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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주목한다 / 상처
― 김연동, 낙관(시인동네, 2018) ― 김옥중, 빈 그릇(미디어민, 2018) ― 유자효, 황금시대(책만드는집, 2018) ― 임채성, 왼바라기(황금알, 2018)
김남규
0. 상처 입을 수 있는 가능성
인간 이성 중심 혹은 주체 중심의 세계관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재론할 필요가 없다. 대상과 세계를 동일자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윤리적이지도 않지만, 미학적이지도 않다. 자연과 동일화할 수 있었던 그 옛날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리라. 총체성이 무너진 지금 여기에서 서정의 가능성을 논한다는 사실 자체가, 서정의 불가능성에 맞닥뜨린 우리의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리하여 예술과 문학의 장에서는 ‘타자’의 개입 혹은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데, 타자의 출현은 여러모로 고통스럽다. 나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나에게 무조건적인 의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서정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아름다움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의해 길가에 피어난 한 송이 꽃에서도 발현되지만, (목적 있는) 이타성에 의한 우리의 실천에서도 발현된다. 우리의 유전자 혹은 우리 생존-기계는 기본적으로 ‘이기적(selfish)’인데, ‘희생(sacrifice)’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성을 초월할 수 있다. 시몬 베유(Simone Weil)에 따르면 미(美)는 우리에게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중력과 은총)을 요구한다. 우리는 미 앞에서 측면의 자리만 차지할 뿐이다. 따라서 대상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내려놓고, 우리는 타자에게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한다. 타자는 폭력적으로 온다. 느닷없이, 예고 없이, 다짜고짜, 내 입 속의 빵을 빼앗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속수무책’ 당해야 한다. 이것을 ‘상처-입을 수 있는-가능성’이라고 부른다면, 우리의 글쓰기는 ‘상처 입을 수 있는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처에서 작품이 발생하고 상처는 이내 사라지지만, 우리는 작품의 미세한 틈새에서 무한하게 열린 상처(타자)를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처가 우리를 보고 있다. 아주 미세한 상처가 우리에게 무한함의 안쪽을 들여다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상처가 무한함을 덮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봐야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라는 덮개, 상처가 덮고 있는 상처 안쪽의 무한함을 봐야 한다. 비밀을 품고 침묵하고 있는, 그러나 우리를 보고 있는, 바르트의 ‘풍크툼(punctum)’처럼 상처는 우리를 찔러 들어온다. 풍크툼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고, 우리를 공격한다. 상처가 상처를 입히는 상황. 독자도 상처 입을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니, 작품과 저자, 독자 모두 ‘상처-연대’를 자처하고 있다. 아름답기 위해서다. 하여, 우리는 김연동, 김옥중, 유자효, 임채성의 작품집을 통해 상처를 입고자 한다. 상처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을 보려 한다.
1. 슬하—김연동, 낙관
이번 김연동 시인의 시집에는 ‘슬하(膝下)’를 떠나야 하는 시인의 슬픔 혹은 시인의 슬하를 떠난 슬픔이 주된 정조로 흐르고 있다. “낙엽만 떨어져도 쓸쓸함이 몰려오”고 “콧날 시큰 해”오는(「슬하」) 상황에 처한 시인은 슬하의 부재에서 자기의 존재성을 문제 삼는다. 슬픔이 시인에게 선험적 조건이 되어 시인은 슬픔으로부터 자기 존재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픔이라는 기분은 단순히 시인 앞에 있는 어떤 것, 시인이 느끼거나 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인의 존재 양태를 드러내 보이는 근본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슬하’를 복원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어두운 길에 선 듯 문득 소름 돋는 오래된 유골과의 소슬한 재회였다 잊힌 듯, 잊히지 않는 핏줄 붉은 아버지
꿈에서도 아리다던 식민의 못 자국이, 모서리 닳아버린 조국이란 조약돌이 드리운 그늘의 시간 유품인가 당신은
생전의 정신처럼 더없이 맑은 하늘 구천(九泉)이 거기 있어 영혼이 머문다면 앞섶에 물망장(勿忘章) 구절 새겨주고 가시리라
귀를 기울여도 이명만 일어날 뿐, 삶과 죽음의 경계 눈을 열고 오는 소리 서늘한 낙엽이 한 장 경전으로 내린다 ― 한 장 경전(經典) 전문
「용비어천가」의 110장에서 124장까지를 ‘물망장(勿忘章)’ 혹은 ‘무망장(無忘章)’이라 한다. 후대 임금들에게 경계(警戒)의 뜻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핏줄 붉은 아버지’는 시인에게 ‘물망장 구절’로 “서늘한 낙엽” 한 장을 내리신다. 그 낙엽 한 장에는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가 담겨 있다. “죽고 사는 길이 여기에 있듯”(「제망매가」), “어두운 길에 선 듯 문득 소름 돋는/ 오래된 유골과의 소슬한 재회”는 시인에게 있어 시인의 존재가 처해 있는 곳을 적확하게 알려주며, 시인은 ‘죽음 앞에 선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삶의 끝, 자기 가능성의 끝을 외면하거나 무한정 늘리는 것으로 삶에 대한 애착을 보이지만, 시인은 자기 삶의 끝을 가정하면서 죽음을 끌어안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체념 혹은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다. 시인은 죽음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갠다. 그것이 삶이다.
아흔넷 시린 생이 만장처럼 걸려 있는
병상을 돌아 나와 아린 눈물 훔칩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시든 꽃 우리 엄마 ― 「시든 꽃」 전문
죽음은 내가 나의 밖으로 사라지는 유일한 지점이다. 죽음이야말로 타자 중의 타자다. 그래서 죽음은 정돈되거나 질서 지워진 사물들이 아닌, 태초의 사물, 혼돈의 사물, 사물의 근원으로 다가가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으로 사물을 구원해야 한다. 우리는 사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사물의 본질을 오염시키거나 거세시켰다. 우리는 오르페우스처럼 내가 더 이상 아닌 곳, 내가 말할 수 없는 곳으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시인 역시 죽음으로 내려가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시든 꽃”인 ‘우리 엄마’를 부른다. 죽음은 나를 텅 비게 하고, 그 무화의 공간, 비인칭의 세계에서 말을 하는 것은 시인이 아니라 시 자체이므로, 시인은 존재의 영점(zero degree) 혹은 시인을 사라지게 하는 텅 빈 공간(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에 자신이 존재해 있음을 안다. 그곳은 무척 슬픈 곳이지만, 그곳으로 가야‘만’ 사물의 근원을, 시를 만날 수 있다.
이내 겨울이 오면 처방전이 바뀌겠지 까닭 없는 슬픔에도 익숙해진 이마 위로 찬 계절 채비를 하듯 여우비가 지나간다
파도가 밀고 오는 꼬였던 발자국들, 그 흔적 쓸어주던 늦은 가을볕이 등 굽은 어깨를 치며 단풍 진다 서두르네
뉘 모를 보푸라기 다독이는 아내에게 바람에 구겨진 옷 다림질만 시켰구나 아픔을 혼자서 삭인 그 눈물을 몰랐구나
빗금 친 시린 날들 허전한 삶의 뒤끝, 몸보다 마음의 병 깊어가는 시간 앞에 내 은발 기대선 와온 노을빛도 은빛이네 ― 「은빛 와온」 전문
이번 시집에서 가장 명편(名篇)이라 생각되는 「은빛 와온」은 릴케가 말한 ‘세계의 내적 공간(Weltinnenraum)’으로 다가가는 듯하다. 이것은 지상을 초월하거나 고양되어 신에게 다가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 바깥, 세계 바깥으로 나아가 세계 내 존재들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다. 사물과 존재가 ‘와온’에서 자유롭게 만나고 흩어진다. “슬픔에도 익숙해진 이마”와 “찬 계절 채비를 하듯 여우비”가 만나며, “등 굽은 어깨”가 “늦은 가을볕”과 만난다. 이윽고 시인의 ‘은발(銀髮)’은 ‘와온 노을빛’과 만나 어우러진다. 아내에게 “바람에 구겨진 옷 다림질만 시켰”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아픔을 혼자서 삭인 그 눈물”과 만난다. 시인은 그렇게 아내의 본질, 사물의 본질, 삶의 본질과 마주하게 되었다. “허전한 삶의 뒤끝”에서 “몸보다 마음의 병 깊어가는 시간”에 시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죽음은 시인에게 있어서 마지막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 또는 사고가 아니라 시인이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계속 삶에 깊숙이 내재해 있었다. 그러므로 죽음은 시인 실존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죽음은 시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오래도록 살아갈 것이다. 죽음을 삶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 죽음이라는 상처가 아물지도 덧나지도 않고 평생 삶에 새겨 있는 것(tattoo). “겨울이 오면 처방전이 바뀌”겠지만 결코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병(不治病). 시인은 시인만의 고유한 죽음을 살아갈 것이다.
2. 그림자―김옥중, 빈 그릇
김옥중 시인의 단시조집 빈 그릇은 “넘치는 그릇보다/ 빈 그릇이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시집의 첫 작품 「빈 그릇」이 일러주듯이 이미지의 범람 혹은 말-잔치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시인은 빈 그릇이 오히려 바람과 달빛을 담을 수 있고, “청정한/ 저 하늘까지도” 담아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 글쓰기는 그렇게 비우는 일이자 무위(無爲)의 글쓰기이며, ‘무용함의 유용함’을 이번 시집의 시적 전략으로 삼은 듯하다. 따라서 시인은 시인을 보고 있는 풍경, 시인의 눈을 찔러오는 풍경에 주목하고 그 풍경의 틈새 혹은 라캉의 ‘누빔점(point de capiton)’을 본다. 그곳은 의미가 만들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자리가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 알 수 없는 것에 의미를 고착시키려는 시인의 글쓰기-실천은 시인-아닌-곳에 시인이 있음을 알게 한다. 작품은 그저 시인과 독자에게 잠깐 들어오라고 손짓하거나, 혹은 우리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뿐이다.
매끈한 장신에다 서시 같은 얼굴에다
한 귀를 열어 놓고 세상 소식 다 듣더니
조각난 슬픈 사연을 어루만져 꿰맨다. ― 「바늘」 전문
바늘이 지나간 자리, 봉합된 자리는 봉합 전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해야 한다). 만약 봉합이 “조각난 슬픈 사연”을 꿰매는 일이라면, 애초에 사연들은 슬프지 말아야 했고, 조각나지 말아야 했다. 바늘은 그런 곳을 지나가는 일을 천직으로 부여받았으니, 바늘이 지나간 자리는 슬픈 자리, 부정성의 자리다. 시인이 바늘을 보고 작품을 썼건, 바늘이 지나간 자리를 보고 작품을 썼건 간에 그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두 개의 천을 바느질로 접어 안팎을 만들어 누비는 것처럼 기표의 기의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둘을 함께 고정시키는 점은 고정된 의미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누빔점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욕망을 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조각난 슬픈 사연을 보고 있는(보려는) 우리의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신경증자처럼 조각난 슬픈 사연은 우리에게 어떤 증상과 환상을 허락하였는가. 수많은 증상과 환상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글쓰기일 것이다.
한평생 지킴이로 뒤에서만 서성인다
내 눈치 알고 사는 저 녀석이 얄밉다
더불어 푸른 의리는 언제나 손을 놀까. ― 「그림자」 전문
그림자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그림자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림자는 비로소 나에게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어 나에게 ‘보여진다’. 시인은 “한평생 지킴이로/ 뒤에서만 서성”이던 그림자를 “내 눈치 알고 사는/ 저 녀석”으로 부르기로 했다. 그림자를 그림자로 부르기로 하자, “푸른 의리”도 나타난다. 그림자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인지, 나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림자를 고정시키자 다른 환상이 나타났다. 이제 그림자의 본체인 ‘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자와 푸른 의리와의 관계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시인의 자리는 사라지고 그림자와 푸른 의리만 자리에 남았다.
소나무 그늘 아래 바위에 사려 앉아
바람도 걸음 멈춘 새하얀 네 미소가
어둑한 내 가슴속의 그림자를 지운다. ― 「석란꽃」 전문
이제, 시인의 가슴속 ‘그림자’까지 지워진다. 물론, 「그림자」의 그림자와 ‘내 가슴속의 그림자’는 다른 층위다. 전자는 말 그대로 그림자(shadow)일 것이고, 후자는 근심과 불행의 상징물일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본체에서 파생되는 것, 복사된 것임은 분명하다. “바람도 걸음 멈”추게 하는 석란꽃의 “새하얀 네 미소”가 시인 가슴속의 그림자를 지우게 한다. 근심과 불행의 대리물이 사라졌으니, 이제 근심과 불행 이전의 본체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인용된 두 작품에서 본체는 중요하지 않다. 제거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본체 없는 그림자. 부재로서의 현존으로 본체를 증명하려는 그림자. 그림자는 근심과 불행의 본체를 지시한다. 그러나 이제 그림자마저 사라졌으니, 본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질문에 이미 대답이 있다. 이에 따라 그림자에게 본체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시인은 시인 자신-본체의 무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자리가 바로 ‘빈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빈 그릇이라는 형상, 그림자라는 형상은 시인의 형상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인의 욕망을 보고 있다. 그러나 끝내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인의 욕망과 그에 따른 의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쓰는 시인과 모르고 쓰는 시인이 있을 뿐이다. 다만 실패를 알고 쓰는 시인만이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이며, 비로소 시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3. 고요―유자효, 황금시대
유자효 시인의 첫 단시조집 황금시대는 “가슴엔 만단정회/ 내려앉은 만근 수심”이 “그대가 떠난 뒤에도/ 어찌할 줄 모르”(「후회」)는 시인의 애절함이 여러 사물과 사건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감정을 전제로 대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사물과 사건이 시인에게 애절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이 보고자 하는 것은 대상이 시인을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이러한 시인의 응시는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가 말하듯 미지의 대상이 주체에게 틈입하는 일이기도 하다. 릴케에 따르면 ‘보기’를 통해 시인은 시인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동시에 거기에서 부정성 혹은 상처를 만나게 되거나 상처를 입게 된다. 즉, 본다는 것은 다르게 보는 것, 경험하는 것인데, 그것은 앞서 말한 ‘상처-입을 수 있는-가능성’과 조우하는 일(윤리)이다. 그러나 미지의 대상이 우리를 보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전부 반응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사람만이, 특정한 대상에 반응한다. 우리는 그 반응을 흔히 ‘시적 감수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상처와 고통도 함께 찾아온다. 그래서 시인은 늘 슬퍼해야 한다. 말 더 보태서 이 세상 모든 슬픔을 짊어가는 자를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 대신하여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폐가 담장 밑 야생화가 피었다
그것도 그늘진 곳 새하얗게 내민 얼굴
이곳서 종신서원한 그 고독이 슬프다 ― 「야생화」 전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고 아무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시인에게는 “종신서원한/ 그 고독”으로 다가온다. 물론 “폐가/ 담장 밑”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만,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폐가’가 아니라, “그늘 진 곳”이고, ‘야생화’가 아니라 “새하얗게 내민 얼굴”이다. 전자는 쉽게 보이는 것, 학습해야 하는 정보의 영역 ‘스투디움(studium)’이라면, 후자는 절반의 욕구와 절반의 욕망만 작동시키는 ‘풍크툼(punctum)’이라 할 수 있다. 풍크툼은 내가 대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를 찾아오기 때문에 절반의 욕구와 절반의 욕망만 작동시킨다. 더욱이 풍크툼은 대상에 어떤 이름을 붙이거나 정보로 변환시키는 것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정보로 환원시키지 못한다는 것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동일자의 원리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야생화에서 슬픔을 보는데, 그 슬픔은 시인이 명명한 것이 아니라, 야생화가 시인에게 미적 거리를 제공하면서 사후적으로 얻게 된 하나의 ‘정념(pathos)’이다. 그러니까 풍크툼은 어떤 대상을 본 그 즉시 드는 느낌이나 수다(감상)가 아니라, 오랜 고민 끝에, 잠들기 직전, 불면의 끝에 출몰하는 반성과 침묵이다.
때로 내가 고요할 때 들려오는 말이 있다 한 마디가 들리면 전체가 다 들리고 끝없는 시공 속에서 함께이자 홀로인 것 ― 「우주의 말」 전문
고요할 때, 침묵은 말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침묵이 침묵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우리 앞에 나타난다. 충만한 침묵. 우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깊은 심심함’(한병철)을 견디지 못하고, 멀티 태스킹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자신의 고유성과 본래성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망각하려고 비본래적인 것과 먹고 살기 바쁜 세인(世人, das man)의 삶을 추종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다. 상황이 이러하니, “고요할 때” “들려오는 말”은 바로 “끝없는 시공 속에서 함께이자 홀로인” “우주의 말”인데, 이것은 곧 우리가 재현하고 남은 것, 의미 부여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서 ‘잔여’ 혹은 ‘잉여’로서의 의미들이다. 이러한 미지의 것, 끝낼 수 없는 것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시인의 의지를 통해 시인을 비롯한 우리는 은폐된 진실 혹은 진리를 본다. 그것은 잠깐 출몰했다 이내 사라지지만, 그것을 보려는 우리의 태도는 윤리적이지 않겠는가. 침묵은 각자의 방에 있고, 각자의 윤리는 각자의 침묵에 있다.
푸른 하늘 검은 획 가을 까치 한 마리
찌르릉 도끼날에 쓰러지는 나무들
이 사랑 채 다 못 주고 떠나서야 알겠네 ― 「11월」 전문
11월이 주는 허전함과 애상(哀想)을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지만, 이번 유자효 시인의 시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작품 「11월」은 그 중에서도 특별해 보인다. 이시영 시인이 “다리 저는 할머니 한 분이 애기를 업고 나와 행길 가에 서성이고 있습니다/ 곧 들판이 컴컴해질 것 같습니다”(「십일월」)라고 말했다면, 유자효 시인은 “푸른 하늘/ 검은 휙/ 가을 까치 한 마리”로 11월의 맑고 찬 하늘을 명징하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찌르릉/ 도끼날에 쓰러지는 나무들”의 소리로 늦가을의 적막감을 보다 극대화시켰다. 그러한 풍경들은 곧 시인에게 다음의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이 사랑 채 다 못 주고/ 떠나서야 알겠네”. 까치와 쓰러지는 나무들로부터 시인은 사랑을 다 주지 못했다는 후회와 죄책감, 슬픔이 촉발되었다. 이 이미지들을 무어라 부를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시인은 망설이는데, 까치가 나는 하늘과 나무들 쓰러지는 소리가 시인에게 계속 잔여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끝내 말할 수 없고, 말해도 부족하므로 시인이 대상들에게 그리고 타자들에게 주는 사랑은 언제나 미진(未盡)하다. 그래서 슬프다. 그리고 그 슬픔은 고요할 때만 찾아온다. 유자효 시인은 고요 속에서 “소소한 일상들/ 늘 보는 모습들”(「나의 것」)을 오래 노려볼 것이다. 슬퍼도 슬픔을 해야 할 일로 믿는 자에게는 슬픔이 다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 화인―임채성, 왼바라기
임채성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왼바라기는 시집 제목처럼 부정적인 것과 함께 하려는 부정성의 옹호 혹은 ‘부정성에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시인은 “연필과 숟가락은 꼭 오른손에 잡으라고”, “옳은 쪽 바른 손만이 법이고 밥” (「왼바리기」)이라는 ‘아버지-법’에 시인은 “누르면 용수철처럼 튕겨지는 결기”로 대항한다. 마침내 시인은 “그른 쪽 그늘에 숨어 비익조를 꿈꾸”려 한다. 기존의 질서와 이념을 전복하려는 시인의 결기가 대단하다. 가속화된 소통에 반기를 제기하는 것이라면, 으레 돌 맞기 쉬우나, 진실은 언제나 파편적으로 존재하므로 경제성의 원리에 반기를 드는 실천은 ‘언제나’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의 질서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주체의 변증법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개인 스스로가 안티테제가 되지 않으면 결국 고인 물이 썩듯이 동일자의 영원한 악무한 고리를 끊을 수 없다. 따라서 시인은 언제나 부정성과 함께 간다. 물론 이에 따라 발생되는 손해와 상처 혹은 슬픔들이 부정성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비를 몬 손돌바람 갈기 바짝 세운 저녁 잘려나간 우듬지로 거먹구름 흩고 있는 입동의 플라타너스 그 몸피를 읽는다
결별의 낙숫물이 뚝뚝 듣는 거리에서 하릴없이 바라만 보는 먼발치 살붙이들 무젖은 한 겹 껍질마저 휘주근히 벗으며
옹이 밴 지난 이력 얼루기로 그려넣고 눈설레 땡볕마저 나이테에 새겼으리 우산도, 외투도 없이 떨켜만 키운 몸통
쭈글쭈글 접힌 뱃살 울 어매도 저랬을까 여섯 자식 배앓이로 살 트는 줄 몰랐던 나무의 겨우살이가 거스러미로 일어선다 ― 「뱃살무늬를 읽다」 전문
“나무의 겨우살이가 거스러미로 일어선다”는 시인의 결론은, “입동의 플라타너스 그 몸피”와 “쭈글쭈글 접힌 뱃살 울 어매”를 일치시키면서 오는 것이지만, 둘 다 “옹이 밴 지난 이력”에 의한 것이자 “비를 몬 손돌바람 갈기 바짝 세운” 지금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매끄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이 두 대상은 오로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타자(결국 시간의 문제)로 인해 ‘옹이’ 혹은 ‘주름’이 그 고통의 흔적으로 남았다. 그들의 ‘뱃살무늬’는 타자의 틈입에 의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감내한 주체의 소산이기도 한데, ‘떨켜’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떨켜는 잎이나 꽃잎, 과실 등이 식물의 몸에서 떨어져 나갈 때, 연결되었던 부분에 생기는 특별한 세포층으로 식물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미생물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다. 다시 말해, 타자의 침입은 주체에게 항체를 만들어준다. 플라타너스와 울 어매의 삶을 볼 때, 타자의 침입 혹은 (같이 있어야 할 것) 상실은 고통스러웠겠지만, 시인은 그것을 마냥 위로하거나 긍정하지는 않는다. “떨켜만 키운 몸통” 나름의 삶도 인정해야 하고, 그것이 삶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인 역시 그렇게 살 것이다. 옹이 하나 없는 무절(無節) 목재로만 짓는 건축물은 없다.
광고회사 신입 시절 광고주 인사 갔죠 갓 찍은 명함 주며 카피라이터라 했어요 남의 글 베껴 쓰는 일? 복사기냐며 웃대요
식은 커피 다시 끓어도 웃으며 대답하길 코피를 쏟을 때까지 문안 뽑는 일이라고, 오늘도 문안 여쭈러 잠시잠깐 들렀다고
살다보니 복사기가 도처에 있더군요 TV에도 신문에도 서점과 인터넷에도 거리엔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의 사람들
생각까지 복제하는 디지털 카피시대 내 시는 그 무엇을 베껴 쓴 판박일까 붕어 살 한 점도 없는 붕어빵도 그러거니 ― 「카피, 라이터」 전문
시인 자신의 아픈 회고담을 시화(詩化)했다. “남의 글 베껴쓰는 일”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카피라이터’ 시인은 광고주-광고기획자라는 갑-을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본주의사회, 분업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른바 ‘갑질’을 고백하고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이, 자신의 생각이 그들의 조소(嘲笑)처럼 “생각까지 복제하는 디지털 카피시대”에서 “그 무엇을 베껴 쓴 판박”은 아닐까 반성해본다. ‘붕어빵’ 찍어내듯 자신의 글이 그렇지 않은지 반문해보려는 시인은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의 사람들”과 같지 않으려 한다. 시인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남과 다르다는 ‘선민의식’ 혹은 무차별 ‘상대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척 다행이다.
그림자가 길어진다, 낮술에 취한 바다 결 고운 미풍에도 찡그리는 수면 위로 힘겹게 끌고 온 하루 허물어져 내린다
가늘게 들썩이는 네 야윈 어깨 너머 낙지처럼 흐늑이던 핼쑥한 빛의 촉수 잡지도, 놓지도 못한 꼬랑지가 밟힌다
해를 문 불새였다, 내 앞의 언제나 넌 데식은 심방 안에 둥지 몰래 틀어놓고 뜨거운 들숨날숨을 맥놀이로 뛰게 하던
네게로 가지 못해 시나브로 녹슨 말들 날마다 새로 찍는 그 화인 가슴에 묻고 첫사랑 저문 한때가 수평선을 넘어간다 ― 「실안 낙조」 전문
이번 임채성 시집 중에 가장 울림이 있다고 생각되는 인용시는, “첫사랑 저문 한때”를 기억하는 동시에 지금 겪고 있는 시인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낮술에 취한” 것은 바다가 아니라 시인이고, “결 고운 미풍에도 찡그리는” 것은 수면이 아니라 시인일 것이다. “잡지도, 놓지도 못한 꼬랑지” 당신. 당신 앞에서 시인은 언제나 “해를 문 불새”였으나 당신은 지금 여기 없다. 그러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그 시간. 다시 되찾아올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시인은 “네게로 가지 못해 시나브로 녹슨 말들/ 날마다 새로 찍는 그 화인 가슴에 묻고” 글을 써갈 것이다. ‘날마다 새로 찍은 그 화인’이야말로 시인에게는 저주이자 축복일 것이다. 이제, 시인은 상실된 대상의 이미지를 애도한다. 그러나 애도는 영영 실패할 것이지만, 애도하는 과정은 시인에게 글쓰기의 영감(정감, emotion)을 선물로 건네줄 것이다. 시인은 상실된 대상이 부재하나, 그 현존을 글쓰기로 채워나갈 것이며, 그 부정성이 시인의 마음을 끊임없이 격렬하게 운동시킬 것이다.
5. 미의 구원
아름다움(美)은 강제도 없고 욕망도 없다. 자유가 가득한 세계다. 동시에 연약하고 부서지기 쉽다. 비밀을 간직하고 침묵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미적 형식 혹은 미적 판단에 개입하고자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미의 구원은 곧 타자의 구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바르트, 「사랑의 단상」)이라는 바르트의 지적처럼, 우리가 미에 매달릴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무화를 경험해야 한다. 더욱이 타자는 우리에게 틈입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하시오”의 정언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시인은 ‘상처 입을 가능성에의 의지’를 가진 자다. 김연동 시인은 죽음이라는 타자의 몸에 자신의 몸을 포개고 있고, 김옥중 시인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빈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유자효 시인은 고요 속에서 슬픔을 노려보고 있고, 임채성 시인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가고 있다. 모두가 타자로 인한 상처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연대로서 슬픔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미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우리는 저들 대신 슬피 우는 자들이다. 그러면 미가 우리를 대신해 울 것이다.
김남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외 수상. 시집 집그리마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