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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하나님이 참으로(그럼에도 - 칼빈 사역)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 부사 * (아크)는 다른 곳에서 흔히 쓰는 것처럼 단순히 '명확하게' 확실한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와는 반대로 '그럼에도', '......에도 불구하고' 또는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윗이 이처럼 당돌하게 이 시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이것들을 말로 옮기기 전에 그의 마음이 많은 의심과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로 격동하고 있었다는 특별히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용감하고 영웅적인 사람과도 같이 다윗은 매우 고통스러운 몸부림과 유혹을 당했다. 그는 오랜 노력으로 마침내 모든 좋지 못한 생각을 흔들어 떨쳐 버리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자기 종들에게 은혜로우시고 그들 행복의 신실한 보호자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는 사단이 그에게 가져다준 더러운 생각과, 이제 그가 스스로 용기를 얻어 육신을 따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섭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가지게 된 참된 종교를 좋아하는 증거 사이에 무언의 대조가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인의 절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철학자들이 하듯 논쟁하는 자리에 올라가지도 않았고 어리석은 웅변 형식으로 자신의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지옥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열렬한 감정으로 자기가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가 보여준 예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말로 표현한 어려움과 심각한 번민들은 그의 마음과 폐부를 나타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결론은 감각과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돌보시기에 게으른 것 같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항상 자기 종들을 은혜로 감싸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고, 특별히 참된 성도들에게 그 섭리의 범위를 넓혀서 다른 피조물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할 뿐만 아니라 마치 가장이 자기 식구들을 위해서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마련해 주고 식구들을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특별한 관심으로 그들의 축복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교회를 위해서는 더욱 밀접하고 특별하신 보살핌으로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며 교회를 유지하고 보호하신다.
선지자가 왜 '이스라엘'이라고 특별히 말했으며, 또 곧이어서 앞 문장에서 말한 자들 중에서 뽑아 낸 자들인 "마음이 정결한 자"라고 그 이름을 제한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에돔 족속임을 구실로 마치 교회의 뛰어난 존재들인 양 이스라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부르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든 아브라함의 변질된 후손들을 경건한 자들의 범주에서 말살해 버리려는 의도에서, 하나님을 순전하고 올바르게 경배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스라엘에 속한 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은 의도로 말한 것이다.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고 내가 말한 것은 단지 이스라엘 족속의 이름만을 만족하게 여길 뿐 정당하게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자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신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반절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가리키고, 하반절의 "마음이 정결한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참된 의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 주신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억지 해석이므로 다음고 같은 해석을 취하는 것이 좋다. 다윗은 택한 백성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함에서 떠난 많은 위선자들을 반드시 자기들의 숫자에서 삭제시켜야 하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같이 보살펴 주시는 은혜를 기뻐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신 말씀이 이 말씀과 일치한다. 그당시 유대인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거의 분간할 수 없었고, 그들은 대부분이 '손에 할례를 받은 자' 다시 말해서 외부의 할례받은 자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참 아브라함의 자손과 위선자들 사이에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가려내기 위해 그들에게 간사스러운 꼬임에서 풀려날 수 있는 특징을 주어 식별하였다. 그러므로 분명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올바른 마음을 갖는 것 이상으로 필요한 구비 조건은 있을 수 없다.
73;2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 문자 그대로는 "나는 거의"는 '그리고 내가'로 직역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강조형으로 번역해야 한다. 다윗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욕을 돌리게 하고 믿음을 짓누르게 하는 시험들은 비단 보통 사람,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도가 매우 미약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하는 자기에게까지도 그러한 시험들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 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본으로 보여줌으롬써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매우 조심하여 살펴보도록 자극하고 있다. 사실상 그는 시험에 실제적으로 굴복하지 않았으면서도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또는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말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팔이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넘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기 위한 것이다.
73:3
이는 내가......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 (우매한 자를 부러워 하였음이로다 - 칼빈 사역).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당했던 시험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자기가 악한 자의 현재 처하고 있는 번영을 바라보고, 간혹 그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판단하여 그들의 처지를 부러워한 적도 있다는 뜻도 들어 있다. 우리가 정한 법칙에 따라 살지 않으려고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고 있을 때나, 또 그렇게 행할지라도 형벌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고삐를 늦춰 담대하게 범죄를 저지르게 될 때에는 우리는 분명히 심각하고도 위험한 시험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시실리(Sicily)의 폭군이었던 젊은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시라쿠스(Syracuse)의 성전을 탈취한 후에 노략한 물건들을 싣고 득의만만하여 항해하면서 지껄였던 농담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와 함께 있던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 신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푸는지를 보지 못하였는가?'하고 했다. 이와 같이 악한 자의 번영은 죄를 범하는 용기를 더해 준다. 잘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로 풍성하게 해 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이거나 은혜를 입은 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의 번영함이 다윗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으며, 그로 하여금 그들과 더불어 동료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케 하여 거의 그들의 생활을 따를 뻔하게 되었음을 본다. 다윗이 불의한 자들에게 '우매한 자'(칼빈 사역)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범한 죄가 무지나 실수로 인해 저질러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지 않고 어리석게도 참된 지혜의 근본 요소가 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거역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가 교활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규칙적이고 뼈대 있게 살아야 한다는 올바른 판단의 근본 원리가 없다면 그들은 어리석을 자들이다. 그들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수많은 시험, 즉 악한 자들의 안락함과 이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먼저 시인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훌륭한 건강 상태를 실례로 그들이 건강하며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숨을 거두지도 않아, 마치 참된 신자와 같이 여겨질 때가 많다고 우리에게 말하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는 때에도"라는 말을 '지연시키다'라는 의미로 보고, 이 말은 악한 자가 갑자기 또는 순간적으로 죽어서 방탕함에 대한 대가의 고통을 당장에만 겪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욥은 악한 자가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가리켜 사용하기를, 그들은 이 땅에서 사치스러운 향락을 마음껏 누린 후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욥 21:13)라고 했다.
이 말은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가 죽기 전 '갑자기, 예기치 않게 죽는 것이 자기에게는 가장 행복한 죽음인 것같이 여겨진다'고 한 말과 관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해석가들에 의하면, 다윗은 악한 자가 큰 고통이나 번민없이 쉽고도 평탄하게 죽어가는 것을 불평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서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즉 '저희의 힘은 건강하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형수들과 같이 죽음을 오래 끌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힘을 쇠약하게 만드는 많은 질병들은 죽음의 사신들이요, 우리의 생명이 짧고 덧없음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우리의 힘과 용기가 우리들로 하여금 방탕하고 반역을 일으키고 싶은 자극을 주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씌어 주신 멍에인 고통을 적절하게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73: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 여기서는 악한 자가 유쾌한 휴식을 즐기고 있음과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여 온 인류가 일반적으로 당하는 슬픔을 면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좋은 일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일에도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종 심판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관시키려는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항상 그들 중에 얼마를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여 본문에 묘사된 것처럼 재난이 없는 상태에서 사는 특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게 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의 일생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차 있고, 또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요, 조건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가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스스로 사치스러운 향락에 도취되어 매우 안일한 생활을 즐기면서, 마치 자기들은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 중에서 쾌락을 누리도록 높임을 받은 자로 생각하고 별도로 자기들을 위한 향락의 처소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에 쓰라린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73: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그러므로 교만이 저희를 목걸이처럼 두르고-칼빈 사역) - 이 말씀은 앞에서 말한 불평보다 그 정도가 더 심각하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신의 자비와 인자함을 악용하고 있는 악한 자들을 수치스럽게 그리고 사악하게 간주하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배은망덕함과 반역을 참으신다고 하는 말을 볼 수 있다. 시인은 몸에 걸치는 옷과 차림새를 비유로 해서 이러한 자들을 자기들의 악한 행위에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목걸이같이 그들을 두르고 있다'(칼빈 사역)고 번역한 * (아나크)란 동사는 "목걸이"란 의미를 가진 명사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악한 자들은 마치 금목걸이로 우아하게 몸을 치장하듯이 자기들의 뻔뻔스러움과 광기를 찬양할 만한 생활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옷"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 (쉬트)를 '엉덩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본문에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확신하기는 다윗은 목 혹은 머리를 말한 후에 - 왜냐하면 다윗이 사용한 히브리어의 동사 * (아나크)는 때때로 '면류관을 쓰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 이제는 사람의 모든 맵시를 한 마디로 함축한다고 본다. 이 말이 나타내고 있는 뜻은 악한 자들은 자기들의 번영한 것 때문에 매우 눈이 어두워져서 점점 더 교만해지고 방자해진다는 것이다. 시인은 순서상 매우 적절하게 "교만"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으로 "강포"를 말하여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악한 자들이 사방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빼앗고 강탈하며 수많은 잔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아무도 자기와 견줄 만한 사람은 없다고 여기거나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강포의 근원 다시 말해서 그 모체는 교만이다.
73: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 다윗은 이제 덧붙여 말하기를 악한 자들이 그런 강포와 잔인성을 터뜨리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먹고 살이 쪄서 눈이 얼굴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솟아나며"라는 말을 그들의 눈이 살이 쪄서 덮이고 가려지게 되어서 그들이 눈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살이 찌게 되면 눈이 얼굴에서 볼록 튀어나오게 되므로 나는 이 말의 적당한 의미를 보류하는 편을 더 좋게 여긴다.
그러나 고찰되어지는 것은 다윗이 이 말을 육체적인 용모를 말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이 그들의 소유가 넉넉한 것 때문에 교만해진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번영한 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몹시 배가 부르고 도취되어 후에는 교만으로 부풀어올라 거의 터질 지경에 이르게 된다. 본문의 마지막 문장도 역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며'라고 번역한 * (아바르)란 동사를 '고삐가 풀린 오만'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악한 자들은 일상적인 범주에 머무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구름 너머의 생소하고 엉뚱한 것들을 찾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하면 온 세계를 자기가 소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주시기를 바랄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전혀 만족할 줄 모르고 미친듯이 한없는 욕망을 좇아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는다는 말이다. 동사의 의미를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들은 어떤 법으로 규제를 당하거나 어떤 경계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설명하는 것은 확실히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타당성이 있는 또 다른 해석도 있다. 그들이 지나치게 만족을 누렸던 형통과 번영은 그들이 생각 속에서 그려 낸 것들을 기대하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동안 '행운의 여신이 그물을 던져 대신 고기를 잡아 주는 것처럼 소망했던 이상의 많은 것을 얻게 되는 자들을 이따금 볼 수 있다.' '행운의 여신이 대신 고
기를 잡아 준다'는 말은, 만년의 데미테리우스가 재간도 없고 주의심도 없는 데다 위대한 통찰력도 없는 처지에 수없이 많은 성읍을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을 재치 있게 묘사한 말이었다. 만약 우리가 "살찜"이라는 말을 앞에서 말한 뜻으로 새긴다면, 이 귀절은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항상 그들이 바라거나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모든 좋은 것들로 풍성하게 쌓아 주시고 채워 주셨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73: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 어떤 사람들은 동사 * (야미쿠)를 타동사의 능동태로 보고, 이 말의 의미는 악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누그러뜨릴 것,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하거나 위협하여 자기들을 닮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흔히 자동사의 의미로도 사용되므로 문맥상으로 볼 때 후자
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악한 자들이 자기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한없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모든 염치와 정직을 발로 짓밟음으로써 자기들의 사악함을 숨기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부정함을 거만하게 자랑한다는 뜻이다. 악한 자들이 바라던 대로 만사가 형통하게 되면 모든 염치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 때에 번민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타락을 자랑스럽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을 실제로 보고 있다.'네가 가진 모든 소유물과 너의 목을 베는 일까지라도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은가?' 손쉬운 예로 강도들을 들 수 있지만, 그들도 스스로 두려움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윗이 말하고 있는 거인들, 다른 말로 한다면 차라리 사람이아닌 괴물이라고 해야 할 자들은 자기들은 어떤 법률의 속박에서도 제외된 자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있어서는 나약한 것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뽐낸다. 또한 자기들이 가진 그 격렬함도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할 줄 모름으로써 자기들에게는 선과 악의 분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해석하는것을 보면, 악한 자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를 수 있는 크나큰 압제와 강포를 자랑함으로써 단순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해석을 반대한다.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은 악한 자들의 이런 자비함을 볼 때에 몹시 근심하여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그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보게 될 때에 녹아지고 분해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저희가 높은데서 말하며'(칼빈 사역)란 표현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다 거만과 욕설을 퍼붓는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겨서 그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거만한 사람들을 가리켜 라틴어로는 despicere라 했고, 헬라어로는 (카타블레폐인), 즉 '내려다보다'라고 했다. 다윗도 이처럼 그들을 높은 데서 말하는 자들이라고 소개한 까닭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생각지 않고 스스로 특별한 계급이 있는 자, 말하자면 작은 신들이라고 생각하는 데 기인한 것이다.
73: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 이 말씀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거만한 말을 한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세력도 자기들을 넘어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이 하늘과 땅을 지배한다고 스스로 아첨한다. 혹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경고하고자 하면 그들은 단호하게 이 벽을 부셔 버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이 가진 힘의 사분의 일 만큼도 크게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거만하고 자만한 말을 막아 낼 것이 없다. 그래서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 우리가 그들의 허망한 생각이 얼마나 크고도 한이 없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는 시인이 가르쳐 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실제적인 사실로 볼 수 있다고 인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73: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매우 여러 가지 의미를 찾아 내기에 고심하고 있다. 첫째 왜 관계사 '그'(his)가 누구의 백성인가를 보여주는 선행사가 없이 사용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관계사를 단순히 악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보고, 악한 자들은 항상 이러한 모습으로 떨어져나간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백성'은 '대단히 큰 무리' 혹은 '떼'를 가리키는데, 이는 악한 자가 일어나게 되면 항상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은 무리를 이루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악한 자들의 모든 형통함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불러 모은다는 것, 즉 무리를 이룬다는 것과 그들을 자기들의 왕궁이나 호화스러운 저택에서 마실 물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 하고 이와 같이 형통하는 생각으로 황홀해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외 또 대다수의 많은 주석가들은 다른 의
미, 즉 하나님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리로"라고 번역한 * (할롬)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무리한해석이다.
아직도 그 의미는 명확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야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 전체를 연결지어 '하나님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히 슬픔의 물을 흘릴 것이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귀절은 앞절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험을 당하여 파선을 당하고 삼킴을 당하게까지 되었다는 뜻이다.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이스라엘 사람인 양 위선을 행하는 자들에 한정된다. 선지자는 이러한 자들은 어리석게도 악한 자를 부러워하며 곁길로 나아가 그들을 따르면서 하나님과 모든 종교에 작별을 고하므로 멸망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귀절은 어떤 부정한 일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유혹들로 인해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여 곁길로 나아가고 있는 많은 택함을 받은 자손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옳은 의미는 멸망받을 무리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결심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부당한 것들에 유혹을 당하여 부러워하고 본받으려 하는 자를 동시에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곧이어지는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는 앞절에서 밝힌 말씀에 대한 이유로서, 그들은 참된 종교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이익을 찾지 못하면 원통함과 슬픔으로 고통을 당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물로 가득차다'라는 표현은 가장 쓰라린 고통을 마시고 가히 측량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차게 될 것을 비유한 것이다.
73;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 어떤 주석가들은 선지자가 여기서 악한 자들
에게로 돌아가 그들이 스스로 죄를 범하도록 자극하고 흥분시켜서 비웃고 멸시하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다윗은 앞절에서 말했던 것, 즉 신실한 자가 악한 자들이 잠간 동안 형통하는 것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악한 생각에 빠졌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그들이 하나님에게 지식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말해 주고 있다. 세상 사람들 속에는 이러한 정신 착란이 너무 흔하게 널려 있다. 오비드(Ovid)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Sollicitor nullos esse putare deos."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시험에 빠진다."
실로 이교도인 시인도 이처럼 말했다. 우리가 알기는 대체로 시인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일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말을 묘사한다. 시인이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 인류가 하는 말이며, 사람들은 어떤 역경에 처하게 되면 곧 모든 하나님의 지식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을 의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논쟁을 하며 하나님을 꾸짖는 자리에까지 들어간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고대 라틴시귀에서 볼 수 있는 불평의 의미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Nec Saturnius haec oculis pater adspicit aequis'
"싸턴의 아들 위대하신 신은 이러한 것들을 공평하신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
그러나 그가 거기서 말하고 있는 여인은 자기가 바라던 대로 취급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신 쥬피터를 불의하다고 비난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호하시고 관할하시는 것을 부인하고 모든 것은 다 우연하게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일은 인류 중 불신의 무리에게는 너무도 흔하다. 다윗은 참 신자들까지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망설인다고 본문에서 말한다. 이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직분을 수 행하기를 쉬시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것도 즉시 행하실 수가 없다고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무슨 연고니이까"(렘 12:1)라고 한 말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귀절에서 거룩한 자들도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시험에 빠지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일에 대한 의심이 그들의 마음 매우 깊은 곳에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그와 상반되는 것을 주장하여 자기 자신에게 굴레를 씌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의심하는 영 때문에 생기는 질문, 곧 정말로 하나님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찌하여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큰 혼란을 치료하여 주시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피할 정도로 항상 사단의 올무를 신속히 간파하는 것은 아니다. 악한 자가 하나님을 거역해 지껄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하나님은 안일하게 쾌락을 즐기면서 아무것도 돌보시지 않고 모든 것들이 우연에 의해서 다스려진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비록 남 앞에서는 잠잠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거스려 지껄이는 일을 그치지 못하고 하나님을 불의하다거나 게으르다고 비난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고 경건한 자들을 무시하고 만사를 혼란 속에 몰아넣어 파멸에 이르게 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악하고 혐오할 만한 생각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까지 들어오기 이전에 하나님의 가슴에다 자기들의 짐을 벗어 버리고, 자기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으므로 알 수가 없는 은밀한 판단만을 유일하게 따르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악한 자가 세상이 무질서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때에 자기들이 운명이나 우연이라고 부르는 맹목적인 통치만을 생각한다는 것과, 참 신자들까지도 동요되어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손으로 보호함을 받아 그러한 깊은 바다 속에 완전히 빠지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73:12-14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 시인은 이 귀절에서 자기를 거의 혼란에 빠뜨리던 자들의 성격을 생생한 사진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는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지금 안일함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쾌락을 즐기고 있으며 권세와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형통함을 불과 며칠이 아닌 오랜 세월동안 즐기미으로써 마치 영원토록 누리는 것같이 보이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악함이 파렴치하고 냄새나는 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러한 자유를 누리며 제멋대로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 * (올람)은 '세상'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것은 타당치가 않다. 이 말이 여기서는 '한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악한 자의 형통함이 견고하고 오래도록 계속되는 것과 따라서 그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의인들의 인내가 너무 길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다윗은 악한 자가 그토록 하나님의 자비하신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자신의 처지를 낮추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양심은 자신이 신실하고 올바르게 걸어왔음을 증거하고 있지만, 자기는 남달리 흔치 않은 매우 심각한 정도의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이를 행하기 위하여 힘씀으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가 "종일 재앙을 당하며"라고 한 것은 해가 자주 떠오르듯이 그때마다 여러 가지 모양의 고통이 자기에게 예비되어 있어 자기의 환난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나는 공연히 순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지켜 보존하려고 수고함으로써 끊임없는 환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날이 샐 때에 나를 만나기 위해서 지키고 있는 것을 보나이다.
이러한 처지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에 대한 보상이 없음을 드러내게 되나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에게 보다더 긍휼을 베푸실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경건한 자들이 구별되는 참된 거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마음의 순결이요, 둘째로는 외부로 나타나는 행위의 의로움이다. 다윗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실례를 통해서 이 두 가지를 함께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먼저 마음의 순결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 우리 행위에 옳고 완전무결함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증명하도록 하자.
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 (내가 만일 말을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 칼빈 사역) 다윗은 자기가 유혹을 받았던 생각들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제하면서 마음속에 그러한 문제에 대해 의심을 가져오게 했던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약간 어려운 점또는 애매한 점이 있다. 이 귀절의 마지막에 나오는 히브리어 동사 * (바가드)는 '죄를 범하다.' 또는 '속이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주의 자녀들의 시대를 속였도다'라고 번역하고,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주의 자녀들에게서 저희의 소망을 빼앗게 되리라'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거스려 범죄하였도다'라고 번역하는데, 그 뜻은 '만일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죄를 범하게 되리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선지자가 한 말은 이러한 순서로 되어 있다.
'볼지어다! 주의 아들들의 시대여 내가 범죄하였도다.'(칼빈 사역) 그러므로 여기서 매우 좋은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나는 이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만일 내가 그러한 악한 생각과 의심에 동조했다면 나는 궤휼을 행하였을 것이나이다. 볼지어다! 의인들은 아직도 땅 위에 남아 있고, 주께서는 주를 위하여 각 시대에 몇몇 사람들을 남겨 두셨나이다.' 여기에는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어떤보충 설명도 추가할 필요가 없다. 동사 * (바가드티 ; 내가 죄를 범하였다)는 다른 동사의 한 부분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단독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시대"라고 번역한 히브리 명사 * (도르)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완전하게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조만간 그 마음이 돌같이 굳어질 때까지 자기들의 부정한 생각에 고삐를 풀어 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각을 벗어 버림으로써 그와 함께 구원의 소망까지 내던져 버리는 동안, 그는 결코 멸망속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억제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다' 혹은 '선포하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윗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만일 자기가 이와 같은 문제가 확실한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자기는 매우 흉악한 죄악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에 자기 자신속에 의심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한스럽게 여겨 대적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자기가 말한 두 가지 마음의 상태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항상 세상에 소수의 자기 백성들이 남아 있는가를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지시 관사인 "볼지어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도 대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12절에서는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볼지어다! 주의 자녀들의 시대여'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적으로 인해서 교회가 그토록 맹렬한 사단의 공격과 수많은 무리의 대적들에게 위협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