니마을 사람 69명 학살을 학살하였다. 당시 주민들은 마을이 모두 불타 담요나 해먹이 없어 아이들 주검은 상자나 대바구니에, 어른들 주검은 커다란 채반에 담아 머리에 이고 길을 걸어 1번 국도 앞 베트남 정부군 초소까지 가서 도로 양옆으로 시신을 늘어놓고 청룡에 대한 응징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한-베트남 간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미국의 강한 항의로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조사하였고 당시 중대장은 이 사건으로 조기 귀국을 당했다.
우리가 지어주는 병원 건설현장
꽝남성의 성도 탐키(Tam Ky)에서 한 25km를 지나니 매우 커다란 한글 광고판이 국도 변에 서있는 공사현장이 나온다. 작년 12월에 공사가 시작되고 바로 1주일 전에 기공식을 한 추라이(Chu Lai) 지역의 베트남중부지역종합병원 건설현장으로 한국 정부의 의료지원사업으로 짖고 있는 것이다. 추라이 지역은 청룡 부대가 주둔하였던 곳으로 최대의 미군기지가 있던 곳이다. 한국의 베트남 지원이 이런 식으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위로가 된다.
소음과 먼지 속에 국수를 말아먹다
꽝응아이성으로 들어갔다. 성도 꽝응아이를 들어가는 입구에 강(Song Tra Khuc)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가면 꽝응아이이다. 그러나 미라이(My Lai)학살로 유명한 손미(Son My)마을은 이곳에서 갈라진다. 강가에 있다는 호텔을 찾아 갔으나 마침 폐업 중이었다. 근처 민박집을 찾았다. 방은 거의 비어 있음에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른다. 우리는 그동안 준 것을 설명하고 결국은 반으로 깍았다.
문제는 숙소 근처에 식당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내까지 강을 건너가기도 그렇고 하여 강 입구 도로변에 간이식당을 찾았다. 먹을거라곤 국수뿐이었다. 오가는 자동차의 소음과 날리는 먼지 속에서 얼음에 담긴 맥주를 마시며 한 그릇의 국수를 말아먹고 나니 기운이 난다.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발바닥이 매우 가렵다. 그동안 젖은 신발을 계속 신고 다닌 탓인가 보다. 호텔방에 있는 에어콘과 TV가 모두 우리의 LG 제품이다.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많은 곳에서 우리가 만든 제품을 보았다. 직접 그 현장을 보니 우리나라의 가전제품이 세게 곳곳에 많이 나가있는 것을 실감한다.
미군이 자행한 송미마을 학살
이른 아침에 택시를 불러 송미마을로 갔다. 너무 일러서인지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위령관 입구 전면에는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과 나이가 적혀 있고, 안에는 당시 참혹했던 장면의 사진과 관련 군인의 학살 장면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당시의 촬영한 사진이 알려지면서이다. 전시품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남조선 용병(South Korean mercenaries)이란 단어도 들어있다.
해방전선위원회중앙당은 침략국가 미국과 남조선 용병들이 국민들과 세계시민들 앞에서 자행한 잔인한 범죄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국제법정에 이러한 미제국의 전쟁범죄를 심리하라고 고발했다(The central part liberation front committee accuse violently atrocious crimes of the America aggressor and the South Korean mercenaries before the national people, the world people, the international court to try war crimes of the American empire.).
전시관 밖에는 당시 마을의 처참한 모습을 꾸며 놓았다. 마을과 전시관 사이에는 강력한 인상을 풍기는 조각 작품이 우뚝 솟아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보 티 리엔의 남편이 만든 작품이다.
송미학살은 미라이학살로 알려져 있다. 미군에 의해 일어난 최대의 민간인 학살로 베트콩의 구정대공세 직후인 1968년 3월 16일 송미마을 인근 4개 부락에서 자행되었다. 미라이는 작전지도에 명기된 이름으로 실제 학살이 이루어진 송미와 딘케의 인접마을이다. 학살이 일어나기 이틀 전 인근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들이 부비트랩에 걸려 사상자가 발생하자, 베트남 정부의 신분증을 보유한 양민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17명의 임산부와 어린이 173명을 포함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고 모든 가옥에 불을 질렀다, 미군의 피해는 이 참상을 보다 못하여 스스로 자해한 병사 1명 뿐이었다고 한다. 생존자 보 티 리엔이 세계를 순회하며 베트남 참상을 폭로하여 송미학살은 미국 내 반전 평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현장을 지휘한 캘리 중위는 40년 만에 공개 사과했다.
휘영청 밝고 둥그런 보름달이 떠오르다
오늘의 주행 계획은 약 70km로 예정되어 있어 아침부터 느긋하게 자전거를 몰았다. 목적지인 사힌쓰(Sa Huynh)는 바닷가에 인접한 해변마을이다. 책자를 통해 소개된 호텔을 찾았으나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있어 마을로 되돌아가 숙박을 하였다.
해변가에 위치한 호텔과 바닷가 사이에 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방문 앞에는 넓은 복도가 있어 옷을 널고 자전거를 정비하기에 아주 좋았다. 앞에 있는 바다를 이곳에서는 동해라 하고, 국제적으로는 남중국해라 한다. 해변가로 나갔으나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당장은 환경에 신경을 쓸 형편이 되지 못하겠으나 경제가 발전하고 환경을 잘 가꾸면 베트남의 해변은 엄청 좋은 관광자원이 되리라 본다.
날씨는 화창하고 멀리 파도소리는 좋았으나 모기에 뜯겨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저녁을 먹을 때는 바다 위로 휘영청 밝고 둥그런 보름달이 떠올라 온 세상을 훤히 비추었다.
크기에 관계없는 야자 가격
주행 중에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야자수를 마셨다. 처음엔 야자가 보이면 들어가서 마셨다. 대개 10,000동을 받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큰 야자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자꾸 지나치게 되고 결국 한 곳에 섰다. 그런데 야자가 좀 작았다. 그러나 주인은 크기에 상관없이 10,000동을 받는다. 남부로 갈수록 야자가 더 커 보였다. 한 번은 야자가 좀 커 보이길래 잠시 쉬어갈 참으로 들렸다. 크기에 관계없이 가격이 같은 줄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야자를 통채로 내 주지 않고 속에 있는 물만 컵에 따라 나온다. 한 통을 한 컵에 다 집어 넣었을리는 없는 것 같았다. 주인 마음대로였다.
2월 첫째 날이다. 푸엔(Phu Yen)성의 성도 투이호아에서 28km 지점을 지나나 앞에 다비아(Nui Da Bia) 산이 보인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이 산에서는 우리 군인의 많은 교전이 있었다. 이 고개를 넘어가니 칸호아(Khanh Hoa)성의 성도 나짱(Nha Trang)까지 평지가 계속 이어졌다. 첫 번째 나짱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갔더니 해안가로 돌아가는 도로였다. 경치는 아주 좋았으나 8km 정도 더 가야했다.
해안가를 따라 계속 달리니 나짱의 중심지가 나온다. 좀 싸고 좋은 호텔을 찾기 위해 해변가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가격 대비 이번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호텔이 되었다.
주변 보따리상인과 상생하다
해변가에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한 식당에 들어가 해변가에 위치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은 외부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삶은 바닷가재를 파는 한 아주머니가 팔아달라고 밖에서 우리에게 조른다. 가격은 매우 저렴했다. 그러나 이미 식당에 들어와 주문했고 남의 음식을 식당에서 먹는 것은 곤란하였다. 그도 눈치를 챘는지 안에서 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았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사 먹어도 좋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가.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쫓아내고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식당의 종업원이 보따리 상인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주인의 허락을 받았는지는, 상납을 받는지는 몰라도 그 종업원은 쾌히 그렇게 하라고 한다.
음식을 다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그 그릇에 담으니 그 아주머니가 도로 걷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