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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18
섬길 자를 택하라
사람은 죽을 때 가장 진실해진다고 합니다.
죽어서 마지막 떠나는 길이니까, 더 이상 속일 것도, 감출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누군가 죽는 순간에 남기는 유언만큼은 진실이라고 믿고 권위 있게 받아들여서, 다른 건 몰라도 유언만큼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옛날 얘기에 나오는 청개구리 이야기 아시지요? 청개구리가 평생 부모말씀 안 듣고 늘 반대로만 하며 살았는데, 어미 개구리가 하도 속이 상해서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어미 개구리는 죽기 전에 유언을 하면서, 어차피 유언을 남겨봐야 내 말과는 반대로 할테니까, 아예 내가 말을 반대로 하면 내 뜻대로 하겠지 하면서 내가 죽으면 물가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청개구리는 어미 개구리가 죽은 후 자기가 그동안 어머니 말씀 안 듣고 제멋대로 해 온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 유언만큼은 꼭 지켜드려야지 하면서 어미 개구리의 유언대로 어미 개구리를 물가에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비만 오면 물가에 서서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걱정하면서 운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의 의도는 물론 부모님 말씀을 잘 듣자는 것이겠지만, 이 이야기에서도 유언의 권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평생 말을 듣지 않던 사람이라도 유언만큼은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유언이라는 게 한 사람의 평생을 담은 가장 권위 있는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여호수아의 유언입니다. 여호수아 23장은 자기의 뒤를 이를 후계자들, 차세대 지도자들에게 한 유언이라면, 오늘 이 말씀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하는 유언입니다. 그만큼 이 말씀은 한 민족 앞에, 그리고 그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들 앞에 권위가 있고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이스라엘의 지난날들을 회고합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민족을 이루기 전, 이스라엘의 시작인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로부터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그들의 조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몸담아 살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그를 그의 선조로부터, 다시 말하면 그들이 섬기던 우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해내신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원하시는 것은 내 말 잘 듣나 안 듣나 보자 해서 말 잘 들으면 좋아하고 말 안 들으면 기분 나빠서 저주를 내리려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가장 올바르게 잘 사는 것이고, 또 그럴 때에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 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찬양 받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의 삶이 더욱 감사로 넘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게서는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우상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이끌어 내셔서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하신 일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복되고 기쁘게 사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쁨이고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을 때, 그 길을 가로막으려고 쫓아오는 애굽의 기병들을 홍해의 물로 덮으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광야에서 많은 적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도록 지키시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보다 앞장에 서서 싸워주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내가 또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유언을 하면서, 새삼스럽게 이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건 모두가 다 함께 경험한 일들이고, 또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모두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텐데, 다 아는 이야기를 무엇 때문에 다시 하는 것일까요?
지난 주말에 개봉한 영화 가운데 메멘토라는 미국영화가 있습니다.
상당히 주목받는 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데, 영화의 소재가 아주 독특합니다. 주인공은 머리를 다쳐서 10분 이상 기억을 유지할 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입니다. 그의 유일한 기억이자 목표는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 복수하는 것인데, 10분만 지나면 뭐든지 깡그리 잊어버리기 때문에, 주인공은 메모와 사진에 의존해 기억을 유지합니다. 자기 자동차를 알아보기 위해 자기 차 사진에다가 '내 차'라고 적어서 가지고 다니는 식입니다. 그는 메모도 믿지 못해서 확실하고 중요한 기억은 몸에 문신으로 새겨놓기까지 합니다. 이 주인공이 걸린 병은 확실히 특이한 병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참 잘 잊어버립니다.
이런 얘기가 있죠. 어떤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 택시를 탔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릴까봐, 택시를 타자마자 기사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릴지 모르니까 나중에 자기가 물어보면 가르쳐 달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아니나 다를까,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사에게, 아저씨,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죠? 하고 물었더니, 기사 아저씨가 깜짝 놀라면서, 아니, 언제 타셨어요? 그러더랍니다. 기사도 손님이 탄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은 참 잘 잊어 버립니다. 고마웠던 기억도, 뼈아픈 실패의 기억도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어떤 일은 빨리 잊는게 좋은 것도 잊지만, 잊어서는 안될 것까지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고 삽니다.
여러분, 남에게 신세지고 고마웠던 기억 얼마나 오랫동안 하십니까?
이런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아주 어렵고도 급박한 상황에 몰려서 돈이 급히 필요해졌다고 합니다. 친구를 찾아가 부탁을 해서 돈을 빌렸습니다. 친구도 사정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지만, 친구의 부탁이니까, 무리해서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돈을 빌린 친구는 몇 번씩이나 고맙다고, 나중에 꼭 갚겠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돈을 빌린 친구는 그 덕택에 위기를 넘기고 사업이 크게 성공해서 큰돈을 벌게 되었는데, 돈을 빌려 준 친구는 그 이후로 계속 허덕이다가 형편이 아주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돈을 빌려주었던 친구는 전에 자기에게 돈을 빌려갔던 친구를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는데, 돈을 빌려갔던 친구는 자기도 여유가 없다면서 딱 잡아떼더라는 겁니다. 돈 빌렸을 때의 그 고마워했던 마음, 그로 인해 자기가 이렇게 큰 부자가 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저 자기 돈을 보고 찾아 온 귀찮은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혹시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물고기의 기억력이 0.5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낚시꾼의 미끼를 물어서 죽을 뻔하다가 겨우 빠져나와서는, 돌아서서 다시 그 미끼를 보고는 덥석 문다는 겁니다. 우리는 물고기보다 나을까요? 우리의 기억력은 얼마나 될까요? 감사했던 일, 기뻤던 일들은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선한 일들은 모두 어느 샌가 잊어버리고, 그저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더 많은 감사할 일들이 생기고 더 기쁘게 찬양할 일들이 많아지는 걸 경험하고서도 금방 까맣게 잊어버린 채, 계속 하나님이 나에게 뭘 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셨던 그 수많은 일들,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낸 경험을 하고서도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은 우리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의 그 감격, 그 가슴 벅찬 기억들은 먼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설로만 남아있고, 우리 가슴속에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요? 우리야말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을 금방 잊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잊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다시 일깨워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토대로,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단하도록 다짐을 받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이전 그들의 조상들처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인가, 여호수아는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이제 그 오랜 세월 동안 고난과 위험을 함께 겪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면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주를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만 섬기시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이든지,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를 섬길 것이오."
섬길 자를 택하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지나 온 역사 앞에서, 그리고 이제 그들 앞에 놓인 미래를 보며, 그들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섬길 자를 택하라. 우상을 섬길 것인지, 너희 자신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고 애매한 태도는 설자리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선택하라. 양쪽 다 애매하게 양다리 걸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버리든지 둘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동시에 믿겠다고 합니다. 자기의 경험, 자기의 이익, 자기의 전통, 세상의 방법, 세상의 가치, 이런 것들을 포기하지 못해서, 어떻게든지 하나님과 그런 것들을 얼버무려서 짬뽕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런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믿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다. 여호수아는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없이, 조용히 섬기며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을 열정적으로 목청높이며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을 그르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이라면 방법의 차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래서 교파도 많이 있고 신학도 다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 섬겨라. 그렇지 않으려면 아예 우상을 섬겨라. 하나님과 우상,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거다.
그러면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백성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을 믿겠으니, 너희는 너희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는 참 어렵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다. 이후로 나처럼 살겠으면 하나님을 믿어라. 안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해라. 나는 지금까지처럼, 죽는 날까지 그렇게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 하나님을 선택했다면, 나와 함께, 그리고 나의 뒤를 이어서 나처럼 살겠다고 결단하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겁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두고 누구나 필요한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밭을 팔고는 아까운 마음이 들었는지 일부는 감추고 일부만 교회 앞에 바쳤다가 결국 두 부부가 모두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너무한 것 아니냐, 아예 재산을 바치지 않은 사람도 많았을 텐데, 왜 다른 사람은 멀쩡하게 잘 살았는데, 그래도 그 사람들은 일부라도 바쳤는데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거기 있지 않습니다. 재산을 바치고 안 바치고는 선택사항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이 되느냐 마느냐는 선택사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을 바치기로 했으면 전부 다 바쳐야지 일부만 바치고 일부는 숨겨 두었다면 그건 도둑질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택을 했으면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로 했으면, 그 순간부터는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어중간하게 양다리 걸치는 신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어라.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만 섬겨라. 그렇지 않을 바에야 아예 우상을 섬겨라. 이 말이 정말 우상을 섬기라는 말이겠습니까? 차라리 우상을 섬기면 나중에라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상태로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병중에 가장 고치기 힘든 병이 의처증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면 무슨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텐데, 의처증 환자들은 자기가 부인을 사랑해서 그런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절대로 병원에도 가지 않으려고 하고, 그러니 병을 고칠 길이 없다는 거지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우상, 하나님과 자기 자신, 하나님과 재물 등등 그게 뭐가 됐든 간에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것을 같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성경은 거듭 말하고 있는데도, 그래도 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자기를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그때는 앞으로 하나님을 믿게 될 가능성조차 불확실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아니면 차라리 하나님을 떠나라.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이 자리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이끄셨는데, 그 하나님을 믿든가, 아니면 아예 믿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밝혀라. 하나님을 믿든지 안믿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선택은 너희에게 달렸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따르겠다. 지금까지 한 순간도 나를 놓지 않으시고, 잠시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한번도 나를 잊으신 적 없고, 내가 성공하고 출세했을 때는 물론이고, 적군이 내게 돌진해 올 때, 내가 힘들 때, 내가 실패했을 때, 모두가 나를 반대하고 아무도 내 곁에 없을 때, 그 언제라도 한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으신 하나님, 나는 그 하나님을 믿겠다.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너희와도 함께 하셨으니, 그분만을 섬기고 그분만을 믿어라. 아니면 아예 믿는다는 말도 하지 말아라.
이 장면에서 여호수아의 진면목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여호수아는 말만 앞장서고 말로만 본이 되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삶으로 웅변하는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겠는가? 그러면 내가 살아 온 것처럼 살아라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선택했다.
여호수아에 비하면, 우리는 참 초라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핑계를 댑니다. 환경을 탓하고, 조건을 탓하고, 인간의 한계를 내세웁니다. 물론 모두 사실입니다. 인간이 어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실수하고 실패하고 때로는 믿음이 흔들리고 낙심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면, 이미 그건 핑계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제약과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당신을 믿고 섬겼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밖에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아,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야 정말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의 유언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고백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여호수아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적당히 눈치 봐가면서 좋은 쪽만 찾아다니며 앞으로도 계속 왔다갔다하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나를 지키신 그분, 어둠 속을 헤맬 때 흘리던 우리의 눈물 때문에, 그 눈물을 닦아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 우리의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섬길 자를 택하라.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