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3년 11월21일 ~ 22일
올가을은 다른 해보다 더 추운 것 같다.
경계존중 캠프는 9월 말에 가는 것으로 계획했었으나
그 전날 다른 일정이 있어서 무리가 되어 미루게 되었다.
이후 10월에 제주살이를 갔다오고 연말에 종강식을 준비하는 등
바쁜 탓에 흐지부지 취소되는 건가 싶었다.
그러다 11월 말에 기회가 생겨 캠프를 갈 수 있게 됐다.
캠프 일정을 의논하면서
학생들이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였던건
숙소에 수영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가을에 앞마당에서 반팔 반바지를 입고
따뜻한 수영장에 들어가는건 어떤 느낌일까
다들 한번 쯤은 경험해보고 싶었을 것 같다.
캠프 첫날이 되고 날다에서 갈 채비를 다 끝냈다.
그런데 혁수가 아직도 안왔다.
전날 늦지 않게 오라고 문자를 보내고
오늘 아침에도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오지 않는다.
더 기다려봐도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우린 먼저 출발했다.
각자 축령산에 대해서 알아오기로 하였는데
어떤 장소를 가든 그 장소의 정보를 알면 의미가 깊고
나중에 어딜 갔다 왔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령산이 장성 북서쪽에 있는데 고창까지 이어져서
전남과 전북을 잇는 산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우리가 차에 내려 장성 땅에 첫 발을 내딘곳은 장성호수변길마켓 주차장이었다.
산 언덕에 '옐로우 시티 장성'이라는 글자가 크게 세겨져 있었는데 멋져보였다.
저수지가 있는 데크길을 걸으면서 느긋하게 풍강을 누렸다.
출렁다리에서 출렁이는 스릴을 느끼고 싶어 방방 뛰었지만
별 느낌은 없고, 되려 현서가 멀미 난다고 그만 뛰라고 소리쳤다.
그때쯤 혁수가 이제 일어났는지 언제 출발하냐고 연락이 왔다.
우린 이미 장성에 왔는데 혹시 저번처럼 또 택시를 타고 오려는건 아닌지 확인해봤다.
모르겠다고 하자 가능하면 와줬으면 좋겠고 너 편할 대로 하라고 말한 후
숙소 주소를 남기고 더는 토달지 않았다.
우리 차가 숙소를 향해 경사진 도로를 오르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택시 한 대가 지나갔다.
누가 이 멀고 먼 산길에 택시를 타고 오나?
혁수가 타고온 택시가 아닐까 우리는 짐작했지만
예상대로 숙소 앞에 정말 혁수가 나타났다.
우리가 탑승한 차인지 모르는 듯 혁수는 쭈그려 앉아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부르자 그제야 얼굴을 든다.
숙소에서 의자를 원으로 배치해 앉아 경계 존중 캠프를 공부한다.
경계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이 따지고 보면 서로 크게 다를 바 없고
말 그대로 타인을 존중하기 위해서 일정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한번에 이해하기엔 어려운 개념이었다.
종이 테이프에 자기 별명을 써서 옷에 붙이고
서로가 이름 대신에 별명을 불렀다.
그리고 별명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돌아가면서 소개했다.
펼쳐진 타로 카드들 사이에서 카드 두장을 골라 내 현재 기분을 말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별명을 부르고 사랑해를 외치면서 공을 전달하는 놀이,
술래가 자기와 공통되는 점을 말할 때 얼른 의자를 바꿔 앉는 놀이 등
다양하게 몸을 움직이는 작업을 동반하면서 수업을 들었다.
특히 자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자리를 찾아 차지해서
색깔 테이프로 자기의 영역을 만든 후
상대방이 자기 영역 앞에 왔을 때 초대하거나 거부하는 시간이 가장 뜻깊었다.
싫을 때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고
싫은 이유의 대해 정중하게 말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추운 가을에 야외에 있는 따뜻한 수영장에 몸을 담가 피로를 푼다.
크게 첨벙 소리를 내며 입수하고, 벌칙 게임으로 냉탕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등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던지고 놀 공이 없어서 슬리퍼를 대신해 공놀이를 하고
골대를 지정한 후 팀을 짜 게임을 진행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상대방에게 슬리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놓지 않게 되자
여럿이 달라붙어서 줄다리기를 하듯 슬리퍼를 뺏으려는
그야말로 힘 싸움이 되고말았다.
나중에는 개인전으로 골대에 슬리퍼를 넣는 사람이 설거지 면제권을 갖는 게임을 했다.
슬리퍼가 꾸겨질 때까지 아득바득 서로 뺏으려고 달라붙었다.
얼마나 치열하던지 한명씩 포기하더니 끝내 혁수가 골을 넣게 된다.
대단한 근성과 체력이다.
저녁 시간이 되자 선생님들은 고기를 굽고
학생들은 대강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바비큐장에 들어간다.
선생님은 고기가 할인돼서 많이 샀으니 계속 가져다 먹으라고 하셨다.
밥 준비를 돕지 못해서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밥은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
상 치울 때가 됐는데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 남은 고기를 마저 먹었다.
하루가 다 끝나갈 무렵이 되고 혁수가 폭주족 친구들과 어울리는 문제에 대해
마리아 선생님과 혁수가 따로 만나 얘기하는 것을 나도 옆에서 같이 들었다.
청소년기때 비행을 하는건 당장은 즐겁고, 어른들이 책임져주니 편하겠지만
성인이 되고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인생은 길게 봐야한다.
꾸준히 등교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나는 조언해줬다.
다음 날 아침
축령산을 걸으면서 활기를 얻는다.
혁수는 언제까지 걷냐고 불평이지만
그래도 잘 따라와줘서 고마웠다.
인생이란 산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힘겨운데
목적을 달성하고 산을 내려오면
그 보람참을 얘가 알까,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