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 성관(慧菴性觀, 1920~2001) 스님 이야기>
혜암 스님은 1920년 3월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김남영, 법명은 성관(性觀)이었다.
1933년(14세)에 장성읍 성산 보통학교 졸업하고 1936년(17세) 일본 유학중 <선관책진(禪關策進)> 등의 선어록을 보고 출가를 결심해 귀국했다. 선관책진은 중국 명나라 때 운서주굉(雲棲株宏, 1535-1615) 스님이 저술한 선어록(禪語錄)이다.
1946년(27세) 해인사에서 인곡(麟谷) 스님을 은사로, 초대 조계종 종정인 효봉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고 ‘성관(性觀)’이라는 법명 받았다. 출가한 날로부터 평생토록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 두타고행(頭陀苦行)을 실천하고, 용맹정진으로 수행자의 귀감이 되었다.
또한 한암, 효봉, 동산, 경봉, 전강 선사 등 당대 선지식 회상을 비롯해 45 하안거를 성만하며 참선 수행한 전형적인 수좌이다.
그래서 웃음을 지을 땐 동자승처럼 천진난만한 얼굴이지만 무표정할 때에는 투명한 얼음장처럼 냉철한 기운이 느껴진다. 바로 평생 원칙과 소신을 중시하며 살아온 선객의 풍모다.
1947년(28세)에는 문경 봉암사서 청담, 성철, 향곡, 자운, 우봉, 보문, 법전 스님 등 20여 납자와 함께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결사에 참여해 불교 재흥(再興)의 씨앗을 뿌렸다.
1948년(29세)에는 해인사서 상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한암 스님 회상서 안거했다.
1949년(30세)에는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하고 범어사 동산 스님 회상에서 안거했다.
1952년(33세), 범어사 동산 스님 회상에서 하안거 대중 88명 가운데 유일하게 안거증 받았다.
1967년(48세)에 해인총림이 개설됨에 따라 첫 유나로 임명됐다.
1970년(51세)에 대중의 요청에 따라 잠시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다.
1973년(54세), 해인사 극락전에서 철조망 치고 결사 정진했다.
1979년(60세), 해인사 조사전에서 3년 결사를 시작으로 1990년(71세)까지 총림 선원 대중과 함께 정진, 유나, 수좌, 부방장으로서 수행 가풍 진작을 위해 진력했다.
1981년(62세)에 해인사 원당암에 재가불자 선원(달마선원)을 개설해 매 안거마다 1주일 철야 용맹정진을 지도했으며, 매월 2회 토요 철야참선 법회 개최해 약 500여 회에 걸쳐 참선 법문을 했다.
1987년(68세)에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선출.
1993년(74세)에 성철(性徹)스님이 입적한 후 해인총림 제6대 방장에 추대됐다. 해인사 방장에 오르면서 대중 선방 수좌들에게 하루 4시간 이상 잠자지 않고 오후에 불식(不食)하도록 하는 것을 가풍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혜암 스님의 벼락같은 법문은 유명하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위법망구(爲法忘軀),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몸을 버리라는 의미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 자기가 집중하고 있는 일에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녹아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에 스님의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말씀을 화두 삼아 무아를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온몸을 다 바친다면 그것이 바로 수행이고 삶의 행복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늙은 쥐가 쌀 궤를 한 구멍만 뚫듯 해야 한다. 미련한 쥐나 어린 쥐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쌀 궤를 뚫을 적에 이짝에 뚫었다 저짝에 뚫었다 하는데, 늙은 쥐는 쌀 궤를 많이 뚫어봤기 때문에 쌀이 나오든 말든 죽어라고 한 구멍만 뚫는다. 화두 공부도 늙은 쥐가 쌀 궤 뚫듯이 해야 도가 깨달아진다. 공부가 안 된다고 저리 따져보고 이리 따져보고 또 다른 화두로 바꾸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1994년(75세)에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됐다.
지리산, 태백산 등 깊은 산속 토굴에서 수행에만 전념해오던 혜암 스님이 본격적으로 종단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94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이었던 때였다.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이 두 번 연임을 한 후, 더 이상 연임은 못하게 종헌 종법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종법을 고치면서까지 세 번쩨 연임을 하려고 획책했을 뿐만 아니라, 종단을 독선적으로 운영을 해 부작용이 많았고, 더군다나 은처를 둔 것이 발각이 됐음에도 당당히 총무원장을 더하겠다니, 혜암 스님은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 서의현 총무를 몰아내는데 앞장을 섰다.
이리하여 종단을 개혁했던 일은 우리나라 불교사 초유의 사건이었다. 당시 혜암 스님은 개혁파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혜암 스님은 오랜 수행 경력과 함께 종단이 분규에 휩싸였을 때마다 원칙과 소신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에 앞장서 일찌감치 종정 후보로 꼽혀왔다.
1999년(80세) 드디어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됐다. 혜암(慧菴) 스님은 평생토록 수행에 전념하는 동시에 과감한 개혁 실천에도 앞장섰던 인물. 조계종 원로회의에서 22명의 정원 중 19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장일치로 종정에 선출됐다.
1999년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고 처음 맞이한 부처님 오신날을 즈음해 불교신문과 특별인터뷰를 갖는 자리에서, “부처님은 고통 받는 중생들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러 이 땅에 오셨다”면서, “모든 것은 상자상의(相資相依)로, 인류의 불행은 자신만 살겠다는 인간중심 철학에서 비롯됐다”고 경책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혜암 스님은 해결책을 묻는 질문에 “연기적 세계관을 현실에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에 있다”면서, “일체중생이 다 부처이고, 이 시대의 부처는 자신의 본심이 천진불임을 아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공부하다 죽어라.”
제자들은 혜암 선사가 세상에 남긴 이 금과옥조와도 같은 말을 경남 합천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 옆 대형 석조 죽비에 새겨 놓았다. 길다란 돌에 새겨진 이 촌철살인 같은 말씀은 현재까지도 길이길이 후학들에게 수행의 지표로 전해진다.
그래서 ‘혜암’이란 두 글자는 기억 못하더라도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은 불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법호보다 그 말씀이 더 유명하다면 혜암 스님이 생전에 얼마나 수행을 강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승으로서 수행자로서 혜암 스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대중들의 가슴을 적시고 울렸다. “용맹정진하다가 죽는 놈 봤어? 그러다가 죽는다면 그보다 수지맞는 장사는 없어. 정진하다가 죽을 수만 있거든 죽어버려. 내가 화장해 줄 테니까”
“내가 여기 원당암서 20년 동안 한 말이 이것입니다. 쉼 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쉬세요, 한 생각 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져주세요, 그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2001년(82세) 12월,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인과(因果)가 역연(歷然)하니 참선 공부 잘해라’고 당부한 후 임종게를 수서(手書). 해인사 원당암에서 의자에 앉은 채 가야산을 바라보는 자세로 편안히 열반에 드니 세수는 82세요 법랍은 56년이었다.
――――다음은 혜암 선사 법문이다――――
<참선(參禪)보다 더 큰 기도(祈禱)는 없다>
일반 신도들에게 법문을 할 때는 ‘아미타불’을 염하고 나서 법문을 시작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부르면 나고 죽는 큰 죄, 팔백 겁의 죄를 녹여 버리는 공덕이 생깁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부른 공덕이 이러할 진데 참선의 공덕은 말할 것도 없지요.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생기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가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모두가 남의 탓만 하고 있어요.
이는 죄(罪) 받을 일, 죽을 일을 만드는 거와 똑같습니다. 모두가 ‘내 놀음’입니다.
내 마음, 내 공로만큼 받는 것이지 가만있는데 부처님이 복을 지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매일 세끼 밥을 꼭 챙겨 먹으면서도 법문을 듣는 것에는 게으릅니다.
법문을 듣고 앉아 있으면 다 아는 얘기 같거든요. 그러나 행이 따르지 않는 앎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불하기 전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법문을 밥 먹듯이 듣고 이를 부지런히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문을 수없이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우리 중생들이에요. 아무 일도 없으면 심심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을 만듭니다. 일이 없으면 공연히 걱정스럽고, 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이 모두 헛것인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죄지을 일을 만들어냅니다.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할 때 다시 말해서 여섯 도둑놈이 일이 없을 때가 제일 좋은 때인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그래서 귀 도둑놈, 눈 도둑놈, 코 도둑놈을 만들어 지옥에 가는 일을 만드는 판국입니다. 이래 가지고도 도를 닦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눈 밝은 이가 보면 고생길이나 죽을 길만 일부러 찾아다니는 것과 같아서 안타까워요. 천지의 은혜보다 귀중한 것이 불⋅법⋅승 삼보입니다.
성불할 때까지 이 삼보에 의지해서 쉼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좋은 법문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말입니다.
‘일주일 만에 꼭 도를 깨치겠으며, 그러지 못할 때는 죽어도 좋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환적굴을 찾지 못하고 대신에 다른 새로운 굴에서 ‘깨달음의 공부’에 들어갔습니다. 굴속에서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육 일(六日)을 지내고 나니, 귀가 바글바글 울리고 손발 마디마다 빡빡하더군요. 그렇게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정진하면서 지금까지 사십 년 ‘장좌불와’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장좌불와를 하게 된 동기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일주일 만에 도를 깨치겠다’라고 마음먹고 매주 한 주일을 새로 시작하고 하다 보니 어느새 사십 년을 계속해 장좌불와를 하게 되었을 뿐인 게지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座臥 語默動靜)에 걸림 없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는 오래 하고, 있는 것보다 일도양단해서 간절히 할 때 힘을 얻고 덕을 보는 것이지, 그저 오래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아무리 더 없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내 마음’을 모르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질이 풍부하든 그렇지 못하든 내 본 마음을 모른다면 귀신이 중간에 끼어들어 속이고 다니며 죽을 길로 끌고 갑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나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일입니다.
옛 도인의 말씀에, 태어나면 소금 장사밖에 할 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조금 치라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을 찾으려고 야단이니 큰일입니다. 어서 빨리 자신의 마음 찾는 공부를 해야지요.
우리가 끌고 다니는 이 몸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듯이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몸뚱이는 분명히 나의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을 천번 만번 소중히 해 다시 태어나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살아봐야 괴롭기만 하지, 뭐 좋은 일이 있습니까. 밥 먹고, 세수하고, 화장실 가고, 남을 돕거나 해치는 일, 뭐 그런 거지, 그밖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길에서 몸을 주웠듯이 몸보다 더 중요한 불법을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보물이 있는데 엉뚱하게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콧구멍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귓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가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깨치고 보면 시방세계가 모두 ‘나’로부터 나오고, 하늘과 땅, 해와 달 역시 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내 마음자리에서 보면, 수없이 스러졌다 일어서는 바다의 파도만도 못한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을 바로 알아야지 행여 짐작으로 안다면, 이는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도는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같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천 분이 나타나신다 해도 나의 일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은 오로지 자기가 깨달아 써먹어야지요.
팔만대장경을 다 왼다고 하더라도 ‘이 뭣고?’하며 참선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합니다. 도라는 것은, 오직 내가 깨닫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며 참선보다 더 큰 기도는 없습니다.
참선은 곧 활구(活句)요, 정법이요, 부처입니다. 도 앞에서는 부처라는 글자도 보잘 게 없습니다. 부처의 불(佛)자를 몰라도 부처님이 참선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 뜻을 아는 사람은 그대로 ‘살길’을 만난 겁니다.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참선 공부를 해 볼 만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