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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답사를 다녀와서...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서울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있었다면 그로부터 100년 후 오늘 2019년 3월 2일 대전에는 대전대표(?) 33인이 모여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답사를 했습니다.
이번 답사의 해설은 현직 대신고등학교 역사교사인 최장문 선생님께서 맡아 주셔서 귀한 설명을 들으며 답사를 할 수 있었어요.
인동시장 만세운동 현장에 가다...
옛충남도청 본관 앞에서 모여 이번 답사를 시작하여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대전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던 인동시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인동시장 모습(사진자료-잇츠대전 2019년 3월호)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쌀상회라는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주변에도 쌀가게가 여기 저기 눈에 띄었습니다. 이 근방이 바로 인동만세운동이 있었던 인동쌀시장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인동시장 앞에 대전천변에 “인동 만세로광장”이 만들어져 있어 그곳으로 내려가 봤습니다.
광장 한 쪽 벽면에는 만세운동 장면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어요. 나중에 울림의 안여종 대표님이 덧붙여주신 설명에 의하면 3.16 만세운동 재연행사 때 참여한 시민들의 사진으로 이 벽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곳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대전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두 가지의 세계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고 합니다.
1918년에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포함된 14개조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그 무렵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가 탄생했는데 그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전 세계에 노동자 혁명을 퍼뜨리기 위해 강대국들이 지배하는 식민지가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켜주기 위한 주장이 아니었어요. 단지 전쟁에서 진 나라들이 식민지를 통해 다시 국력이 강해질까 봐 염려해 패전국의 식민지국가에 적용되는 원칙이었고 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세계 정치적 상황은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었는데 이런 소식을 먼저 접한 일본 유학생들은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2.8 독립선언을 발표했어요. 또 이 독립선언서를 세계 여러나라의 대사관과 일본 언론, 조선총독부에 보냈어요. 일본이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유학생들을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천도교 손병희를 중심으로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계 지도자들로 구성된 33인의 민족대표를 뽑았습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계획했습니다.
최장문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고종의 장례식이 3월 3일 월요일이라 하루 전인 일요일에 모이려고 했으나 종교인들로 구성된 민족대표들의 상황 상 일요일은 피해 3월 1일 토요일로 잡았다고 합니다.
민족대표들은 원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 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민족대표들이 앞에 나서면 시위가 자칫 사나워질까 우려해 근처의 인사동에 있는 음식점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조선총독부에 스스로 신고를 하였고, 일본 경찰 80여명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치자 만세구호를 외친 후 모두 순순히 일본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2시간여 동안 기다리다 학생 대표가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후 곳곳에서 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본격적으로 3.1 운동이 시작된 겁니다.
이 만세운동은 200만 명이 참여하여 7,500여명의 우국지사가 피살되고 16,000여명이 중상을 입고 45,000여명이 검거되는 큰 사건이었으나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일본인 피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점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는 3.1운동이 비폭력적이며 평화적인 만세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전의 2018년도 3.16 만세운동 재연행사 사진 (사진자료-잇츠대전 2019년 3월호)
대전에서는 3월 3일부터 4월 초까지 총 19차례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대전 최초 만세운동은 3월 3일 인동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이것이 대전 최초의 만세운동이었습니다.
인동시장에서의 만세운동은 총 4차례 있었고 3월 3일 이후 3월 16일 인동가마니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날 정오 무렵 시작된 만세운동이 인동 일대와 원동 일대로 확산되자 일제는 용두동의 헌병대와 문화동의 보병대를 출동시켜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고, 가마니 공판장에 있는 잉크를 흰옷을 입은 군중들에게 뿌려 잉크 자국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고 전해집니다.
3월 27일에는 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만세운동이 있었고, 4월 1일에는 김직원과 박종병의 주도하에 군중 4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다 대전심상소학교에 무장매복했던 일제 병력에 의해 진압당했습니다. 100년 전 네 차례에 걸쳐 독립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인동시장에서는 2000년부터 해마다 재연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100주년 기념의해인 올해는 4월 2일에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인솔을 해주신 최장문 선생님께서 100년전 인동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할 당시 그 길을 직접 같이 밟아보자고 제안하시며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만세재연행사를 할때 걷는 그 길이라고 합니다.
최장문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물어보셨는데 그 당시의 절박함과 긴장감을 느껴보기는 어려워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인동시장에서 도로변으로 나와 대흥교로 연결되는 도로를 건너면 인동에서 원동으로 바뀌고 바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대전청소년위캔센터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곳은 2015년에 개관하였고 2012년도까지는 대전동구청이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1980년도에 폐교한 원동국민학교가 있던 자리라고 하는데 여기서 잠시 ‘국민학교’란 명칭에 대해 설명해 주셨는데 ‘국민학교’는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이기 때문에 해방 후 바로 없앴어야 하는 단어였으나 1995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1996년부터 ‘초등학교’로 불렸습니다.
원동국민학교는 그 전신이 1906년에 개교한 대전소학교로서 이는 대전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이고, 1910년에 대전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5년 해방 후에 다시 원동국민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청소년위캔센터 한켠에 원동국민학교가 폐교되는 아쉬움에 졸업생들이 세운 원동국민학교 유래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1919년 4월 1일 4차 인동시장 만세운동 때 이곳에 무장매복하고 있던 일본병력에 의해 진압당했던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합니다.
1919 대전감옥소 특별전시관을 방문하다...
우리는 다시 버스로 이동하여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 마련된 「1919 대전감옥소 특별전」을 관람했습니다.
이 전시회를 기획. 총괄하신 고윤수 대전시 학예사께서 직접 설명을 해주시는 드문 행운도 얻어서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 이야기부터 이 전시가 갖고 있는 의미 까지도 깊이 있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올 해가 3.1운동 100주년 기념의 해라 여러 지자체에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데 대전에서는 역사를 기념하는 가장 현명한 방식인 기록의 측면에서 접근해보자 하는 출발에서 대전감옥소(1923년 대전형무소로 개칭)의 기록과 흔적들을 모아 아카이브 성격으로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전시관으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 우리가 처음 접한 장면은 실제 대전감옥소에 수감되어 있던 독립운동가의 사진과 그 옆의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학예사님은 사진의 주인공이 엄창복 (1912.8.22 경기도 개성부 출생)이라는 분이고 백범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활동하다 조선에 입국 중 검거된 분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또, 우리 앞에 있는 이 공간이 어떤 곳인 줄 알겠느냐고 물으시고 실제 1933년도 대전형무소 도면을 참고로 당시 독방시설의 규격과 형태를 그대로 하여 재현한 공간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제대로 복원하려면 재질과 느낌까지 그대로 살려서 해야 해서 복원이 아닌 재현이라는 표현을 쓰셨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규격과 형태는 같도록 재현했지만 입구의 높이는 살짝 다르다고 하시면서 당시 독방 구치감의 실제 입구 높이는 170센티미터였으나 재현한 공간은 살짝 높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독방구치감 우측에 있는 제1전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전형무소 모형이었습니다. 입체적인 모형이 제작되어 있어 한눈에 그 공간이 파악이 됐습니다. 반대쪽 벽면에는 대전형무소의 항공사진이 걸려있었습니다.
▲대전형무소 공간배치도
형무소의 옥사는 중앙간수소에서 여러 방향의 사선으로 옥사를 배치하여 한사람의 간수가 여러 명의 수감자를 관리할 수 있도록 지어진 구조이고, 격벽식운동장은 독방수감자들이 운동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사람씩 걸을 수 있도록 지어졌으며 부채꼴로 지어 이곳도 간수 한명이 운동중인 각각의 수감자를 모두 감시할 수 있게 지어진 구조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T.01이라고 적힌 부분은 2018년 8월 공원화사업으로 터파기 공사 도중 대전형무소의 ‘담벼락’과 ‘취사장 바닥’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된 구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특별히 건물의 남서쪽 벽면에서 미츠이시 내화벽돌 주식회사라고 적힌 벽돌이 출토되었고, 이 회사는 현재 본사가 일본 오카야마현에 있고 1892년도에 창업한 벽돌회사라고 설명해주시면서, 이 벽돌은 일본 미츠이시 내화벽돌 주식회사에서 만들어진 것을 수입해와서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고, 일제강점기 당시 대전감옥소에는 감옥 내부에서 필요한 벽돌을 제작할 수 있는 공장시설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 취사장은 벽돌공장을 짓기 이전에 지어진 초기 시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대전형무소에서 출토된 벽돌
T.02는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망루가 있는 위치를 표시한 것이고, T.03은 현재 대전 중구 선화서로 126번길 16-2에 일식 가옥 한채가 남아 있는데 동네 주민들은 이 곳을 대전형무소의 직원들이 살았던 관사라고 말하고 있어 관사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대전형무소에는 형무소 내에 우물이 4기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취사장 옆에 설치된 우물1기 뿐이고 잠시 후에 직접 가서 답사할 예정입니다.
우리는 흔적의 공간을 나와 기록의 공간인 제2전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제2전시관의 한쪽 벽면에는 대전감옥소의 연혁이 적혀 있었습니다. 대전감옥소는 1919년 5월에 개소하여 1923년 5월에 대전형무소로 개칭하여 개소한 시기의 이야기를 할 때엔 대전감옥소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고, 개칭 후 시기에는 대전형무소로 표현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고윤수 학예사님은 3.1운동으로 인해 대전감옥소가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8년도에 작성된 도면기록이 있는 점을 보아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대전감옥소가 준비되고 있다가 갑작스런 3.1운동으로 급하게 감방시설부터 만들고 간수소 등 관리자가 사용하는 공간은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대전감옥소가 3.1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속성으로 만들어지긴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2전시관의 한쪽 벽면에는 수형기록카드와 숫자로 본 대전형무소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고 있어 눈에 띄었습니다.
54 : 현재까지 확인된 대전형무소 표기 수형기록카드의 인물 수
730 : 수형기록카드의 등록문화재 지정번호
1,310 : 1939년 기준 대전형무소의 수감자 수
4,837 :수형기록카드에 기록된 인물 수
6,264 : 현재 남아 있는 수형카드의 수량
65,193 : 현재까지 확인된 수형기록 카드의 가장 늦은 연번
또한, 소소한 체험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대전형무소의 도면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따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고, 1950년도에 대전형무소 내부를 찍은 기록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의 표정과 간수들의 행동도 볼 수 있어 그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옛대전형무소터에 가다...
일정이 빠듯하여 이곳에서 꼼꼼하게 살펴보진 못하고 아픈 역사의 현장인 우물에서 잠시 최장문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옛대전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수감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정치인, 좌익인사, 제주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보도연맹원 등이 수감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후퇴하던 이승만정부와 군은 조직적으로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을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산내 골령골로 끌고가 최소 4,000명 이상을 학살하였습니다.
9월 하순에는 대전을 점령했던 인민군들이 북으로 퇴각하면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우익인사 1,557명의 수감자들을 형무소 뒤편에서 집단 학살했습니다.
미군이 대전을 수복한 이후 대전형무소의 이 우물에서만 100여구의 시신이 꽉차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시기 전국에서 최초이자 최대규모의 집단학살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대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아직도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조금씩이라도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일이 우리 일인 것 같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가다...
우리는 원래 예정되어 있었던 유성초등학교 해방기념비를 시간 사정상 생략하고 버스 안에서 설명으로 대신하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유성구청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일찍부터 모여서 열심히 답사를 하느라 다들 배가 고팠던 터라 맛있게 먹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서 곽낙원여사와 김인선생의 묘로 갔습니다.
김구선생의 모친이신 곽낙원여사와 김구선생의 장남이신 김인선생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간단히 듣고 헌화를 하기로 했습니다.
미리 준비해간 꽃으로 참가자 중 김긍원 선생님(대전문화유산울림)과 최지원 대표님(한밭문화마당)께서 참가자들을 대신해 헌화를 한 후 다함께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가자 중 구자란선생님(문화중심바루다)께서 기미독립선언문 중 마지막 3가지 다짐을 낭독하셨습니다.
고은 시인의 시 “곽낙원”을 최지원 대표님이 낭독해 주셨는데 시 한편에 곽낙원 선생의 일생이 담겨있어 뭉클 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이곳에 묻히지 말았어야 하는 인물들이 꽤 묻혀있는데 그 중 김구선생님을 낳아주신 곽낙원여사와 그 아드님인 김인선생의 묘가 있는 이곳에 김구선생 암살범의 배후로 지목받은 김창룡의묘도 있어 일행은 김창룡의 묘에도 잠시 찾아가봤습니다.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수없이 잡아 그 공로로 승진을 하고, 해방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여순사건에서 군부내 좌익숙청을 주도했고 이승만 반대파를 앞장서 제거하고 기무사령대를 만들고 기무사령관으로 재직한 인물로 독재정권, 군부정권에 충실한 댓가로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1992년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의 자백으로 김창룡이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인물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이장하지 않고 이곳에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게 너무 속상했습니다.
울림의 김긍원 선생님께서 대전현충원에 자주 오셔서 이곳에 대한 많은 이야기 거리와 정보들을 가지고 계셔서 잠시 알짜배기 설명을 듣는 호강도 누렸습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코스로 강산 김용원선생의묘에도 참배를 가려고 했으나 답사를 마칠 시간이 되어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의 답사는 이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습니다.
미세먼지는 있었지만 날이 따뜻해서 답사하기에 너무 좋았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답사라는 주제로 그 의미가 뜻 깊어 참 뿌듯한 하루였습니다.
오늘 좋은 해설을 해주신 최장문선생님과 답사인솔을 해 주시고 간간히 설명도 곁들여주신 안여종 대표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번 답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33인의 참가자>
최장문, 안여종, 김긍원, 백숙현, 이완직, 김복식, 최흥자, 최순임, 안혜정, 안수형,
유미애, 류혜경, 정난희, 변새봄, 임지선, 구자란, 이춘아, 김미숙, 한창훈, 정영숙,
조미현, 박민수, 박주원, 임병희, 한소민, 전선희, 우주연, 김지은, 구영주, 조명우,
최지원, 정명자, 허혜경
2019.3.3 허혜경 씀
첫댓글 허 간사님
답사후기에는 답사때의 생생함과
당신이 찾고 보완한 내용이 있어
답사 가이드했던 사람에게도 참 유용합니다.
허혜경샘의
부지런한 손과 발에 항상 감동받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대표님께서는 더 간단하게 쓰라고 하셨는데 자꾸만 길어져서 좀 난감하기도 합니다. ^^;;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6시간의 답사가 소중한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허간사님 감사드립니다. 참여해주신 33인의 참가자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ㅎㅎ
책으로도 접할 수 없는 선생님들의 최고의 해설과 함께 참으로 의미있고 깨달음이 있는 답사였습니다^^
이렇게 멋진 후기글 덕분에 다시한번 돌아보는 시간도 갖게되네요^^
넘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