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리튼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진정한 정의(正義)는
강자 앞에서 강하고
약자 앞에서 약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말은 총보다 세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이
1839년 발표한 역사극
‘리슐리외 : 또는 모략’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1. 개요
전적으로 위대한 사람의 지배 하에서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
Beneath the rule of men entirely great,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에드워드 불워-리튼
보통 문학이나 언론의 영향력을 표현할 때 쓴다.
비슷한 표현은 이전부터 존재한 듯하다.
여기서 말하는 칼은 당연히 무력의 대유이다.
어떤 비유가 적당하든
웬만하면 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문장은
기원전 7세기경
아시리아 설화에 나오는 주인공인
아히칼이 한 말로,
"The word is mightier than the sword.“
(말은 칼보다 강하다.)이다.
또한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작가 유리피데스는
“The tongue is mightier
than the blade.“
(혀는 칼날보다 강하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2. 비판과 반론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람들은
자동화기의 위력을 보지 못한 작자들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맥아더는
그가 살던 당시
무시무시하게 발전했던
화기들의 위력을 보고,
펜으로 표현되는 것들을
무력하다고 느꼈는지
저렇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을 한 맥아더는
펜의 대표자에 의해 망했다(…).
그가 전장에 나가 싸웠던 것들
모두가 펜의 대표자들에 의해
지휘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맥아더의 비판에 대해
반론할 거리는 여전히 있는 셈이다.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해당 국가를 통치하는 수뇌부들은
국가를 운영하는 펜의 역할이었고,
항상 군대같은 무력집단을
아래로 두었다.
그리고 사실 그 칼도 펜으로 만들었다.
다만 쿠데타라는 것을 생각하면,
펜이 칼보다 강한 것은
칼을 펜으로 통제하는 게
가능할 때 이야기일 뿐이다.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소설가 김훈
펜으로 대표되는 문인들 중에서도
김훈처럼 이러한 말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 합니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에 보내는
칼의 경의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영도 소설 피를 마시는 새 중
엘시 에더리
무책임하게 펜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도 있다.
3. 여담
일본의 명문 대학교인
게이오기주쿠대학의
표어이기도 하다.
배트맨(1989년 영화)에서
조커는 이 말을 인용하며
범죄조직과 야합한 부패 기자들을
펜으로 찔러 죽인다.
다크 나이트에서도
조커가 어느 한 마피아 조직원을
책상에 세워둔 연필에
머리를 찍어 죽여버린다.
존 윅에서는
연필 그 자체를 무기로 쓴다.
히프노시스 마이크의 노래 중
ヒプノシスマイク-
Division Battle Anthem-에서
펜과 칼보다
히프노시스 마이크라는 가사가 나온다.
어떤 만화에서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출처는 19세기 영국 희곡
프랑스 파리의 언론사 테러를 비난하는
시위대의 일부가 펜과 연필을 들고 나왔고
희생자들에게 바친 추모 만평들은
펜과 총을 대비시키면서
언론이 폭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상투적으로 사용되곤 한다.
영국 BBC방송은
이 말의 출처를 추적했고
19세기의 영국 작가
에드워드 불워-리튼(1803-1893)이
원조라고 밝혔다.
불워-리튼이 1839년 발표한 역사 희곡
'리슐리외 추기경'을 보면
주인공이 하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리슐리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재위 기간에
재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 희곡에서 암살 음모를 적발했는데도
가톨릭 사제의 신분으로서
적들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를 수 없는 상황이었던
리슐리외는 시중을 드는 하인이
"그렇지만 주인님은
지금 다른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펜은 칼보다 강하네.
칼을 치우게.
국가는 칼 없이도 구할 수 있네"라는
대사를 읊는 것으로 돼 있다.
옥스퍼드인용사전의 부편집장인
수전 래트클리프는
이 표현이 곧바로
시중에 유포되기 시작했다면서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일상적인 말이 됐다고 소개했다.
오늘날 이 표현은
영국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권에서
번역돼 사용되고 있다.
케임브리지 딕셔너리즈 웹사이트는
이 말이 '사상과 저술은
무력이나 폭력보다
사람들과 사건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풀이하고 있다.
BBC방송은
그러나 불워-리튼이 원조라고 해도
언론이 무력이나 폭력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인물은 아닐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인 로버트 버튼이
17세기초에 발표한 저서
'우울증의 해부'에서는
'언어에 의한 일격은
칼에 의한 일격보다 더 타격을 준다'는
말이 사용됐는데
오래전부터 전해진 격언이며
그가 활동하던 당대에도
상투적으로 쓰인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래트클리프 부편집장은
또다른 영국 극작가
조지 웨스톤이
1582년도에 발표한 작품에서
'펜의 일격은 창의 반격보다
고통이 심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기원전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 시인 에우리피데스도
"혀는 칼날보다 강하다"는
말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말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부정적 의미였다는 해석도 없지 않다.
나폴레옹도
언론과 무력을 비교하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생전에 "4개의 적대적 신문사는
1천개의 대검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실제로
이 말을 사용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의 언론관을 반영한 것은 분명하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을 당시
프랑스에는
십여개의 신문사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폐간되고 소수의 신문사만 살아 남았다.
Pen is mightier than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Persuasion is better than force.
설득이 무력보다 낫다.
“Sometimes words can be so concrete
and so real, and therefore so cruel.
Maybe that’s what they meant
when they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때로는 말이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일 수도 있고,
따라서 너무 잔인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펜이 검보다 강하다고 말했을 때
그런 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는 가끔씩 말이
더 잔인하거나 현실적이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며,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표현을 쓰고 있네요!
펜은 칼보다 강하고, 국민은 펜보다 강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타자기는 총보다 강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영상은 펜보다 강하다.
스크린샷은 펜보다 강하고,
sns는 두뇌회전 보다 강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법이 주먹보다 강하지만,
칼이랑 주먹이 펜이나 법보다 빠르더라.
펜은 칼보다 강하고, 키보드는 총보다 위험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종이는 방패보다 견고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여자의 육감은
남자의 확신보다 예리하다.
'칼이 된 말'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연대의 힘'
말이 칼이 될 때(홍성수 지음, 어크로스 펴냄)
중학생 때 보던 '성문기본영어' 비교급 편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펜은 칼보다 강하다.'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멋진 글을 쓰면
세상도 멋져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펜으로 세상을 정의롭게 바꾸겠다는
야망에 들떴을 때였다.
문장 하나가 장래희망에
'기자'라고 적게 했다.
홍성수 교수의 책
'말이 칼이 될 때'를 받아들고
30년 전 나를 흥분시켰던
저 문장을 생각했다.
부끄러워졌다.
'칼보다 강한 펜'을 꿈꿨으나
나의 펜은 그냥 칼이 되어버렸다.
의사의 손에 들려진 칼이 아니라
강도의 손에 들려진 칼,
나의 펜은 그런 칼이 된 것은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반성문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1
2001년 3월 29일이었다.
한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여자 모델이 사실은
'트랜스젠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를 추진했다.
'트랜스젠더'라는 말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합정동의 한 연예기획사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 여자 모델을 인터뷰했다.
다음날 아침신문에
'주민등록번호 790217-1xxxxxx.
그는 여자다'로 시작하는 기사를 썼다.
그 기사로 하리수 씨가
언론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17년 전 그 기사를
다시 찾아 읽어보니 낯뜨거워진다.
기사 전체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호기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고맙게도 하리수 씨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서
트랜스젠더의 법적인
인정 판결을 받아내는 등
한국 사회의 진보에 기여했다.
#2
2009년 기동취재팀장 시절
'다문화가정'에 대한 기획시리즈를 연재했다.
후배가 다문화 가정 출신으로
연희초등학교 회장이 된
한 어린이를 인터뷰해왔다.
후배가 쓴 인터뷰 기사 속 어린이는
지극히 평범한 어린이였다.
'다문화가정 아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어떤 그늘도 없었다.
후배한테 그런 그늘을
기사에 녹일 것을 지시했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을 없애자는
캠페인 기사를 쓰면서
정작 스스로 그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3년 후 이 어린이의 엄마가
우리나라의 첫 이민자 출신
국회의원이 됐다.
바로 이자스민 전 의원이다.
이자스민 전 의원은
일베 등의 인격모독적 공격에도
꿋꿋이 견디며
다문화가정과 이민자의 권리 확대에
힘을 보탰다.
#3
2012년 4월
수원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귀가하던 한 여성이 끌려가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것이다.
처음 국민들의 분노는 경찰에게로 향했다.
피해 여성이 경찰에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전화로 신고까지 했으나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인 오원춘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언론 보도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원인을 '조선족'의 문제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원춘이 몽골에서
도축 일을 했다는 사실까지 가져다가
토막살인의 원인으로 삼고,
조선족들이 상습적으로
장기 밀매를 한다는 것까지 더해
그들을 흉포한 집단으로 그렸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조선족에 의한 흉악범죄' 사례들을 발굴하고
조선족 범죄를 막을 수 있는 방안에 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황해', '범죄도시'같은
영화 속에 그려지는
'중국동포'의 모습은
이런 언론 보도가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주류 언론들은
평소에는 인권 확대를 옹호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듯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너무 쉽게 편견에 무릎을 꿇는다.
외부 압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선정적인 기사'를 위한
자발적인 투항에 가깝다.
중학생 딸의 친구를 살해한
'이영학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언론은 이영학과
그 중학생 딸이 갖고 있었던
'장애'에 집중했다.
그의 정신적 문제,
성적인 일탈행위 등
모든 원인을 '장애'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 태도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확대하고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문제의 올바른
해결까지 방해한다.
올바른 진단이 없으니
올바른 해법도 없는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소수자에게만 머물지 않고
모두에게로 향한다.
▲ 저자 홍성수 교수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표현이란 무엇인지,
혐오표현이 왜 사회적 문제가 되는지,
혐오표현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방법은 없는지
쉽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인식의 지평 위에서
새로운 입장과 시작을 갖게 된다.
여기 저자가 그린 '혐오의 피라미드'가 있다.
▲ 혐오의 피라미드
혐오는 편견에서 자란다.
사람의 생각 속에서 자란 혐오의 감정이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혐오표현이고
혐오표현은 구체적인 차별행위로
이어질 수도 있고
이것들이 제시되지 않으면
증오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같은
집단학살로 발전할 위험도 있다.
'혐오의 피라미드'에서
차별행위 윗 단계는
그다지 논란거리가 아니다.
현재 우리 법체계 안에서도
혐오표현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을 때에는
법적 처벌이 가능하고
피해구제의 수단도 있기 때문이다.
편견은 표현되지 않는 이상
이를 제지할 방법이 없다.
문제는 혐오표현이다.
혐오표현을 어떻게 처벌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방지하느냐에 있다.
저자는 두 가지 방식을 예시한다.
하나는 유럽 방식이고
하나는 미국식이다.
유럽 국가들은 주로
'혐오표현금지법'을 도입해
혐오표현 자체를
법으로 제지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여기에는 나치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은 '혐오표현'을 법으로 금지하면
'표현의 자유'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판단으로
혐오표현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더 많은 표현'과
'더 좋은 사상으로 맞서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믿음과
혐오표현을 시민사회의 힘으로
퇴출시킬 수 있다는
역사적 자신감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다고
미국이 혐오표현 문제에 대해
손놓고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학교, 기업, 언론 등
공공 영역에서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등
형사 규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규제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EBS가 방송프로그램에서
칼럼니스트 은하선 씨를
일방적으로 퇴출시킨 것과 같은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그 방송국은 엄청난 징벌적 배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 언론과 방송, 영화는 편견에 기대어
편견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진은 조선족 범죄조직을 다룬
영화 '범죄도시'의 한 장면.
한국은 '혐오표현' 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흐름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혐오표현에 관한
국가적인 차원의 조치가
전무할 뿐 아니라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표'를 무기로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가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의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진행될 때
기독교단체는
의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김이수 후보자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그를 낙마시키라고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보수 기독교계는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에게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등을
약속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압박에
자유로울 수 없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지난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였다.
당시 홍준표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에 반대합니까?"라고 물었고
문 후보는 "그럼요"라고 답했다.
저자는 '혐오표현금지법',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법적이고 상징적인 조치뿐 아니라
사회적인 연대의 힘으로
'혐오표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수자들에게
'당신들 옆에 우리가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동시에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서울대에서 벌어진 일을 예로 들었다.
2016년 서울대 성소수자 동아리 QIS가
'관악에 오신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신입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교내에 붙였는데
이 현수막이 일주일 후에 찢어졌다.
누군가 일부러 훼손한 것이다.
동아리 학생들은
현수막을 다시 제작하는 대신
중앙도서관 앞에
찢어진 현수막을 걸어놓고
학생들에게 반창고로 붙여달라고 요청했다.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표명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사람과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은
백신으로 전염병 확산을 차단하는 것과
메커니즘이 같다.
율라 비스는 '면역에 관하여'에서
"자신은 백신을 맞았지만
미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은 맞지 않았지만
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보다
홍역(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다"며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라고 주장했다.
소수자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사적인 계좌를 늘리는 동시에
공동의 신탁을 하는 행위인 셈이다.
소수자를 지키는 행위이고
공동체를 지키는 행위이고
결국은 나 자신은 지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혐오표현'을
'대남비방 삐라' 같은 존재로
전락시켜야 한다.
예전에는 동네 뒷산에 삐라만 발견돼도
겁이 덜컥났을 뿐 아니라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삐라가 대량으로 발견되도
대수롭지 않다.
삐라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뿐더러
시대에 뒤떨어진
우스꽝스러운 물건으로 만든 것은
튼튼하고 건강해진 우리 사회다.
우리 연대의 힘이
'혐오표현'을 '삐라'처럼 만들 수 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마사 누스바움을 인용한 의미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누스바움은 그의 저서 '혐오에서
인류애로'에서
"'인류애의 정치'란
존중과 상상력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며
"모든 존중에는 반드시 상상력을 동원해
타인의 삶에 감정적으로 참여하는
능력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