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의 토요 칼럼(2025.8.23)
<한국이 박정희의 중화학을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필자저 "중화학에 박 정희의 혼이 살아 있다"에서 인용)
1. 개념적인 평가
지난해 (20010년) 7월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를 지나서 까지 한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일하신 KIST출신 80대의 노과학기술자 다섯 분 들과 점심 모임을 가졌다.
식후 커피시간에 "한국에 박정희의 중화학이 없었으면 어떻게 돠었을가요?"를 화제로 올렸다.
C 선배가 그게 "질문감이 되느냐?" 하면서 "아무것도 없지 " "중화학이란 박정희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정의 내렸다.
K선배는 "꼭 대답을 해야 한다면 한국이 중화학을 안 했으면 한국의 지금의 위상은 필리핀 수준 밖에 안될 거야" 했다.
옆의 P 박사가 거들었다. 한국이 중화학 없이 순조롭게 갔다고 한다면 인도로 했다가 1만 불선 수준인 지금의 말레시아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1인당 GNP가 3만 불일 때 필리핀은 3천 달러, 말레이시아가 1만 불 수준이었으며 인도는 GDP는 높으나 1인당 GNP는 2천 달러 수준밖에 안 되었다.
한국은 중화학으로 후진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지만 여타 후진국은 중진국 내지 후진국의 대열에 눌러앉아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경제력을 비교함에 있어서 후진국과 중진국, 중진국과의 나라에 따라 격차가 많다. 시간이 간다고 후진국이 중진국이 되거나 중진국이 선진국이 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 선언을 안 했더라면 중화학도 없고 수출 100억 불 달성도 없고 선진국도 없다는 것이다.
2. 경제개발 추진상의 평가
한국이 70년에 10억 불의 고지를 겨우 넘은 후 71년에늗 1인당 gnp는 278 달러였다.
정부가 81년도를 목표로 착수한 72년도의 한국의 경제지표는 수출 16.7억 불, 1인당 gnp는 318달러로서 선진국이 되기에는 아득한 수준이었다.
한국은 보리고개로 대변되는 기근과 빈곤에서 모면하는 정도로서 국제사회는 한국을 개도국이라 불렀다.
한국을 동아시아의 발전하는 네 마리 용 즉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한국읔 포함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것만 하더라도
한국민에게 경제개발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위대한 지도자이다.
72년 정부(EPB)는 70년대를 향하여 81년도듵 목표로 한 10년간의 "신장기 경제개발계획"을 빌표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이것은 경제발전도를 표시하는 수출계획에서 3차 5개년 계획으로 76년에 35억 불을 달성한 후 4차 계획의 종착역인 81년에 53억불읕 달성하는 것이었다.
10년간의 연평균 상장률 8%를 기준으로 계획한 것이었고 1인당 gnp 목표는 없었다.
정부의 경제기획 당국에서는 장밋빛 전망이라고 자화 자찬하고 매스컴도 의욕적인 10개년 계획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72년 16.7억 불을 달성한 국가가 10년 후에 53억 불의 수출을 달성한다는 것은 놀라운 성장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이 처한 국내외적 정치사회 경제구도로 보아 70년대라는 미래 개척을 위한 좋은 timing에 대폭적 성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었다.
운명이란 하늘이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만드는 것으로 운명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화학이란 선진국의 전유물인 중화학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 하나 없이😏우리들 자신이 추진하여 중화학 공업화도 하고 81년도에 수출 목표 100억 불에 대하여 200억 불을 달성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불 목표에 대하에 1,636불을 달성하여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이와 같은 기적과 같은 실적이 대한민국을 하나밖에 없는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3. 공업구조개편에서의 평가
박정희의 60년대의 1,2차 경제개발의 근간은 첫째 공업입국 둘째 수출제일주의였다.
국고에 돈 한 푼 없어 수출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수출할 것이 없었다.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하고 수출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수출했다.
61년 4천 불에서 시작하여 공산품이 없어 광수산물로 중석과 무연탄 그리고 김과 오징어등이 수출 주중 품목이었다. 가발용 생모가 수출 일등 폼목일 때도 있었다.
64년에 1억 불을 수출하여 1억불을 달성한 10월 30 일을 수출의 날(중도에 무역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였다. 지금은 12월 22일 100억 불 수출 달성한 날에 기념하고 있다.
박정희의 60년대의 1,2차 경제개발 계획기간에 수출산업 구조를 보면 반제품이나 부품을 수입하여 가공 조립하여 수출하는 노동집약형 조립산업 구조였다.
인건비로 국제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며 수출하는 구조로서 박정희의 수출 제일주의로 64년 1억 불, 67년 3.2억 불을 거쳐 70년에 10억 불의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10억 불의 수출제품의 구조를 보면 고무, 피혁, 플라스틱 가공과 합판 그리고 섬유 봉제품이었다.
여성인력으로 만드는 섬유 봉제품 수출이 전체의 49%를 차지하여 여성인력이 한국의 수출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국의 일등 수출폼목인 봉제품 수출마저 "한미섬유 협정:에 의거 쿠오터로 제한을 받게 된 데다가 미국이 중공과의 화해무드로 특혜를 주자 한국의 수출증대는 어렵게 되었다.
중공이 아니더라도 안건비가 비싸진 한국은 다른 후진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소비재 산업을 위주로 노동집약 산업으로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부가가치가 높은 후진국이 따라올 수 없는 중화학공업 제품을 생산 수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70년대 타이밍 좋은 시기에 공업 입국상의 소비재의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개편해야 하는 절대적 시점에 온 것이다.
중화학은 궁극적으로 공업구조를 모두 중화학 구조로 바꾸는 것으로 수천억불의 투자가 필요하고 기술력도 없고 내수시장이 없어 중화학으로 가는 길은 망국의 길로 간다고 내각 전체가 반기를 들고 나섰다.
박정희 대퉁령은 강압대신에 설득으로 동참시켜 추진하여 선진국 형태인 중화학구조로 개편하였던 것이다.
박정희의 중화학이란 결론적으로 공업구조를 선진국 중화학 공업구조로 개편함으로 이것이😏오늘날의 한국을 5대 공업강국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이 실현할 수 있도록 한국식으로 만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내가 책임진다고 해서 추진한 것이다.
중화학 선언이란 중화학 공업 6개 업종을 선정하여 공업구조상으로 선진국 구조로 만드는 것으로 대규모 공장군울 건설하기 위해 중화학 업종별 전용 대규모 공업단지를 만들어 건설한 것이다.
4. 정치사회적 체제와 지도자의 신념
중화학은 공업구조 개편론에서 시작에서 완공까지 10년의 기간을 요하므로 영도자의 강한 집념을 필요로 하는 국가 최고 정책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했다.
중화학 추진에 있어서 신설기구 하나 없이 정부의 기존 부서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것이되 법령에 근거하여 대통령실을 대신한 중화학 기획단이 Control Tower가 되어서 교통정리를 하였다.
신규로 중화학 부서를 만든다든지 외국의 용역회사를 불러 막대한 자금을 소비한 적도 없다.
중화학은 "관계획 민실천"의 원칙하에 추진되었다. 중화학이라고 하는 것은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민간이 경쟁하며 활약하는 "자유민주 주의 국가"에서만 추진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한국은 미국과 상호방어 협정을 맺은 동맹 국가로서 친미 반공, 친기업쳬제를 지속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중화학의 본질은 수출지향성 중화학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국제경쟁력으로 경쟁하며 수출입하는 것으로 군사동맹국가인 미국과의 협조체제 유지는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