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길 / 에드워드 콘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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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불교의 길에 들어서며
1. 종교로서의 불교
불교는 영성을 다루는 동양적인 방식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세계의 모든 다른 종교들과
이른바 '신비적'인 면에서 동일하다.
이 삶의 철학적 본질은
토마스 아 캠피스가 지은 그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
에서 강한 어조로 분명하게 밝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는
지혜에 관한 인류 공통 유산의 일부이다.
불교의 지혜로
사람들은 유한한 이 세계를 극복하고
불멸, 곧 불사不死의 삶을 얻게 되었다.
지난 2세기 동안 유럽에서 영성에 관한 관심은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밀려서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요즈음 '영성'이란 말은
모호하고, 정의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영성 자체가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보다는
영성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히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성현들이 보편적으로 전해준 전통에 따르면,
영성 세계에 이르는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감각적 경험을
비교적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
둘째는
집착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
셋째는
생김새. 지성. 인종(피부색과 체취),
교육 수준 등이 어떠하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인들이 집단적인 노력은
영적이지 않은 길로 흘러갔다.
흔히들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는
삶에 대한 태도, 인생관, 영혼의 기능 등에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간주되어 왔다.
불교가 유럽의 상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뿐 아니라 모든 존재가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종교는 영성에 대한 열망이
구체적으로 조직화된 것으로서
감각적인 세계를 거부하고,
그런 세계에
우리를 옭아매는 충동을 부정한다.
3,000년 동안 아시아 홀로
영성에 대한 사유나 방법을
창의적으로 개발해왔다.
유럽인은 이런 문제들을
아시아에서 빌려와서
아시아의 생각에 적응하고자 했으나
때로 어설프기도 했다.
내 생각에 유럽의 영성 개발은
유럽에서 기원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모두
동양의 영성에서 자극 받은 2차적인 것이다.
유럽의 사상의
사회법과 사회 조직을 정교화하는 데,
그리고 감각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조정하는 데 뛰어났으며,
유럽중에서도 특히 로마와 영국이 탁월했다.
유럽의 고유한 전통은
삶의 의지를 긍정하고
감각적 세계에 몰입하는 것이다.
반면에 인류의 영성에 관한 전통은
삶의 의지를 부정하고
감각적 세계를 멀리하는 것이다.
모든 유럽인의 영성은
피타고라스이 파르메니데스 때부터
주기적으로
동양 정신이 유입되어 새로워졌다.
그리스 철학에서 동양의 요소를 제외하고,
예수 그리스도. 바울.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그리고 아랍 사상을 제외한다면,
지난 2,000년 동안의
유럽의 영적 사유는 상상할 수 없다.
1세기 전부터는
인도 사상이 유럽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제 시들어버린 유럽의 영성이
다시 활성화될 것이다.
불교에는 다른 지혜의 형태와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이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불교가 전래된 것은
지혜를 닦는 수행 때문이 아니라
불교 공동체가 존재했던
사회적 상황, 불교에 사용된 언어,
불교를 채택한 사람들 사이에
유행한 과학과 신화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
우리는 성스러운 삶의 본질적 요소를
이국적인 호기심과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둘째,
명상을 통해 구원받는 방법은 많지만
불교의 전통은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도
명쾌하고 충분한 해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다른 종교의 명상과는 다른)
불교만의 특질이다.
잘 검토해보면,
자이나교, 수피, 이집트 사막의 기독교 수사,
가톨릭의 금욕적 신학 및
신비신학 등의 문헌에서도 명상을 다루고 있다.
자신이 속한 동시대의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히 환멸을 느낀 사람에게
불교는 매력적인 부분이 많다.
오묘한 사유로 도달하는
피안의 초월적 숭고함,
불교 예술의 화려함,
광대한 영역으로 전파된 그 장엄함,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부동의 결단력과
고요한 선정 등이 매력의 일부이다.
처음에는
그러한 이국적인 정취 때문에
불교에 빠져들더라도
불교가
나날의 일상적인 삶에
끼치는 변화를 보고 판단해야만
불교의 참가치를 올바로 알 수 있다.
불교 경전에서 권유하는
유익한 행위의 규범은
대개 세 가지로 나뉘는데,
계율, 명상, 지혜 이다.
이 중에서 계율과 명상은
일상적인 평범한 사회를 떠나
구원을 추구하는
모든 인도 종교의 공통 자산이다.
여기에는
재가신도를 위한 행위 규범 외에도
출가공동체 생활을 위한 규율,
마음을 챙기는 규칙적인 호흡법,
감각 제어법, 색환color circle 응시를 통환
무아경 유도법,
황홀경의 여러 단계를 비롯한
많은 요가 수행들,
또 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정함[자비희사]등이 있다.
나아가
어떤 신비적 종교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의식 고양적이고 교화적인 특징,
예를 들면
죽음에 대한 명상,
역겨운 이 물질적인 몸의 기능들에 대한 명상,
그리고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과
승가에 대한 명상 등이 있다.
이러한 모든 수행법을
일평생에 전부 닦을 수는 없다.
해탈을 위한 길은 이처럼 많지만,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개아個我가 실존한다는 믿음을
소멸시키는데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개아라는 단어를
요즘처럼 막연하게 받아들인다면,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의 참뜻을 이해할 수는 없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五蘊]로 구성되어 있다.
나중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우선 다섯 가지 무더기를 열거하면,
형체[색色, The Body],
느낌[수受, Feelings],
지각[상想, Perceptions],
의지[행行, Impulses]
그리고 의식[식識, Acts of Consciousness]이다.
사람이 움켜쥐고 개대고 이용하는 것은
모두 이 다섯 가지 중의 하나이며,
'개아'를 구성하는 재료이다.
이 다섯 무더기 위에
'자아self'가 있다고 지어내는 데에서
개아가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이 믿음으로 인해
'이것은 나의 것', '나는 이 가운데 어떤 것',
'것들 중 어떤 것은 나 자신'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개아가 있다는 믿음 속에서
'나는 이것이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있다'.
'내 속에 이것이 있다', '내가 이 속에 있다'
라고 표현하게 된다.
개아는 실체가 없는 상상에 불과하므로
개아라는 사실은
그 가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사라짐과 동시에 없어진다.
개아는 다섯무더기가
임의적인 덩어리로 구성된 가상이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아가 사라진 그 결과가
불교의 목표인 니르바나[열반]이다.
이에 대해 '참개아를 발견했다'고
표현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지금 이해되고 있는
'개아'라는 단어가
워낙 모호하고 탄력적이어서
이를 용납할 만도 하지만,
불교 경전에서는
명백하게 이런 표현과
그에 상당한 어떤 표현도 기피하고 있다.
불교가 여러 학파로 나뉜 것은
목표에 접근하는 방법의
다양성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초기 교단에서도
다양한 기질과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길을 통해
목표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사리푸트라[사리불]는
지혜 제일로 유명했고,
아난다[아난]는 믿음과 헌신으로,
마우드갈랴야나[목건련]는 신통력으로 유명했다.
후기에는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학파를 형성했고,
점차 교리가 널리 전파되면서
지역적인 분리가 심해지고
이질적인 교단 조직들이 파생되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
탈개별화[무아의 증득]를
이루는 방법들에 대해 다룰 텐데,
현존하는 문헌으로 보면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거나
아주 희미한 조짐만 보인다.
그러나 많은 후기 불교도들이 주장했듯이
붓다는
중생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올바른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주요 학파들의 주장을 다루는 데 할애하고,
각 부파들이
그들 나름대로 특별히 선택한 방법들을 통해서
어떻게 다른 부파들과
동일한 목표에 이르게 되는 지를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부침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