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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읽기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F.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 독일어 제2판 서문
여기서 독일 대중에게 새롭게 내놓게 되는 이 책이 처음으로 출판된 것은 1845년 여름이었다. 이 책은 좋은 점에서나 나쁜 점에서나 저자의 청년 시절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당시 나는 24세였다. 지금 나는 그 3배나 늙었고, 청년 시절의 이 노작을 다시 읽으면서 그것으로 하여 부끄러워할 것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청년 시절의 이러한 흔적을 조금이라도 지워버리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고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다시 내놓는다. 다만 뜻이 아주 분명하지 않은 몇 구절을 더 명확하게 서술하고 여기저기에 연도(1892년)를 기입한 새로운 간단한 각주를 첨부하였을 따름이다.(선집6,375)
이 책의 운명에 관하여서는 다만 1887년에 이 책이 뉴욕에서 (플로렌스 켈리-비슈네비츠키 부인에 의하여) 영어로 번역되어 발행되었다는 것과 이 번역본이 1892년에 런던의 스반 조네샤인사에서 다시 출판되었다는 것만을 말하여 둔다. 아메리카판 서설이 영어판 서설의 기초가 되고, 이 후자가 다시 지금의 독어판 서문의 기초가 되었다. 현대의 대공업은 그것이 나타나는 모든 나라의 경제관계를 동일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독일의 독자들에게 미국이나 영국의 독자들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말한 것은 거의 없다.(선집6,375)
이 책에 서술된 사태−적어도 영국에 관한 한−는 오늘날 대부분 지난날에 속한다. 물론 공인된 교과서에는 명확하게 쓰여 있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이 완성되면 될수록 그것은 그 초기 단계를 특징짓는 시시한 사기와 기만의 수법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현대 정치경제학의 법칙이다. 유럽 상업의 가장 낮은 단계를 대표하는 폴란드 유태인의 시시한 속임수, 거기에서는 그에게 아주 유용하며 그의 고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동일한 간계도 그가 일단 함부르크나 베를린에 오기만 하면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를린이나 함부르크에서 맨체스터의 증권거래소로 온 중개상은, 그가 유태인이건 기독교도이건 간에 오래지 않아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실이나 직물을 싸게 사려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고국에서는 가장 영리한 장사술이라고 인정되어 오던, 좀 세련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매우 한심한 그 수법과 술책을 포기하여야 한다. 물론 대공업의 진보와 함께 독일에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필라델피아에서의 공업의 예나(주190) 이후로는, 구독일식의 우직한 사람들의 다음과 같은 원칙조차도 평판을 잃어 버렸다: 우선 좋은 견본을 보내고 그 다음에는 나쁜 상품을 보내더라도 사람들은 좋아만 한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술책과 간계는, 시간이 돈이 되고 미덕에 열광해서가 아니라 다만 시간과 노력을 헛되이 잃지 않기 위하여 어느 정도 상업도덕이 발전한 대시장에서는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영국에서 공장주와 그의 노동자의 관계에서도 사정은 이와 동일하다.(선집6,376)
주190) 1876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6회 만국 산업 박람회에 출품된 독일 산업의 전시품은 대부분 다른 나라 제품에 비해 수준 이하였다. 엥겔스는, 이 사건을 ‘공업의 예나(industrielles Jena)’라고 표현하여 1806년 10월 프로이센 군대가 예나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패배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선집6,612)
1847년 공황 후의 경기 회복은 새로운 공업 시대의 시작이었다. 곡물법 폐지(주191)와 이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던 그 후의 재정 개혁은, 영국의 상업과 공업에 요구되는 충분한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곧 이어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식민지 시장에서는 영국 공업 생산품들에 대한 흡수력이 빠르게 발전하였다. 랭카셔의 역직기는 한꺼번에 수백만의 인도의 수직공들을 몰아내었다. 중국은 점점 더 개방되어 갔다. 그러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은 거인의 걸음걸이로 전진하던 이 나라에서조차 전대미문일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당시에는 식민지 시장에 불과하였다는 것, 그것도 최대의 식민지 시장이었다는 것, 즉 ^원료를 제공하고 공업 생산물을 외국에서−이 경우에는 영국에서−수입하는 나라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선집6,376-377)
주191) 1815년 영국에서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해에 따라 도입된 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의 제한이나 금지를 의도했던 곡물법은, 저렴한 노동력을 얻기 위한 산업 부르주아지의 주도로 1846년에 폐지되었다.(선집6,612)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지난 시기 말에 도입된 새로운 교통 수단−철도, 대양을 항해하는 기선−이 이제는 국제적 규모에서 실용화되었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지금까지는 다만 맹아 상태로 있었던 것이 실제로 형성되었다: 세계시장. 이 세계시장은 당시에는 아직 다음과 같은 하나의 대공업 중심 주위에 집합한 주로 또는 전적으로 농업적인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국. 영국은 이 나라들의 과잉 원료의 거의 대부분을 소비하고 그 대신에 공업 제품에 대한 이 나라들의 수요의 거의 대부분을 공급하였다. 따라서 영국 공업의 진보가 거대하고 전대미문의 것이었다는 것, 그러므로 1844년의 상태가 지금 우리에게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으며 거의 원시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선집6,377)
그러나 이러한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대공업 또한 겉보기에는 도덕적이었다. 노동자에 대한 좀도둑질을 통한 공장주들 간의 경쟁은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았다. 사업 규모는 이러한 보잘것없는 돈벌이 수단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백만장자인 공장주들은 이러한 시시한 술책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더 나은 일을 해야 했다. 그러한 것은 기껏해야, 경쟁에 패하지 않기 위해서 일 그로센이라도 긁어 모으지 않을 수 없는 영세하고 돈에 궁한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현물 임금제는 공장지대에서 사라졌다. 10시간법(주192)과 기타 일련의 작은 개혁들이 통과되었다−이러한 모든 것은 자유무역 및 무제한적 경쟁의 정신과는 직접 모순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보다 불리한 조건하에 있는 동업자들과의 경쟁에서 거대 자본가들을 한층 더 우월하게 만들었다.(선집6,377)
주192) 10시간 법(10시간 노동일에 대한 법률)은 아동과 여성 노동자에 대해 유효한 것으로, 1847년 6월 8일 영국 의회에서 채택되었다.(선집6,612)
나아가, 공업의 설비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노동자와 충돌할 때마다 손실과 영업난은 더 컸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장주들, 특히 거대 공장주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기풍이 나타났다. 그들은 불필요한 분쟁을 피할 줄 알게 되었고 노동조합의 존재와 그 힘을 인정할 줄 알게 되었으며 드디어는 파업도−제때에 일어나기만 하면−그들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노동자계급과의 투쟁에서 군사령관이었던 거대 공장주들이, 이제는 누구보다도 먼저 평화와 조화를 부르짖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선집6,377-378)
정의와 인류애에 대한 이러한 모든 양보는, 실은 자본이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을 촉진하고 그러한 부수입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소규모 경쟁자들을 압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 소수의 수중에서, 종전의 보잘것없는 부수적인 약탈은 지금에 와서는 전혀 의의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광범한 지반 위에 서 있는 사업에 대해서는 장애로까지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적어도 주요 공업 부문에서는−왜냐하면 그다지 중요치 않은 부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이전에 노동자들의 운명을 악화시키고 있던 그러한 모든 사소한 부담을 제거하였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빈곤의 원인을 저 사소한 폐단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큰 기본적 사실이 더욱 더 전면에 나오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매일 일정한 금액으로 자본가에게 판매한다. 노동자는 몇 시간의 노동으로 이 금액에 해당하는 가치를 재생산한다. 그러나 노동계약에 의하면, 노동자는 노동일을 채우기 위해서 아직 여러 시간 더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가 이 추가 잉여노동 시간에 생산하는 가치가 잉여가치인데, 이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호주머니에 들어간다. 이것이, 문명사회를 한편으로는 모든 생산 및 생계수단의 전유자인 소수의 로트쉴트와 반더빌트로 바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방대한 임금노동자들로 더욱더 분열시키는 제도의 기초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이러저러한 부차적인 폐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도 그 자체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오늘날 영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하여 명백하게 입증되고 있다.(선집6,378)
나아가, 반복되는 콜레라, 티푸스, 천연두 기타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은 영국 부르주아에게, 자신이 만일 가족과 함께 이러한 질병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도시를 위생적으로 만드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극심한 폐해는, 오늘날은 제거되었거나 혹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다. 하수도가 설치되었거나 개선되었으며 ‘빈민가’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여러 곳을 뚫고 넓은 도로가 열렸다. ‘소아일랜드’는 없어지고 그 다음으로 ‘세븐다이얼스’(주193)가 없어질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의의가 있는가? 1844년에는 내가 아직 거의 목가적인 곳이라고 서술할 수 있었던 지역 전체가, 지금은 도시의 성장과 함께 빈민가와 똑같이 황폐화되고 거주할 수 없는 빈곤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물론 돼지와 쓰레기 더미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계급의 불행을 은폐하는 기술에 있어서 일층 더 발전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주택에 관해서는 아무런 본질적인 진보도 없었다는 것은, 1885년의 「빈민의 주택에 관하여」라는 왕실위원회의 보고서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찰법규가 나무 딸기 열매처럼 주렁주렁 열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노동자들의 빈곤에 울타리를 칠 뿐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다.(선집6,378-379)
주193) ‘소 아일랜드’란 주로 아일랜드인들이 거주하는 맨체스터 남쪽의 노동자 지구를 말한다. ‘세븐 다이얼스’란 런던 중심부의 노동자 지구를 말한다.(선집6,612)
그러나 영국은 성장해서 지금은 내가 서술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청년기를 벗어났는데, 다른 나라들은 이제 겨우 거기에 도달하였다. 프랑스, 독일 그리고 어느 나라보다도 아메리카는 내가 1844년에 에견한 바와 같이 위협적인 적수로서 영국의 공업의 독점을 깨뜨리고 있다. 이들의 공업은 영국에 비하면 아직 어리다. 그러나 이들의 공업은 영국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오늘날은 1844년의 영국 공업과 거의 같은 발전 단게에 도달하였다. 아메리카에 대해서는 이 대비는 특히 두드러진다. 물론 아메리카 노동자계급의 외적 환경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동일한 경제법칙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모든 점에서 똑같지는 않더라도 동일한 질서 속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에서도 노동일을 법적으로 단축하기 위한, 특히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과 아동을 위한 동일한 투쟁을 보게 된다. 현물 임금제가 성행하고 있고 농촌 지방에서는 독채 제도(주194)가 ‘보스들(bosses)’ 즉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에 의하여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886년에 펜실바니아의 코네스빌 지방 광부들의 대파업에 관한 보도를 미국 신문에서 접했을^ 때 나는 1844년의 잉글랜드 북부의 갱부 동맹파업에 관한 나의 기술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부정한 도량을 통한 노동자들에 대한 동일한 사기, 동일한 현물임금 제도, 자본가들의 최후의 파괴 수단을 통해 광부들의 저항을 분쇄하려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시도: 광산 회사 소유의 노동자 주택에서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것.(선집6,379-380)
주194) 독채 제도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처분 가능한 공장 주택을 제공하는 제도이다. 이 주택의 임대료는 임금에서 곧바로 공제된다.(선집6,612)
나는 여기에서도 영어판에서도 이 책을 오늘날의 사태에 맞추려고, 즉 1844년 후에 일어난 변화를 일일이 열거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렇게 하자면 이 책의 두께를 두 배로 늘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맑스의 자본 제1권이, 1865년 경의 시기 즉 영국의 공업 번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처지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맑스가 말한 것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선집6380)
이 책의 일반적인 이론적 관점−철학적, 경제학적, 정치적 면에서−이 오늘날의 나의 관점과 결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844년에는 현대적인 국제 사회주의는 아직 없었으며 그후 무엇보다도 먼저 또 거의 전적으로 맑스의 업적에 의하여 과학으로 완성되었다. 나의 책은 이 현대적인 국제 사회주의의 맹아적 발전단계의 하나를 대표할 따름이다. 그런데 인간의 태아가 그 발전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의 선조인 어류의 활 모양의 아가미를 아직 재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도처에서 현대 사회주의가 그 선조의 하나−독일 고전 철학−에서 나왔다는 혈통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가장 큰 강조점은,−특히 그 마지막 부분에서−공산주의란 다만 노동자계급의 당파적인 교리가 아니라 자본가를 포함한 전 사회를 지금의 협애한 관계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종국적 목적으로 하는 이론이라는 주장에 있다. 추상적인 의미에서는 이 주장이 옳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그것은 대체로 무익한 것이며 유해하기까지 하다. 유산계급이 해방의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을 극력 반대하기까지 하는 한, 노동자계급은 혼자서 사회 변혁을 준비하고 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도 역시 부르주아^지의 해방을 전 인류의 해방이라고 선언하였다. 귀족과 성직자는 이를 인식하려 하지 않았다. 이 주장은 −봉건제도를 염두에 두는 한 그 당시에는 명백한 추상적인 역사적 진리이긴 하였으나−곧 순전히 감상적인 공문구로 변질하여 혁명 투쟁의 불길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에도 중립이라는 자신의 우월한 관점으로부터 모든 계급 대립과 계급투쟁을 초월한 사회주의를 노동자들에게 설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많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될 풋내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최악의 적,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선집6,380-381)
본문에서는 대공업 공황의 주기가 5년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1825년부터 1842년까지의 사건들의 경과를 통해 겉으로 나타난 시간을 산정한 것이다. 그러나 1842년부터 1868년까지의 공업의 역사는, 실제 기간은 10년이라는 것, 중간 공황은 부차적이고 1842년부터는 점차 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868년부터는 사태가 또다시 변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추후에 언급하기로 한다.(선집6,381)
나는 많은 예언, 특히 당시 청춘의 열정이 나에게 불어 넣었던 영국에서의 임박한 사회혁명에 관한 예언을 본문에서 삭제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나의 노작이나 나 자신을, 당시의 상태보다 더 훌륭하게 묘사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놀라운 것은, 이 예언 중 실로 많은 것이 빗나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중 실로 많은 것이 맞아 떨어졌다는 사실이며 또 대륙과의 특히 아메리카와의 경쟁의 결과로 영국 공업의 위기 상태−물론 당시 나는 이것을 너무 가까운 장래의 일로 예언하였다−가 그 후 실제로 닥쳐 왔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하여 나는 여기에다 논문 하나를 전재하려 한다. 그 논문은 런던에서 1885년 3월 1일에 공공복지에 영어로 게재되었고 동년 6월에 신시대(제6호)에 독어로 게재된 것이다.(선집6,381)
“사십년 전에 영국은 아무리 보아도 폭력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공업의 거대하고도 급속한 발전은 해외 시장의 확대와 수요의 증대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십 년마다 생산과정은 전반적인 상업공황에 의하여 폭력적으로 중단되었으며, 이 공황에 이어 오랜 기^간의 만성적인 침체가 있은 후 단기간의 번영이 뒤따라 왔으며 이 번영은 또 번번히 열병과 같은 과잉생산으로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파산으로 끝났다. 자본가계급은 곡물의 자유무역을 소리 높이 요구하고 굶주린 도시주민을 그들의 고향인 농촌 지방으로 돌려 보냄으로써 그것을 강요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존 바라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그대로였다: ‘빵을 구걸하는 빈민으로서가 아니라 적진에 배치되는 군대로서’. 도시의 노동자 대중은 정권에서의 자신의 몫−인민 헌장−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다수의 소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헌장을 폭력적으로 관철할 것인가 합법적으로 관철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1847년의 상업 공황과 아일랜드의 기근이 닥쳐 왔으며 그와 함께 혁명의 전망도 닥쳐왔다.(선집6,381-382)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은 영국 부르주아지를 구원하였다. 승리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사회주의적 구호는 영국 소부르주아지 층을 놀라게 하였으며 보다 좁은 범위 내이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보다 실천적인 경계 내에 있던 영국 노동자들의 운동을 와해시켰다. 차티즘은 그 전 역량을 발휘하여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는데, 그것은 1848년 4월 10일(주196)에 외부적으로 붕괴되기 전의 일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자본가계급은 전선 전체에 걸쳐 승리를 거두었다.(선집6,382)
주196) 인민헌장의 채택을 요구하는 제3차 청원은, 1848년 4월 10일 런던에서 대중 시위로 지지를 얻을 계획이었다. 정부가 이 시위를 금지시키자 차티스트 지도자들은 시위를 단념하고 시위 참가자들을 해산시켰다.(선집6,612)
1831년의 의회 개혁(주197)은 토지 소유 귀족에 대한 자본가계급 전체의 승리였다. 곡물관세의 폐지는 대토지 소유뿐만 아니라 자본가들 중 그 이해관계가 많으나 적으나 토지 소유의 이해관계와 일치하거나 또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다음의 분자들에 대한 공업 자본가들의 승리였다: 은행업자, 증권 중개업자, 금리생활자 등등. 자유무역은 영국의 대내외적인 재정 및 상업 정책 전체를 이제 국민을 대표하게 된 계급인 공업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일치하도록 변혁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 계급은 열심히 이 일에 달라붙었다. 공업 생산에 대한 모든 장애는 무자비하게 제거되었다. 관세율과 세금 제도 전체가 변혁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유일한 목적, 그러나 공업 자본가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목적에 종속되었다: 모든 원료와 특히 노동자계급의 모든 생활수단을 저렴하게 하는 것, 원료의 생산비를^ 줄이고 임금을 더 인하하지는 않더라도 억제하는 것. 영국은 ‘세계의 작업장’이 되어야 했다. 아일랜드가 이미 그러햇듯이 다른 모든 나라는 영국에 대해서−영국의 공업 생산물의 시장, 원료 및 식료품의 구입처가 되어야 했다. 영국은 농업적인 세계의 대공업 중심으로서, 곡물과 면화를 생산하는 위성들이 부단히 그 수를 증가하면서 그 주위를 회전하는 공업의 태양이 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훌륭한 전망인가!(선집6,382-383)
주197) 선거 개혁에 대한 법률은 1831년 하원에서 채택되어 1832년 6월에 국왕에 의해 확정되었다. 그 개혁은 지방 귀족 및 금융 귀족의 정치적 독점에 반대하였으며 공업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이 의회로 입장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 법안에서 노동자계급과 소부르주아 층은 선거권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선집6,612)
공업 자본가들은 확고하고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언제나 대륙의 속물적인 경쟁자들과 자신들을 구분지었던 전래의 원칙에 대해 경멸하면서 자기들의 이 위대한 목적의 실현에 착수하였다. 차티즘은 사멸하고 있었다. 1847년의 파국이 완전히 지나간 후에, 당연하고 또 거의 자명한 것이지만 다시 개시된 호경기는 전적으로 자유무역 덕분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정에 의하여 영국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공장주들이 지도하고 있던 당인 ‘대자유당’의 꼬리가 되었다. 일단 획득한 이러한 우위는 영구화할 필요가 있었다. 차티스트들이 자유무역이 아니라 자유무역을 국민의 유일한 생활 문제로 전화시키려는 것을 맹렬히 반대한 데서, 공장주들은 노동자계급의 조력이 없이는 부르주아지가 국민에 대한 완전한 사회적 및 정치적 지배권을 결코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였으며 또 나날이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두 계급의 서로에 대한 태도가 점차 변하였다. 한때는 모든 공장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공장법이, 이제는 그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준수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업 전체에 어느 정도 확대되기까지 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악마의 소행이라고 비방을 받아 오던 노동조합이 이제는 완전히 정당한 제도로서 또 건전한 경제학적 학설을 노동자들 속에 보급시키는 유익한 수단으로서 공장주들의 배려와 비호를 받게 되었다. 1848년 전에는 배척당하였던 파업까지도, 이제는 왕왕 대단히 유익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공장주 신사분들이 필요한 시기에 자신들이 그것을 일으켰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였다. 고용주와 평등한 권리를 노동자에게서 약탈하였던 법률 가운데서 적어도 가장 심한 것은 폐지되었다. 그리고 한때는 그렇듯 무서운 것이었던 인민헌장이 이제는 실제로, 최근까지 그것을 반대하여 온 바로 그 공장주들의 정치강령이 되었다. 법에^ 의해 재산 평가에 의한 피선거권 자격 제한이 폐지되고 비밀투표가 실시되었다. 1867년과 1884년의 의회 개혁(주198)은 이미 보통선거권, 적어도 현재 독일에서 실시되고 있는 바와 같은 형태의 보통선거권에 매우 접근하고 있다. 지금 의회에서 심의되고 있는 선거구에 관한 법안은 평등선거구를 만들고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프랑스나 독일의 그것에 못지않게 평등한 것이다. 의원 유급제와 매년 선출되는 의회는 아닐지라도 임기의 단축은 가까운 장래에 틀림없이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티즘은 죽어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선집6,383-384)
주198) 1867년 노동자 대중 운동의 압력에 의해 영국에서는 제2차 의회 개혁이 수행되었다. 이 개혁 법안을 통해 소부르주아 층과 노동자계급 가운데 형편이 좋은 층이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은 그 이전이나 이후나 제외되어 있다. 1884년에 제3차 의회 개혁은 1867년의 선거권을 농촌 지역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러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도시 빈민, 모든 여성들은 여^전히 제3차 선거개혁 이후에도 선거권을 가지지 못했다.(선집6,612-613)
1848년의 혁명은 그 이전의 많은 혁명과 마찬가지로 기이한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칼 맑스가 늘 말하던 것과 같이, 그것을 진압한 바로 그 사람들이 그 유언 집행자가 되었다. 루이-나폴레옹은 통일된 독립 이탈리아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으며, 비스마르크는 자기 식으로 독일을 변혁하고 헝가리에 일정한 독립을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영국 공장주들에게는 인민헌장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없었다.(선집6,384)
영국에서 공업 자본가들의 이러한 지배의 결과는, 처음에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공업은 회복되고 현대 공업의 이 발원지에서도 전대미문의 속도로 확장되었다. 1850년부터 1870년까지의 20년 동안의 생산의 엄청난 비약이라든가 수출입, 자본가들의 수중에 축적되고 있던 부, 거대 도시에 집중된 인간 노동력 등의 압도적 숫자들에 비하면, 증기와 기계 이전의 모든 거대한 창조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 진보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10년마다 반복되는 공황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공황은 1857년에도 있었고 1866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후퇴는 지금은 반드시 겪지 않을 수 없는 또 결국에는 또다시 본궤도로 돌아가는 자연적이며 불가피한 현상으로 인정되게 되었다.(선집6,384)
그러면 이 기간 동안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어떠하였는가? 일시적으로는 광범한 대중을 위한 개선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개선은 방대한 실업 예비군이 유입되고 노동자들이 새로운 기계에 의하여 계속 구축되고 또 오늘날에는 농업노동자들 역시 기계에 의하여 더욱더 구축되어 이주하고 있기 때문에 번번이 다시 과거의 수준으로 되돌아가곤 하였다.(선집6,384)
지속적인 개량은 노동자계급 중 보호받는 두 부류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 중 첫 부류는 공장 노동자들이다. 이들을 위하여 적어도 비교적 합리적인 표준 노동일이 법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건강상태는 상대적으로 회복되었고 정신적 우월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정신적 우월성은 그들이 한 장소에 집결되고 있는 관계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들의 처지는 1848년 전보다는 확실히 개선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그들이 일으킨 파업 가운데 십중팔구는 생산을 축소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공장주들 자신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당신들은 공장주들로 하여금 그들의 공장 제품이 전혀 팔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데 동의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들로 하여금 파업을 일으키게 하여 보라. 그러면 자본가들은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공장을 폐쇄할 것이다.(선집6,385)
둘째는 대형 노동조합이다. 이것은 성인 남자의 노동만이 사용되거나 또는 그러한 노동이 지배적인 노동 부문의 조직이다. 여기에서는 여성 노동과 아동 노동의 경쟁도 기계의 경쟁도 지금까지 그 조직적 역량을 타파할 수 없었다. 기계공, 목공, 소목, 건축 노동자의 경우와 같이 그들은 기계 도입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그들의 처지는 1848년 이래 의심할 바 없이 현저히 개선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지금까지 15년 이상이나 고용주들이 그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고용주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노동자계급 중에서 귀족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비교적 안락한 처지를 강요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또 이 처지를 그들은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레온 리바이씨와 기펜(그리고 또 어리석은 루요 브렌타노)씨의 모범적인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 특수하게는 영리한 개개의 자본가들에게 또 일반적으로는 자본가계급에게 매우 착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들이다.(선집6,385)
그러나 대다수의 노동자대중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의 빈곤과 생활 불안의 정도는 과거보다 더 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지금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심한 편이다. 런던의 이스트엔드는, 정체된 빈궁과 절망의, 실업을 당했을 때에는 굶주림의, 취업했을 때에는 육체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의 부단히 확대되어 가는 늪지대가 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대도시에서도 소수의 특권적인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사정은 같다. 그리고 소도시들과 농촌 지방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동력의 가치를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격에 한정하는 법칙과 노동력의 평균가격을 일반적으로 이 생활수단의 최소 한도로 저하시키는 법칙, 이 두 법칙은 노동자들을 차륜 사이에서 눌러 으깨는 자동기계의 불가항력적 힘으로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다.(선집6,385-386)
즉 이것이 1847년 이래의 자유무역 정책과 20년 간의 공업 자본가들의 지배에 의하여 조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에 전환이 있었다. 사실 1866년의 공황에 뒤이어 1873년 경에 경미한 단기간의 활황이 있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는 않았다. 사실 1877년이나 1878년에 있으리라고 예상되었던 완전한 공황은 없었다. 그러나 1876년 이래 공업의 모든 주요 부문은 만성적인 정체 상태에 있었다. 완전한 파국도 없고 또 파산의 전후에 우리가 당연히 믿고 있던 장기간의 호황기도 없었다. 죽은 듯한 침체, 모든 사업 부문의 모든 시장의 만성적인 범람, 이러한 것이 우리가 벌써 거의 10년 동안이나 경험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면 이 원인은 무엇인가?(선집6,386)
자유무역 이론은 다음과 같은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영국이 농업적 세계의 유일한 대공업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가정이 완전히 그릇된 것임을 사실들은 밝혀 주었다. 현대 중공업의 조건인 증기력과 기계는 연료 특히 석탄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석탄은 영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있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 미국, 심지어 러시아에도.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사람들은 단지 영국 자본가들의 큰 명예와 부를 위하여 아일랜드의 굶주린 차지인이 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계를 위해서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영국이 거의 한 세기 동안이나 향유하여 온 공업 독점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되고 말았다.(선집6,386)
그런데 영국의 공업 독점은 영국의 현존 사회제도의 초석이다. 이 독^점이 계속되고 있던 기간에도 시장은 영국 공업의 증대하는 생산성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였다. 그 결과 10년마다 공황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로운 시장이 날로 드물어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맨체스터의 면직물, 스탠포드셔의 도기, 버밍엄의 금속 제품 등으로 가득찬 문명이 콩고 강변의 흑인들에게까지 강요되고 있다. 만약 대륙의 상품 특히 미국의 상품이 부단히 그 양을 증대하면서 유입된다면, 만약 세계에 대한 상품 공급에 있어서 지금도 영국의 공장들이 차지하고 있는 부당한 몫이 해마다 줄어든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 만병 통치약인 자유무역이여, 대답하여 보라!(선집6,386-387)
이것을 지적하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1883년에 사우스포트에서 있은 영국 협회의 회의에서 경제 분과 부장 잉글리스 팰그래브씨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언명하였다. ‘영국이 큰 사업 이윤을 얻던 시대는 끝났으며 각종 대공업 부문의 발전은 정지 상태에 들어 갔다. 영국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가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결말은 무엇이겠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성장하고 확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세계시장에 대한 상품 공급에 있어서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부당한 몫이 단순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금 정체와 빈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본의 과잉,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 노동자의 과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해마다의 생산 성장이 아주 정지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급소인 아킬레스건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생활조건은 부단한 확대를 필요로 하는데, 이 부단한 확대가 이제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다. 매년 영국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국민이 산산조각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산조각날 것인가.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멸망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가?(선집6,387)
그러면 노동자계급은? 심지어 1848년부터 1868년까지 상업과 공업이^ 전례없이 확대되었음에도 그들은 그러한 빈곤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당시 그들의 광범한 대중은 기껏해서 그 처지가 일시적으로 개선되었을 뿐임에도 얼마 안 되는 특권을 가진 보호받는 소수만이 지속적인 이익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 눈부신 시기가 마침내 끝났을 때, 현재의 답답한 정체 상태가 더 악화될 뿐만 아니라 이 악화된 치명적인 부진 상태가 영국 공업의 지속적이고 정상적인 상태로 될 때에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선집6,387-388)
진리는 이렇다. 영국의 공업 독점이 지속되는 한 영국 노동자계급은 어느 정도 이 독점의 이익에 참여하였다. 이 이익도 노동자들 사이에 극히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대부분은 특권을 가진 소수가 차지하였다. 그러나 광범한 대중도 때때로나마 일시적으로 한 몫을 얻곤 하였다. 바로 이것이 오언주의의 몰락 이후 영국에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독점이 무너지면 영국 노동자계급은 그 특권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그들 전체가−특권적이며 지도적인 소수들도 포함하여−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에 처하게 될 날이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가 영국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선집6,388)
여기까지가 1885년의 논문이다. 1892년 1월 11일에 쓴 영어판 서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였다. “1885년에 내가 본 사태에 대한 이 서술에 나는 거의 첨가할 것이 없다. 오늘날 ‘실제로 사회주의가 영국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대량으로 나타났다. 각종 색채의 사회주의, 의식적인 사회주의와 무의식적인 사회주의, 산문적인 사회주의와 시적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사회주의. 이러한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실로 이 무섭기 짝이 없는 사회주의가 존경할 만한 것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벌써 사교계의 옷을 입고 응접실 의자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류사회의 다음과 같은 저 무시무시한 전제군주의 구제 불가능한 변덕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부르주아지의 여론. 그리고 이것은 지난 세대의 우리 사회주의자들이 그 여론에 대해서 언제나 품고 있던 경멸이 정당하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새로운 징조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선집6,388)
그러나 내가, 부르주아 집단들 사이에서 물을 타서 멀겋게 만든 사회주의를 자랑거리로 삼는 이러한 일시적인 유행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일반적으로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달성한 진보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은, 런던의 이스트엔드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끝없는 빈곤의 소굴은 더 이상 6년 전과 같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아니다. 이스트엔드는 그 마비된 절망 상태를 일소하였다. 이스트엔드는 소생하여 ‘신조합주의’의 고향이, 즉 광범한 ‘무학(無學)’ 노동자 대중의 조직의 고향이 되었다. 이 조직은 많은 점에서 숙련 노동자들의 낡은 조합의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낡은 조합은 그것이 창립되었을 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낡은 조합은 임금제도를 기껏해서 조합원들의 이익을 위하여 약간 완화할 수 있는 영원히 주어진 최종적인 사실로 간주한다. 이와는 반대로 새로운 조합은 임금제도의 영원성에 대한 신앙이 이미 심하게 동요하던 때에 창립되었다. 그 창립자와 후원자들은 의식적인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감정에서 우러나온 사회주의자였다. 새로운 조합에 망라되고 그 힘을 이루고 있는 대중은 노동자계급의 귀족들에게서 멸시 받던 험하고 무시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헤아릴 수 없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아직 처녀지와도 같아서 비교적 안락한 ‘낡은’ 조합주의자들의 두뇌를 혼란시키고 있는 이전의 ‘존경할 만한’ 부르주아적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조합이 전체 노동자 운동의 지도권을 틀어쥐고 부유하고 거만한 ‘낡은’ 조합을 점점 더 끌고 가는 것을 본다.(선집6,389)
이스트엔드의 사람들이 큰 과오를 범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선배들 또한 그러하였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들을 경멸하고 있는 공론적 사회주의자들 또한 그러하다. 위대한 계급도 위대한 국민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오류의 결과를 통해 배우는 것보다 더 빨리 배우지는 못한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가능한 모든 실책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이스트엔드의 각성은 현 세기 말(fin de siécle)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성과 있는 사건의 하나이다. 나는 살아서 이것을 보게 된 것을 기뻐하며 자랑으로 생각한다.”(선집6,389)
내가 육 개월 전에 앞의 글을 쓴 때부터,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다시 큰 전진을 하였다. 수일 전에 끝난 의회 선거는, 두 관변 정당인 보수당과 자유당에게 이제는 제3의 당 즉 노동자당이 있다는 것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정식으로 통고하였다. 이 노동자당은 지금 막 생겨났다. 그 성원들은 아직 전래의 각종 편견−부르주아적, 낡은 조합주의적 그리고 심지어는 공론적 사회주의의 편견−을 일소하는 데 매달리고 있는데, 이는 마침내 그들이 그들 전체의 공통된 지반 위에 결집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단결시키고 있는 본능은 이미 대단히 강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서 전대미문의 선거 결과를 가져왔다. 런던에서는 두 사람의 노동자(제임스 케어 하디와 존 번즈), 그것도 공공연하게 사회주의자라고 언명하는 사람이 선거에 나섰다. 자유당은 이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후보자를 한 사람도 감히 내세우지 못하였다. 그리고 두 사회주의자는 의외의 압도적인 다수표로 당선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자유당원들과 동맹을 맺은 초면의 노동자 후보들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무참하게 낙선하였다. 이제까지의 이른바 노동자 대표들 즉 노동자의 속성을 자신들의 자유주의 대양 속에 기꺼이 익사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노동자의 속성을 용서받은 자들 중에서, 낡은 조합주의의 가장 주요한 대표자인 헨리 브로드허스트는 8시간 노동일을 반대한다고 언명하였기 때문에 보기 좋게 낙선하였다. 글래스고우의 두 선거구와 솔포드의 한 선거구와 기타 많은 다른 선거구에서도 독자적인 노동자 후보들이 낡은 두 당의 후보들에 대항하여 출발하였다. 그들은 패배하였으나 자유당의 입후보자들도 패배하였다. 요컨대 대도시와 공업 지역의 많은 선거구에서 노동자들은 낡은 두 당과의 온갖 연계를 결정적으로 끊었으며 그리하여 일찍이 어떠한 선거에서도 거두지 못한 그러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선거권을 자신의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한다면 자신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고 또 느꼈다. 거의 40년 동안이나 영국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있던 ‘대자유당’에 대한^ 미신은 깨어졌다. 그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또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기만 한다면 자신들 노동자들이야 말로 영국에서 결정적 힘이라는 것을 적절한 예를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1892년의 선거는 자각과 소망의 시작이었다. 그 나머지 일은 대륙의 노동자 운동이 돌보아 줄 것이다. 의회와 지방의회들에 이미 많은 대표를 가지고 있는 독일인과 프랑스인은 더 많은 성과를 가지고 영국인들의 경쟁심을 십분 조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멀지 않은 장래에 새 의회가 글래드스톤 씨를 상대로 하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글래드스톤 씨도 새 의회를 상대로 하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될 때, 그때에는 영국 노동자당도 충분히 조직적으로 되어, 교대로 정권을 잡으며 바로 이를 통해 부르주아의 지배를 영구화하고 있는 낡은 두 당의 시소 게임을 즉시 끝장낼 것이다.(선집6,390-391)
1892년 7월 21일, 런던
MEW 22, 316-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