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江의 關東別曲을 따라
“江湖애 病이 깁퍼 竹林의 누엇더니, 關東八百里에 方面을 맛디시니..” 로 시작되는 정철(鄭澈, 1536~1594)의 ‘關東別曲‘은 고딩시절 머리 쥐나게 외웠던 古文 아닌 고문(拷問)이었죠. 그러나 이제 와 입시와 무관하게 천천히 들여다보니 나름 쏠쏠한 재미도 있네요. 관동별곡은 松江이 관동 方伯을 제수받고 한양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해안으로 나아가, ‘관동8경’ 이라는 총석정, 삼일포, 청간정, 낙산사,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의 아름다운 경관을 돌아보며 읊은 가사라는 건 잘 아실 겁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시화첩(詩畫帖)인 '關東十境'이라는 게 있습니다. 강원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이 영조 22년(1746) 관내 여러 고을을 순시할 때 화원(畫員)에게 경치를 그리게 하고 화첩을 돌려본 지인들의 시를 받아 만든 것이랍니다. 여기에는 통천 총석정(叢石亭), 고성 삼일포(三日浦), 간성 청간정(靑澗亭),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鏡浦臺), 삼척 죽서루(竹西樓), 울진 망양정(望洋亭), 평해 월송정(越松亭) 등 관동팔경에 흡곡 시중대(侍中臺)와 고성 해산정(海山亭) 두 곳이 추가되었읍니다. 아쉽게도 현존하는 '관동십경'에는 월송정 그림이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월송정 그림을 오려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여기에서는 관동팔경 중 정자(亭)에 해당하는 청간정(淸澗亭), 낙산사의 의상대(義湘臺), 경포대(鏡浦臺), 죽서루(竹西樓), 망양정(望洋亭) 그리고 월송정(越松亭)에 대해서 ‘넓고 얕게’ 훑어보기로 하지요. 다만 지금은 북한 땅에 위치해 있고, 정자라기보다 주상절리(柱狀節理)로 유명한 총석정(叢石亭)과 호수인 삼일포(三日浦)는 제외시켰읍니다.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원도 북단에 위치해 있고 휴전선이 가까워서 웬지 외진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의외로 古今의 저명한 인사들(?)의 숨결과 손때가 많이 묻어있는 정자지요. 겸재 정선이 그린 ‘淸澗亭‘이라는 산수화에는 이 정자는 바위산이 정자의 축대같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조선조 중종 15년(1502)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측됩니다. 갑신정변(1884) 때 소실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재건되였고, 1980년에는 정자를 완전 해체 복원합니다.
현판은 현종 연간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左相으로 있을 때 이곳에 들러 친필로 썼다는데 소실되었고, 1928년 다시 지을 때 독립운동가 청파 김형운이 쓴 글씨가 대신 걸려있답니다. 정자 내부에는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현판이, 1980년 해체 복원 후에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지은 시문(아래↓)이 편액으로 걸려있고요.
嶽海相調古樓上(악해상조고루상)
果是關東秀逸景(과시관동수일경)
설악과 바다가 어우러진 옛 누대에 오르니,
과연 이곳이 관동의 빼어난 승경이로구나.
☞蛇足 :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은 명필 명문이니 당시는 대통령학에는 詩文이 필수 과목이었나 봅니다. ^^
그냥 갈 수 없지요. 조선 인조 때의 문장가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이 청간정을 찾아 남긴 시 한 수 붙입니다.
天敎滄海無潮汐 亭似方舟在渚涯 (천교창해무조석 정사방주재저애)
紅旭欲昇先射牖 碧波纔動已吹衣 (홍욱욕승선사유 벽파재동이취의)
하늘이 滄海의 밀물과 썰물을 멎게 하는 곳에,
방주 같은 정자 하나 물가에 서 있네.
붉은 해 솟아올라 그 빛이 먼저 들창에 들고,
푸른 물결 일렁이자 옷자락이 벌써 나부끼네.
(*우리말 새김은 정자 안에 원래 있는 것과 달리 필자가 임의로 고쳐 보았읍니다. 원 시에는 뒤에 4구가 더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 하였음.)
속초(양양) 의상대(義湘臺)
梨花니화ᄂᆞᆫ ᄇᆞᆯ셔디고 졉동새 슬피울제 洛山東畔낙산동반으로 義相臺의샹ᄃᆡ예 올라 안자
日出일츌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ᄒᆞ니, 祥雲샹운이 집픠ᄂᆞᆫ동 六龍뉵뇽이 바퇴ᄂᆞᆫ동
바다ᄒᆡ ᄯᅥ날제ᄂᆞᆫ 萬國만국이 일위더니 天中텬듕의 티ᄯᅳ니 毫髮호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詩仙시션은 어ᄃᆡ가고 咳唾ᄒᆡ타만 나ᄆᆞᆺᄂᆞ니
天地間텬디간 壮장ᄒᆞᆫ 긔별ᄌᆞ셔히도 ᄒᆞᆯ셔이고 - 관동별곡 중 의상대 해당 부분
필자가 전부터 義湘臺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던 건 정자(亭) 이름에 사람 이름이 들어갔다는 겁니다. 茶山草堂이나 杜甫草堂처럼 개인 소유의 집(堂)엔 호나 이름이 들어간 건 있지만, 여러 사람이 오르내리는 정자에는 좀 이상하다는 거지요. 그리고 정자의 이름은 대개 亭 자로 끝나는데 臺가 웬말이냐는 거지요. 그런데 이번에 조사해 보니 짐작이 가네요. 이곳이 원래 정자가 서 있던 데가 아니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한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참선하던 높다란 평지(돈대 臺)였다는 거지요. 후대에 여기에 정자를 지으면서 옛 이름을 그대로 쓴 게 아닐까요.
의상대(義湘臺)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동해안에 있는 정자로, 강원도 유형문화재(제48호)입니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에 있어 좋은 전망대 역할을 합니다. 1925년 승려 만옹(晩翁)이 팔각정(八角亭)으로 새로 지었으며, 만해 한용운(萬海韓籠雲)은 '의상대기(義湘臺記)'를 씁니다. 1937년 태풍으로 무너진 정자를 새로 지었고 1975년에도 한차례 중건합니다. 1995년 마근(馬根)은 의상대를 해체하여 6각정으로 다시 짓고, 2009년 다시 해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역시 그냥 갈 수는 없지요. 조선 후기 선승 용암 체조(龍巖 體照, 1714~1779)의 '낙산사 의상대에 올라(登洛加義湘臺)'란 칠언절구(七言絶句)입니다.
偶然飛錫*洛伽樓 湘老臺高洗客愁 (우연비석낙가루 상노대고세객수)
師去千年不復返 但看山下碧波流 (사거천년불부반 단간산하벽파류)
*飛錫 : 승려가 석장(錫杖)을 집고 날 듯이 다닌다는 뜻
우연히 낙산사에 들러 누대에서 노니나니,
높다란 의상대에서 나그네의 시름을 씻누나.
의상대사 가신 지 천년. 다시 돌아오지 않으시니,
산 아래 흘러가는 푸른 파도만 바라보누나.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의상대를 찾아 유람기와 시, 그림을 남겼습니다. '삼국유사'를 비롯해서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에도 낙산사 창건 기록이나 중수 기록, 유람기, 경치를 읊은 시문이 다수 전하지고 있답니다.
강릉 경포대(鏡浦臺)
斜陽샤양 峴山현산의 躑躅텩튝을 므니ᄇᆞᆯ와 羽蓋芝輪우개지륜이 鏡浦경포로 ᄂᆞ려가니
十里십리 氷紈빙환을 다리고 고텨다려 長松댱숑 울흔소개 슬ᄏᆞ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잘샤 모래ᄅᆞᆯ 혜리로다 孤舟고쥬 解纜ᄒᆡ람ᄒᆞ야 亭子뎡ᄌᆞ우ᄒᆡ 올나가니
江門橋강문교 너믄겨ᄐᆡ 大洋대양이 거긔로다
從容둉용ᄒᆞᆫ댜 이氣像긔샹 闊遠활원ᄒᆞᆫ댜 뎌境界경계
이도곤 ᄀᆞᄌᆞᆫ ᄃᆡ ᄯᅩ어듸 잇닷말고 紅粧홍장 古事고ᄉᆞᄅᆞᆯ 헌ᄉᆞ타 ᄒᆞ리로다
- 관동별곡 중 경포대 해당 부분
역시 ’돈대 臺‘ 자가 붙은 정자입니다. 짐작컨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가 치열하게 대치하던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으로 보아 군사 목적의 돈대가 있었던 곳이 아니었다 생각됩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더 이상 변방이 아니기에 전망 좋은 이곳에 정자를 지었겠지요.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도 있습니다. 고려말 충숙왕 13년(1326) 지중추부사 박숙정에 의해 창건된 누정건물로 안축의 ’경포대신정기(鏡浦臺新亭記)‘ 기문(記文)에 옛날 화랑인 영랑(永郎)이 놀던 곳이며 정자가 없어 비비람이 치는 날 유람하던 사람들이 곤욕스럽게 여겨 작은 정자를 지었다"라고 하여 창건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조 4년(1626년) 강릉부사 이명준(李命俊)에 의하여 크게 중수되었는데, 당시 우의정 장유(張維)가 지은 중수기(重修記)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고 쓰여져 있읍니다.현재의 경포대 건물은 영조 21년(1745년)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세운 것으로서, 낡은 건물은 헐어내고 홍수로 인하여 사천면 진리 앞바다에 떠내려온 아름드리 나무로 새로이 지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판은 헌종 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이익회(李翊會)가 쓴 것이랍니다. 정자 안에는 ‘第一江山’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第一’과 ‘江山’의 필체가 누가 보아도 다르게 보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이곳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글씨를 써 주었는데 뒷 글짜가 산실되어 후대 사람이 써 넣었다는 겁니다. 이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스토리는 주지번이 宋대 명필 미불의 글씨 第一山를 탁본하여 와서 나머지 글자를 채워 넣었다는 거지요. 실제로 중국 비문에서 같은 글씨가 발견되기도 하였구요. 경포대 정자 안에는 율곡 이이가 10살때 지었다는 「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 어제시(御製詩), 영조 대의 문인 조하망(曺夏望)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의 시문과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관동별곡에도 나오듯이,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오는 설화에는 경포대에서 홍장과 강원감찰사 박신과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지요. 이곳의 風光이 하도 일품이다 보니 고려말의 대학자 안축(安軸), 강릉이 고향이며 詩畫에 능했던 신사임당 등 수많은 詩人墨客들이 다투어 경포대를 읊었습니다, 그중 정조대왕의 시가 맘에 들어 여기에 붙입니다.
江南小雨夕嵐暗 鏡水如綾極望平(강남소우석람암 경수여능극망평)
十里海棠春欲晩 半天飛過白鷗聲(십리해당춘욕만 반천비과백구성)
강남에는 보슬비 내리고 저녁 안개 자욱한데,
비단 같은 경포호 가이없이 펼쳐졌네.
십리 해당화에 봄은 저물어 가는데,
흰 갈매기 나지막이 소리내며 지나가네.
정조대왕이 시문에 능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역시 대단한 내공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