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부 전선에 가다(5)
나는 건봉사에 남아 있다는 무명용사 위패를 확인하러 절에 들어갔다 나오다 할아버지를 만났다.
건봉사는 입구 사명대사 흉상이 있다. 임진왜란시 승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차를 세우기에 내려서 이유를 물었더니 할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지도도 건봉산 나오는 지도를 한장 달라고 하였다.
마침 점심 시간이 되어 우린 할아버를 모시고 간성에 가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식사를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무속인의 초보단계이신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말 순수한 무속인으로 영이 들어 올 수도 있는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너무도 진지하여 그후로도 서너차례 나는 만나서 관련 사실을 들었고 이를 위해 건봉사에 출입하는 나이 많으신 분들은 많이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건봉사도 6.25전쟁 당시 대부분 타버려 피해를 받은 곳이고 군부대가 그나마 땅을 다 차지해 초라해진 모습(조선시대에는 100분의 스님이 기거했던 거대한 사찰임)으로 민통선 북방에 방치(?)해 오다 통제선이 뒤로 밀리며 옛모습을 1980년대부터 찾기 시작했다.
특히 영도스님(지금은 입적하심)이 재직시 비약적인 세 확장을 가져 왔으며 지금은 누구나 찾아가 기도와 관람을 할 수 있다. 이곳은 국내 사찰중 유일하게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곳으로 적멸보궁이 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하고 신라시대에 양산 영축산 통도사, 평창 오대산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정선 태백산 정암사, 인제 설악산 봉정암을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은 아니지만 강원도 고성 8경의 하나로 입구에 커다란 금강송이 압권이며 대웅전 앞에 있는 능파교는 보물로서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알아보는 중요문화재도 있다.
이런 곳이 서산 사명대사게서 승병을 일으켜 임진란시 왜군에 맞섰던 승보사찰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의 비극속에서 다시 적군의 은거지를 없애버린다는 논리로 불타버렸으니... .
절 뒤로 계곡을 따라 오를 수도 있지만 초행은 위치 찾기가 힘들고 건봉령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어렵지만 3개의 소 계곡을 넘어 제보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한 여름이라 무척 더워 흘러내리는 소 폭포에서 자연스레 목용아닌 목욕도 하며 거의 반나절을 뒤져서 위치를 찾아냈다.
"20여개의 올망졸망한 가묘들이 쓰라진 현장의 기억을 보듬고 있었다."
말하신 고추장 단지 잔해도 널여 있다. 주변을 보니 개인호도 몇군데 있다. 앞을 보니 건봉사 위치가 확연하게 투영더ㅐ 온다. 이곳에 왜 군인이 아니 백골부대원이 죽어갔을까.
할아버지의 말인즉슨 북으로 침투해 들어갔는데 성공하여 그쪽의 높은 지휘자 목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그들 특공대가 다라 들어와 휴식을 취하던 이곳에서 모두 죽여버리고 다시 북으로 도망쳐 갔다는 이야기다.
요즘 같으면 북파공작원이라고나 할까, 전쟁중에 남강을 건너 상호간에 이런 무력 충돌을 해야만 했던 쓰라린 현장의 모습은 세월속에서 많은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우린 이듬해에 병력을 투입하여 일대를 발굴해 보았으나 유품은 일부 발굴 했으나 유해는 찾지 못했다. 그러니 고스란히 그 제보는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분명 바로 위로 올라서면 중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했던 장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지역임은 틀림 없었다. "영혼이시어 편히 잠드소서!"
여기서 어느 제보자와 동행한 탐사내용을 알아보면 이 답에 어느정도 근접해 갈 수도 있다.
2009년 5월에 제보자 두분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한 분은 탄광업자이고 한 분은 운전을 전담하는 공생관계의 70대후반의 사장이었다. 집은 충남의 홍성이 고향으로 일제시대부터 아버지가 주요 돌을 캐는 탄광업을 하여 가업을 이어 받았으나 군부대와 거래하다 망해버렸다는 사장이었다.
사연은 이러하다.
탄광은 잘은 모르지만 땅의 귀속권과 발견되는 광물의 귀속권은 다르다고 한다. 그런 탄광사업으로 일제시대에는 돈 많이 벌었는데 해방 되면서 북한지역의 채굴권이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려 돈 많이 주고 계약한 아버지는 화병에 술만 드시는데 거기에 전쟁이 발발하여 아예 희망마져 끊기자 그만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배운게 도둑이라고 본인도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탄광업에 뛰어들어 한때는 서울에 빌딩도 몇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왔다.
"간첩이다. 불어라. 이런 지도 어디서 났어?"
"동부지역에서 히토류(?)채굴권을 갔기 위해 당시 군사령부 방첩대장, 군사령관등 군 수뇌부와 협상으로 계약이 성사 단계에 이르고 그 조건으로 지금 휴전선에 철책 작업을 위한 지뢰제거와 벌목을 해 주기로 하고 장비를 투입하여 건봉사에서 건봉령, 건봉령에서 오소동, 오소동에서 소까치봉-대까치봉에 이르는 철책도로를 닦고 벌목을 하고 지뢰를 제거하고 김신조사건(68년도1월21일 청와대를 기습하여 국가원수를 죽이려 침투한 무장간첩단, 당시 지금의 서대문구 북한산 서북쪽 자하문까지 침투했다 식별되어 대부분 사살되고 김신조씨는 체포되어 살아나 지금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이후 전방 철책을 보강하기 위한 사업을 하게 된다.
"지금은 다 털어놓고 말할 수 있다며 정말 큰 비밀을 얘기했다?"
당시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로비를 하는데 그 대상이 바로 수뇌부와 기관원이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6:4의 비율로 나눠 먹기로 하고 아름들이 소나무를 현장에서 켜서 서울로 빼내 돈으로 바꾸고 기암괴석을 빼내고 천연 수종의 나무나 식물들을 보이는대로 수집하여 처분하고 잘도 나가던 사업이 어느날 갑작스레 중단 된다.
세상에는 지금이나 그때나 비밀은 없는 법이란다. 누군가 내부에 있는 놈이 밀고를 하여 조사를 받게 되는데 참 무서운 것이 죄명이 무슨 무단 광물채취나 수렵행의라면 그래도 좀 거시기 하지만 아니 "간첩으로 방첩대에 조사를 받게 되는데 무려 한달을 아무런 체포영장이나 법적인 행적권도 없이 군 수사기관에 구금시켜 놓고 간첩으로 몰아 붙혀버렸단다.
"군사지도에 이렇게 공사구간이라고 표시해 주더니 이것이 군 작전지도라며 간첩이란다."
아니 본인들이 지도에 작업구간을 표시해서 준 것인데 이게 간첩이 가지고 내려온 아군 위치가 새겨진 지도라며 물증이 명확하니 인정하면 정상을 참작하여 사형은 면하게 해 주겠다고 진술서에 서명하라 한다. 그때야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공안정국이니 이제 도니 문제가 아니고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밤사이 긴급 체포되어 가면서 누구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백차에 실려갔다. 요즘도 이런 일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 본다.
가서보니 어딘지 생전 알지도 못하는 지하 어딘가에 끌려와 있고 책상 앞에는 같은 회사에 일하는 몇몇이 쓴 진술서라며 "사장이 가끔 알 수 없는 군인복장의 사람들과 비공식 접촉을 목격하곤 했다"는 식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두가 매소되어 아니 협박에 못이겨 살고자 그들이 써준대로 복필하여 자필 진술서를 낸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부인할 사람이 없다. "변호사가 어딨어, 모두 쌔까만 안경쓴 놈들 뿐이야"
군사령관을 방첩대장을 지역 중앙정보부 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니 어디서 어르신 이름을 들먹이냐고 매질과 발길질만 한다.
정말 기막힌 현실이 본인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살아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 방도를 구할 것이 아닌가. 방법은 간첩이란 진술서에 서명해야 한다. 그러면 정상을 참작해 준다고 하니 믿어야할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고 1년 6개월을 복역하고 나옸더니 그당시 함께 작당한 사람들은 그자리에 아무도 있지않고 오히려 군 계약건에 대한 차압이 들어와 회사는 망했다. 공사를 못했으니 그 벌금을 물으라는 것이다.
누가 이런 말을 믿겠는냐고 하며 한 숨을 쉬면서 사장님이 말을 잇는다.
완전 패인이 되어 고향으로 갔더니 아버지 죽고 어머니 병들고 집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사를 다시 복원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대간다고 다시 인맥을 찾아다녀 조그만 회사를 설립하고 요로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결국 무죄를 선고 받는다. 하지만 이미 그당시 관련된 군관련자들은 모두 제대하여 나이가 다 60이 넘어 더 이상 사회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상태로 다들 변변치 못하게 살고 있었다 한다.
"반달곰이 고진동 계곡에서 목욕하고 새끼들 하고 제주도 넘는 것을 옆에서 봤다."
그때 휴전선 보수공사를 거의 1년가량 하면서 많은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곰도 고진동 계곡에서 만났단다. 혹시나 놀라서 공격할 것을 고려해 접근하지 않고 옆에서 움직이지 않고 지켜봤더니 한참을 그곳 작은 폭포밑에서 놀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생생하다 한다. 그런 어느날 일하는 인부들이 혼빕백산하여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귀달린 뱀(?)이 무너진 건물더미 위에 올라 앉아 기도한다.!"
오소동 계곡은 그리 깊이는 없다. 하지만 이곳의 산들이 평균 800~900m 높이니 계곡의 깊이는 경사도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나타냄으로 사실 이곳에 들어가면 바로 위 하늘만 보인다.
그런데 이 게곡은 물이 흘러 남강으로 내리는데 이 계곡을 따라 오르면 작은 까치봉이나 조소령으로 올라서 건봉산으로 해서 건봉령 향로봉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그런데 이미 이곳은 51년 6월에 우리 국군이 점령한 후에 지금까지 변동없이 휴전선이 그대로 되어있다. 그러니 그당시 북동쪽에 있는 월비산 전투와 351고지 전투가 가장 심하게 진행 되는데 월비산도 우리가 수도사단이 51년 10월 중순에 탈환하여 동년 11월 중순에 11사단에 인계하게 된다.11사단이 11월 중순에 결국 북한군에 피탈당하여 남강너머로 진출하려던 우리의 북진 계획이 좌절하게 되고 만다. 이런 과정에 당연히 소까치봉과 대까치봉까지 때로는 적이 기습 침투하기도 하고 우리도 남강을 넘어 들어가 적의 후방을 교란하게 된다.
그러니 언제 싯점은 모르지만 오소동 계곡에 엄청큰 금강송으로 터치카를 만들어 침투부대들의 은거지로 활용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을 인민군이 기습하여 수류탄을 투척하고 화염방사기로 지지고 완전히 수면상태에서 모두다 죽어 버리는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살아난 사람이 없이 모두 전사해 버렸으니 누가 보고서를 쓸리도 없고 굳이 실패한 작전을 알리려 하지도 않했을 것이다.
2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무너진 벙커위로 나무들이 자라고 숲이 생기어 그 형체마져 알아볼 수 없게 되니 그곳을 지나는 수색대원들에게는 그저 전쟁의 탄흔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데 휴전선 철책을 보강하고 지뢰 매설을 다시 하는 과정에 차가 들어가 벌목도 해야 되는 마당에 길을 넓히다 보니 소로 옆에 숲속에 건물 잔해가 있어 뭔가 하고 공사 인부가 수풀을 헤치고 바라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귀달린 누런 구렁이가 앉아 있는게 아닌가... .
"얼마나 사람을 기다리고 그러다 다시 구렁이로 환생하여 한 세상을 바라본 영혼이여!"
그러니 기갑하고 도망쳐 나와 작업 현장에 와서 알리게 되고 대원들이 몇몇 나사사 그 실체를 확인하러 몇일을 잠복까지 했단다. 정말 그런 뱀이 있었다고 한다.
나라 위해 명령을 이행하려 했던 용사님, 그들이 백골부대였다. 죽어도 명령을 지키는 불사조의 정신으로 남강을 넘나들다 장렬히 전사했지만 누구하나 찾아와 주지도 않고 흐른 세월 어언 70년이 된다.
지금도 철책밑으러로 조금만 내려서면 그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우린 그곳을 찾으러 실제 함께 동행하여 그곳 근처에 갔다 왔다.지금 남방한계선에 물려 있어 안전상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곳을 찾으려 이곳저곳을 탐사하는데 꿩마저도 도망치지 않고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 본다. 한번도 보지못한 인간들이 나타났으니 우리가 동물원의 사람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검은 바위 위에는 독사가 빙빙 몸을 감고 있으면서 우리가 모르고 그곳을 지나쳐도 그저 조용하게 미소지으며 바라만 본다. 신기한 큰 동물들이 나타난 것이다.(?)
자연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곳이 동부 전선이다. 비무장 지대에 들어가 351고지 바로 밑에서 총안구 밖으로 보이는 그 소총의 위력이 엊그제인데 이렇게 차로 또는 걸어서 과거 철책공사 구간을 탐사하는 우리는 행복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 사장은 이런 제보 아닌 제보도 하고 싶었지만 아마도 히토류 광맥을 눈으로 확인하려 했던 것 같다. 들리는 소문으로 세계 최대 매장량이 이곳 남북한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사장과 나는 그후로 한두번 더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어느날 나는 혼자 휴일에 건봉사를 찾았다. 종교적 이유도 있겠지만 뭔가 이곳에 무서운 비밀이 있을 것같은 예감이 나를 이곳으로 안내 했다. 버스를 이용하여 이곳에 오는 시간은 기다리는 정도를 고려하니 아침 첫차로 간성에 와 절에 오니 오전 11시가 되었다. 법당을 나와 부처님 치아사리를 마침 스님이 친견토록 한다고 하여 친견하고 점심 공양을 하였다. 6.25전쟁에 관련된 이 절과의 내력을 물었으나 원하는 답은 없었다. 다만 그때 절이 완전 다 타 버렸다는 이야기와 많은 적군과 아군 군인들이 근처 일대에서 죽어갔고 페허가 된 절을 처음 찾았을 때는 주변ㄴ에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다는 원론적인 내용만 들었다. 특히 부도탑이 많이 있는 초입의 좌측으로 올라가면 개인호가 많고 탄피나 파편, 수통, 철모들이 꽤나 많았으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등공대(신라시대 신도들이 기도하여 부처님세계로 올라 갔다는 설화같은 이야기가 있는 곳)에 오르는데 좌우측은 철조망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좌우측 그 철조망 속을 보면 개인호가 살아있고 도중도중에 교통호 흔적도 살아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한 10여분 들어가 등공대에 서면 큰돌로 석종처럼 만들어진 부도탑같은 곳에 총을 맞은 흔적이 명확하게 남아 있어 이곳도 전쟁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나와 나는 다사 서울로 가려 버스를 티려는데 왠 중년 여인이 나를 보자고 한다.
그래서 함께 자리하여 간성으로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동행자가 되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가 만났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 그리고 탄광업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정말 무시무시한 세상이다.
"그 노인들 만나지 마세요, 탄광업자 사기꾼이니 조심 하세요."
하고픈 이야기를 물어보니 정말 그날 내가 왜 그곳에 가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우선 할아버지 할머니 관련 이야기는 나한테 제보한 그곳은 자기가 먼저 현몽으로 알아내서 절에 출입하는 사람들 입소문을 타게 되었는데 마치 본인들이 찾은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다는 비판적 이야기와 항ㄹ먼니는 무당이라며 조금 있으면 굿하라고 할거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두번째 탄광업자는 완전 사기꾼으로 나를 이용하여 뭔가 얻으려는 속셈이 있다며 너무 쉽게 협상을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절의 내막은 본인이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당시 영도스님(지금은 입적하심)을 한 20년 함께하고 있는 신도라며 별별 이야기를 나에게 한다.
그러더니 그날 밤에 영도스님이 갑작스레 입적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나는 다시한번 그 절을 찾기로 하고 어느날 갔는데 다시 거기서 이 여인을 만났다.우연인지 뭔가 나에게 주는 암시인지 몰라도 우연은 아닌듯 싶은데 섣불리 예측을 말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실화같은 것이 아닌 실제 이야기로 지금도 그 의문은 항상 내 머리속을 헤집고 있다.
탄광업자는 누구며 할아버지는 누구고 이 여인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더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것같은 느낌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난 그 후로는 탄광업자의 전화를 받지 안했다.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연락을 주시고 본인 아들이 서울에서 대 기업의 중견간부로 있다하며 연락처를 주시기도 했다.
그러다 이지역 발굴유해 영결식에 갔더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와 있고 그 아들 되는 분도 와 있었다. 상호 인사를 나누고 시기 끝난 후에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 한구의 유해라도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란 판단이 섰지만 어쩐지 자꾸 멀어지고 싶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 여인은 어떻게 내가 만난 사실을 알고 잇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탄광업자가 왜 이과장님을 만나 함께 탐사도 하고 별별 이야기를 다 했는데 그 후 연락이 없었나요?"
"한두번 전화로 제안을 해 오기는 했지요, 그건 말하기 곤란하고... ."
"5 : 5로 나누어 갔자며 뭔가 타협이 있었을 것인데 아닌가요?"
"지금은 곤란 합니다. 이 이야기가 나가면 또 무슨 소동이 날 수도 있어요. 이정도에서 끝내지요."
"참 흥미있는 사건의 구성인것 같으면서도 뭔가 하나 빠진 느낌인데... ."
우린 다시 현장을 나와 간성 터미널로 향했다. 여기서 버스로 나와 김실장은 서울로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