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듣는 마음’ 어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오늘 제1독서의 그 유명한 ‘지혜를 청하는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지혜란, ‘듣는 마음’이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오늘 복음의 ‘밭에 숨겨진 보물’이라는 유명한 비유 말씀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 살 만큼 하늘나라는 보물과 같은데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듣는 마음’ 곧 지혜를 청한 솔로몬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마치 하늘나라는 어떤 공간이나 장소의 개념이 아닌 솔로몬이 지혜를 얻은 것처럼 손에 쥐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솔로몬에게 있어서 하늘나라는 ‘듣는 마음’ 곧 지혜였다. 그가 지혜를 얻음으로써 하늘나라는 그의 것이 되었다. 수많은 금은보화보다, 온 세상의 권력보다 지혜를 참된 보물로 여겼던 솔로몬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하느님 앞에서 ‘듣는 마음’을 갖게 된 솔로몬에게 세상의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듣는 마음’을 구하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들어주는 마음’을 구하느라 세상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보세요! 누가 제 말 좀 들어주실래요?”
그 누가 나의 위로가 될까? 그가 들어주면 내 마음이 편안해질까? 저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면 내 마음에 햇살이 비칠까? 어렸을 때 엄마의 조용한 미소, 안아주시는 따뜻한 가슴, 끄덕거리는 고갯짓만으로도 크게 위로를 받고 안락함을 느꼈던 우리, 어쩌면 그때로 돌아가 그때의 위로와 안락감을 다시 느끼고 싶은 걸까?
많은 사람이 ‘퇴행’을 해서라도 ‘잠시의 위로’라는 유혹에 빠진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퇴행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에너지를 보충하는 일은 매우 건강하고 유익하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 퇴근길에 술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는 일은 썩 괜찮은 방법이다. 친구에게서 위로받고 친구에게 땡강 부리며 유치하게 굴어도 우정은 그것을 받아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내 삶이 위로될까? 그것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위로와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하여 끼리끼리 ‘또래’를 구성하고 ‘들어주는 마음’에 집착하여 쫓지만, 우리의 마음에 영원한 위로가 되지 못하고 궁극적인 안전망을 제공하지 못한다.
어느 시대보다 강한 나르시스 인간인 우리에게 솔로몬은 ‘듣는 마음’이 어떠냐고 묻는다. 세상의 어떤 왕보다 지혜로웠고 이스라엘을 한때 크게 번성하게 했던 솔로몬이 시대를 거슬러 오늘 우리에게 말한다. “‘듣는 마음’이 어때? 매력적이지 않아?”
물론 성경에서 ‘듣는 마음’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말씀 이외 세상 어디에서 지혜를 구할 것인가?’란 솔로몬의 생각이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은 사람과 솔로몬이 겹쳐 보인다. 두 사람은 그 보물을 얻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렸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 본성에 따라 살아가더라도 그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고 서로 어긋남이 없이 조화를 이룰 것이다.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9) 어떤 이들이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사람들일까? 그들은 자신의 자아에서 ‘부여된 모상’을 발견한 사람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광야에서 40일)하시고 세상에 나오신 것처럼 우리도 신앙 안에서 자신의 자아 정체감을 회복하고 ‘자기-SELF’를 확립한다면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닐까?
바오로 사도는 더 나아가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로마 8,30) ‘미리 정하신 이들’이란, 고통스럽고 수고스럽지만 인내하며 ‘자기’를 찾아 나선 이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이고 이렇게 응답하여 하느님 말씀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 이는 하느님에 의해 의롭게 된다. 이제 그들의 삶은 하느님께 바치는 찬양이요, 찬미가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 8,29b)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몰랐다. 다정하고 따뜻한 엄마가 좋았고 나에게 호의적이고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이면 최곤 줄 알았다. 무조건 내 편 들어주면 동무고 내 편이 아니면 동무가 아니라고 여겼다. 가끔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리움으로 남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 머물 수도 없다. 삶의 시계는 돌아가고 한번 흘러가 강물이 돌아올 수 없듯이 나의 시간도 흘러가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어른이 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애정 넘치는 사랑 노래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겁을 주시려는 의도가 아니라 ‘불구덩이에 던져’지지 말고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시는 마음이신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중략)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고 과거에는 명암이 있다. 어떤 이는 살아있는 과거에 얹혀살고 어떤 이는 과거에서 현재를 비추며 산다.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처럼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새것도 내 것이고 옛것도 내 것인데 나는 내 곳간의 주인인가? 머슴인가?
첫댓글 세상을 자유롭게 마음껏 살으라 하신 주님
위태로운 이 곳에서 사는동안 날마다 들으라 하시며
길을 따르라 하시니 오늘도 감사하며 따르겠습니다~ 감사드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