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
○ 주소 : 인천 중구 제물량로232번길 46 (지번 : 송학동1가 11-1)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일대를 둘러보았다면, 이제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보자. 차이나타운 뒤로는 ‘응봉산’이 넓게 자리하고 있는데 주거지(송월동 등)가 밀집된 언덕길을 따라 빙 둘러 가거나 ‘차이나타운 황제의 계단’ 또는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하는데 이 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다. 고종 25년(1888년) 11월 9일 인천항구 각국 조계 장정 제1관에 의해 공원으로 확정되었으며 도면에 미, 영, 러, 청, 일 등 각국 외교관이 공동 서명하고, 러시아 제국 국적의 우크라이나인 건축 기사 사바틴(Afanasii Ivanovych Seredin-Sabatin, 1860년 1월 1일 ~ 1921년)이 측량했다고 한다. 사바틴은 독립문, 덕수궁 중명전, 정관헌을 설계하기도 했다. [참고 : 자유공원, 위키백과 ‘사바틴’]
인천항 개항 무렵에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 불린 이 공원은 일제의 한국 병탄 (이칭 : 경술국치, 한일합병, 국권 피탈 /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권을 상실한 날) 이후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각국 조계가 철폐될 무렵에 ‘서공원(西公園)’이라 불렸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만국공원(萬國公園)’으로 불리다가 한국전쟁 이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1957년 10월 3일에 ‘자유공원’으로 개칭하여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다.
공원 외곽에는 사슴, 사자, 얼룩말, 양 등 각종 동물 조형물들이 반겨준다. 마치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공원에 들어서기 전, 송월동 일대를 잠시 둘러보았다. 제물포고등학교와 인천기상대, 송월초등학교 등이 있는 동네 풍경은 정겨움이 물씬했다. 아름다운 날씨까지 더해지니 그저 걷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조금만 시야가 트인 곳으로 걸어가면 항만, 인천 앞바다 등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 인천기상대
자유공원 앞에 도착했다. 탁 트인 곳에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저 멀리 인천대교를 따라 인천국제공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보인다.
오른쪽에 월미산과 월미전망대가 보인다. 월미도 여행 시, 이곳은 꼭 방문해 보도록 하자.
계단을 내려가면 제물포 구락부(왼쪽에 보이는 건물)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인천시민애(愛)집]이 있다.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표현으로 제물포항 개항 후, 미국, 독일, 러시아 등 각국 인사들이 모여 사교활동을 하던 클럽이었다. 현재 이곳은 다양한 전시 및 체험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자유공원에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주변의 다른 나무들과 대비될 정도로 새하얗고 거대한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라 한다. 식재년도가 무려 1884년이라니, 1883년 개항한 제물포항과 역사를 나란히 하는 나무인 셈이다. 이 나무는 개항기 공원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문화적 가치에 의미를 두어 보호수로 지정(지정일 : 2015. 6. 29.)되어 있다.
광장 한쪽에 놓인 계단을 올라가면 맥아더 장군을 기리는 동상을 볼 수 있다. 맥아더 장군은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여 전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을 압록강 국경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참고 : 두산백과 두피디아]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문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정의로써 이러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 세계의 노선 위에 승리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만인의 감격과 탄앙을 한몸에 두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여기 이 동상의 주인공인 ‘다그라스(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그는 1880년 1월 26일, 아더 맥아더 장군의 둘째 아들로 미국에 태어나서 소위로 출발하여 오성 장군의 칭호를 받음에 이르기까지 무릇 반세기에 걸쳐 가지가지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이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패전 일본에 주재케 되었다. 일본이 이같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해방되었으나 불행히도 국토가 비참하게 양단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부터 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즉시 정부는 한국구원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공산침략 항진에 참가한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탁월한 천재가 발휘된 것은 바로 이곳 인천에서였다. 그 호매한 식견으로 안출된 거의 기적적인 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에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결행하여 그 결과로 전세가 일전하여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었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격에 넘치는 우리 국민의 명의와 의연으로 각계각층 대표를 망라한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가 김경승 교수의 손에 의하여 비져진(빚어진) 장군의 용자가 영겁을 통하여 이 거룩한 지역을 부감하도록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장군과 그 휘하 용감한 유엔군 장병들이 우리와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독한 침투에 대한 최후 투쟁에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없다.”라고 말한 분이 역시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
자유공원을 거닐다 보면 하늘을 바라보는 뾰족한 모양의 탑을 볼 수 있다. 바로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다. 1882년 5월 22일 대조선국 전권대관 신헌과 대미국 전권대신 로버트 윌슨 슈펠트(미국의 해군 제독·외교관)와의 사이에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은 그로부터 전개되는 모든 한미 양국관계의 발전에 가장 기본적이며 역사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한미수호조약 체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재음미하고 앞으로의 양국과 양국 국민의 상호 신뢰와 우호 협력관계의 계속적인 발전과 전진을 바라며 세운 기념탑이다. [한미수교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 1982년 5월 22일 착공, 1982년 12월 14일 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