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 임 종 호 -
사람은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나는 누구일까? 몇 가지 키워드를 설정해 보자.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 나는 모르는데 남들은 아는 나, 남들은 모르는데 나만 아는 나,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로 설정해 보자.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는 가시적으로 공개된 나 또는 드러난 평판에 따른 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생년월일, 가족관계, 신체조건, 외모, 학력, 경력, 재력, 전공, 취미, 특기, 성향 등의 항목을 예시해 볼 수 있다. 다만 인격은 평판과 다를 수 있다. 성공이나 성취와도 다를 수 있다.
“나는 모르는데 남들은 알고 있는 나”다. 자신이 평소 알고 있지 못하는 습성이나 특징 같은 것. 가령 말을 할때 연신 혀를 내밀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거나 쉴새없이 눈을 깜빡이며 코를 만지는등 일반적이지 않은 특유의 언행,표정,제스추어, 체취,왜곡된 고정관념,돌출성,과대망상증,갖가지 기행(奇行) 등 남들에게 다소 이질적으로 비쳐진 특이한 면면이 이에 해당 될 것이다.
“남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나”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의 나라고 할까..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엄연히 실존하고 있는 나를 일컬음이다. 자신의 진면목,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로부터도 방해받고 있지 않을 때의 행태, 방심하고 있을 때의 자화상, 은밀한 생각,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상상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다. 깊은 내면에 저류(底流)하고 있는 원초적인 나라고 규정해 본다. 사실상 보이지 않게 나를 조정,운전하고있는 무의식 속의 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면 아래의 빙산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쓴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얘기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지킬 박사는 덕망이 높고 배려심이 남달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반면에 하이드는 밤만 되면 나타나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동일인이었다. 대낮엔 선량의 표상 같은‘지킬박사’행세를 하다가 한밤엔 악의 화신 같은‘하이드’로 변신한다는 줄거리로 엮어져 있다. 인간의 내면에‘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비단 이 작품 속에서 뿐만 아니라 전문가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태생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괜찮은 사람인양 보이기 위하여 적절하게 가공을 하거나 포장을 하는 경향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 해야 할 것이다. 격조있는 체, 유별한 체, 정의로운 체 하지만 보통사람은 그리 고상하지도, 우아하지도, 존엄하지도 않은 존재로 보는 입장이다.
「논어」와 「중용」에 군자신독(君子愼獨)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앙받는 군자는 남들이 보지 않는 데서도 도리에 벗어남 없이 언행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퇴계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은 말씀이기도하다. 또한 시인 윤동주는“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라고 읊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을 향해“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체 위선적인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누가18:9~14)
그 때나 지금이나 남들 앞에서는 정의의 화신인양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면서도 자신은 정작 남의 눈을 피해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자행한다. 보는 눈이 많을 때는 품격있는 체 구두선(口頭禪)을 연출하다가 익명성이 보장되는 상황에서는 상반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신독(愼獨)은 실행이 어려운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명산대천의 수려한 풍광도 멀리서 바라볼 땐 절경이었던 것이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각종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 현장임을 목격하기도 한다. 천사표로 조명받던 사람이 어느 날 흉악범으로 밝혀져 대서특필 되는 사례도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한편 편견과 선입견에 따라 또는 대세에 편승하거나 부화뇌동하여,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심증만으로 시시비비를 속단해선 안 될 것이다. 열사람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와선 안 된다는 것이 법조계의 법언(法諺)으로 존중되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모습만으로도 좋은 사람이 있다. 외양이든 살아온 이력이든 적절히 꾸미면 봐줄만한데, 포장이 지나치면 실상과의 괴리감이 느껴져 식상하게 된다. 가족관계나 죽마고우가 아닌 한 너무 가까이 지내다보면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그 사람의 품성,미추,됨됨이 등 여실한 진면목은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사람이 제일 잘 알게 되어있다. 하여 비리, 부정, 불륜 같은 불미스러운 내막도 운전수, 비서, 친·인척 같은 측근에 의해 폭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전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친분 관계 유지도 적절한 안전거리 확보를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얘기가 회자 되고있다.“엄마닮은 신부감은 아빠가 반대하고, 아빠닮은 신랑감은 엄마가 반대”한다는것. 저런 남편과 한번 살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언급에 대해 “그 인간 빌려줄 테니 한 달만 같이 살아 보시라요.”,“우리 엄마요? 밖에선 천사표지요.”“우리 상사요? 과분하게 평가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속고 있는 셈이지요. 잔재주에 능하고 변신의 귀재거든요. 우리끼리는 카멜레온이라고 칭(稱)하기도 하죠.“그 친구요? 영향력 있는 유력자에게 접근하여 어필하는 솜씨가 탁월하지요. 또한 남의 공(功)을 가로채어 자기 것인양 생색내는 재주가 달인급 이구요.”가까운 거리에서 격의 없이 지낸 사람의 평가는 비교적 믿을만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음해나 중상모략, 시기 질투의 발로인지 여부는 예의주시 헤아려 봐야 할 것이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차제에 왕과 신하 사이의 일화 한 토막을 상기해 보고자한다.
옛날 어느 왕이 대신들에게 꽃망울이 맺힌 화분을 하나씩 나누어 주며, 한 달 후에 가장 예쁘게 가꾸어온 대신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명했다. 저마다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마침내 정해진 날이 도래되어 대신들은 자신이 가꾼 화분을 왕에게 바쳤다. 화분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 있었다. 그중 한 대신의 손에 들려있는 화분에 눈길이 쏠렸다.
그 화분에는 꽃 대신 말라비틀어진 줄기만 볼썽사납게 꽂혀 있었다. 왕이 언짢은 어투로 어찌된 영문인지를 물었다.그 대신은 죽을죄를 지은 표정으로 이실직고 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지만 까닭 없이 꽃이 죽어버려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라고.. 그러자 왕은 죽은 꽃을 들고온 그 대신에게 큰 상을 내렸다. 다른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모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당초에 왕이 뿌리를 잘라버린 꽃을 자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화분을 바꿔치기 했기 때문이다. 의표(意表)를 찔린 줄도 모르고 회심의 묘수(?) 발굴에 고심하다가 악수를 둔 셈이다. 경각심을 촉구하는 풍자 인듯하다. 여사한 상황이 이 시대에 주어진다면 제 발등 찍는 꼼수가 또다시 등장할까? 아닐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루를 열고 닫을 때까지 수많은 상념들이 명멸하게 된다. 마음 가는 대로, 상상력이 미치는 대로의 궤적(軌跡)을 그려 동영상을 만들 수 있다면 가관일 것이다. 때로는 남이 알면 부끄러울 황당무계(荒唐無稽),유치찬란한(?) 망상들이 꼬리를 물 때가 있다(나의경우). 은밀히 간직한 내 생각을 남들이 알아챌 수 없도록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는 것은 천만 다행이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음 씀씀이 일거수일투족 까지 속속들이 감찰하시는 것으로 믿고 있다. 모르긴 해도 자신 있게 공개할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다. 가령 테레사수녀 같은분은 예외로하고..
어떤 악행을 모사(謀事)하든 가시화 되지 않으면 법적으로는 범죄자로 특정하지 않지만, 성경에는 시기, 질투, 탐심, 음욕, 증오 등 죄성을 품는 자체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나는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한심한 인간이구나..”자성과 아울러 용서를 구하는 기도도 드려보고, 다짐도 해 보지만 인품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원죄의 잔재(殘滓)로부터 자유로울 자가 없다는 기독교의 입장에 한 가닥 위안을 삼고 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이래 인공 지능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호기심에서 인공지능 관련 서적을 구해 읽어 보았다. 장차 인공지능이 고도화하여 사람의 지능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추론이다. 긍정적인 변화가 기대되는 반면에 비인간화 현상의 심화, 기존 질서의 재편 등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이 도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관심을 끄는 대목은 인공지능이 분석력, 판단력, 응급대처 능력까지 갖추게 되며,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차원을 달리하는 세상이 열리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생각까지 다 털리게 되면 투명인간으로 살아가야 될 것같다. 그런 단계로까지 진전 된다면 인간관계에 일대 혼란이 빚어질 것이다. 반면에 중상모략, 음해공작, 작당모의 같은 범죄가 발붙이기 어려운 세상이 올 수도 있지않을까 싶다. 긍정적인 측면도 기대해 봄직하다.
“누군가 당신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라는 경고성 구호가 나돌고 있다. 장차는 물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메모리칩, 몰래카메라, 특수스티카, 도청기 등 고성능 첨단장비와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하면 일거수 일투족을 실시간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의 적나라한 행태마저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하니 장차 유리상자 속에서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17년도 12월 안산문협지에 게재한 칼럼입니다.



첫댓글 몰래카메라보다 더무서운 하나님의 눈 아멘입니다.
둘째 손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말할수없이 예쁘시겠습니다.
저두요 !!큰소녀도 정말 많이 자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