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철학의 생성존재론
▲ 현대철학의 타자
오늘날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상징계가 있고 이
위에서 우리는 모두 그물 지워지고 기표화되어 있죠. 말하자면 보았으나 본 게 없는 세계죠. 이런 곳에서
출몰하는 타자에요. 외부성이죠.
찰리 채플린의 <시티라이트>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의 첫 번째 장면이 뭐냐 하면, 동상 제막식이에요.
거기에는 군인들, 정치가들, 관료들이 다 모여 있죠. 엄숙한 순간이죠. 그 엄숙한 순간에 이 동상은 어떤 역할
을 합니까?
우리 상징체계 중에서 굉장히 묵직하고 무거운 상징체계 역할을 하는 거죠. 동상에는 애국심이라든가 국가라
든가 충성이라든가 군인의 용기라든가 하는 상당히 많은 가치를 부여받고 묵직하게 군림하는 하나의 심볼이
있죠. 그 동상이 제막식을 하는 겁니다. 거기 참석한 사람들이 막을 싹 걷을 겁니다.
이 순간은 이 상징체계 속에서 인정과 승인과 찬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죠. 그 멋진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동상은 국가라든가 조국과 같은 대단히 묵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빅 심볼, 큰 심볼이죠. 그런데 막을 걷으니까
여기서 어떤 거지가 자고 있어. 까만 옷을 입고. 하얀 대리석과 대조가 되죠.
이 놈은 뭡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이미 조직하고 있는 어떤 삶의 그물망을 탁! 찢고 나타나는
거죠. 이런 것이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외부에요. 그러니까 칸트가 말하는 타자하고는 뉘앙스가 판이한 타자죠.
▲ 내재성의 사유
그런 이야기를 다른 말로 하면, 니체 외에 생성 존재론자들은 한편으로는, 전체로써의 바깥(물자체)은 거부
해요. 그런 점에서 내재성의 사유죠. 초월성의 사유가 아니라 내재성의 사유죠. 물자체 같은 그런 초월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재성의 사유죠. 동시에, 즉 내재성을 초월하는 바깥이 아니라 내재성 안에서
수시로 드러나는 외부들, 타자들을 사유하려고 하는 거죠.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에게 이 세계의 어디 어디까지는 환하게 드러나지만 그 바깥은 전혀 안 드러나는 그런 구도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이 세계는 얼마든지 드러날 수 있어요. 그러나 드러남과 숨음, 길들여짐과 길들여지지 않음 이런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거죠. 그 내재성 안에.
어디까지는 훤히 알지만 그 바깥은 모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의 절대 바깥은 없어요. 우리 내재성
내에서 무수한 외부, 타자들이 얼굴을 들이밀죠. 현대철학은 그런 경험들을 중시하죠. 그것들이 들뢰즈가
말하는 ‘rencontre’, ‘마주침’이예요.
생성 존재론에 타자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현실 저편에 있는 무한이 아니라 현실의 여기저기에서 돌출하는
타자들이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이성의 거미줄은 모든 것을 낚으려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 거미줄, 그물에
구멍을 내면서 솟아오르는 리얼리티, 그런 타자성, 그 외부성에 주목을 합니다.
▲ 현대 생성존재론자들 -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이 사람들(현대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나마 잠깐 본다면, 니체의 ‘영원회귀론’과 ‘역능의지론’은
엘레아학파에 대한 비판, 그러니까 생성이란 것은 환상이고 이 세계의 본질은 일자(the One)라고 보는 엘레야
학파에 대해 비판입니다.
그를 통해서 현재의 절대성,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고 있는 지금 현재, 이것의 절대성, 끝없이 되돌아오는 차이,
그 다음에 주사위 놀이에 대한 해석들, 의지의 의미와 유한의 긍정 이런 테마들을 남겼죠.
이렇게 니체가 남긴 테마들은 여전히 중요한 테마들로 다뤄지고 있고, 현대 생성존재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
습니다.
그 다음에 베르그송도 마찬가지로 생성을 환상으로 보는 엘레야 학파를 거부하죠. 그는 19세기에 이루어진
다양한 과학적 성과들, 열역학이라든가 진화론 같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시간의 철학, 생성의
철학, 창조의 철학의 원형을 마련했죠.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을 이으면서도 베르그송처럼 과학과 철학을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베르그송은
정확히 구분하죠.
베르그송은 공간은 과학이 연구하는 것이고 시간은 형이상학이 연구하는 것이고, 과학은 물질을 중시하고
형이상학은 생명을 중시하는 것이고, 과학은 동일성을 중시하고 철학은 생성이나 차이를 중시합니다.
이렇게 과학과 형이상학을 날카롭게 이분했는데 화이트헤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철학 속으로 과학을 끌어들
여서 과학과 철학의 공통되는 어떤 보편적 개념들, 범주들을 사유하려고 했죠.
▲ 들뢰즈의 생성존재론
그리고 들뢰즈는 이런 흐름들을 이어서 차이와 사건의 존재론, 잠재성과 현실성의 사유를 전개하게 됩니다.
특히 들뢰즈의 중요한 공헌이 뭐냐 하면, 보통 생성존재론에 결여되기 쉬운 게 윤리적 정치적 차원이에요.
왜냐? 윤리나 정치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가치를 세우고 공통의 것을 만들어가고 당위를 추구하는 것인데,
우주를 끝없는 생성과 변화라는 입장으로 본다면, 윤리니 당위니 제도니 가치니 하는 모든 것들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게 되죠. 가치라거나 당위라거나 법이나 조직 등등이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거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생성존재론은 윤리나 정치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요. 또 실제로 이런 생성
존재론자들이 대체로 그렇죠. 그런데 들뢰즈같은 사람은 생성존재론을 추구하되, 일방적인 생성존재론이
아니죠.
일방적인 생성존재론으로 간다면 무조건 생성과 시간과 흐름만 강조하게 되니까. 들뢰즈는 생성하는 과정
에서 나타나는 매듭들, 어떤 마디들, 실체적으로는 고정되지 않지만 형성되는 어떤 다양체들을 사유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생성존재론이지만 생성존재론이 놓칠 수 있는 어떤 동일성, 어떤 규칙성들, 윤리적 정치적인
것들을 함께 사유했죠. 그것이 이 사람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생성존재론과 대칭적인 또 하나의 흐름
그런데 생성존재론이 현대존재론의 일방적 흐름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주도한 것은 사실이죠. 니체, 베르그
송, 화이트헤드 같은 사람들이 현대형이상학을 주도해왔고 일반 대중적으로도 더 많은 인기와 관심을 끈
사람들이죠. 그렇다고 해서 현대존재론이 무조건 일방적으로 존재론을 지배한 것은 아니고 오늘날에도 플라
톤적인 존재론, 어떤 영원한 것, 수학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 사람만 예를 들어보죠.
먼저 르네 톰(Rene thom)은 원래 수학자인데, 우리가 보통 수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서도 수학
들의 형상을 읽어내죠. 프랙탈이라거나, 카타스트로피라든가 카오스모스 이런 것들, 예컨대 구불구불한 달마
치안 해안이라는 것이 있죠.
그런 것들조차도 기하학이 복잡해서 그렇지 기하학으로 해석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왕관현상이라는 게 있죠.
우유가 뚝 떨어질 때 표현이 왕관처럼 되는 것도 사실은 다 기하학적으로 되어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르네 톰은 현대생성철학자들이 수학을 거부 또는 폄하하고 생성, 시간, 창조만 추구하고 어떤 구조
적인 수학적인, 공간적인 것을 무시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하는 거죠.
이 우주는 완벽한 수학으로 되어있다는 거죠. 플라톤이 생각한 것보다 더 수학으로 되어있다.
플라톤조차 몰랐던 것도 수학적으로 되어있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수학적으로 해명이 잘 되는 것은 물체죠.
그러나 생명체는 수학으로 해명이 잘 안 되거든.
그런데 이 사람은 주로 자신의 독특한 수학을 생물학에 적용을 해요. 물고기 지느러미, 잎사귀들도 얼마나
정교하게 수학적으로 되어있는지 증명하죠.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현대판 플라톤주의자인 거죠.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역시 존재론은 수학이다. 존재론과 수학은 같다 이렇게 봅니다. 존재론을 하는데
수학이 도움이 된다는 게 아니야 이 사람은. 존재론 하는데 수학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는 거지.
수학이 존재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성 철학자들이 생성관점에서 개념화했던 우연이라든가 사건, 다양성조차도 집합론적으로, 수학
적으로 해명하죠. 이 사람도 자기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플라톤주의자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지금 살아있는
데요. 흔히 말하는 ‘after Deleuze’, 들뢰즈 이후에 들뢰즈의 생성존재론과 대비되는 쌍이 되는 대결하는
고전적인 플라톤적 철학자죠. 한국에는 아직 많이 소개가 안 되어있죠.
그 다음에 사울 크립키(Saul A. Kripke)같은 사람을 보면요. 우리가 보통 현대철학을 essentialism, 본질
주의에 대한 거부로 보거든요. 본질주의는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거죠.
옛날 성리학, 조선시대 성리학 같은 것은 모든 사물에 본질이 있는 거야. 나무에는 나무의 본질이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본질이 있다고 봤죠.
사람한테 하면 뭐죠? 남자한테는 남자의 본질이 있고 여자한테는 여자의 본질이 있다는 거죠. 농부한테는
농부의 본질이 있고, 상인한테는 상인의 본질이 있다는 거야.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간단하죠. 자기본질에 따라 살아야겠죠.
또 쉬운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그림을 그릴 적에 본질주의적 그림은 A라는 사물의 본질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모든 화가들이 A의 본질을 그리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A의 본질을 더 잘 그리는 사람이 뛰어난
화가죠.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그림엔 특징이 있죠.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 여자들이 완벽한 이상적인
몸매 아니야. 물론 화가에 따라 조금은 다르게 나타나죠. 그래도 뭡니까. 전반적으로 보면,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죠. ideal한 인간들이죠.
인간의 본질, 인간의 essence를 그린 거죠. 인간의 essence를 그리려다보니 그림이 다 비슷비슷 하죠.
물론 자세히 보면 개성이 다 다르지만 일단은 비슷하죠. 그러니까 essentialism이 뭐냐?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현대철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 중에 하나가 본질주의에 대한 거부, essentialism에 대한 거부에요.
니체 이후에 굵직한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다 본질주의를 거부하죠. 그런데 크립키라는 사람은 놀랍게도
본질주의를 부활시켜요.
물론 제가 앞에서 예를 든 정치적 맥락이라든가 사회적 맥락이라든가 미학적 맥락이 아니고, 아주 논리적인
맥락, 분석적인 맥락에서 복구하죠.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를 가지고도 본질주의를 부활시켜요.
이렇게 현대철학에는 니체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생성존재론이 전반적인 흐름을 형성하지만 또 한편
으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플라토닉한 수학적, 논리적 본질주의를 추구
하는 흐름도 함께 존재한다고 할 수 있죠.
▲ 들뢰즈의 ‘순수차이’ (차이와 반복. 1장)
들뢰즈 존재론의 중요한 몇 가지 개념들만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처음에 이야기할 것이 ‘순수차이’죠. 순수
차이는 동일성에 복속된 차이가 아니고, 동일성을 와해시키는 차이죠. 들뢰즈에게는 동일성이 존재하고
순수차이가 나타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차이가 동일성에 의해 개체화되는 것이다. 이 대목을 한번 봅
시다.
차이라고 하는 것은 동일성을 전제하는 차이들이 있죠. 예컨대 남과 여의 차이는 인간이라는 동일성 내에서
의 차이죠.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의 차이는 동물이라고 하는 동일성, identity에서 벗어날 수 없는 차이죠.
이런 차이들은 일종의 수목형(樹木形) 구조, 나무구조를 가져요.
여기에 어떤 동일성이 있고 그 아래로 차이가 있고, 다시 그 동일성을 전제로 어떤 차이가 있죠. 나무가 뻗어
가는 형태나 구조를 가지죠. 뒤집으면 나무모양이죠. 어떤 근본적인 뿌리가 있고 거기서 퍼져나가는 구조죠.
우리 삶 대부분이 이렇게 되어있죠.
◆ 들뢰즈의 개념들
▲ 들뢰즈의 ‘순수차이’
이런 것을 들뢰즈는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순수차이는 뭐냐? 순수차이는 아예
동일성 자체를 벗어나 버리는 차이를 말해요. 예를 들어서, 누가 한의학적인 기와 몸을 가지고 들뢰즈 연구를
한다고 봅시다.
이것은 기존 학문세계의 이과와 문과가 있고, 이과에 의대가 있고 의대 안에 한의대와 양의대가 있고 하는
이런 구조의 어느 항에 안 들어가죠. 그래서 들뢰즈는 이걸 보고 괴물이라고 그래요. 괴물. 들뢰즈의 철학은
괴물의 철학이라고 그래요. 왜 괴물철학이냐? 기존의 이 수목형 구조 어디에도 안 들어가니까. 이게 어디에
들어가겠어요?
▲ 리좀 (rhizome)
이 동일성 내에서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있는데, 거기에 걸쳐져 있는 놈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런 것을
창조해내는 것을 들뢰즈는 리좀(rhizome)이라 그래요. 리좀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삶 자체가 수목형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동일성 안에서의 차이이고, 또 차이의 차이이라는 나무형태죠.
그런데 여기에 복속되지 않고 나무형태로 보면 괴물인, 나무에 익숙한 형태에서 보면 이상한 놈이죠.
새로운 접속과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 그런 놈들을 창조해내는 것을 들뢰즈는 리좀의 운동이라고 하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 사람은 리좀이 먼저인 거지. 우주의 본질은 원래 리좀이고 차이죠. 그런데 우리가
인위적으로 나무형으로 파악하고 조직하는 거죠. 그러니까 수목형에서 리좀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세계는 리좀적으로 운동하는데, 우리가 수목형으로 파악하고 있는 거죠.
이 점을 들어서 들뢰즈는 우리에게 잠재성이 있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의 삶은 이런 잠재성을 일정하게
코드화 해놓았다고 보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묻혀있는 그 잠재성을 깨워내야 하죠. 그런데 들뢰즈는 잠재성을 끄집어냈다고 해서,
리좀으로 갔다고 해서 다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하죠.
예를 들어서 내가 내 신체를 벗어나서 리좀을 하겠다고 해서 마약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그리고 평소에
사람들을 가르고 있던 벽을 허물고 접속을 했는데 파시즘같이 이상한 게 될 수도 있어. 우리가 뭔가 삶에서
창조를 하려면 리좀을 발견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항상 발견만으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야.
예컨대 암도 굉장히 리좀적이지. 들뢰즈의 생각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 리좀으로 가는데 그것만으로는 안 되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접속해서 가느냐가 필요한 거죠.
어쨌든 존재론적으로 이런 것들이 이 사람의 기초에요. 리좀, 괴물, 순수차이. 이것만 갖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들뢰즈가 지향하는 기본적인 방향은 이겁니다.
현대인들에게 상징계가 워낙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특히 한국인들에게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리좀
이라는 것이 현대인들의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공감을 많이 일으키는 것 같아요. 홍대 앞에 가면 ‘리좀’이란
카페가 있어요. 들어가 보니 전혀 리좀적이지 않더라고.
▲ 애벌레 주체 (차이와 반복. 2장)
그 다음은 애벌레 주체. 들뢰즈가 말하는 애벌레 주체가 뭐냐 하면, 들뢰즈도 그렇고 라깡, 푸코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인데, 현대철학이 무조건 반주체적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간이란 존재가 어떻게 주체를 떠나겠어? 자기가 주체인데.
주체를 떠나자고 하는 놈도 알고 보면 인간 그 놈이 하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건 좀 아니죠. 뭔가 근대적인
주체하고는 다른 인간주체를 찾는 거지. 그런데 그것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들뢰즈란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 자아라고 하는 것은 사실 무수한 우리의 작은 자아들, 주체들 ‘애벌레
주체’라고 하죠.
쉬운 예를 들면, 내가 길을 걸어갈 때도 아무 생각 안 했는데, 문득 10Km쯤 가다가 아까 내가 봤던 게 뭐지?
이럴 때가 있죠. 그러면 지나가는 그 순간에 내 의식적 주체는 의식 안한 거야. 그렇지만 그 영상이나 느낌은
이미 내 애벌레 주체 속에 들어와 있는 거죠.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컨대 지금 우리가 이 여기에 같이 있지만, 이걸 다 파악하지는 못하죠. 내가 강의하면서 여러분 표정을 전부
파악 '못하죠. 그러나 들뢰즈는 그게 다 들어온다는 거야 내 무의식 속에. 애벌레 주체에.
그것을 들뢰즈는 미분(differential)이라고 했죠. 수학적으로 말하면 dx죠. 쪼끔 쪼끔 변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주체, 나, ‘나’라는 identity, 내 의식, 내 자아라는 것은 사실은 뭡니까? 그것은 진짜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통일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이런 애벌레 주체들이 적분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의식이나 자아라고 하는 것은 그냥 어떤 딱 주어진 실체, identity, 동일성이 아니라
는 거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자아 아래에는 무의식이 있어요. 우리는 의식도 잘 모르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이 따로 있고, 의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것 자체가 다 애벌레 자아, 운동하는 애벌레 주체죠. 그런 놈들이 어느 국면, 국면에서 적분(integration)
되면 내가 생각하는 투명한 나, 자아, 나의 동일성이 된다는 거죠. 역동적인 애벌레 자아와 의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벌레 자아로 막 풀어져 있을 수도 있고, 적분되어 명료한 자의식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참 재미있는 개념이죠. 정신분석학자들 라깡 등등이 말하는 무의식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죠.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는데요. 이 사람은 이런 식의 무의식을 말합니다. 이 순수차이가 다루어지는 게 『차이와
반복』의 1장이에요. 그 다음에 이 애벌레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 2장이에요.
들뢰즈를 읽으려면 일단 『차이와 반복』을 이해해야 해요. 마치 칸트를 이해하려면 일단 『순수이성비판』
을 읽어야 하듯이 들뢰즈도 일단 『차이와 반복』을 읽어야 해요. 이 책이 참 어려워 가지고 그래서 내가
꾸준히 연구서들을 번역하고 있는데, 철학사에서 제일 어려운 책들 중 하나에요.
▲ 상식과 양식 (차이와 반복. 3장)
자 그다음은 상식과 양식, common sense와 good sense. 이것이 뭐냐 하면, 재현과 동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철학적 사유방식이 뭐냐? 바로 상식과 양식이다. 전통철학은 재현과 동일성의 사유를 많이 구사
하는데, 그런 사유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논리가 common sense와 good sense죠. 그런데 sense는 3가지
뜻이 있어요.
의미, 감각, 방향 이죠.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나무이야기와 똑같은 거야. 이 세상의 실재는 운동이고 리좀이고 차이이고 생성
인데, 많은 경우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교통정리를 쫙 해서 매끈하게 해가지고 common한 것만 이야기 한다
거나, 자기들이 볼 적에 good한 것만 이야기 하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들뢰즈는 common sense 또는
good sense라고 그러지요. 이 상식과 양식(common sense와 good sense)을 비판하는 것이 『차이와
반복』 3장 주제죠.
▲ differentiation과 differenciation (차이와 반복. 4장)
그 다음에 4장, 5장은 엄청 어려운데, 4장은 ‘differentiation(미분화)과 차이생성, 차이생성과 differenciation
(분화)’를 다루고 있어요. 잘 보면 글자가 다르죠. 앞에는 t, 뒤에는 c죠. 이 두 가지 논리를 통해 차이가 일어
난다. 들뢰즈는 이것을 합쳐서 유머러스하게 differenc/tiation이라고 씁니다.
‘c/t’가 뭐냐 하면 앞에서 말한 저 잠재차원, 우리가 생각하는 상징계 속의 정돈된 그런 질서 아래에는 좀 더
이 우주 본연의 모습들인 생성과 창조, 차이생성들이 있는데, 그 차이들의 작동방식이 뭐냐 하면 differentia
tion, 앞에 있는 차이생성이에요.
그런데 들뢰즈는 그 차이의 생성이라는 것이 무조건 아무 규칙도 없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카오스가 되겠지.
그러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지. 우리가 주어진 질서에 복속된다거나 동일성에
사로잡히는 것도 문제지만 무대포로 차이화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든.
이 우주에 분명 질서가 있죠. 우리 몸의 이런 구조, 동일성이 있잖아. 그러니까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이 능사
가 아니에요. 어떻게 그 생성의 장 위에서 이런 동일성들이 만들어지고 스러졌다가 다시 만들어지는 이 전체
를 보여주는 것이 문제다. 그냥 일방적으로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성을 완전히 부정하면 다음 시간에 여러분이 나를 못 알아보겠지. 그건 아니잖아요.
현대철학을 너무 극단화해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동일성이라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사실은 생성의 장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생성되는 과정이 differenciation, 분화죠. 잠재성 내의 차이들의 운동이 ‘t’를 쓴 differentiation이라면,
그 운동의 결과, 철수도 만들어지고, 영희도 만들어지고, 산(山)도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c’를 쓴 differencia
tion이죠. 이것이 『차이와 반복』 4장의 주제입니다.
▲ 특이성과 강도 (차이와 반복. 5장)
마지막 5장의 주장은 뭐냐 하면, 특이성들과 강도들이죠. 특이성들이 뭐냐? 참 설명하기 어려운데,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여기 제갈량이 있는데, 다른 것은 우리가 아는 제갈량과 똑같아요. 그런데 모자만 바뀐
제갈량이 있어요. 제갈건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다음에 관우는 관우인데 수염이 짧아. 관우가 수염이 아주 예쁘잖아요. 그래서 미염공 아니에요.
그리고 장비는 장비인데 수염이 아름다운 장비가 있어. 이런 경우 있죠. 이런 존재들, 예컨대 다른 것은 다
똑같은 나는 나인데, 뚱뚱한 이정우. 이런 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잠재차원에서는 요 놈이 우리가 현실화된
그 놈이 아니라 그 놈과 가까운 놈들이 진동하는 거야. 이정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몸도 쪘다 말랐다, 키도
컸다 줄었다 한다. 그런 놈이 요동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한 조건 하에 굳어지죠. 이런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발생과정이죠. 쉽게 말하면 아기 낳는 거죠.
처음엔 알이었다가, 여러 겹으로 접힌 다음에 팔 나오고 손이 나오죠. 그 상태에서는 아직 모릅니다.
그 아기가 키가 클지 작을 지, 과학이 발달해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몰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은 거죠.
이런 상태가 singularity, 특이성이죠. 그리고 이제 그런 특이성들이 진동하다가 굳어질 때 작동하는 힘이
강도, intensity죠. 이것이『차이와 반복』 5장입니다.
▲ 사건, 의미 (의미의 논리)
마지막으로 이제 사건, 의미가 있는데, 사건, 의미는 뭐냐 하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질이죠. 동양식
으로 말하면 기(氣)죠. 그런데 꼭 기의 운동이 우리 삶의 현실로 나타날 적에는 그냥 ‘기(氣)의 운동’이 아니라
의미로, 사건으로 나타나죠.
예컨대, 누가 울었다. 울었다는 것은 자연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생리현상이죠. 눈에서 흐르는 액체일 뿐이다.
그런데 그 현상이 우리의 삶의 맥락 속에서 현실화 되었을 적에는 그냥 물리적인 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죠.
아 저사람 슬프구나. 누가 슬프게 했을까 라고 하는 event, 사건이고, 그 사건은 항상 뭡니까? 의미를 띄게
되죠.
또 다른 예를 들어보죠. 먹구름이 꼈어요. 먹구름은 자연현상이에요. 하늘에 있는 입자들이 움직이다 먹구름
이 낀 거죠.
그런데 그 입자들을 움직이는 자연이 우리의 현실세계, 문화세계에 나타날 때는 그냥 자연현상이 아니죠.
하나의 event요 의미죠. ‘아 내일 소풍 못가는 구나.’ 하는 의미죠. 이 세계는 물질적 실체들인데 이런 것들이
운동하여 그 결과가 우리 삶에 나타날 적에는 뭡니까?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서 읽히죠. 그리고 의미를 가지게 되죠. 그러니까 운동이 나타나는 결과가 문화로
읽히고 의미를 가지게 되죠. 봄비와 가을비는 그냥 비죠. 물질적으로 크게 다를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문화
에서는 굉장히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물리적 변화가 우리 삶에 나타날 적에는 그냥 자연현상이나 물질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
으로, 의미로 이루어지고, 우리 삶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이런 것을 써놓은 책이 『의미의 논리』에요. 그래서『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 두 권을 읽으면
들뢰즈라는 사람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