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견고한 평화로움

양근陽根함咸씨의 동족마을인 왕곡마을은 함부열의 둘째 아들인 함영근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한옥 마을은 거의가 양반마을이지만, 왕곡마을은 그렇지 않다. 마을 사람들이 조선시대 내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탓이다. 때문에 거창 하지 않은 택호에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관직을 받은 적이 없 으니 택호라야 그저‘논건너집’ ‘누렁개집’ ‘큰상나말집’이런 식이다. 어딘지 어수룩하게 느껴지는 친근함이 묻어난다. 그런 생각 때 문인지 마을이 훨씬 고즈넉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평화로움의 견고함이다. 6.25 때에는 바로 옆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치열했지만 이 마을의 평화를 깨지 못 했고, 거친 싸움에 지친 동학혁명군도 이곳의 평화에 잠시 몸을 의 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깝게는 고성 산불이 두어 번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이 마을을 범하지는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풍수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더구나 마을이 특별한 인물을 내지 않고 깊숙하게 숨어 있던 탓에 강원도의 전통적인 집 양식을 비교적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새마을 운동으 로 세상 모든 초가가 양철 지붕으로 머리를 새롭게 단장할 때조차, 이 마을에서는 문화적인 평화가 잘 유지되어 함씨보다 100여 년 늦게 이곳에 들어온 강릉 최씨와 더불어, 두 성씨는 이곳의 전통 한옥 을 굳건히 지켜올 수 있었다.
두 개의 성씨가 나란히 마을을 만들어왔다는 점에서는 경주의 양 동뚸을과 비슷한 듯하지만, 두 마을은 확연히 다르다. 양반집과 양 반을 뒷바라지하는 사람들의 거주 공간이 확연히 구분되는 양동마을과 달리, 이곳은 모든 집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평화 의 밀도가 훨씬 촘촘하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의 안온함에는 숨은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여인을 닮은 양민의 한옥

바다를 따라 난 도로를 벗어나 마을의 큰길로 들어서면 시야가 환하게 열리면서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은 누군가 보자기를 막 풀 어놓으려는 듯한 형상이다. 마을므 감싼 산세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고, 보자기 속에 담기듯 자리 잡은 집들에는 보자기 속의 다감함이 묻어난다. 마을 사람들이 여전히 함께 어우 러져 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귀길 둘레에는 작은 숲이 있어 마 을을 운치 있게 해준다. 어귀길을 돌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 는데, 초가와 기와집이 어우러진 모습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그렇게 마을을 다 둘러본 뒤, 샛길 하나를 찾아 들어가면 이 마을의 독 특한 한옥들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의 한옥은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양통집(용마루 밑에 두 줄로 늘어선 겹집)이어서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양민들의 생활을 위한 한옥으로, 대부분 19세기 말 전후에 지어졌다는 것 외에는 건축 연혁이 제대로 남아 있는 집이 없다. 그러니 마을 어느 집이라도 모 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셈이 된다. 발길 닿는 대로‘ 큰상나말 집’을 찾아들었다. 굳이 큰상나말집이 아니어도 좋다. 어느 집에서 나 비슷한 풍경을 만날 수 있으므로 어느 집에 들어가든 상관없다(지 어진 시기나 형편과 달리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집이 모두 비슷비슷 해져 있기 때문이다).
양간이다. 이런 지붕을 가적지붕이라고 하는데, 강원도에서나 볼 수 있는 지붕 형태다. 이 집은 고성군에서 사들여 관리하고 있어 더 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부엌으로 얼굴을 내밀고 여물을 독촉하는 소를 보고 싶었지만, 부엌에 붙은 외양간에도 더는 소가 살지 않는 다. 너무도 말끔한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그나마 외관은 옛 모습 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데에 위안을 받는다.
과학과 생활이 숨은 뒷마당의 담장, 지붕 위를 기웃대는 굴뚝

굳이 대문이라면, 현관문에 해당하는 문이 부엌에 달려 있을 뿐 이다. 그러니 집으로 들어가자면 부엌을 통해야 한다. 이 문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처럼 넓은 부엌이 나오고 외양간과 마루, 그리고 오밀조밀하게 이어진 방이 눈길을 잡고 한 바퀴를 돌아 나온다. 그리고 부엌 안쪽에 붙은 뒷문을 밀고 나가면 뒷마당이다. 뒷마당에는 꽤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북풍을 막고 최소한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을 뒷마당으로 확보한 것이다.
담장으로 가려진 뒷마당에는 여름 나기에 꼭 필요한 과학이 숨어 있다. 뜨거운 앞마당과 그늘진 뒷마당의 기압 차이로 바람이 실내를 지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부엌이 있다. 부엌문이 안 과 밖을 연결하는 것은 물론, 집안의 모든 공간은 부엌을 지나야 한 다. 여성의 발언권이 세지면서 주방이 집의 중심으로 변해가는 요즘의 주거 문화가 이곳에는 조선시대 내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집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서 여성이 한옥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굴뚝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남쪽 지방 한옥의 굴뚝은 아예 없거나 매우 낮아 볼품이 없지만, 이곳의 굴뚝은 우람하고 제법 아름다워 볼 만하다. 우리나라 에서 굴뚝은 여성을 상징한다. 출산할 때 아이가 잘 나오지 않으면 굴뚝에 부채질을 했다는 전통은 이를 함축하고 있다.
왕곡마을의 굴뚝은 이곳 한옥의 구성물 중에서 조형성이 가장 크 다. 나름대로 독특한 조형미를 지닌 채 집집마다 큼지막하게 붙어 있 는 굴뚝은 이 마을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부엌이 집안에서 여성의 위 치를 나타낸다면, 굴뚝은 집 밖으로 여성의 위상을 드러내는 장치이 기도 하다.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큰 굴뚝은 기와로 꾸며져 있고, 끝 에는 항아리까지 씌워져 장식성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한옥의 아궁이는 난방과 함께 부엌일도 해결한다. 때문에 굴뚝 의 규모와 높이로 그 집의 열 이용 상황을 진단할 수 있다. 산골의 한옥에서는 부엌의 연기를 빼기 위해 합각을 비워놓는 것이 보통이 지만, 이곳은 복원을 하며 합각을 메워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합각과 굴뚝이 만드는 여러 가지 문양을 즐기는 것은 왕곡마을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한옥에는 저마다 표정이 있다. 한옥 감상은 그 표정을 읽어내는 일이다. 왕곡마을의 한옥은 좁은 뮳부 공간에서 다시 좁은 내부 공 간으로 방들이 사슬처럼 이어지는 오밀조밀함이 특징이다. 임부姙婦 가 양쪽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등에 아이까지 들쳐 업은 모습이 라고 할까? 생활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하여 왕곡마을 한옥에서 도시의 성형 미인을 기대할 수는 없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여인에 게서 느껴지는 담백함이 이곳 한옥의 얼굴이다.
함부열이 그랬던 것처럼 왕곡마을의 한옥 역시 마을이 기대고 선 설악산을 닮은 셈이다. 다만 설악산이 젊은 여자의 화려함을 가지 고 있다면, 이곳 한옥은 자연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건강한 중년 여인의 생활미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