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신도 영성 : 역사 - 고대] 구별 없이 같은 영적 여정을 적극적으로 걸어갔던 평신도
지난해 여름에 필자는 로마에서 전 세계 신학 교수들과 함께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차관 대주교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대주교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중에서 필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야기가 있다.
대주교님은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에 참석하셨는데, 대회 중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모습으로 봉사하는 한국교회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열정에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른 나라, 다른 민족 사람들과 비교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적 특징을 실감나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사실 한민족은 진취적인 기상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민족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한국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평신도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고국으로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들어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물론 일부이기는 하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자신의 신앙 여정의 길을 스스로 잘 찾지 못하고 방황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여정에서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필자는 앞으로 몇 번의 지면을 통하여 2,000년 교회 역사의 모습과 함께 오늘날 우리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나아가야 할 영적 여정의 길을 밝혀보고자 한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평신도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용어가 포괄적으로 ‘평신도’라는 의미를 대신하여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의 제단에서 봉사하는 레위 지파의 사제가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과 그들이 뽑아서 세운 교회의 감독과 봉사자가 있었다. 하지만 성경은 좁은 의미에서 특별한 직분을 수행하는 이들과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꼭 상반되는 개념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에서 사도들도 구약의 정신을 이어받아 하느님의 자녀들이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 2,9; 참조: 2,5)이며,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묵시 1,6; 참조: 5,10)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자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보편 사제직’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초대교회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좁은 의미에서 특수 사제직과 구별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대립되는 개념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특수 사제직을 넘어서는 보편 사제직으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포괄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많은 영적 권고들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진복팔단과 그 이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부자청년에게 하신 요구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귀 기울여 듣고 실천해야 하는 내용들이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실천되었던 공동소유, 공동분배의 공동체에도 더 특별하거나 선별된 사람들이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었고, 들어갔었다. 나아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이 세운 여러 지역교회 공동체에 편지로 당부하였던 강도 높은 윤리적 권고사항도, 요한 사도가 순교할 각오까지 하면서 신앙을 지키라고 한 묵시록의 당부도 모두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가르침이 일부 특별한 직분에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알아듣고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아울러 성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별되는 것보다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께 선택됨으로써 악한 세상과 구별되어 교회에 속한다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평신도 그리스도인과 수도생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평신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1세기 말경 로마의 클레멘스(「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 40,5 참조)를 비롯하여 2-3세기 여러 교부들은 대사제, 사제, 레위라는 유다교 종교제도의 개념을 빌려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수 사제직에 대해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 발전단계에서 정착되는 교계제도의 질서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균등하게 언급하는 맥락일 뿐이지 평신도와 대립되는 개념도 아니요, 교회 내에서 특별한 직분에 직무상의 모든 책임과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4세기 초까지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와 그에 따른 순교의 상황에 놓여있었기에,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고 증언하는지가 최대 과제였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간에 배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때로는 목숨까지 내어놓으며 신앙을 증언해야 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질 수 있었던 영적 여정이었다. 곧 성직자라고 더 엄격한 영성생활을 해야 하고, 평신도라고 해서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영성생활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순교의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과 합일하는 같은 영성을 실천하며 살아갔다.
한편 3세기 중반부터 교회 안에서는 이집트 사막에서부터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정신의 연장선에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도생활을 실천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많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의 결단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하였다.
이집트 사막 은수자의 아버지라 부르는 안토니오 역시 어느 날 성당에 들렀다가 듣게 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라는 말씀을 즉시 실행에 옮기면서 은수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에서 피를 흘리는 순교의 상황이 점차 사라지게 되자 많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합일의 여정을 걷고자 하는 열망을 백색의 순교라고도 할 수 있는 은수자로서의 삶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것이 후대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면서 본격적인 수도생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모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수도생활에로 나갈 수도 없었고 하느님과 합일의 영적 여정을 포기할 수도 없어 고민하던 차에, 그들은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순교자들이 묻힌 무덤으로 순례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예루살렘 등지와 교회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들도 순례하였다. 그들이 걸어간 순례의 길은 나름 고난과 희생이 요구되었던 어려운 여정이었다. 한편 순례의 길마저 떠나기가 여의치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은 전례생활을 통해 강론을 들으면서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나갔다.
물론 4세기부터 급격히 늘어난 새 영세자들 중에 때로는 충분한 준비나 결단 없이 입교하였던 일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세상과 교회, 이교적인 것과 그리스도교적인 것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영생을 얻고자 그리스도에게 기도하였지만,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이방신에게도 기도하면서 종교혼합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베네딕토 등의 가르침이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영적 지도자가 되기 전에 오랫동안 평신도 또는 일반인의 신분으로서 삶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다양한 체험을 하였기에, 늦은 나이에 성직자, 수도자가 되어서도 그 경험을 잘 살려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에게 더 적합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께 속한 고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성직자, 수도자와 한 모습으로 따르면서 영적 발전을 위한 여정을 걸어가고자 주님의 은총 속에서 노력하였다.
[평신도 영성 : 역사 - 인물] 초기 그리스도교의 평신도 영성가들
동일한 영성의 다양한 실천
평신도 영성에 관해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고마움과 함께 반성을 한다. 조선시대의 평신도들이 우리 땅에 복음을 들여오고 정착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치고 순교에 이르기까지 열정을 바친 것에 비해 침묵을 큰 덕인 양 살고 있는 평신도인 나의 모습을. 못난 모습의 부끄러움을 잠시 접어두고 훌륭한 신앙의 선조들을 찾아내어 소개를 하는 동안 그 숨결이 내게도 배어들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으로 시작한다.
평신도의 모델,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
교계제도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일어난 뒤 백여 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과 그들의 성격에서 평신도의 모델을 찾는 것이 좋겠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12명, 제자 또는 사도로 불리는 이들은 베드로에서 시작하여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주제넘게 앞서고, 심지어 스승을 돈에 팔아넘겼다. 그럼에도 그들이 사도의 권위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인품, 지위, 재산, 학력과 상관없이 부르심에 응답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그 한 가지이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그들이 내린 결단, 그것이 바로 새로운 질서로 이루어질 세상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다양한 배경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던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헤어졌다가 부활을 경험하고 다시 모였고, 다양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는 열매를 맺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순교, 안드레아와 토마스의 선교, 스승을 팔아넘겼다가 곧 죄를 뉘우치고 자살했다는 유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일상을 넘어서는 결단 안에서 또 다른 삶의 일상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한 가지 신앙에서 시작된 사도, 제자들, 추종자들은 어떻게 복음을 위해 헌신했는지 성경을 펼쳐보자.
순교자와 선교사들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 곧 순교자이다. 12사도들 중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스승이 매달린 십자가에 감히 같은 자세로 달릴 수 없다는 겸손으로 그렇게 순교하였고,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은 바로 그의 무덤에 기초를 두고 세워졌다. 교회는 이렇게 바위와 같은 순교자들의 고백과 열정을 반석으로 하여 튼튼한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12사도 이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고, 초대교회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위하여 제자들 가운데 일곱 봉사자를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뛰어난 이가 스테파노였다. 그는 봉사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고, 그의 말에서는 지혜와 성령이 드러나 반대자들은 대항할 수 없었다(사도 6,8-10). 결국 그는 예수님처럼 원로와 율법학자들에게 고소를 당하고 최고의회에서 유다교의 예언을 이룬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다 돌에 맞아 죽고, 첫 번째 순교자로 기록되었다(사도 7장).
둘째, 복음을 전하려고 자신의 땅을 떠나 돌아올 기약 없이 낯선 땅으로 떠나간 사도, 곧 선교사들이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증언을 믿지 않다가 부활한 이의 몸에 남겨진 못 자국을 보고서야 믿었다는 토마스(요한 20,24-29)는 눈으로 확인한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고자 인도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인도의 서남쪽 뭄바이 지역에는 토마스 성인 도착을 기념하는 비가 있고, 이미 1세기에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인도인들은 동방교회의 한 갈래인 말라바르 교회를 세웠다.
여러 해 전에 로마의 ‘데레사’ 대학 도서관에서 함께 일했던 인도인 존 신부는 수염을 기르는 삼십대 중반의 호인이었다. 어느 날 선교에 관한 토론을 하다가 그가 바로 말라바르 교회의 사제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보다 먼저 세워진 인도교회의 뿌리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 이후 서구인들의 선교를 통해 비로소 아시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가톨릭교회의 선교역사에 관해 코웃음으로 답하던 그의 모습은 충격을 넘어서는 신선함이었다.
바오로 사도
셋째, 스테파노가 순교하던 자리에 앞장서 있던 사울(사도 7,58)은 보수적인 유다인이었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뒤에 바오로라고 개명하고 스스로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다(갈라 1,11-24). 12사도들을 평신도의 모델로 보았으니, 그 역시 평신도의 모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지중해를 가로질러 로마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나 선교여행을 하고, 마침내는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뿐 아니라 소아시아의 여러 신생교회에 편지를 보내 새로운 신자들을 격려하고 교회를 키워낸 설교가인 동시에, 당시 국제사회인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을 믿고 따르는 것의 의미를 해석한 신학자였다.
그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인 로마서는 오늘날에도 시들해진 신앙에 새 힘을 북돋우는 영적 잔칫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편지들 이후에 쓰인 네 복음서들 역시 그의 영향으로 작성되었다고 하겠다. 곧 그의 열정과 학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만남을 통해서 새로워진 인간, 새로운 질서(로마 8,1-17. 31-39)로 이루어질 세상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는 헌신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 앞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베드로와 함께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의 뒤를 잇는 다양한 신학자들을 교부라고 부른다. 이렇듯 신앙을 이성으로 해명하여 초기교회의 기초를 다져낸 신학자들 중에는 사제가 아닌 평신도들이 있었고, 나이가 들어서 사제품을 받게 된 이들도 있었다.
순례자와 은수자들
넷째,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초기교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신앙의 모델은 순례자이다. 우리나라에까지 그 열풍이 일어났던 스페인 북쪽 지방의 순례는 야고보 사도의 순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스페인 북쪽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여행하고 복음을 전한 순례자이며 선교사로 전해진다. 스페인의 뙤약볕 아래에서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매일 걸었던 이들은 이미 그 순례의 의미와 맛을 알고도 남아 또 다른 순례를 꿈꾸고 있으리라.순례자들 가운데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이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기록으로 남긴 4세기의 여성 에제리아이다. 1884년 이탈리아의 아레초 도서관에서 가무리니가 발견한 여행기에 따르면, 그녀는 갈리아 지방의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신자로, 구약성경의 기록에 따라 모세가 걸어간 시나이반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곳에서 여러 해를 머물다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여행기는 4세기 말 동방교회의 모습, 성탄에서 성령강림에 이르는 시기의 예루살렘 교회의 전례와 새로운 신자들을 교육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전한다. 구약성경과 초기교회의 상황에 대해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이 있었던 그녀의 여행기를 통해 신앙의 원천을 이루는 역사적 사실들을 직접 경험하고 예루살렘 모교회의 전통을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값진 신앙의 유산을 나누는 것이라 하겠다.
다섯째는 박해를 피해서, 또는 박해 이후의 해이해진 교회를 떠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겪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또는 육체적 극기와 한계를 경험하고자 일상의 삶을 떠나서 은수자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다. 이집트의 사막에서 터키의 카파도키아에 이르기까지 백색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이들 은수자들의 삶은, 개인적 삶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형태로 확대되어 수도원의 모태가 되었다. 사막의 교부와 교모들의 금언집들은 바구니를 짜는 등 손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아낸 은수자들이 배우고 가르쳤던 유산이다. 그들 가운데 안토니오와 파코미오는 은수자와 수도자의 삶을 시작한 이로 각각 알려져 있다.
예수님을 따른 모든 이는 누구든지 ‘평신도’의 자리에서 시작했음을 교회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교계제도가 생겨나면서 그 제도 안에서 부르심과 응답의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니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평신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기꺼이 길을 나선 모든 이들, 하나인 신앙의 열정을 다양한 가능성과 구체적인 성소의 이름으로 펼쳐나간 이들 모두를 부르는 이름이라 하겠다.
[평신도 영성 - 실천사례] 하느님 말씀은 나의 등불
평신도 영성을 다루는 이 자리에서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평신도 영성 실천사례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영성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인터넷으로 복음 해설을 제공하는 국제 사이트 Evangelizo(www.evangelizo.org)와 관련된 저의 체험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체험의 시작
평신도의 소명은 사제와 수도자의 소명과 다릅니다. 평신도의 길은 처음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일을 하면서 우연히 부르심을 받습니다. 지난 4월 저는 제가 번역한 책, 「피에르 신부 하느님과 함께 5분」을 친한 친구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저에게 “신부님 묵상도 좋지만 나는 언니가 복음을 직접 묵상한 내용을 듣고 싶어요.”라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지만 날마다 그 친구에게 저의 묵상을 보낼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친구의 말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제가 매일 새벽 메일로 받아보는 ‘Evangelizo’의 복음해설이 떠올랐습니다.
로마에서 제가 「야곱의 우물」이란 잡지에 렉시오 디비나 원고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찾은 사이트인데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태리어를 잊지 않으려고 날마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읽던 것을 이 친구를 위해 번역해서 보내기 시작했는데, 차츰 친구들이 늘어났고, 평신도의 일상적인 영성훈련에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생각하기에 지금 이 사이트 안에 한국어 버전을 넣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날마다 저에게 도착하는 Evangelizo의 메일을 열 때마다 저는 갓 구워낸 신선한 빵을 받아 먹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위한 말씀의 빵이지요.
이 홈페이지를 열면 먼저 라틴어 로고가 눈에 들어옵니다. “Domine, ad quem ibimus? Verba vitae aeternae habes.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오늘의 복음(Daily Gospel)’으로 불리는 Evangelizo는 세속화된 세상에서 복음의 정신대로 살고자 2001년 두 명의 젊은 남자 평신도와 한 명의 수도자에 의해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vangelizo의 사명은 인터넷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이트는 날마다 전례력에 따른 성경 본문과 성인들, 교회 박사와 교부들, 영성가의 작품에서 발췌한 복음 해설을 제공합니다.
이레네오 성인부터 샤를 드 푸코, 복자 마더 데레사,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복음 묵상은,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신앙 안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모든 사람이 날마다 아침에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이 내용을 받고 그것을 미사 동안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선교를 위해 현재 11개국 언어로 70명의 사제, 평신도, 수도자들이 팀을 이루어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체험을 통해 배운 것
제가 이 Evangelizo의 복음 해설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면서, 자신을 포함한 평신도들의 영성생활에서 왜 말씀이 중요한지 깨달은 것 세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복음 묵상은 말씀의 내면화 과정입니다.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이 일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데려가 저 자신이 먼저 말씀의 내면화 과정을 거치게 하였습니다. 단순히 좋은 성경 자료를 함께 나누는 것을 염두에 두었는데, 가끔 교부들의 성경 해설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 또 너무나 바빠서 다 읽고 이해할 시간이 없으니 핵심을 요약해 달라는 친구들의 부탁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해설만 번역하다가 나중에 제가 이해한 해설 내용을 짧게 요약해서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또 얼마 뒤에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아들의 여자 친구인 개신교 신자를 보고 자극받은 50대 어머니를 도우려고 저의 짤막한 해설 앞에 ‘그날의 복음 구절’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시간이 날 때 아무 때나 보내다가 나중에는 전날 저녁에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말씀을 품고 잠자리에 들면 의식이 말씀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면화 없이는, 자기화 없이는 참된 교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다교에서 내면화 과정은 아직 부모의 품 안에 있을 때, 어릴 때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시작한 이 말씀 사도직은 저의 영성생활에 큰 활력이 되었습니다.
제 일은 주로 성경과 관계된 일들이지만 성경을 가지고 하는 일과 자신을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내면화하는 것은 별개의 작업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이들의 묵상
둘째, 복음 묵상은 교회의 전통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는 일입니다. 이 시대처럼 성경 말씀이 이단의 도구가 되는 시대에는 올바른 성경 해설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경의 가장 깊이 있는 해석은 경청과 독서와 꾸준한 묵상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형성되도록 내맡겼던 이들”(「주님의 말씀」, 48항), 곧 성인들에게서 나옵니다.
Evangelizo의 복음 해설은 바로 말씀을 삶으로 살아낸 이들의 묵상을 담고 있는데, 특히 우리가 평소에 찾아보기 힘든 교부들의 깊은 성찰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날마다 번역하고 묵상할 때마다 2,000년 동안 하느님 말씀을 해석해 온 교회 공동체가 오늘 우리의 삶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경 해석이란 교회 공동체의 작업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1월 8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빵의 기적(마르 6,34-44 참조)에 대해 이렇게 설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빵 다섯 개를 가져오라고 할 때, ‘우리는 나중에 어떻게 되라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에서 찾아내라고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빵을 들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고 그 빵을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영광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 거룩한 봉사로 그들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이 기적에 참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안에 있는 모든 것, 외딴 장소, 푸른 풀밭, 빵과 물고기라는 적은 양식, 이것을 모든 이에게 구분 없이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 그들 각자가 자기 이웃과 똑같은 음식을 갖는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이것들은 우리에게 겸손, 절약, 이웃사랑을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49,1-3).
씨 뿌리는 농부이신 하느님은 날마다 우리 마음에 말씀을 뿌립니다(마르 4,1-20 참조). 아침마다 복음 말씀이 하루의 일용할 양식, 사막의 만나처럼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고, 저녁에는 하루 동안 받은 말씀의 은총이 작은 은총의 기도가 되어 하늘로 다시 올라갑니다. 이렇게 말씀의 순환이 없으면 우리 삶은 세상적인 것에만 머물게 됩니다.
셋째, 복음 묵상은 일상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훈련하는 소중한 영적 도구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작년 성탄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자기 것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 하느님께 내어드릴 공간이 없습니다.
매일 말씀과의 접촉은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을 기억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날의 복음 구절’은 많은 경우 하루 종일 제 의식을 지배하고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기억 훈련은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이 바쁨 가운데에서도 사막의 고독을 맛보며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체험할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관상이란 말씀을 경청하고 실행하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는 것,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그의 영적 일기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성경 읽기 체험을 이렇게 전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관상생활에 들어갈 수 있다. 장소가 어디이든지.’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관상생활에 불림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서서히 깨달아갑니다.”
결론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성생활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흘러나옵니다. 평신도가 날마다 스스로 자신의 영성을 키워가는 훈련을 하는 데 복음 묵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은 우리에게 좋은 묵상 자료들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어떤 영적 수단이든지 자신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내면화할 때 진정한 힘이 있습니다.
[평신도 영성 : 역사 - 중세] 교회 안에 머물며 교회와 함께하는 평신도 영성
우리나라 국민들이 민감하게 생각하고 반응하면서도 모순되게 행동하는 주제를 한 가지 꼽으라면 바로 ‘역사’일 것이다.
주변 국가들이 우리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왜곡하면 전 국민이 분개하면서 주변국과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하지만 해마다 대학입시철이 되면 대다수 수험생들이 국사와 세계사 등 역사 과목을 시험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듣는다.
필자는 사람들에게 역사와 관련된 성경과 영성 과목을 가르쳐왔다. 그때 필자는 히브리 민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기원전 1250년경부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기원후 1세기경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소상하게 강의를 한다.
또한 필자는 초세기부터 21세기 초까지 2,000여 년에 해당하는 유럽 중심의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영성가들과 영성신학자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추구했는지 상세하게 강의를 한다. 그러면서 과연 필자는 3,000여 년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역사를 이만큼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세의 유럽이 그리스도교 때문에 어두운 암흑기를 보냈다고만 어렴풋이 기억한다. 물론 일부는 그리스도교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자체의 역사 때문에 발생한 부분도 있다. 분명한 것은 중세 유럽 자체의 역사가 그리스도교와 관련되면서 그리스도교 구성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세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역사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중세 유럽 역사가 그 당시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긍정과 부정의 영향을 동시에 끼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엘리트 수도자들과 무지한 평신도
고대가 끝나갈 무렵, 게르만 민족이 북방에서부터 유럽 본토로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서로마 제국이 5세기 말엽에 멸망한 후에, 8세기 말엽 카롤링거 왕조가 프랑크 왕국을 세워 유럽 본토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까지 유럽 전역은 혼돈의 시기를 겪어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제대로 정착하여 살기도 힘들었고, 정규과정의 교육을 받을 수도 없는 이른바 암흑기를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6세기 초엽에 베네딕토는 한곳에 정착하여 사는 수도회를 설립하여 신앙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정착하여 사는 삶을 권장하였다.
6세기 말엽에는 대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북방 민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북유럽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선교활동을 통해 수도자들은 유럽 전역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인들에게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더불어 9세기 초에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왕관과 칭호를 받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수도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또한 샤를마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통해 문화사업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는 상류사회 자제들에게 일반 교육을 실시하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중세 초기 수도원은 더 이상 고대 이집트 사막의 수도원과 같이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선택하는 수도원이 아니라, 교회를 수호하고 널리 복음을 전하려고 인재들이 모여 더욱 제도화시킨 수도원이 되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엘리트 수도자 들과 무지한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일반 신앙인들은 영성생활조차 꾸려나갈 수 없는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수도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시골지역에서는 무지한 평신도 그리스도인 중에서 선발된 사제가 본당사목을 담당하다 보니, 본인뿐만 아니라 일반 신앙인들의 영적 지도를 효과적으로 담당할 수 없게 됨으로써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더욱 황폐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왕족과 귀족의 후원을 받던 수도원에서는 수도원의 원장 직분을 왕족이나 귀족이 후원하는 상류계층 출신의 교육받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에게 맡기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그 결과로 때로는 결혼한 수도원장이 가족들과 함께 수도원 내에 거주하면서 수도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도원장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평신도 그리스도인 자신도 종교와 세속 권력 사이에 끼어서 자신의 영성생활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만에 떨어지기 쉬웠다.
영성생활의 동경과 개인주의적인 수도원 전례
비록 수도원이 여러 가지 이유로 세속권력에 일부 종속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7세기 이후부터 유럽 전역에 설립된 수도원은 선교와 신앙교육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을 보존하고 전하는 역할도 동시에 담당하였다.
더군다나 10세기 초에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를 구하고자 탄생한 개혁 성향의 클뤼니수도원은 짧은 시간 동안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수도원을 유럽 전역에 확산시키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곧 개혁 수도원은 무엇보다도 전례생활을 강조하면서 전례거행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중세 중기의 수도자들의 삶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영성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많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영성생활을 발전시키고자 수도생활을 동경하며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도원 전례는 수도자들에게 최적화되어 있어서 수도자들의 기도생활과 개인성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기둥과 기둥 사이마다 제대를 만들어놓은 고딕양식의 성당 구조와 맞물린 미사전례는 공동체적인 성격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극대화되었고, 수도 사제들이 일반 신앙인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라틴어 전례를 그나마도 개인기도 차원에서 작은 목소리로 봉헌함으로써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미사에 다가가기가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미사에 참여한 일반 신앙인들은 미사전례에 담긴 구세사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거양성체 하는 사제의 동작에만 집중하면서 과도한 성체신심을 발전시켰다.
결국 신앙인들은 성체를 모시는 것을 등한시하고 현시된 성체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무미건조한 신심만 행하게 되었다. 게다가 13세기에 설립된 비(非)성직 수도자들이 중심이 되었던 탁발수도회는 미사전례를 거행할 기회가 적어서 주로 미사전례 밖에서 많이 배우지 않은 일반 신앙인들에게 쉽게 설교를 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의 인간성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 결과로 하느님의 구원역사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는 전례정신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미사전례에서 분리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적이거나 미신적인 요소가 첨가된 올바르지 못한 신앙을 형성할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었다.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분위기 속에 나타난 이단
이렇게 중세 초기는 열악한 교육 여건 때문에 대다수 교회 구성원의 무지로 말미암아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중세 중기에는 반대로 세속 학문의 발전으로 교회에서도 사변적인 신학이 발전하였지만 과도한 엘리트주의에 머물면서,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에 부정적인 영향들이 나타났다.
11세기부터 교회 안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스콜라 철학과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이성적으로 다가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변적으로 설명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중세 후반에 와서 이러한 분위기는 급기야 영성생활 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써 실천적인 측면을 담고 있는 영성생활을 오로지 사변적인 측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알아듣기 어려운 사변적인 영성신학의 분위기에 반감을 가졌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본당이나 수도원 울타리를 벗어나서 연대하여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주로 독일 라인강 주변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요한 원천인 성경과 교회 전통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가운데, 임의로 해석한 방식에 따라 영성생활을 추구하면서 이단의 길로 많이 들어섰다.
결국 중세 전반에 걸친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게다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회 전통에서 벗어나 무엇인가를 시도하였을 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교훈은 중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영성생활의 길을 걸으려면 다소 투박한 모습을 하고서라도 교회 안에 머물면서 교회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평신도 영성 - 인물] 중세 유럽을 밝힌 여성 평신도 신비가들
중세의 영성을 이해하려면 십자군전쟁과 흑사병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배경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5세기 말, 로마제국이 몰락하자 800년 그리스도교 왕권은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신성로마제국을 형성하고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으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전쟁(1095-1291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교황권의 강화를 위해서 시작된 십자군전쟁은 교황권의 약화와 중앙집권적인 왕권국가들의 전개로 이어지고 몽고를 통해서 들어온 흑사병의 유행(1346-1350년)으로 유럽 인구는 1/3이 줄어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중세 유럽은 암흑기로 표현된다.
평신도 여성 공동체, 베긴
빛은 무엇이었고 그 빛을 가려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아가 그 어두움의 한가운데에서 빛을 밝힌 이들은 누구였을까? 역설적으로 중세는 비로소 영성에 눈을 뜬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영국과 동유럽까지 전파되었고 수도원들은 복음대로 사는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신앙은 생활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전쟁으로 남자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여성들이 생산활동에 참여하면서 형성된 평신도 여성들이 모인 ‘베긴’과 여성 신비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베긴(Begijn)은 “기도하다”는 플랑드르어 표현으로, 처녀, 동정녀를 뜻하는 라틴어 Virgo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2세기 라인강변의 빙엔에 살았던 신비가 힐데가르트의 영향이 강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베긴은 독신으로서 경제활동(수공업)을 통해 개인재산을 가진 도시의 평신도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자율적인 결사체로 시작되었다. 제도교회의 형식과 규칙, 나아가 보호를 넘어서 복음에서 영감을 받은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종신제가 아닌 입회와 탈퇴가 자유로운 평신도 공동체가 곳곳에 만들어졌다.
12-14세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170여 개의 단체가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독일의 쾰른 지역에서는 전체 인구 1만 5,000명 가운데 10%가 넘는 2,000여 명이 베긴회 소속이었다는 놀라운 기록도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과 고통을 따르며 정결과 청빈의 금욕주의적인 삶을 지향했다. 또 사도적 전통을 이어 비정형의 자유로운 가족 형태를 추구하고 이분법적 삶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아가서의 신비적 합일 (결혼)을 모델로 “속죄와 정화,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 신비체험, 신성에 참여, 일치, 우주적 합일, 영적인 삶”의 전 과정을 여성의 경험을 토대로 이해하였는데, 이 모델의 여성적 경향은 인간 영혼의 여성성을 바탕으로 한다.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내적 고통은 영적 체험을 통해서 내밀화되는 과정에서 신비가로서 인정을 받게 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함으로써 관상과 활동이 일치하는 삶을 이루었다.
그들은 성체공경을 통해 신비적 합일을 갈망하고 그 신비체험을 토대로 자국의 언어로 작품을 저술하였다. 각 지역에서 영적인 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영어 불어 독일어 플랑드르어 등 자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남겼다. 기록을 남긴 대표적인 베긴들의 사상을 알아보자.
대표적인 베긴들
우아니의 마리아(1177-1213년)는 신비경험을 통해서 사제의 권위를 넘어서는 예언적 권위를 가진 여성이었다. 1215년, 그의 문하생이었던 자크 드 비트리 신부가 쓴 그의 전기를 통해서 베긴회의 독립적인 삶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의 전기를 통하여 베긴회에 대한 이단의 의심이 시작되었다.
안트베르펜의 헤드비히는 궁정 연애시 형태로 신비경험을 저술(1221-1240년)하였다. 그에게 고통의 원인은 죄가 아니라, 신비적 합일이다. 사랑의 지향은 신비가의 고통이며 역설적 기쁨으로 성체를 통해 일치를 경험하고 사랑 안의 재창조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기를 바랐다. 그의 사상은 ‘사랑의 신학’으로 이성과 지성을 앞서는 사랑을 강조하였다.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드(1208-1282년)는 자신의 신비경험을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이란 제목으로 펴냈다. 1-6권(1264년)은 마그데부르크에서, 7권은 1270년 이후 헬프타의 수도원에서 저술하였다.
그는 ‘빛의 흘러내림’, ‘사랑’ 등의 은유를 통해 직접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랑의 비행을 표현하고, 신적 사랑에 연결하여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하느님과 개인 사이의 매개를 거부하고, 겸손을 통해서 여성이 권력을 가지지 않음을 ‘없음의 완성’과 자유로 긍정하였다. 나아가 당시 성직자들의 생활을 비판하는 예언자의 면모를 보였다.
마르그리트 포레트(1255?-1310년)는 특별히 기억해야 할 여성이다. 1310년 6월에 「단순한 영혼들의 거울」을 저술하여 영적 여정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영혼들의 관계를 이해하였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여정에서 이성보다 사랑을 통한 일치의 길이 일치를 향한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이며, 하느님과 평범한 여성인 자신의 영혼 사이에서 완벽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단죄되었으며 파리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18개월 동안 자신에 대해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았고, 사랑의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만을 추구하다가 화형을 당했다. 자신을 변론하지 않고 침묵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평화로운 모습이 이단 심판관들의 분노를 더 키웠다고 전해진다.
부정신학의 전통을 잇는 포레트의 신학적 성찰을 받아들인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은 오늘날에 이르러 그 빛을 드러내게 되었다.
복음을 따라 청빈하고 기쁘게 사는 베긴들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새롭게 요청되는 정신이라 하겠다.
신비가, 동정녀로 알려진 노르위치의 줄리안
마르그리트 포레트 이후 베긴들은 이단자로 고소되어 수많은 여성이 화형당하거나 수도회로 편입되었다. 그들의 영성과 활동을 재평가하는 일은 우리 시대의 과제로 남아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영국 노르위치에서 신비가, 동정녀로 알려진 줄리안(1343-1416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염세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던 시기에 신비주의적 접근을 통해 고난을 딛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다.
1373년 5월 8일, 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으로부터 16차례의 ‘환시’를 보고, 이를 두 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계시」라는 책으로 남겼다. 그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고통, 수난에 참여하고 통회의 상처, 연민의 상처, 하느님을 갈망하는 지향으로부터 느끼게 될 상처를 받고, 이를 재해석하였다.
풍요의 영성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 믿음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라는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나아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어머니로 이해하는 모성의 영성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으로 감싸고, 안고, 반기고, 포용하고, 우주적이고, 확장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곧 하느님의 모성은 삼위일체의 속성의 일부이며 성체는 우리를 먹이고 기르고 새로 나게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여성성은 하느님의 부성을 조화롭게 보완해 주며, 모성은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의 영성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선포되었다. 하느님은 아버지일 뿐 아니라, 어머니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세의 평신도 영성가들은 그 시대를 앞서 개인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따른 신적 사랑의 합일을 지향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