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
영화사 소개가 끝나면 시작하고 제작진 이름이 올라가면 끝나는 영화와 달리, 우리가 사는 현실은 늘 중간 어디쯤에 놓여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그 전부터 쌓여온 무언가 위에 서있고, 극적인 일을 겪었다고 해서 갑자기 끝나지 않고 그저 다른 국면으로 변할 따름이다. 계속 관심 기울이기에는 다른 이슈가 늘 오는 세상 속에, 사람들은 하나의 마무리 계기라고 여겨지는 것이 등장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망각하기 바쁘다.
언론과 여러 논의에 오르는 철거민의 비극이 특히 그렇다. 큰 사고와 함께 주목을 받고, 한동안 시끄럽다가, 그럭저럭 다시 묻힌다. 하지만 현실의 그 자리에는 여지없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함께 사람들이 남아있다.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관심 한 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전부가 걸려있기에, 그들은 떠날 수 없다. 이 책은 09년 용산사태를 다룬 [내가 살던 용산]의 후속권이지만, 단순한 속편이 아니다. 앞서 늘 존재했던 땅 소유와 개발논리의 근본적 모순, 개발과정의 절차와 문제, 관심에서 가려진 철거항의자 인권 유린, 다른 철거민 동네의 싸우는 사연 취재기, 그들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 등이 있다. 물론 용산 그 사람들의 법정 싸움으로 다시 상처받는 그 후 이야기도 있다. 땅따먹기 놀이의 절묘한 비유로, 철거민들을 취재하며 둘러보는 동네 곳곳의 풍경으로, 비극적 사건 속에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연달아 엮이는 연출로 보여준다.
이 책은 쉽게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다만 철거 문제가 찰나의 비극적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생겨날 수 있는 사회적 모순의 단면임을 직면시켜주고, 함께 느끼며 고민하자는 강력한 제안이다.
(김낙호 / 만화연구가)
PS. 지면 성격과 분량상, 작품들의 개별적 우수함을 칭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상당하다.
이경석 작가의 스타일을 과격한 개그가 아닌 가라앉은 다큐에 풀어내자, 정말 묵직하다. 김홍모 작가가 그려낸 사람의 사연들이 하나의 사건 속에 연달아 이어지는 모습은 새로운 시대의 – 하지만 익숙한 사회문제의 – 난쏘공을 보여준다.
김수박의 유연한 해설은 지식만화를 풀어나가는 방식의 또다른 기준이 될 것이다. 심흥아, 김성희, 유승하 작가의 에피소드들도 차분하고 서늘하게 사연을 보여준다.
비록 [내가 살던 용산]만큼 형식이 꽉 짜여진(희생자 1인당 1단편+에필로그) 느낌은 아니지만, 개별 작품들의 스토리텔링은 확실히 한 단계 더 발전했다. 한국의 르포만화가 오늘 한국의 현실에 제대로 발을 딛을 때,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더 발전한 르포만화가, 현실의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풀어가기 위한 강력한 도우미가 되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만화책 한 두권이 철거민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만화책으로 생각과 관심을 얻은 이들이, 그런 해결을 위해 함께 조금씩이나마 움직여나갈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