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컨스터블의 ‘건초마차’
건초마차는 컨스터블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서퍽의 플래포드에 있는 스타투어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은 작품 속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컨스터블의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방앗간이 강가에 있다. 그림의 작은 냇물은 스타투어 강의 초입에 물레방아 용 도랑으로 만든 얕은 여울로 마차가 지나는 그림이다. 떨어진 곳에 건초더미들이 보이므로 건초를 싣는 마차로 추정한다.
이 그림은 더운 여름 오후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189cm에 이르는 대작으로 1821년에 런던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제작했다. 1824년에 파리의 살롱에 출품하여 들라크로와를 위시한 낭만주의 화가의 호평을 받았다. 컨스터블도 풍경화를 그린 낭만주의 화가로 분류한다. 유년시절을 보낸 스타투어 강의 주변 풍경을 많이 그리므로 그의 그림은 그의 자서전적인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영국화가 존 컨스터블은 무성하게 우거진 초록빛 풍경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비평가들은 컨스터블의 작품을 마치 풀위의 이슬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건초마차는 화가가 세부묘사를 아주 정성들여서 하였다. 마차를 타고 있는 소년이 스패니얼 종으로 생각되는 강아지를 부른다. 낚시꾼은 보트 밑으로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화면의 앞쪽에는 짐마차의 바퀴자국으로 생긴 홈이 보이고 왼쪽 편의 집에는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에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컨스터블은 20년 동안이나 화가로 일해왔지만 아직은 명성이 높지 않아서 자신의 고향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이 작품으로 파리 살롱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컨스터블의 거대한 이 작품은 완성하는 데 몇 개월이나 걸렸다. 특히 세부 묘사에 공을 많이 들였다. 컨스터블은 작품의 구도에 만족할 수 있도록 전체적인 스케치는 물론 각각의 장면에 대해서도 다양한 스케치를 하고, 습작을 했다. 건초마차도 여러번 수정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의 이미지를 웅장하고, 아름답게 윤색하여 인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비해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평범해 보인다. 수문, 거룻배, 선박 건조 등을 아주 세세하게 묘사함으로 농촌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이 때문에 평론가들은 컨스터블의 그림에서 주제로 선택한 것을 당황스러워 했다.
컨스터블은 특정의 장소를 기계적으로 그대로 옮겨 놓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풍경 안에서 기후의 변화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했다. 1830년에 쓴 에세이에서 그의 예술적 목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풍경 위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그 일반적인 효과 뿐아니라 특정한 어떤 날, 어떤 시간, 그리고 햇빛, 어둠 등을 기록합니다. 또 쏜 살 같이 흘러가는 시간, 영원불멸하며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부터 포착되는 짧은 일순간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컨스터블의 이러한 생각은 반 세기 되에 나타나는 인상중의 화파에 영향을 주었다. 컨스터블은 또한 수면이나 나무 위를 비추는 햇살이 반짝거리는 효과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흰 물감을 사용하는 기법을 실험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기법을 ‘눈송이’라고 조롱했으나 다른 풍경화가들은 이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또 하나는, 컨스터블은 스케치와 그림으로 처음으로 결합시키려 시도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을 하지만 비평가들은 그런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함으로 현장에서 그린 것이 아니고, 시도를 하였으리라고 평가한다.
컨스터블은 자연스런 그림을 그렸지만 사실주의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풍경을 우리 눈에 익숙하게 전문적으로 표현했지만 그의 밑그림은 도덕적 감정과 에술이란 열망 때문에 언제나 수정했다.(수정을 했다는 것은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예술적으로 잘 느껴지도록 그렸다는 뜻이다.) 풍경화는 도시인이 시골에 대한 향수심리로 많이 찾았다. 따라서 도시인이 요구하는 시골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컨스터블은 주문받은 대로 그리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주문자의 요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컨스터블은 서퍽 주에서 태어났다. 서퍽주는 컨스터블이 화가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목가적인 풍경화를 그리게 해준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