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이달의 책-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유연훈)
김인순
옮김, 솔출판사 2001년 6월18일 발행, 286페이지 표지그림 : 켈러 백작 부인의 초상(1873) - 알렉산드레 카바넬 작가소개 헝가리의 문호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소도시 카샤우(현재는 슬로바키아 영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독일의
시를 헝가리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지만 “작가는
모국어 속에서만 살고 일할 수 있으며, 나의
모국어는 헝가리 말이었다”(<어느 시민의 고백>)라는
고백 속에 오랜 타국 생활 끝에 결국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시와 여행기, 희곡과 소설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주의 체제의 헝가리에서 자유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조국을 떠나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등 여러 곳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지만 헝가리어로 저술 활동을 계속했으며 사십일 년이라는 긴 망명 생활 후 1989년 2월 89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미 3년 전 일지에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1942년에
처음 발표된 소설 <열정>은 1990년 정치적 대전환 이후에야 헝가리에서 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1998년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면서 베스트 오르고 이미 고인이 된 자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작품으로 <에스터의 유언>을 비롯한 20여권의 소설과 수상록,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온다> 같은 여행기와 <어느 시민의 고백> 등이 있다. 줄거리 소설의 외면적 구성은 간단하다.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거의 언제나 형제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사십일 년 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에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그 간단해 보이는 소설의 배후에는 삶과 운명, 사랑과
진실에 대한 마라이의 깊은 인식과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심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묘사한 문학은 예로부터 시공의 제약을 뛰어넘어 많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을 발휘한다. 주인공 헨릭은 어느 날, 쌍둥이 형제처럼 지낸 절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만 당한 것을 알게 된다. 존재를 뿌리까지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 갑작스러운 사건은 결국 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다. 친구 콘라드는 말 한 마디 없이 세상의 다른 끝으로 종적을
감추고, 삶의 양지쪽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하던 헨릭은 배신감과 절망에 휩쓸려 고독으로 칩거한다. 그리고 한 집에 살면서도 가혹하게 팔 년 동안 침묵을 지키는
남편과 비겁하게 도주한 연인 사이에서 헨릭의 아름다운 아내 크리스티나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헨릭, 노 장군은 살아서 친구 콘라드를 기다린다. 오로지 이 기다림 때문에
그는 분노와 절망, 고독
속에서도 오랜 세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는
보이는 현 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 즉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마침내 죽음을 앞둔 인생의 황혼에서 콘라드가 돌아오고, 헨릭의 독백이나 다름없는
대화를 통해 사십이 년 전 서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세 사람을 파괴한 드라마가 서서히
우리 앞에 펼쳐진다. (옮긴이의 말에서 발췌) 본문 중에서 17-아흔 살이 지나면, 오십 대나 육십 대와는 다르게
늙는다. 서글픔이나
원망 없이 늙는다. 77-그들은 서로 좋아했기 때문에, 서로의 원죄, 부와 가난을 용서했다. 모든 힘에는 지배당하는 사람에 대한 감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경멸이 스며있다. 예속 당하는 자를 인식하고 이해하여 아주 능숙하게 경멸할
때에만 인간의 영혼을 지배할 수 있는 법이다. 88-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간과 관계를 가지고, 인간의 행위와 운명에 참여할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이 보였다. 96-두 노인은 서로를 관찰했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서 아주
주의 깊게, 생명력의
마지막 표시, 삶의
기쁨에 대한 희미한 흔적을 상대방의 얼굴과 태도에서 찾았다. 97-‘나는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서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던 게야.’ 이 순간 두 사람은 기다림이 있었기에 지난 몇 십 년(41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단 한 가지 과제를 준비하는 데 평생을 바친 것 같았다. 122-세상은 아무것도 아닐세.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네. 123-“찬 신기하게도 기억은 쌀과 뉘를 골라낸다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보면, 커다란 사건들은 사람의 내면을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어./이따금 세세한 일이 아주 중요할 때도 있어.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전체를
지탱해주고 기억의 파편들을 응집시켜주지. 137- 끝에 이르면 처음이 보다 선명하게 떠오르기 마련일세. 141-모태에서 태어난 생명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고귀한 관계가 우정이라고 나는 생각했네. 142-어떤 응답도 원하지 않으며, 친구로 선택한 사람을 환상으로
보지 않고, 잘못을
알면서 잘못과 그 결과까지도 받아들이지. 이것은
이념일 수도 있네. 그러나
그러한 이념이 없다면 산다는 것, 인간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나? 145-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 뒤에 숨어 있는 의도로
죄를 짓는 것일세. 166-운명이란 우연히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관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지. 172-자네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내게 있었기 때문에
나를 증오했지./그러나 자네의 영혼의 밑바닥에는 갈등,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었어.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한 시련은
없네.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세상에서 차지하는 것하고 타협할 때에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세. 175-사람은 고독 속에서 모든 것을 배우게 되네./나는 진실을 찾고, 진실을 찾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지. 177-시장에서의 흥정처럼, 남녀 사이에는 모든 것에
조건이 따라붙지. 그와는
반대로 남자들 사이에서 우정의 깊은 의미는 사리사욕 없이 상대방에게서 어떤 희생, 애정도 기대하지 않는 것에 있네. 184-운명이 직접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 두려움과 불안의 저 밑바닥에서
일종의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네. 인간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운명을 접해보고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일세. 215-세세한 것을 통해서 본질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세. 247-한 사람은 운명적인 결합에 자신을 불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정열 앞에서 도망쳤고, 다른
한 사람은 진실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침묵했지. 250-사람은 오로지 실제 현실만을 붙잡을 수 있어. 지금 나는 그것을 붙잡네. 시간의 속죄 과정이 분노의
기억을 정화시켰지.
252-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네. 늘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드러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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