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의 글로벌 무역중심, 영파 쌍서도(寧波 雙嶼島)
1. 영파 쌍서도: 500년전의 세계무역센터의 소멸
500년전, 명황조는 가장 엄격한 해금(海禁)정책을 실시했다. 왕직(王直)의 해적무장밀수집단이 경영하던 영파 쌍서도(현재의 주산육횡도)는 그러나 전세계적인 무역의 중심지였다. 유럽과 일본에서 들어오는 백은이 쉬지않고 이 곳으로 운송되어 왔고, 중국의 비단, 자기 및 차와 교환하여 갔다. 당시의 쌍서도는 포르투갈인들만 1200명이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학자들은 "16세기의 상하이"라고 부른다. 전세계의 상품이 여기서 교환되고, 중개되고 집산되었다. 태주(台州) 사반도(蛇蟠島)는 일찌기 쌍서도의 분부(分埠, 예하 부두)였다. 당시 유럽은 증기엔진을 개발하기 200년전이었고, 일본은 66개국이 서로 다투고 있었으므로, 가정연간의 명왕조는 전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제국이었다. 1548년, 절강순무 주환(朱紈)은 대군을 이끌고 쌍서도를 파괴하였다. 해상무역에 집착하던 포르투갈인들은 사반도를 거쳐 남쪽으로 옮겨 복건성의 오서항, 월항에서 계속 왕직 집단과 무역을 했다. 장주부근은 다시 새로운 무역중심이 되었다. 이후, 명왕조는 쇄국의 해금정책을 쓰면서, 포르투갈인들은 다시 광동의 주강구(珠江口)로 옮겨갔다. 도지휘사 황경은 뇌물을 받고,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자리잡도록 허용하고, 무역에 종사하도록 했다.
500년전의 중국은 일찌기 명실상부한 세계무역중심이었다. 만일 당시의 명나라 정부가 쌍서도를 공격하여 소탕하지 아니하고, 국문을 열고, 해금정책을 포기했더라면, 중국의 압도적인 무역우세를 이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고, 중국의 세계무역중심지위는 아마도 오늘날까지 500년간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편전쟁이후의 모든 민족의 재난도 아마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강희제가 대만을 수복한 후, 일찌기 해금정책을 포기하였는데, 말년에 다시 해금하였다. 같은 시대의 제정러시아 피터대제는 열심히 통치하여 미친듯이 해외무역과 공상업을 추진했다. 이때로부터 영국이 대포로 중국의 대문을 연 것이 겨우 1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은 글로벌화과정에서 자신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고, 강력한 지위를 보유할 기회를 영파 쌍서도에서부터 가졌으나, 마침내 강희제 만년의 해금정책으로 기회는 사라졌다. 5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찌기, 중국인들은 글로벌화의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었고, 중국은 세계재부의 중심에서 이처럼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2. "감합무역(勘合貿易)"에서 무장밀수
개방의 대문이 점점 닫혀가는 명나라초기이후, 조정은 해금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했고, 동시에 괴상하고 유한한 조공감합무역(朝貢勘合貿易)을 시행했다. 즉, 외국상인은 "사신"을 따라 중국에 와서 시박사(市舶司)는 그 물건을 '공품(貢品)'으로 하여 조정에 조공으로 바치고, 중국측에서는 이 천조위의(天朝威儀)를 앙모하는 외국인에게 상품을 하사하였다. 무역의 규모, 이윤, 효율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가정초의 3년에 한번 조공을 바치고, 매번 3척의 배에 200명까지 올 수 있도록 제한했다. 나중에 일본상업무역사절단간에 "쟁공지역(爭貢之役)"이 발생하면서 조정은 중일감합무역을 중단해버린다. 같은 시기에 왕직 집단은 무역장벽을 타파하고, 무장밀수로 해외무역에 나선다. 왕직은 일본에 20년을 머물고, 사업이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는 평호(平戶)를 기지로 해상을 누볐고, 명나라군대를 연달아 격파했으며, "휘왕(徽王)"으로 불리웠다.
이시기에 왕직은 휘상(徽商)의 전통적인 규범을 받아들여, 일본에서 크게 발전했다. 일본역사에서는 왕직을 "대명국의 유생"이라고 적고 있다. 왕직은 일본의 언어와 문자를 습득하고, 일본의 상품시장을 연구하며, 신의로써 이익을 취했다. 왕직의 휘하에는 일부 일본인들도 왕직의 명을 받들어 일하면서, 장사의 기술을 배웠다. 성의로 손님을 대하고, 신의로 화물을 거래하며, 의로써 이익을 취한다는 "동방상인"의 정신적인 풍모를 형성했고, 일본상인의 모범이 되었다. 오늘날의 일본에서는 화책, 서적, 만화와 게임소프트웨어등 여러 형식으로 왕직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평호에는 왕직의 고거가 남아 있어, 사람들이 관람하고 있다.
3. 핵심인물 왕직, 휘상에서 휘왕으로
500년전의 이 대외개방논쟁중에서 관건적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왕직이다. 그는 명나라 가정연간의 휘주 흡현사람이다. 역사서에는 왕직을 "어려서 협객이었고, 강건하고 지략이 많았으며 베풀어주기를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왕직은 일찌기 휘주의 관습에 따라 장사에 나섰고, 광동으로 가서 큰 배를 만들어 유황, 비단, 면을 일본, 태국, 서양등의 국가에 운송판매했다. 대외무역으로 왕직은 많은 돈을 벌었다. 명나라 가정제때 "조그마한 배도 바다로 나갈 수 없다"는 해금정책을 실시하고 관부는 무역을 금지시키고, 그리하여 어민과 무역상인들은 살길이 없게 된다. 중국연해의 각지에서는 무장밀수활동이 벌어진다. 왕직은 영파 쌍서도에서 허동(許棟)집단의 상선들을 장악한다. 절강순무 주환이 소탕작전을 펼칠 때, 이광두는 체포되고, 허동 형제는 도망한다. 왕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강절해상무장집단의 수령이 된다.
1550년, 왕직은 바다를 안정시키고, 비적을 소탕한 공로를 내세워 정부에 해금(무역금지)정책의 완화를 요청하나 조정의 기습과 포위공격을 받는다. 왕직은 포위망을 뚫은 후 일본으로 도망한다. 역량을 결집하여 2년후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연해 상인들의 지지하에 연안의 마을을 공격하여, 강절일대에 위명을 떨친다. 왕직은 정해왕이라고도 하고 휘왕이라고도 불렀다. 관군은 왕직의 무리를 어찌하지 못하여, 절직("직"은 안휘, 상해 일대) 민광에서 왕직은 활약했다. 장경, 주왕충, 양의의 세 총독은 모두 직위해제되었다. 비록 이때는 해금을 한지 오래되었지만, 대외무역은 무장밀수의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4 . 왕직의 피살로 개방의 문은 굳게 닫혀버리다
가정 34년(1555년) 명왕조는 왕직무장집단과의 교전중에 계속 실패하고, 세번이나 총독을 바꾸게 되자 책략을 변경하게 된다. 그리하여 왕직을 회유하기로 한다. 신임 절민양강총독인 호종헌(胡宗憲)은 조정의 명을 받아 계획을 짠다. 호종헌은 옥중에 갇힌 왕직의 노모와 처자를 풀어준다. 그리고 후하게 대접한다. 동시에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어 왕직에 글을 내리고 초무(招撫, 귀순하도록 회유)한다. 왕직은 신중하게 생각한 후, 조정에 귀순할 것을 결심한다. 사람을 보내어 호종헌에게 통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글에서는 명나라 조정이 해금을 해제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고 시장을 열어 통상하도록 요구한다.
여러차례의 협상을 거쳐, 왕직은 마침내 1557년 9월 하순 수천의 병사를 이끌고 일본에서 배를 타고 귀국한다. 그리고 주산(舟山)의 잠항(岑港)에 정박한다. 곧이어 전당총독부에서 귀순하게 된다. 호종헌은 예로써 왕직을 대한다. 이후 상소를 올려 왕직을 사면하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이 기간중에 일부 중신은 이미 안면을 바꾸었다. 호종헌을 격렬하게 탄핵하고, 왕직의 뇌물을 받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하였다. 호종헌이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왕직을 내놓게 된다. 왕직은 체포되어 옥에 갇힌다. 1559년 12월 항주의 관항구(官巷口)에서 참수된다. 서광계는 왕직이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왕직의 유언은 "나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양절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까 걱정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5. 호종헌 : 개방논쟁에서 또 하나의 원혼
호종헌(1512-1565)은 휘주 적계 사람이다. 가정연간에 관직이 병부상서, 철성총독, 태자소보에 오른다. 임지에서는 현지의 권세가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스스로 청렴하며 공적인 일을 우선시했고, 법에 맞게 사건을 처리했다. 북국변방을 정돈하는데 수차례 공을 세웠고, 번왕을 치리하고 억울한 사건을 풀어주는데 노력했다. 호종헌은 널리 인재를 모았다. 서문장, 척계광, 유대유등이 모두 그가 기용한 사람들이다. 그는 학문이 깊고 깊이 생각했으며, 여러권의 시문상소글을 남긴 것외에 <<주해도편>>을 편찬했고, 명나라때의 중일관계, 각성에서 왜구에 대항한 내용, 용병, 수성, 소탕과 초무, 시장과 연해방어형세등을 논하고 상세한 그림을 붙였다. 이 책은 당시 중국이 해상강국으로 성장할 것을 바라고 쓴 것이다.
호종헌은 조정이 왕직을 이용하여, 해상무역을 합법화하면, 해적은 소탕하지 않아도 스스로 없어질 것이고, 해상비단길을 다시 열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이는 명나라의 강대한 생산력에 의지하여 대외무역을 통하여 국력이 계속 발전하고 세계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책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긴 안목의 주장은 명나라 왕조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종헌은 왕직을 귀순하게 한 후 사면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았고, 어쩔 수 없이 왕직을 내놓았으며 왕직은 죽음을 당하였다. 결국 동남해안의 왜구의 화는 더욱 가중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정의 말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큰 잘못도 저질렀고, 호종헌은 배신하였다는 악명을 얻었다. 호종헌은 권력자들에 의하여 계속 탄핵받았고, 다시 하옥되었으며,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세상의 무상함을 깨달은 후 <,주구가>>를 지어 간신들을 통박한 후 자살했다. 두 천재의 죽음은 당시의 시대적인 비극이었다. 호종헌의 이후에 천재적인 장수 척계광도 우울하게 죽었고, 천재문인 서문장은 미쳐서 스스로를 파괴시켰다. 명나라 중기의 조정부패로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억울한 사건이 줄을 이었다. 그것은 왕조몰락과 천재도살의 시대였다.
6. 왕직의 공과논쟁
왕직에 대한 평가는 사학계에서 포폄이 일치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견해는 왕직이 원래 해외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으로, 무역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것만으로도 그의 팽창하는 욕심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오해려 해적이 되어 정치적인 야심을 길러갔으며, 공공연히 명왕조에 대항하였다. 왕직의 부하들은 출신이 각양각색이어서 그는 중국대륙의 일반백성, 깡패, 지식인을 다 모았을 뿐아니라, 일본사무라이, 상인, 낭인까지도 그 수하에 거두어 들였다. 부정적인 견해는 왕직이 상인에서 해적으로 바뀌었고, 해적에서 왜구와 결탁하여 환난을 초래한 민족의 패류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견해는 왕직은 우수한 상인이고, 초기의 중일간의 경제 및 문화교류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그는 나중에 "무장밀수"의 길을 걸었지만, 이것은 명왕조의 해금정책과 신의를 지키지 않는 악착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몰린 것이라고 본다. 소위 '왜구와 결탁'이라는 것은 실제로 바다로 도망친 일부 일본인들이 왕직의 부하로 일하였던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의 친일파들이 일본인들에게 고개숙이고 일본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였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해외무역은 중국에 세계로 나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고, 왕직은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적극적인 세력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이 핵심적으로 부딛치는 것은 왕직을 "상인"에서 "해적"으로 변모시킨 동인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있다. 중요한 점은 해금 및 이로 인한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