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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너더리통신 84/180504]“굿뉴스” 생질녀들의 임신
5월이다. 역시 5월은 계절(季節)의 여왕(女王)임에 틀림없다. 연초록 잎들이 온산을 물들인다. 야리야리, 연하디 연한 나뭇잎들이 햇살에 비치어 반짝인다. “야, 참, 정말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눈이 씨-원하다. 그 밑에 돗자리 깔아놓고 장수막걸리 한잔 마시며, 마음에 조금도 거스름이 없는 막역(莫逆)한 친구와 수담(手談)이라도 나누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는 현실이 무단시 짜증이 난다. 연달아 피어나는 만화방창(萬化方暢) 봄꽃의 향연도 좋지만, 온산이 붉게 물드는 만산홍엽(滿山紅葉) 가을도 좋지만, 밤새 흰옷으로 갈아입은 뒷산의 독야청청(獨也靑靑) 겨울도 좋지만, 나는, 나는 왠지 작년보다, 아니 그 재작년보다 이 신록(新祿)의 계절이 좋아라. 갈수록 좋아라. 아, 나이가 들어가는 때문이리라.
게다가 5월은 샐러리맨(시한부여서 더욱더)으로는 최상(最上)의 달이지 않는가.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 22일은 부처님 오신 날. 공식적으로 쉬는 ‘빨간 날’들도 많다. 이러한 때, 우리 대가족 내 누이들에게 ‘좋은 소식’이 잇따라 더욱 좋구나. 큰누이의 ‘참한’ 딸내미가 지난해 1월 결혼하고, 2월엔 둘째누이의 ‘야물딱진’ 딸내미가 질세라 결혼을 했겠다. 그런데, 한두어 달 사이로 회임(懷妊)을 했다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막내 외삼촌이 글로나마 축하해주려 자판을 두들긴다. 이건 누가 뭐래도 진짜 경사(慶事)다. 서른이 훌쩍 넘어도 독신(獨身), 비혼(非婚) 어쩌고하는 노총각 노처녀들이 즐비한. 요즘같이 희한하게 돌아가는 세상, 신랑 평균연령이 30을 넘긴 지가 오래라던가? 또한 결혼을 했어도 애를 낳지 않는 커플이 수두룩하다던가(2016년 신혼부부 118여만쌍 중 35.5%인 42여만쌍이 비출산).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러는 것일까? 아지 못게라. ‘인구절벽(人口絶壁)’ ‘출산절벽(出産絶壁: 2017년 35만7천여명 출산. 출산율 1.05명으로 역대 최저기록)’ ‘이혼홍수(離婚洪水)’라는 용어가 횡행하는 수상한 세월, 겁나는 세상이 아니던가? 1대 1이 만났으면 최소한 2가 되어야 ‘생산성(生産性.productivity)’의 원리에도 맞지 않겠는가? 그게 어찌 선남선녀(善男善女), 그들만의 탓일까? 한 치 앞도 대책없는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을.
이러는 판에, 내 생질녀들이 더도덜도 아닌 ‘딱 맞는 나이’에 제 짝궁을 만나고, 또 1년만에 임신을 하였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여 그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고맙게 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몇 달만 있으면 달덩이같은 애기가 둘이나 생긴다. 내가 2년 전 체험해 봐서 안다. 눈도 못뜨던, 강보(襁褓)에 싸인 손자녀석을 안았을 때, 또 하루하루 무럭무럭, 토실토실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 즐거움, 이건 숫제 희열(喜悅)이 아니었던가. 하여, 큰 애한테 불쑥 말해 버렸다. “이것으로 네가 할 수 있는 효도(孝道)는 다 끝났다” 하지 않아서야 할 말인가? 모르겠다. 지금 심정도 그때와 변함없으니. 핏줄 잇기야말로 최고의 효도인 것을. 아들이나 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보고 고리타분하다고 말하지 마라. 역사(歷史)가 별 거라더냐. 대(代)을 잇는 것이 역사가 아니더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최근에 들은 이야기 한 토막. 나와 동갑내기 배드민턴 여성회원이 손자 자랑을 하다, 당신의 시아버지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채 의식불명으로 돌아가셨는데, 마침 손자가 태어났다고 말하자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핏줄에 대한 본능이 죽음을 초월할만큼 강하다는 것을 그때 진하게 느꼈다고 했다. 큰아들은 둘째를 낳고 싶어한다. 이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 생각인가. 그런데, 말처럼 만만치 않은 현실의 벽이 기다리고 있다. 누가 키울 것인가? 둘조차 낳아 기르기가 어려운 삶에 어쩌지 못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보니 안타깝다. 그렇다고 우리가 키워주겠다고 '호언장담'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정부당국에 그 해답을 묻기로 하자.
어린이날을 잊어버리고 산 세월도 제법 되는데, 생각해 보니 내일이 어린이날. 이제 막 세 살 된 손자의 선물을 사자. 문구점을 가거나 백화점을 가도 예사로 안보이는 게 아이들 코너이다. 광화문 교보빌딩의 대형 글판 문구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튀어오르는 몸/그 샘솟는 힘은/어디서 오는 것이냐” 참말로 시(詩) 한번 야무지게 썼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김광규 시인의 시 ‘오래된 물음’의 일부란다. 대체 아이들의 그 끝없이 '샘솟는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냐’. 내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바다. 그들은 바이탈(vital) 그 자체이다. 생동감(生動感), 생명(生命), 그 실체를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더냐.
지난 4월 28일 새벽, 그 전날의 ‘빅 뉴스’에 내가 왜 그렇게 전율(戰慄)을 하며 좋아했을까?를 문득 생각해 봤다. 물론 통일(統一)과 남북한의 평화(平和)를 목마르게 갈구(渴求)해온 것은 사실이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한반도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라는 말에 의심쩍없이 환호(歡呼)했던 것은, 나의 아들, 특히 손자(孫子) 때문인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아, 내 손자가 사는 세상은 전쟁(戰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더란 말이다. 춤을 출 정도로 좋더란 말이다. 그래서였구나. 다른 때보다 내가 더 흥분(興奮)했던 것은. 알고 보니, 이것이 물보다 진하다는 핏줄 소관이로구나. 자는 아내를 깨워 이 ‘깨달음’을 말하니 피-익 웃고 만다. 아무래도 좋다. 내 아들과 손자 사는 세상(물론 내가 산 세상도 전쟁은 없었지만)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은 없다는 것이 이제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약속(約束)’이 된 것이다. 내 손자가 스무 살이 되면 징병(徵兵)이 아닌 모병(募兵), 직업군인시대가 되리라. 암, 아무렴. 그렇게 되어야하고 말고.
우리 누구라도 한 소절만 들어도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몇 개나 될까?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의 <고향의 봄>, ‘나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의 <어머니의 마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애국가> 등이 있겠지만, ‘날아라 새들아/푸른 하늘을/달려라 냇물아/푸른 벌판을/오월은 푸르구나/우리들은 자란다/오월은 어린이날/우리들 세상’의 <어린이날 노래>는 보지 않고도, 눈을 감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나도 혼자 힘차게 <어린이날 노래>를 불러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손자와 남의 손자 그리고 우리의 손자들을 위하여. 나의 지인은 딸 셋에 아들 하나를 연달아 낳았다. “왜 그렇게 많이 낳았느냐”고 물었더니 “애들을 넷을 낳으니 대가족집안이 최소 10년 동안 모이기만 하면 웃음꽃이 핍디다”라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하며, 나의 기를 죽였다. 그렇다. 이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아이들이 재롱 앞에서 인상쓸 자 누구리요? 아이들은 언제나 천사(天使)인 것을.
이제 곧, 우리 집안에 또 천사 두 명이 태어난다. 천사 한 명에 세 집안(본가, 외가, 친가)에 웃음꽃이 핀다. 고몰고몰 낮은 포복, 엉금엉금 높은 포복을 하더니, 어느새 아장아장, 겅중겅중, 성큼성큼 걷는구나. 그러고는 말문이 트인다. “엄마” “아빠” “하삐” “할미”. 흐미-. 이제 곧 끝말잇기도 조손(祖孫)끼리 할 수 있으리라. 세상은 함박꽃이다. 모란꽃이다. 계절의 여왕, 5월에 곧 태어날 생질녀들의 아이들을 기다리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