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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사람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올여름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름이 덜 끝난 것 같아서 목소리가 안 크신 거죠.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가 더 힘들고 누가 덜 힘들고 이렇게 판단하기가 되게 어렵습니다. 힘든 사람이 많은 이유는 현실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것도 있습니다.
그럼 왜 부정적인 사람이 많을까요?
부정적인 사람의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부정적인 메시지를 많이 듣고 자라서 부정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목회가 어려운 것도 목회의 현실이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것도 있지만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목회가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주변에 부정적인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고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아서 인생이 어려운 겁니다.
제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이 100이라면, 그리고 지금 제가 사용하고 있는 능력이 30이라고 이게 가정해 보겠습니다. 다른 문제도 있겠지만 제가 하나님께 받은 100이라는 능력치를 사용하지 못하고 겨우 30만 사용하면서 사는 것은 제가 자라면서 들은 부정적인 메시지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100일이라는 기회를 주셨는데 제가 30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산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제가 100이라는 기회를 못 활용하고 30만 사용하는 것은 제가 자라면서 들은 부정적인 메시지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자라면서 들은 부정적인 메시지가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고 기회도 활용하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그렇다면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걸까요? 저는 문제가 없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남탓을 쉽게 합니다. 그래서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다고 생각해서 남을 탓하고 남에게서 원인을 찾아요.
그런데 같이 부정적인 메시지를 듣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있고 영향을 적게 받은 사람이 있어요. 같은 부정적인 사회에 살았는데도 긍정적인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어요. 정말 분위기가 최악인 직장에 같이 다녔는데도 한 사람은 되게 부정적인데 한 사람은 되게 긍정적인 경우도 있어요. 한 배에 같이 태어나서 같은 날 태어나도 한 사람은 긍정적이고 한 사람은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아니지만 덜 받은 거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을까요? 아무리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줘도 자기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으면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나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매일 줘요.
그런데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으면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누가 나에게 키 작은 것을 지적하고 놀림감으로 삼아요. 그러면 스스로에게 키가 작아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는다는 거예요.
눈이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놀려요. 그런데 스스로에게 눈이 작아도 괜찮아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부정적인 영향력을 덜 받는다는 거예요.
너무 가난하고 힘든데 가난을 사람들이 비웃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가난해도 문제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는다는 겁니다.
살이 많이 쪄서 뚱뚱해요. 사람들이 뚱뚱하다고 놀려요. 근데 스스로에게 뚱뚱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으면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습니다.
제가 이렇게 맷집이 되게 좋잖아요. 여러분 0.1톤에서 좀 모자라요. 생각보다 많이 나갑니다. 제가 통뼈라서 당연히 주변에 사람들이 제 신체를 가지고 이렇게 말할 때도 있죠. 저희 가족도 그렇고 저는 항상 그러며 말합니다. 이게 살이 아니고 근육이라고 그래서 별로 누가 저에게 뚱뚱하다고 놀려도 큰 영향력을 받지 않아요. 사람이 자기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만 줄 수만 있으면 이 부정적인 메시지의 영향력을 좀 덜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부정적인 메시지를 말해도 영향을 덜 받는다는 거예요. 자신이 들은 부정적인 메시지로 인해서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거예요. 자기의 단점이나 약점을 콤플렉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과 저는 스스로에게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훈련을 못 받았어요. 그러니까 너는 괜찮아 너는 좋은 사람이야. 공부를 못해도 하나님이 다른 달란트를 나에게 주셨어 등등 이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자신에게 주는 훈련을 잘 못 받았어요. 나는 괜찮아 나는 이뻐. 나는 잘생겼어. 뭐 이렇게 이래 스스로에게 좋은 메시지 주는 훈련을 못 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부정적인 메시지를 많이 듣게 되고 그러면 부정적인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면 순식간에 부정적인 메시지를 자기에게 말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대군을 이끌기가 어려웠던 것은 서막이라는 환경적인 열악한 조건도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모세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10명이 부정적이었어요. 10명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메뚜기 콤플럭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정탐꾼 대부분이 부정적인 거예요. 12명이었는데 10명이 부정적이었어요.
그러면 왜 이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적이었을까? 유추를 해보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으로 노예로 살면서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수없이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나는 노예야. 나는 종이야. 노력해도 이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어.
이와 같은 비슷한 메시지를 400년 동안 부모가 갖고 또 그 부모는 자녀에게 말하고 막 이랬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400년의 노예 생활이 콤플렉스를 갖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부정적인 상황을 만나면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콤플렉스가 생겼어요. 그래서 누군가 조금만 부정적인 말을 하면 스스로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거예요. 너의 삶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자신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했고, 조금만 힘들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표출하며 살았던 거예요.
이게 쌓여왔기 때문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가 너무 어려웠던 겁니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냈고, 12명은 가나안을 정탐 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것 같은 시간대에 봤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의 내용이 전혀 달랐어요. 10명의 정탐꾼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했고, 두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족속들을 자기의 먹이 자기의 밥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400년의 노예 생활이 콤플렉스를 만들었고 이 콤플렉스가 부정적인 상황을 조금만 접하게 되면 발동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정적인 말을 수없이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발동한 콤플렉스는 메뚜기 콤플렉스예요. 이게 어떤 거냐 하면 갑자기 모든 것이 나보다 커 보이고 나보다 좋아 보이고 나보다 위대해 보이는 증상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갑자기 자기가 쓸모없는 사람으로 갑자기 자기가 불필요한 사람으로 갑자기 자기가 형편없는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을 만나면 이 콤플렉스가 발동이 되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또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계속 쏟아내며 살았던 겁니다.
여러분 성도들 중에 대개 부정적인 상황에서 긍정적인 걸 말하는 사람은 되게 좋은 사람이에요. 만약에 여러분이 앞으로 결혼을 한다고 하면 되게 안 좋은 상황에서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위나 며느리나 남편과 아내를 택하면 돼요.
만약에 여러분과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이 시간이 있다면 되게 어려운 상황인데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여러분은 꼭 성공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메시지가 힘이 아주 크다는 거예요. 결국 이 열 사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 열 사람으로 인해서 20세 이상은 광야에서 다 죽어서 묻히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광야를 무덤으로 만든 사람이 이 열 사람이었던 거예요.
만약에 이 사람들이 부정적인 보고만 하지 않았으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덤이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고고학자들이 고고학자들이 100%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덤인지는 확인할 수는 어렵지만 이 광야에 이 무덤들이 돌로 이렇게 쌓아놓은 이 무덤들이 막 모래가 이렇게 날리고 하면 발견되고 추측하건데,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 생활할 때 쌓았던 무덤이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고 또 발표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몇 번 보기도 하고 듣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을 광야로에서 묻히도록 만든 것이 10사람의 부정적인 견해였던 거예요.
부정적인 메시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만듭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만들려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려면 부정적인 메시지와 싸워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남들과는 잘 싸우지만 자신과는 못 싸워요. 우리는 자신과는 잘 싸우고 남들과는 못 싸워야 돼요. 이게 반대잖아요. 남들과는 정말 잘 싸우는데 정작 자신과는 못 싸우는 거예요. 특별히 자기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과 못 싸워요. 그래서 결국 부정적인 메시지에 파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부정적인 메신저가 있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우리의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메신저와 우리는 매일 싸워야 돼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비한 자가 살고 있어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게 하고 콤플렉스에 빠지게 하는 비관자가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비판자가 나에게 전하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차단해야 돼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삶의 비관자가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비관하게 하는 삶의 비관자가 우리의 마음에 살고 있어요. 그 비관자가 나를 향해서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마음속에 있는 비관자를 그리고 비관자를 부정적인 메신저를 이겨내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졌고 그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메시지를 이스라엘 가운데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메시지는 메시지는 내 삶에도 혼란을 가져오지만 공동체에도 큰 혼란을 가져와요. 성도가 한마디 던진 이 부정적인 메시지는 교회를 와해시키기도 해요.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끼리 굳이 다툴 필요 없어요. 니가 잘났니 못하니 할 필요 없어요. 우리 스스로만 우리 자신과 잘 싸우면 교회는 돼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뭔가를 성공하기 위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과 싸울 필요가 없어요.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메시지와 비간자와 비판자를 싸우면 내가 세상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거예요.
부정적인 메시지로 인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혼란에 빠진 게 아니라 위기에 빠진 거죠. 20세 이상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은 부정적인 메시지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형편이 우리의 과거에 부정적인 경험을 만나 매일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메시지와 전쟁에도 쳐서 그래서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고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은 자신들의 메시지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질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서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 거예요.
근데 이 긍정의 메시지가 정탐꾼 안에 없었던 게 아니에요. 정탐꾼 안에 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근데 부정적인 메시지가 이 멋진 메시지를 다 묻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 긍정적인 메시지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거예요.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우리의 먹입니다. 이렇게 전했어야 되는데,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와도 같습니다는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는 대개 긍정적인 메시지가 많아요. 여러분의 삶의 주변도도요. 긍정적인 메시지가 아주 많아요. 근데 문제는 부정적인 메시지가 이 긍정적인 메시지를 다 죽여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동체에 혼란을 가져오고 위기를 가져와요. 개인의 삶에 혼란을 가져오고 개인의 삶의 위기를 가져와요. 그러니까 우리는 남들과 싸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메시지와 늘 싸워야 합니다.
이 멋진 긍정의 메시지를 동료들에게 전하지 못하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는 메시지를 자기들에게 줬어요. 그 결과 20세 이상 되는 모든 남녀는 광야에서 다 죽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여러분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까? 요즘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까? 마귀라는 놈은 이런 상황을 가장 잘 이용하는 존재예요. 그래서 우리 주변에 조금 힘든 일이 생기면 우리 주변에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정적인 메시지를 만들고 그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말하게 합니다.
너는 안 돼 너는 쓸모없어. 너는 실패한 인간이야. 이미 늦었어. 나는 해도 안 돼. 나만 왜 이렇게 불행한 거야? 사람들은 나를 싫어해, 사람들은 나를 무시해,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아 나만 피곤해 나만 힘들어
라는 수많은 메시지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오늘도 이런 메시지가 여러분의 삶에 전달되고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과 어떤 목회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겨요. 부정적인 메시지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겨요.
여러분 이런 막을 일이 있을까요? 최소한 성도라면 목회자라면 부정적인 메시지는 구분할 줄 알아야죠. 근데 그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답으로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다. 답을 주셨다고 인 이들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영적인 열매를 맺으려면 이런 부정적인 메시지와 늘 싸워야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있는 부정적인 메신저를 찾아내야 돼요.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 부정적인 메신저는 마귀였습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줬고, 아담과 하와의 잘못된 욕망과 부정적인 메시지가 만나서 죄를 짓게 된 거예요.
어떤 경우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부정적인 메신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이 부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메신저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마귀가, 어떤 경우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경우는 직장의 상사가 어떤 경우는 내가 의지하고 신뢰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메신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능력을 가졌다면 부정적인 메시지는 파괴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두 번째로 부정적인 메시지를 이겨낼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됩니다. 내 안에 누가 부정적인 메시지를 말하는 메신저인지 찾아내기도 하고, 그리고 그 메신저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우리가 차단하기도 해야 돼요.
또 한편으로는 이 부정적인 메시지를 이겨낼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말도 다 이겨낼 힘이 있는 거예요. 성도들이 부정적인 메시지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들이 만난 말씀이 없기 때문인 거야.
우리는 매일 말씀을 만나고 매일 말씀 가운데 살고, 매일 말씀 가운데 있어야 창조의 능력을 가진 이 말씀이로 인해서 우리가 회복되고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메시지를 이기려면 말씀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이자 야곱이 들은 말씀이며, 노아에게 하신 말씀이며, 바울이 들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과거를 이기게 했고, 그들 속에 있는 부정적인 메신저와 싸워서 이기게 했습니다.
시편 107편 우리 20절입니다. 우리 표준새번역으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단 한마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쳐주셨고, 그들을 멸망의 불응에서 끌어내어 주셨다.
그러니까 치료의 말씀을, 능력의 말씀을, 회복의 말씀을 만나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부정적인 메시지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접하지 않고 매일 말씀을 받지 않고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부정적인 메시지를 이겨낼 수 없어요. 말씀이 강력하기 때문에 말씀을 만나야 부정적 메시지를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말씀이 있으십니까?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10장 4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우리의 싸우는 변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괴는 능력이라
복음은 우리 앞에 있는 어떠한 견고한 진도 파괴하는 능력이라는 거예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를 바랬어요. 그래서 가르쳐주고 있는 거예요.
너희가 가진 이 복음은 너희 앞에 있는 어떤 견고한 진도 다 무너뜨릴 수 있다. 다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지금 가르쳐주고 있어요.
어쩌면 바울은 알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바울이 양육했던 제자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마귀가 쳐놓은 견고한 진들을 부정적인 메시지를 우리가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우리가 무장해야 나의 삶에 쏟아지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싸워내고 내가 이겨낼 수 있는 거예요. 다시 목장 교회가 복음으로 돌아가 이 강한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지지 않는 무기로는 싸울 수 없어요. 교회와 성도의 착각 중에 하나는 자기가 무기를 가지지 않았는데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목회자들도 자기가 무기를 가지지 않았어요. 영적인 무기가 그 손에 없는데 가진 것으로 착각한 목회자들이 있어요.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그 손에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데 가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가지지 않는 무기로는 절대로 싸울 수 없어요. 가지고 있는 무기로만 전쟁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복음이라는 무기를 가졌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가지고 있어요. 소유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분의 사람이잖아요. 우리가 그분의 군대잖아요. 다시 교회가 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무기로 가진 교회가 돼요. 그래야 성도들 주변에 있는 어떤 어려움과도 싸워서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여러분은 어떤 부정적인 메시지를 듣고 살고 계십니까? 싸우십시오. 그리고 이겨내십시오. 그래야 이 땅의 삶을 여러분이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삶과 싸우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에게 주는 부정적인 메시지와 싸우십시오. 형제와 싸우지 마십시오. 이웃과 싸우지 마십시오. 성도와 다투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메신저와 싸우십시오. 그럼 여러분이 승리하게 될 것이고 그 승리가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많은 나라들의 주요한 도로에는 개선문이 있어요. 우리가 승리한 경험을 가졌다는 거죠. 누가 이렇게 과거의 전쟁에서 이 멋진 승리를 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여러분 그 승리의 경험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 승리의 개선문이 많이 채워지기를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