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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강좌 제13회 (제십삼 여법수지분 ).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이 반야바라밀을 여법하게 받아 가지라.
<여법하게 받아지니다>
모든 것이 원만하고 구족하고 수승하고 청정해서 생사까지 초월하여 있는 이 도리를 무엇이라 일러야 좋은가. 언어와 문자가 붙을 수 없고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그 자리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라. 그러나 그 자리는 금강반야바라밀이란 말이 해당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은 일찍이 금강반야를 말씀 하신 적이 없으며 저 작은 먼지도 말한 적이 없으며 큰 세계도 말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일체 상이 없다. 법도 없다. 법 아님도 없다. 얻을 것도 없다. 설할 것도 없다. 성과도 없다. 정토장엄도 없다. 이 몸마저 없다라고 하시고 여기에서 금강반야바라밀을 받아 가지라 하신다. 무엇이 반야바라밀인가.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 이니라.
이런 대화가 있다. 어느 날 수보리가 좌선하고 있으니 공중에서 꽃을 뿌리거늘 수보리가 “꽃을 뿌리는 자가 누구인가?” “하늘의 제석천입니다.” “어찌하여 꽃을 뿌리는가?” “존자께서 반야바라밀을 잘 설하심을 존중히 여기어 꽃 공양을 올립니다.” “내가 무엇을 설하였는가?” “말씀 없으심이 참다운 설법입니다.”
제13. 여법수지분(제십삼 이경을 수지하는 방법)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운하봉지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불고 수보리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제목으로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한다.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
반야바라밀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
般若波羅蜜
그것은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설하였으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까닭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소설법 부.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 무소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 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법이 없습니다.”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 소유미진 시위다 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 所有微塵 是爲多 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를 이루고 있는 티끌이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 제미진 여래설 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須菩提 諸微塵 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여! 여래는 티끌들을 티끌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티끌이라 말한다. 여래는 세계를 세계가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세계라고 말한다.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 부. 불야 세존.
불가이 삼십이상 득견여래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見如來 不. 不也 世尊.
不可以 三十二相 得見如來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이고 여래설 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何以故 如來說 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은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고 설하셨으므로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 약유선남자 선여인 이항아사등 신명보시
須菩提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恒河沙等 身命布施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목숨을 보시한다고 하자.
약부유인 어차경중 내지 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심다.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 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욱 많으리라.”
如法受持分 第十三
여법수지분 제십삼
무비스님 - 금강경 핵심 강좌 (13회). 여법하게 받아 지니다.
제 십삼분 여법수지분이라 그랬습니다. ‘如法(여법)하게 수지하라’, 여법히, 참, 이 ‘如法(여법)’이란 말 정말 좋은 말이죠. ‘법과 같이’,
第十三 如法受持分
제십삼 여법수지분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이시 수보리 백불언
世尊이시여 當何名此經이며 我等이 云何奉持하리잇고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운하봉지
佛告須菩提하사대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以是名字로 汝當奉持하라
爾時에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이시 수보리 백불언
이시에 수보리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말씀 올리되,
석가모니 부처님께 말씀 올리되,
世尊이시여 當何名此經이며 我等이 云何奉持하리잇고
세존 당하명차경 아등 운하봉지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뭐라고 해야 좋겠습니까? 그리고 저희들이 어떻게 奉持[봉지;받들어 수지함]하겠습니까?”
이게 이제 여법수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죠. 좋은 가르침을 뭔가 이게 명칭이 있어야 될 거 아니냐, 아 뭐, 그때 그 가르침이 참 좋았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죠.
그때 그 가르침은 뭐라고 딱 하는 거야. 예를 들어서, 아 여기 저 ‘조계종 부산 연합회’에서 처음으로 개설한 ‘금강경 핵심강좌’, 뭐 ‘핵심강좌’ 이렇게 이름을 붙여야 되는데 옛날부터 그게 이제 사람들은 무의식중에라도 본능적으로 그런 것을 필요로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경의 명칭이 생기기 시작한 거라. 그래 경의 명칭이 있어야 뭘 찾아내서 지적해서 말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수보리가 ‘이 경의 이름을 뭐라고 해야 좋겠습니까?’ 이게 이제 참, 뭘 좀 경전을 하나 독송을 해도 여법하게 하는 하나의 길입니다.
我等(아등)이 云何奉持(운하봉지)하리잇고,
우리가 어떻게 奉持[봉지;받들어 수지함]하겠습니까?
佛告須菩提하사대
불고수보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是經은 名爲金剛般若波羅蜜이니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 경은 金剛般若波羅蜜(금강반야바라밀)이다, 그랬어요.
금강반야바라밀,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로써 모든 문제를 모두 고통을 해결한다, 그런 말입니다. 바라밀이라고 하는 말은, ‘문제를 해결한다’금강과 같은 지혜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金剛般若波羅蜜(금강반야바라밀)을.
以是名字로 汝當奉持하라
이시명자 여당봉지
이러한 이름으로서 그대는 마땅히 받들어 가지라!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소이자하 수보리
佛說般若波羅密이 則非般若波羅密 일새 是名般若波羅密이니라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佛說般若波羅密이 則非般若波羅密이니라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所以者何오 須菩提야
소이자하 수보리
왜냐하면 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密이 則非般若波羅密 일새 是名般若波羅密이니라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여래가 말한 반야바라밀이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여기 또 ‘則非(즉비)’가 나왔죠.
내가 그 전에 걸망지고 다닐 때 경봉스님, 여기 통도사 경봉스님 회상에서 이제 살았는데 그 때 경봉스님께서 법문 하실 때 이 법문을 참 많이 하시죠.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참 자주 하셨어요. 그 스님 법어집을 보면 지금도 나와 있습니다만, 그래 하도 이 법문을 많이 하시니까 신도님이 와 가지고 ‘스님 계십니까?’해야 할 그 시간에,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라고 이렇게 이제 신도가 왔다는 그런 그 신고를 하더라는 거야. 그 신도도 아주 어지간하죠. 경봉스님에게 자주 찾아다니다가 워낙 많이 들은 법문이라서 인사를 그렇게 하더라고 하면서 또 큰스님이 법상에서 그 얘기를 하시면서 아주 호탕하게 껄껄껄 웃더라구요. ‘반야바라밀’하니까 우리는 뭐라고? 곧 집착합니다. 부처님이‘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奉持(봉지)하라, 받들어 가지라고 했으니까, 우리처럼 집착하기 좋아하는 중생들은 얼른 물죠, 얼른 뭅니다. 그야 말로
‘사자교인 한로축괴(獅子咬人韓擄逐塊)’주2) 라고 했듯이, 사자 같으면 부처를 물텐데 중생은 그 부처가 뱉어 놓은 그 이름을 덥석 무는 거야. 그게 무슨 먹을 것인 양 하고 흙덩이를 무는 거지. 그와 같이 부처님은 환~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말하기가 무서워 그래서. 중생들에게 뭐 설법하기도 무서운 거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니까 야! 근사하잖아요. ‘다이아몬드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 근사하잖아요.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로써 우리 인생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게 있겠나, 하고 덥석 무는 거야 그만.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우리 중생의 속성을 잘 아시고는,
‘수보리야! 내가 말한 부처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야.
‘내가 이름을 붙이자니 ‘반야바라밀’이야. 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구체적으로 무슨 형상이 있는, 어떤 그 실체가 있는 것인 줄을 그렇게 알면은 큰일이야! 내가 그런 이야기 하고 싶어도 너거 집착할까봐 사실은 내가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사는데, 제발 이 훌륭한 이름에 마저 집착하지 말라.’이런 의미가 있겠죠.
이거 전부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지금 뭐 사실 하시고 싶은 이야기는 거의 뭐 다 했고, 몇 번 하다시피 했습니다. 또 여기도 이제‘반야바라밀’, 또 ‘則非(즉비)’로, ‘則非(즉비)’라고 하는 참, 그야말로 벼락으로 우리의 그 ‘반야바라밀’에 대한 그런 의식을 깨뜨려 주는 것이 말하자면 ‘則非(즉비)’라는 말입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가 有所說法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소설법부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如來가 有所說法不아
여래 유소설법부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는가?”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수보리 백불언
수보리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말씀 올리되,
이거 수보리 대답입니다.
世尊이시여 如來가 無所說이니다
세존 여래 무소설
“세존이시여! 여래는 무소설이니다!” 그랬어요.
그 수보리가, 여기 조사스님들이 뭐 별별 그런 그 말씀을 다 붙였습니다. ‘건방진 놈 수보리 지가 뭐라고 부처님이 그토록 팔만대장경을 설했는데 무소설이라? 설한 바가 없다?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느냐?’마, 이렇게 하신 분도 있고,
‘하! 수보리야 말로 부처님의 그 마음을 잘 간파한 분이다’라고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고, 뭐 별별 사람이 다 있어요.
보십시오! 저 앞에서 ‘<第七 無得無說分(7. 무득무설분)>’ 이 있었죠.
부처님의 재산 두 가지, 하나는 ‘깨달음[得,득]’얻은 것,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첫 째 재산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재산은 그것을 설하신 것, 만 중생에게 그 이치를 설해주는 것, 그걸 부정했잖아요. ‘無得無說分(무득무설분)’, ‘얻음도 없고, 설함도 없다’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그래놓으니까 그걸 들으신 수보리는 잭깍
‘如來(여래)가 無所說(무소설)이니다’,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했습니다. 무소설’이다, 설한 바가 없다!
이건 아주 제자로서 정말 그 안목에 자신이 있는 그런 말이 되겠죠. 가만히 우리가 객관적으로 봅시다. 우리가 뭐 금강경을 죽 이렇게 읽어 가니까 수보리의 말씀인지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인지 그냥 다 성인의 말이니까 같이 취급합니다마는 사실 엄격하게 나눠놓고 볼 때 이거는 엄청난 소리예요.
‘여래는 무소설이다!’
그럼 저 팔만대장경은 어쩌란 말이냐.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 是爲多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 시위다부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 작은 먼지가 많음이 되는가?
須菩提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世尊이시여
수보리언 심다 세존
수보리가 사뢰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야 諸微塵을 如來가 說非微塵일새 是名微塵이며
수보리 제미진 여래 설비미진 시명미진
요것도 이제 ‘則非微塵(즉비미진)’해도 좋은데, 뭐 ‘非微塵(비미진)’이나 ‘則非(즉비)’나 같습니다, 뜻은.
여기는 반야바라밀을 부정했고, 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먼지, 가장 작은 것을 두고, 물질의 최소단위, 미진을 두고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작은, 작은 단위는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이건 물리학에서 우리가 원자에서 원자를 또 쪼개서 뭐 분자로, 뭐 또, 요즘 뭐 또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해서 quark(쿼크)주1)까지 왔는데, 거기서 또 쪼개서 또 뭐라고 그 명칭이 있어요.
보니까 그것 아직도 쪼갤 것이 있고 그 역시 이것과 저것의 결합이라, 아직도.
원자의 몇 만분의 일이야. 그렇게 작게 쪼갰지만 지금, 과학 기술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독립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란 것입니다. 독립된 하나의 실체는 아니에요.
그 말하고 이거하고 너무 맞는 말입니다[非微塵(비미진)일새 是名微塵(시명미진)이며]. 미진이 아니란 말이야. 실체일 것 같으면 미진라고 해야지, 그런데 실체가 아니니까 미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지.
아주 작은 최소단위를 미진이라고 했을 때 가장 작은 것, 그 지금 물리학 이야기하고 똑 같애요, 지금.
아무리 그거 물질의 최소단위로 분석하고 분석해도 결국은 아직도 그것도 결합체더란 것입니다. 결합체.
더 아직은, 지금 기술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대로 결합체인 줄 알고 있을 뿐이지 아직도 그거 쪼개 보지를 못해. 예를 들어서 음양이라고 합시다. 음양이 결합 되어 있다. 음을 가지고 쪼개면 거기도 또 음속에 음양이 있어. 양을 쪼개도 그 속에 또 음양이 또 있어. 거기서 또 양을 하나 쪼개보면 그 속에도 또 음양이 있고. 이를테면 그런 식입니다, 지금.
그래서 제일 작은 미진, ‘是名微塵(시명미진)’이다!
그 다음에 제일 큰 걸 이야기하고 있어요. 반대로.
如來가 說世界非世界일새 是名世界니라
여래 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이거도 같죠.
여래가 말한 세계도 非世界(즉비세계) , 세계가 아니다. 뭐 큰~덩어리야 말할 것도 없죠. 그야말로 이것과 저것이 다 결합이 되어 있는 것, 여기서 이제 뭐 연기설을 이끌어다가 이야기하고 공을 이야기하고 하기로 하면 복잡해지니까, 그건 뭐 여러 스님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거기다 다 부합시켜서 이해하면 됩니다.
세계, 세계야 말로 정말 허망한 거죠. 이것 저것이 다~ 오만가지가 부합이 돼서, 결합이 돼서 그게 이제 세계가 되지 않습니까! ‘是名世界(시명세계)니라!’ 가장 작은 것,
또 앞에서는 금강경, 지금까지 설해온 금강경을 이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했고, 가장 작은 미진으로부터 가장 큰 세계를 그랬습니다.
그다음에,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불야 세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못본다 이거예요.
何以故오
하이고
왜냐하면, 왜냐?
如來가 說三十二相이 卽是非相일새 是名三十二相이니다
여래 설삼십이상 즉시비상 시명삼십이상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如來 說三十二相(여래설삼십이상)은 卽是非相(즉시비상), ‘卽非(즉비)’이죠. 역시 즉비입니다. 卽是非相(즉시비상)일새 是名三十二相(시명삼십이상)이다.
그러면 우리하고 조금 거리가 있는 저 미진, 그리고 세계는 뭐 그렇다 손치고, 그러면 여래를 두고 한번 보자. 남의 얘기만 하고, 바깥 세계만 이야기하면 무책임하니까 자신에 이끌어다가 한번 생각해 보자 이겁니다.
여기 이제 삼십이상을 든 것은 그런 뜻이에요. 마찬가지예요. 이건. 부처님 아니라 부처님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존재의 실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이상은 진실하게, 진실하게 이야기를 해야죠.
여법하게,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삼십이상이라고 해서 ‘하~ 그건 뭐 건들게 아니다, 우린 뭐 신성시해야 된다, 신성불가침의 경지인데 삼십이상 어떻게 三十二相(삼십이상)을 卽非三十二相(즉비 삼십이상)이라고 하겠느냐’ 이런 의식을 깨뜨려 주는 거예요, 우리에게. 그런 의식을 깨, 깨뜨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 근사하잖아요. 이 금강경이. 그러니까 선사들이 이걸 보고 환장하는 거예요. 시원~하거든요.
어떻게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인 저~ 하늘 같은 부처님의 상호를
‘則非(즉비)’, 卽是非相(즉시비상)이다, 是名三十二相(시명삼십이상)이다, 이 이름이 是名三十二相(시명삼십이상)이다고 감이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습니까!
이거를요 불교를 객관적으로 다른 종교의 어떤 그 교설하고 객관적으로 이렇게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 참 부처님 가르침이 위대하구나! 뛰어 나구나!’‘정말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그런 그 감탄이 나옵니다. 그냥 우리는 늘 뭐 이속에 파묻혀 살다보니까 그렇게 높고 존귀한 줄을 미처 몰라서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에 정말 제대로 심취하고 불법이라고 하는 그 정말 세상에 둘도 아닌 그런 이치에 정말 제대로 심취하다 보면은 저기 그 淸凉國師(청량국사)주2)같은 이는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보니까 ‘하~ 세상에 이런 화엄경이 있는가!’ 싶어가지고 ‘내 죽을 곳을 비로소 얻었다! 得其死所(득기사소)라! ’
저 <청량국사소초(淸凉國師疏竗)>에 들어가면 그런 말이 있어요. ‘내 죽을 곳을 얻었다!’, 하! 화엄경에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이거예요. 그래서 참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이런 것을 만난 것은 그런 아주 감동, 정말 감동스런 표현을 하고 있죠.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以恒河沙等身命으로 布施하고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이항하사등신명 보시
수보리야! (스님께서 (감기)기침을 말씀으로 제어하심)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으로 보시한다 하자.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여인)이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은 생명으로써 보시한다 하자.
若復有人이
약부유인
또 한 사람은 약부유인이,
於此經中에 乃至受持四句偈等하야 爲他人說하면 其福이 甚多니라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 심다
그랬습니다. 여기는 이제
其福(기복)이 甚多(심다), 매우 많다, 이렇게만 표현을 했습니다.
감히 뒤에 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는 감히 생명보다 더 낫다, 이런 말은 조금 참은 거죠. 여기선 참은 것입니다.
그래서 ‘其福(기복)이 甚多(심다)’라고 했어요. 물론 뭐 생명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냥 두 개만 이렇게 딱 객관적으로 이야기만 해놨지, 비교하는 척 하면서 비교하는 건 아니고, 그냥 두 개를 그냥 나열만 해놓은 정도입니다. 기복이 승피다, 그것보다 수승하다, 이런 말은 안 했어요. 생명은 워낙 위대한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사자교인 한로축괴[獅子咬人韓擄(盧)逐塊]’주2)
사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쫒아 흙덩이를 덥석 문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에 집착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실상과 본질을 볼 줄 안다는 비유.
고봉(高峰)원묘(原妙)화상(1238~1295;송말 원초) 간화선 수행지침서 《선요(禪要)》와 《전등록》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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