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승전국들을 중심으로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평화회의가 개최됩니다. 회의는 1919년 1월 18일 개최되어 1920년 1월 21일까지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는데요. 회의를 앞두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 식민지나 약소국 국민들도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파리평화회의에서 우리의 독립을 이루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 파리로 떠나는 김규식
1차 대전 후 중국 상하이를 방문한 미국 특사 크레인은 중국측이 '칼튼 카페'에서 미국특사 방문 환영회에서 '파리평화회의에서는 패전 후 식민지의 처리원칙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논의될 수 있다.'고 연설하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신한청년당 당수 여운형(呂運亨)은 우리 민족 대표 파견 가능 여부를 크레인에게 묻습니다. 크레인이 미국 정부의 의사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돕겠다고 하자, 신한청년당은 파리평화회의로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신한청년당이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이 결정에 따라 신한청년당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로 파견하고, 한편으로는 영문으로 2통의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1918년 11월 28일자로 작성하여 크레인을 통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서 중국대표단 고문으로 가는 밀라드에게 전달하였으나 이는 중간에 분실되고 맙니다.
김규식은 가명으로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신분을 위장한 뒤 상하이를 출발하였습니다. 여비는 신한청년당원들이 결혼반지까지 팔아가며 모아서 마련하고 떠났는데, 떠나기 전 서구인들이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선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이것이 3․1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 유림의 파리장서사건
한편 유림(儒林)은 조선시대 유학자의 정통을 이어오면서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이 있었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유림에서 독립에 무관심했던 건 아닙니다. 김창숙(金昌淑) 등 유림인사들은 독립선언에 참여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파리평화회의를 통해 독립 의지를 보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고, 곽종석(郭鍾錫) 등 유림대표 137명이 김창숙의 연락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이 이 탄원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하였습니다.
<김창숙>
장서의 주요 내용은 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한국 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고,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파리평화회의)가 한국인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면서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으니 이를 파리장서사건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김창숙은 유림단의 진정서를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보내려 하엿으나 이도 좌절되고, 이후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합니다.
●●● 좌절된 파리평화회의 참석
<파리위원부 발행 '꼬레아 리뷰'(La Coree libre) 제2호>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 시내 파리 9구 샤토당가 38번지에 건물을 마련해 사무실을 개설하고는 동지들과 함께 수작업으로 '한국의 독립과 환호'(LINDEPENDANCE de LA COREE LA PAIX) 등 계속 문건과 홍보 팜플렛을 만들고 모임을 개최하는 당시 현실을 알리는데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파리강회회의 참석은 '회의 참석대상은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만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거절당하면서, 김규식에게 공식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보내주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설립할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17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 평화대사에 선임되고, 이어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4월 10일 부재중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4월 11일 파리 현지에 체류 중 외무총장에 선출되고, 파리 현지 주재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요. 4월 13일 상해 임정으로부터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평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 받았습니다.
<파리평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끝)>
이렇게 하여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자격을 얻었지만, 파리평화회의 반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1919년 7월 14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가 끝난 다음에 왔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파리평화회의는 승전국의 입장에서 패전국과의 종전 문제를 처리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하였으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사실상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하였습니다. 일본은 1차 대전에서 연합군으로 참전해 승전국 입장이었으므로 우리의 독립에 관심을 가지는 열강은 없었죠. 한국은 국제적인 미아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할 뿐이었습니다.
김규식은 심한 두통으로 눈이 안 보일 정도까지 가면서도 활동하였으나, 강대국의 무관심으로 파리평화회의 참석이 무산되고 말았죠. 실망한 김규식은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가고, 이때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당시 활동보고서를 쉬지 않고 타이핑하였습니다.
이후 김규식은 미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고 임시정부 등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광복을 맞이합니다. 독립한 조국에서는 분열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암살 위협까지 받는 등 곤경에 처하다가 6․25전쟁 중 납북당하고 마침내 사망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납북자라는 이유로 외면당하다가 1989년에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사건
경술국치 이전의 헤이그특사사건이나 파리평화회의 참여 무산에서 보듯이 일제가 다른 강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외교적 노력이 결실을 맺기 힘들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외국으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것은 윤봉길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비롯되었죠. 계속된 독립운동으로 우리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어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의 독립이 연합국 정상 간에 합의될 수 있었는데요. 일본이 중국․미국․영국 등 다른 나라와 적대관계가 조성되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외교적 노력을 기울로 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거나 국제 정세를 파악 못한다면 외교도 빛을 발하긴 힘들다는 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리평화회의 참석은 폭압적인 우리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려 노력하고, 3․1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는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