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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타자들>> 니졸데 카림. 이승희 옮김 민음사
이졸데 카림은 다원화 시대 종교 무대에서 모든 신앙인은 개종자라고 하였다. 다원화 시대에서 찌그러진 자아들은 문화 무대에서는 어떤 활약을 할까? 문화를 좁은 의미가 아니라 광의로 대해야 한다. 사회의 공기나 분위기나 유행 혹은 관습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오늘 쓰기가 무척 싫고, 햇빛도 좋으니 나의 잡다한 감상을 잔뜩 푸념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나의 이야기는 충분히 했고, 더 이상 보태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1인칭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 자아라는 좁은 감옥이 답답하고 좀스러울 때가 있다. 이제부터 문화 무대에서의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지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제 4장는 문화 무대- 근본주의의 저항이다. //다양성이 큰 사회에서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로만 형성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경계 짓기를 통해서도 형성된다//
덜 다양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에서 구할 수 있지만, 더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도 경계 짓고 구별하고 싸워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모른다. 이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제한되고 빼기의 정체성이라 그런다고 한다. 이런 상황의 좋은 영향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기적을 낳을 수도 있다고 한다. 각 개인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안다면 공동선을 지향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다른 방향은 근본주의라고 하는 듯하다. 저자는 이를 이중화의 관점으로 관찰해야 한다고 한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다원화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따라서 오늘날 다원주의에 대한 종교적 저항이다.-----종교가 하나의 확신에서 하나의 정체성이 될 때, 종교는 더 이상 그 너머가 아닌 자기 정체성을 지향한다// 이런 단순화는 늘 위험이 따르지만,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보자. 전통의 종교가 나를 버리고 예수나 부처의 삶이나 원리를 따른다면, 다양성 사회의 종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받고 인증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를 믿고 나는 완전하게 되었다든가? 예수 안에서 행복해졌다. 뭐 이런 표현이 아닐까? 영화 밀양에서 살인자가 종교를 믿고 스스로 그 종교 속에서 완전한 용서 혹은 자기 자신를 셀프 용서하고 완전한 정체성을 추구해 버린다. 주위를 약간이나마 주의를 가지고 관찰해 보면 우리는 변화가 아니라,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음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를 //자기 스스로 선택한 전통//, //종교가 스스로 선택된 정체성// 등으로 표현한다. 세속화는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선언이 아닐까.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가족도 개인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 수단을 가지고 스스로 전통을 선택해 버린다는 의미다. 저자는 //완전히 근대적이고 세속적인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그들은 7세기로 뛰어든다//고 쓴다. 이런 특징의 근본주의는 다양성의 대한 저항이라고 한다. 다양성에 대항하여 자신의 완전한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시도다. 스스로 감옥을 선택하여 그 속에 들어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열쇠를 밖으로 던져버리는 모양새다. 그리고 근본주의 종교나 단체는 그런 행동에 해석을 하여 숭고하거나 위대한 결정으로 둔갑시켜 준다. //개인에게 정체성을 제공하는 부름은 거대한 전체와 개인들을 결합하고,----개인들에게 모든 관점에서 ‘의미’를 제공한다// 어쩌면 근본주의란 정체성과 의미를 갈망하는 개인들의 짠하고 안쓰러운 광경이 아닐까도 싶다. 역설적으로 의미와 정체성이 무력해지고 쪼그라진 자아를 참아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누가 이익을 얻는가?
//종교적 근본주의는 다원화에 대해 소수자 편에서 나온 방어다. 방어의 또 다른 형태는 주류 사회의 것이다// 소수자는 양의 개념이 아니다. 서구에 비해 이슬람은 소수자이며, 다원화는 서구 사회의 발명품이다. 서구와 그들의 제조품인 다원화에 저항하기 위해 이슬람 사회는 종교적 근본주의를 꺼내든다. 이슬람 사회는 종교적 근본주의로 방어한다면, 주류 사회, 즉 서구나 유럽은 다원화에 어떤 방어 기제를 가지고 있을까? 여기에서 주류 사회를 좀 더 폭 넓게 적용해봐도 될 듯하다. 유럽의 주류, 미국 백인 중산층, 한국 중산층, 가부장적 가장들 등으로 확장해 볼 수 있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저자는 한국의 중산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중산층의 세습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사실 이들은 사회의 변화에 저항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원화가 중산층의 세습을 위협하고 있고, 좀 더 논의를 확장해 보면 중산층이 다원화에 저항하여 어떤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지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반근대의 선포자들은 근대의 토대 위에서 반응하도록 강제하고 있다(저자가 인용한 헬무트 두비엘에 의하면)// 가부장들은 이제 반가부장에 저항하기 위해 고리타분한 가족주의를 들이밀지 않는다. 근대의 언어로 저항한다. 어떤 장애인 시설이 자신의 거주 지역에 들어서면 반대자들은 자신의 부동산 가치가 하락하기에 반대한다고 하지 않고 교통이니, 안전이니, 문화 따위를 들먹이며 반대한다. 대구의 어떤 동네에서 이슬람 사원 반대가 거세다고 하는데, 종교를 반대한다가 아니라, 문화 따위의 이유를 내세워 저항한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테러를 사용한다면, 주류 사회는 문화 무대에서 저항한다고 한다. 다원화 사회의 특징인 불안정화, 명료함의 상실은 이익일까? 손해일까? 해방일까? 위협일까? 미국 백인 중산층이 현재의 지위 상실이 다원화와 세계화의 결과라고 하여 트럼프를 선택하고, 한국의 주류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를 다원화에서 찾고 저항한다는 의미라고 읽을 수 있다.
//다원화된 주체는 우연적일 뿐 아니라 우연을 체험하는 주체다. 이와 같은 우연성의 체험이 심리 분석뿐 아니라 철학이 가르치듯이 모든 주체성은 우연이라는 인식론에 부합한다 할지라도, 개인은 우연성의 체험을 인식이나 진리가 아니라 모두가 대처해야만 하는 어려운 줄타기로 경험한다.----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완전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뿐이다//
이것을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이지만, 그리고 우연성을 인식하지만 줄타기를 하기는 피하고 싶다. 주류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관계와 더 많은 소유와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줄타기에 내몰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즉 불완전한 상징이 아니라 완전한 상징을 얻어 줄타기를 피하고 싶지 않을까? 저자는 문화 무대에서 대립 관계를 완전한 상징과 불완전한 상징의 대립으로 보고 있다. 즉 어떤 이들은 불완전한 상징을 능동적으로 다루겠다는 결정이자, 다원화를 가속화하려 하고, 어떤 이들은 완전하고 확고한 상징을 세우고, 다원화를 저지하고자 한다는 의미 같다. 내 식대로 표현해보면 무의미의 의미를 받아들일지, 무의미에 저항하여 완전한 의미를 얻고자 노력할지다.
종교에서는 근본주의라면 문화에서는 본질주의라고 한다. 문화 본질주의의 특징은 //상징은 변화하고 유통된다. 상징의 본질주의화는 바로 이 본성을 지워 버리려고 한다.// //동어 반복이다.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다. 다른 정의는 용납되지 않는다//의 무한 동어 반복. //문화는 문화다, 내 것은 내 것이며,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동어 반복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방어책이다// 이를 폐쇄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폐쇄적 정체성은 ---중심의 상실 이후 배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배제를 통해서만, 배척을 통해서만 온전한 소속을 재구성하거나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다// 이는 공격적 정체성이며//부정이고, 분열에 대한 방어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이며, 불완전한 정체성에 대한 방어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이다.//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다가 독립 선언이 아니라, 사실은 상실을 잊기 위한 처절한 외침일지 모른다. 내기 확고한 가부장으로 가족의 중심에 있다면 굳이 내가 가부장이라고 동어반복을 할 이유가 없다. 백인 중산층이 유럽의 주류가 중심에 당연히 위치하고 있을 때 내가 중심이다고 굳이 주장할 이유가 없다. 어떤 사회가 주류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친절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어떤 친절한 사람이 자신의 이익이 침범되자마자 친절의 위선이 벗겨진다. 중심을 상실한 자들이 다시 중심으로 회귀 할 방법은 무엇일가. 그것은 배제나 배척일지 모른다. 흑인과 이민자와 여성들을 배제한 백인 중산층 남자로 이루어진 미국, 강남이라는 지역을 만들어 돈의 장벽으로 진입을 막고 배제하고,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성처럼 둘러싸서 타인들을 배제하고 배척하고,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타자들을 배제하고 배척하면서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이라는 주술을 동어반복 한다. 백인 중산층에게도 인권이 있다. 강남인도 피해자다. 우리는 소수자다 등등. 자기 자신은 자기 것이다는 구호는 배제와 배척의 언어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교환을 원천 차단한다. 물론 이 모두는 이중적이다. 다양성으로 교환을 확장하기도 폐쇄하기도 한다.
//소수자 집단의 전략은 봉쇄이며, 누구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주류 사회에서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전략이 된다// 그래서 소수자 집단은 집단 자살을 하고 탈출을 막을 장치를 촘촘히 하고, 주류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철의 장막 혹은 돈의 장막으로 막고 명품관의 출입을 통제하는 모양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 둘은 배제와 배척을 통해 정체성을 획득한다.
한쪽에선 근본주의란 이름으로 봉쇄하면, 다른 쪽에서 본질주의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출입문을 굳게 잠근다.
//우리는 그 문제를 풀고 싶지 않다. 우리는 거부한다. 울타리를 치고, 장벽을 세우며, 철조망을 쳐서 변화의 반대편에 설 것이다. 이것은 향수가 낳은, 경계와 명료함에 대한 열망이다. 외부적인 방어인 동시에 내면적인 방어다. 내면이 불안한 주체를 완전한 주체로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생각까지 그렇게 고정시킬 필요가 있을까? 다른 것은 이익과 관계하지만 생각은 돈이 들지 않는데 꼭 그래야 할까? 완전히 순진한 나의 생각이었다. 생각이 바뀌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벌벌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돈이 많다는 삼성의 이건희는 한 때 이런 말을 했다. 마누라 빼고 다 바꾸자. 사실 이 말은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삼성의 지배와 이씨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지 바꿀 수 있다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즉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꾼다. 순전히 개인적 느낌이지만, 여행을 하거나 책읽기를 하는 이유는 변화와 우연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대 변화지 않기 위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즉 변하지 않기 위해 모든 변화를 받아들인다. 뭐라도 할라치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철의 장막을 쳐버린다. //경계와 명료함에 대한 열망// 다원화 사회는 경계를 허물고 명료함을 제거한다고 한다. 그런 다원화 사회에서 경계를 확실히 하고 명료함을 얻는 방식은 배제와 배척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도, 미국과 유럽의 주류 사회도 사실 같은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가? 한국 사회의 트로트에 대한 과대한 유행은 실향에 대한 향수, 전통에 대한 향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 다원화에 대한 피로를 풀고자 하는 열망은 아닐까?
반다원주의자들의 분리 전략은 교묘하다 //첫째-우리 안에 모두가 포함되어 ‘이방인’이 없도록 ‘우리’를 매우 넓게 구성하는 것을 허락한다. 즉 친절하게 보이도록 한다. 둘째-경계지움이 내면적 분리가 아니라 외면적 분리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를 넓게 구성하고 친절하다는 의미는 다원화를 받아들이기가 아니라, 적대를 가장자리로 옮겨 놓으려는 전략이다.//결합하는 존재로 등장하고, 결합된 것처럼 보이는 매우 격렬한 분리다// 즉 우리를 이렇게 확장하고 친절한데 이 결합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 때문이다? 중국이 ‘우리’를 만들기 위해 오랑캐를 변방으로 옮겨 놓으려는 전략? 겉으로 보기에 변방은 지리적 외면적 분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적 분리일지 모른다. 내면적 분리를 은폐하기 위한 전략이 아닐가. 변방에 있기에 ‘우리’가 아닐 뿐이다. 단지 시험이라는 외면적 사건 때문에 너희는 비정규직이다 이면에는 내면적 분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동탄에 혹은 강남에 산다. 단지 행정구역명이 다르다. 화성시민이 아니라 사실은 동탄 시민으로 분리하려는 내면적 전략을 외면적 분리인 것처럼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는가?
/이들은 경계선을 긋는 사람들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나 서구의 주류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계 긋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경계선 바깥에 서 있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경계를 거부한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저항은 변화하지 않는 ‘진정하고 순수한’ 사회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는 진실에 대한 거부와 부인이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는 위험한 힘이다. 현실을 자신들의 환상에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어떤 환상에도 치우치지 않고, 아니 어떤 환상도 없이, 경계도 없이. 고향도 없이, 불안한 정체성과 우연성에 몸을 맡길 수 있을까? 다원화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전략과 윤리는 이런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걸까? 한 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고 참담하다. 이 질문은 사실은 잃어버린 중심을 찾으려는 암중모색이었거나, 안쓰러운 시도이자, 현실을 잊어버리거나, 현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몸짓이자, 변화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건가?
//정치 전선은 포괄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과,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
포괄적인 ‘우리’를 원한다면 모두에게 같은 권리를 주어야 한다. 배타적인 ‘우리’를 원하는 이들은 오늘도 경계짓고 배제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