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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와 정보 스크랩 한옥 돌아보기
oceangoing 추천 0 조회 29 09.07.27 14: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집터 위에 돌로 층층이 쌓은 단을 말하며, 빗물이나 습기 등으로부터 집을 보호해 준다. 땅에 가깝게 집을 지으면 습기가 올라오는데, 이때 기단을 여러 겹 쌓아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주추를 놓으면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단은 집안 구조물 사이의 엄격한 위계를 드러내는 장치로도 활용되었다.

 | 한옥에서 창은 채광과 통풍을 위한 것으로, 주로 살대에 창호지를 발라 사용한다. 창호지는 보온, 채광, 환기뿐만 아니라 집을 치장하는 장식적인 의미도 갖는다. 창문 아래를 받치는 예쁜 나무판을 ‘머름’이라 하는데, 머름은 문지방보다 높아 사람이 방에 앉아 편안하게 팔을 걸칠 수 있는 높이다.

 | 온돌과 함께 한옥의 특징으로 꼽히는 마루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습기를 막고 통풍을 하는 등 쾌적한 여름철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높은 누대 위에 마루를 깔아 다락방처럼 만든 누마루, 지금의 거실처럼 안채 한가운데에 넓은 방처럼 꾸민 대청마루, 방이나 대청마루의 앞이나 뒤편에 덧대어 낸 툇마루 등이 있다.

 | 비나 눈으로부터 실내를 보호해 주는 기와지붕은 시각적으로 집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집의 격식을 나타내기 때문에 장식적인 면이 특히 강조되었다. 비교적 간략한 맞배지붕부터 화려하고 위용이 있는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솟을지붕 등 종류가 다양한데, 일반 살림집에서는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이 주로 쓰였다.

 | 바깥을 향한 지붕 아래의 공간으로, 본래의 역할은 빗물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는 등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처마는 집의 외관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하는데, 추녀와 함께 어우러진 처마의 날렵한 곡선은 옛 여인들의 버선코에 비유되며 특유의 곡선미를 선사한다.

 | 기둥은 주춧돌 위에 세우는 나무로, 한옥 공간 구성에서 기본이 된다. 기둥을 곧게 잘 세우려면 주춧돌과의 접합이 아주 중요하다. 기둥은 대개 정면에서는 곧게 보이지만 사실 완만하게 곡선을 이루거나 아래 위 너비가 다른데, 이는 원근감을 표현해 좀 더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착시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 목조 가옥인 한옥의 기둥을 맨 땅에 세울 수는 없는 일. 기둥이 썩지 않게 하면서 전체 구조물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주춧돌이다. 대개 주춧돌은 울퉁불퉁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돌을 깎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된 기둥을 돌의 모양새대로 파내는 기술인 ‘글겅이질(그렝이질)’을 했기에 가능했다.

 | 비록 좁더라도 마당을 갖고 있지 않은 한옥은 찾기 어렵다. 살림집에서는 마당에 고추를 널어 말리거나 작물을 쌓아 두기도 했지만, 대개는 키 큰 나무 등을 심지 않고 그저 마당 그대로 비워 두는 경우가 많았다. 소담한 한옥에서 여유와 한가로움을 드러내는 소박한 공간이 바로 마당이기 때문이다.


 |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 옆에 붙어 있는 부엌에는 불을 때는 2~4개의 아궁이와 부뚜막이 있다. 지금의 싱크대와 비슷한 부뚜막에는 큰 가마솥을 걸어 두었고, 그릇들을 보관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선반인 ‘살강’도 있었다. 그러나 전통 한옥의 부엌은 작업 동선을 고려해 볼 때 지금의 부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한 구조였다.


 |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이자 한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온돌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구들이 데워져 방바닥 전체에 열이 전달되는 방식이며, 고구려인들이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돌’이라는 단어는 성균관의 온돌을 5간으로 늘렸다는 세종실록(1425년)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며, 18세기 즈음 전국적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초 한국에 온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한국인들은 밤마다 펄펄 끓는 방바닥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습관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1569년 7월, 덕봉이 전남 담양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지 11개월 째다. 남편 미암이 홍문관에 출근하게 되면서 혼자 한양 생활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덕봉은, 지난해 상경해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신경 쓸 일 많은 한양 살림에 1년 여가 훌쩍 지나고 어느덧 7월. 앞뒤 산자락이 그늘을 만들던 고향이 그리워질 만큼 한양의 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미암이 빙패(氷牌)를 가지고 서빙고로 가 얼음 네 덩어리를 얻어다 줬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들이야 계곡에 발 담그며 ‘탁족(濯足)’이라도 한다지만, 집에 있는 사람은 어찌할꼬! 얼마 전, “서책 아낄 줄만 알지 집안 돌볼 줄은 모른다”라고 타박하자 미암은 덕봉에게 아끼던 부채(1)를 선물로 주었다. 돈처럼 대접 받는 부채를 더위 식히라고 준 데에는 아내에게 내심 미안해 하는 남편의 마음이 담겨 있지만, 그 귀한 부채라도 무슨 소용이랴. 팔 아프게 부채질 하다 보면 또 금세 땀이 차고 마는 것을.

임시 거처라 살림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안채에서 덕봉은 둘둘 말아 놓은 돗자리(2)(3), 그리고 죽부인(4)을 찾아냈다. 여름철 독서할 때 쓰던 돗자리와 발은 남편이 귀양갈 때에도 가져갔던 것이라 군데군데 해졌지만, 책에 빠지면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사람이니 그런 것 쯤 신경 쓰지 않았다. 죽부인은 남편이 20여 년의 귀양 생활을 마치고 55세에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았을 때, 혼자 여름을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 덕봉이 만들어 보낸 것이다. 더운 여름 밤, 행여 딴 생각 하지 말고 이거나 끌어 안고 자라는 매서운 당부가 깃든 죽부인이었다.
 


 | 부채는 벌레를 잡거나 더위를 이기기 위한 도구로 가장 유용했지만, 전통 혼례나 풍류를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화폐를 대신할 만큼 값비싼 선물 역할도 했다.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을 가진 부채는 우리나라에서 기원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더위가 시작될 무렵인 단오에 선물로 부채를 주고받기도 했다.
 | 왕골이나 골풀의 줄기를 이용해 만든 자리로, 왕골 자체에 염분 성분이 있기 때문에 땀 흡수력이 좋아 여름에 특히 시원하다. 새겨 넣는 무늬에 따라 용 문양을 새긴 것을 용문석이라 하고, 그 외에도 호문석과 난초석 등 많은 종류가 있다. ‘꽃무늬 돗자리’라는 뜻의 강화도 화문석이 그 중 특히 유명하다.
 | 대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어 둥글게 엮어 만든 피서용 취침 도구. 사람의 키만큼 길고 누워서 안고 자기에 알맞은 긴 원통형인 데다 속이 비어 있어 공기가 잘 통한다. 아버지가 안고 자던 죽부인은 어머니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는데, 감히 자식이 안고 잘 수 없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관 속에 합장하거나 불에 태웠다.
 | 주로 여름철에 창문이나 대청에 치는 용도로 사용되던 발은 삼국시대 이래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한옥이 점차 사라지면서 수요가 크게 줄었다. 전통 가옥인 한옥에서 발은 생활의 필수품이었는데, 여름철에 강한 햇볕을 막아 주어 시원함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밖에서 방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


 | 등나무나 대나무를 저고리 소매처럼 만들어 팔목에 끼던 것이다. 통풍이 잘 되어 주로 남자들이 한여름에 많이 사용했다. 털이나 무명 등을 이용해 만든 겨울용도 있었다.
 | 말 그대로 ‘등과 등의 거리를 두고 입는 옷’이라는 뜻으로, 여름철에 삼베나 모시 안에 입었다. 등나무 덩굴을 가늘게 한 뒤 구부려 조끼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등에 걸치면 옷이 살에 닿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함을 느끼게 해 준다.
 | 옷감이 성글어 땀이 나도 몸에 잘 붙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해 여름 의복 재료로 널리 사랑 받았다. 생육 조건이 까다로운 모시에 비해 삼베는 원료인 삼이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 서민층에서 폭넓게 사용했다. 모시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


때마침 담양에서 아들 경렴이 내외가 챙겨 보낸 쌀과 말린 숭어 등 물품이 도착한 터였다. 짐 꾸러미 안에는 담양의 대나무로 만든 토시(5)와 등나무로 만든 등등거리(6)도 들어 있었다. 잔병치레 많은 어머니가 한양 더위에 벌써 기진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어 보낸 것이다. 남편이 얻은 중부 장통방(종로구 관철동) 집은 정원이 좁은 집이지만, 그래도 마루가 넓은 편이라 다행이었다. 뒤꼍으로 난 문을 활짝 열어 젖히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대청에 발을 치고 바닥에는 자리 깔고, 남편은 죽부인에 나는 등등거리…. 값비싼 모시옷 입는 호사는 못 누려도 까슬한 삼베(7)옷에 이 정도 지원군이면 올 여름 버티기는 어렵지 않을 것도 같다. 올 여름만 잘 버티면 남편과 잠시 짬을 내 고향에 다녀올 수도 있을 터, 이 더위가 지나고 나면 덕봉은 미암에게 담양으로 휴가를 가자고 조를 참이다.




사람이 건축 공간을 창조하는 행위는 자연이나 외부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은신처로서의 기능을 위한 것이었다. 그 은신처가 바로 ‘집’이라는 구조체인 것이다. 집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삶의 터를 제공하면서 자연 환경 요소에 대해 적응 및 대응하게 하는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든 땅 위에 집을 지었다면 바닥은 맨바닥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지형적인 특성, 즉 ‘반도’라는 특성은 대륙적인 요소와 해양적인 요소가 같이 자리잡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더위와 추위에 함께 적응할 수 있는 구조. 즉, ‘마루’와 ‘온돌’을 둔 것이다. 한국 주거의 마루와 온돌은 추위와 더위에 적응하는 상반된 기능을 가졌다. 마루와 온돌이 한국 주거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 기후에 가장 적합한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루는 지반면에서 떨어져 나무로 만든 공간을 둠으로써 바닥면의 습기나 바람이 통하게 하는 구조이고, 온돌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 그 열기로 구들을 데워 온기를 받아들이는 구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루와 온돌을 통해 고온 다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었다.



마루의 가장 우선적인 효용은 지면으로부터의 습기를 피하고,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차단하며, 앞뒤 통풍을 위한 기능을 가진다는 점이다. 마루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확하게 고증을 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조선시대에 오면서 마루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게 되는데, 그 용도나 구조 기법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을 보인다. 주거 건축에서 상류 주택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일반 민가에서도 오래 전부터 방 앞으로 작은 마루를 내어 안과 밖을 연결해 쓰기도 했다. 주거뿐만 아니라 다른 건축물에서도 마루가 사용됨으로써, 외기의 완충적 효과를 꾀한다거나 목조의 촉감과 탄성으로 충격을 덜어 준다는 이점 외에도 다른 재료에 비해 우리에게 정감을 주는 구조로 인식된 것이다.


 



 

기능적으로 보면 마루는 마당 쪽으로 개방돼 마당과 엇물리는 공간이 된다. 내부 공간의 엇물림은 건축적 공간성을 높여 주는 우수한 방법이다. 한정된 내부 공간을 외부로 확장하거나 외부 공간이 내부까지 들어올 수 있는 신축성 또는 탄력성을 공간에 부여하는 우수한 연결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앞마당 쪽으로만 개방된 것이 아니라 뒷문을 열면 후원과도 연결되면서 상호 관통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마루는 외부와 내부 공간을 이어 주는 반 외부 공간인 동시에 평면적으로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 공간이라 볼 수 있다. 마루는 형태상으로는 고상식(기다란 나무 기둥이나 돌 기둥을 이용해 마루를 높게 만든 형태)이고, 기능적으로는 여름에 습기를 피하면서 조망과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이 만나는 신성한 공간으로도 볼 수 있다. 집 전체를 관장하는 성주신의 성주 단지를 모시는 곳도 마루이고, 관혼상제를 치르거나 조상을 모시는 사당 역시 마루이기 때문이다.



여름의 공간인 마루와는 달리 겨울을 나기 위한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 밑의 구들을 데워 그 열이 인체에 직접 전달되거나 실내의 공기를 덥히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 온돌에서 뛰어난 과학성을 찾을 수 있다. 온돌은 우리의 습성에 맞는 난방 구조이며, 난방과 취사를 동시에 겸할 수 있고, 재는 비료로도 재활용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육식을 하는 서양인에 비해 채식을 주로 하는 한국인이 창자의 길이가 길어 체내 혈액이 대부분 상체에 모여 있기 때문에 하체의 체온을 위해 따뜻한 바닥에 앉아 생활해야 하는 ‘두한족열(頭寒足熱)’ 방식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온돌인 것이다.


 



 

온돌은 우리 몸에 침투하는 따끈따끈한 바닥의 적외선과 동시에 창호지를 통한 안팎의 열흐름이 항상 상쾌함과 개운함을 느끼게 해 준다. 즉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인 셈이다.
이렇듯 우리 기후에 맞는 마루와 온돌은 우리 주거 건축에 정착되면서 뚜렷하게 상반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온돌은 흙이나 돌로 이루어진데 반해 마루는 나무로 되어 있고, 온돌이 폐쇄적인 공간 구조를 보이는데 반해 마루는 개방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마루와 온돌은 오랜 기간을 통해 선택과 적응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온돌이 한국 전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데 비해 마루는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고 그 유형도 지역이나 집의 규모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다.
그 발생과 발달 경로가 각기 다른 두 개의 요소가 함께 존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의 절충과 진통이 있었지만, 추위를 나기 위한 온돌과 더위를 이기기 위한 마루의 자연 조절 기법은 서구 주택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기능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여름, 우리는 대청마루에 목침을 베고 누워 부채로 바람을 일구며 여름 한낮 무더위를 달래곤 했다. 앞마당 쪽에서 불어오던 서늘한 한 가닥의 바람이 마루를 통해 뒤쪽 대발 친 바라지창으로 빠져나갈 때, 마루 바닥의 매끄럽고 서늘한 촉각은 한여름의 더위를 잊게 해 주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온돌을 둔 방에 샛노랗게 기름 먹인 바닥의 여백과 가로세로 질서 있는 모양을 만든 창과 문, 그리고 윗목에 놓여진 고풍스러운 가구에서 볼 수 있는 질박함이 어우러진 그 집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정신을 길렀다. 그런 곳에 바로 마루와 온돌이 있었다. 위대한 미래는 찬란했던 과거와 접목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 참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온돌과 마루에 담긴 우리네 전통적 가족 관계와 따뜻했던 인정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요즘, 우리가 이 평범한 사실을 너무 쉽게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 볼 일이다.

 

 



집이 사람의 삶을 담은 그릇이라면, 한옥은 한국인의 삶을 담은 그릇이라 하겠다. 가족 제도와 생활 양식이 변화하면서 보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기술들이 출현하고 있다지만, 한옥에는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오랫동안 한국인들이 공유해 온 삶의 방식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서 재료를 얻은 한옥에 살면서 정서적인 풍족과 육체의 건강을 얻었고, 그런 생활을 통해 가족과 함께 안온하고 여유 있는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넓은 평 수가 보통 사람들의 꿈이 되어버린 시대에 한옥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던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새삼 일깨워 보기 위함이다.
 
단지 과거에 대한 향수나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복잡한 생활의 무게를 벗고 넉넉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작은 여유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한옥은 보다 살기 편하게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한국인의 정신을 담고 있는 우리의 터전이자 과학적이고 현명하게 축조된 주거 공간이다. 대청마루에서 더위를 식히고 온돌방에서 잠을 자는 한옥 체험이 늘어 가는 요즈음, 이번 테마를 통해 한옥에서 사는 소박한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한옥에 담긴 그 깊은 뜻과 상징을 이 짧은 페이지 안에 어찌 다 담아낼 수 있을까, 그저 편리함만 추구하는 시대에 한옥이 주는 쉼과 여유의 의미를 작게나마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옥은 말 그대로 ‘한국의 가옥’이다. 한옥은 보통 조선시대 양반 가옥으로 알고 있지만, 뿌리를 따지면 이보다는 더 오래되었고 그 범위도 더 넓다. 한반도에서 오랜 기간 사람들이 살면서 자연환경, 문화, 사상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공통적 주거 형식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조선시대 들어서 정형화된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재 조선 이전의 주거 유구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긴 하나, 고려 후기에 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옥의 전형인 조선시대 형식에 근접하게 된다. 계급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반드시 양반만의 가옥일 필요는 없다. 흔히 ‘민가’라고 하는 중하층의 주거에도 한옥 요소들이 일부 이기는 하나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민족의 가옥을 구성한 것이니 한옥은 이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최근 한옥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 방향이 점점 규모가 크고 형식도 어느 수준 이상이 되는 ‘고가의 부잣집’으로 잡혀가고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작은 규모의 개인집에 전통 민가의 특징을 섞으면 그 또한 한옥을 현대화한 훌륭한 예에 해당된다. 단, 좁혀 보자면 한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 가옥으로 한정 지을 수 있다.

한옥을 낳은 배경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웅장하지는 않으나 변화무쌍한 산과 강, 사계절이 뚜렷하면서 해가 좋은 빛, 겨울에는 서북풍이 불고 여름에는 남동풍이 부는 바람 등이 자연환경적 요소이다. 문화적 요소로는 상대주의 국민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고 그때그때 각 집마다 사정에 맞춰 개성을 충분히 살린다는 뜻이다. 사상적 요소는 고려시대 때 융성했던 노장사상이 제일 큰 밑바탕을 이루며 여기에 유교의 형식미가 가미되면서 완성되었다. 고려시대 주거지 외형은 조선시대의 한옥과 유사하나 많이 단순해서 변화무쌍하고 아기자기한 한옥 특유의 특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차이는 유교 형식미의 유무에 따른 결과다. 원래 유교 형식미는 매우 엄숙하고 정형적이지만, 이것이 노장사상 및 한국적 상대주의와 합해 지면서 규칙적이면서도 동시에 변화무쌍한 다양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융합 또는 통섭의 좋은 예일 수 있는데, 실제로 노장사상과 유교사상의 영향권 아래 드는 한·중·일 삼국의 주거를 비교해 봐도 한옥이 제일 변화무쌍한 특징을 보인다. 더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유교와 노장은 서로 반대편에 서는 사상인데, 이 둘을 하나로 합해서 규칙적 정형성과 변화무쌍한 다양성을 동시에 얻어 낸 예는 한옥이 유일하다. 한국인 특유의 혼성 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난 대표적 예가 바로 한옥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옥의 구체적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 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요약해 보자.

첫째, 한옥은 바람과 햇빛을 받아들여 이용하는 데 매우 뛰어난 가옥 구조를 자랑한다. 집 밖과 집 안에 그 비밀이 있는데, 집 밖에서는 자연 지세에 맞춰 집을 짓는 풍수지리가 그 비밀이고 집 안에서는 통(通)을 최대한 살린 배치 구도가 각각 그 비밀이다. 둘을 합해 보면 이렇다. 바람도 자동차처럼 다니는 길이 있는데 그 길목에 집을 짓되, 그것이 걸리적 거리지 않게 집을 짜면 집 안에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오가는 것이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늘 다니는 길로만 다니는데, 이를테면 해바라기처럼 거기에 맞춰 집도 쫓아다니면 집 안에는 항상 따뜻한 빛이 가득 찬다. 물론 겨울에는 바람을 피하고 여름에는 햇빛을 피하는 상식 쯤은 가장 잘 지키는 지혜로운 집이 또한 한옥이다. 바람은 여름에 유리하고 햇빛은 겨울에 유리하니, 한옥을 친환경 주택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 통을 살린 배치 구도는 곧 한옥의 공간적 특징으로 발전하는데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구조가 그것이다. 문을 다 열면 각목으로 짠 상자 뼈대처럼 되는데, 여기서부터 문을 하나씩 닫을 때마다 집은 끊임없이 다양하게 변한다. 뚫리고 막히는 방향과 정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이쪽을 막고 저쪽을 뚫을 수도 있고, 이쪽저쪽 다 막고 요쪽만 뚫을 수도 있다. 가히 가변형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창문 여닫을 힘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이 외에도 많은데, 중요한 것은 한옥의 특징들이 번호 붙여 나열할 성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 물고 물리면서 다양한 특징들을 추가로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통은 식구들 사이의 간접 의사 소통을 늘려주면서 동시에 집 안에서 환기와 통풍을 최대로 늘려준다. 사람 사이에 연락이 오가는 길과 바람이 통하는 길은 결국 같기 때문이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구조는 남향을 면한 벽의 면적을 늘려서 겨울에 햇빛을 집안 구석구석에 들이는 데 유리하다. 한옥은 마음만 먹으면 북향 방이 하나도 안 나오게 할 수 있는 구조를 갖는 가옥이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구조는 마당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효과도 준다. 사실 마당 없는 한옥은 흔히 하는 말로 ‘팥소(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마당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가회동의 도심 한옥만 가도 사람들은 좋다고 난리들인데, 마당을 맘껏 살린 시골에 있는 진짜 한옥은 도심 한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요즘 아파트에 싫증난 사람들이 한옥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옥의 특징을 충분히 알고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옥에 사는 진짜 의미를 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소한 여름에 에어컨 없이 살아야 진짜 한옥에 사는 것이다. 껍질만 한옥처럼 지은 다음 통유리 붙이고 에어컨 달고사는 것은 한옥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목조-기와-개인집’에 사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한옥이 절대선도 아니다. 한옥에 살아 본 적이 있는 어르신들은 불편한 점에 대해서도 많이들 말씀하신다. 한옥이 안 맞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 신경이 예민하거나 프라이버시 침해가 정말 싫은 사람은 한옥을 피하는 것이 좋다. 한옥의 장점은 매우 세밀하고 섬세한 것이어서 적성에도 맞고 그것을 잘 알고 즐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선물을 선사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별 효과를 볼 수 없을 테고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 한옥은 마치 다도(茶道)와도 같다. 티백으로 된 녹차 마신다고 어디 가서 다도라고 말할 수 없듯이, 한옥에도 도가 있어서 이것을 지키고 즐길 줄 알아야 한옥에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tong.nate 네이트 우수 블로그 왕관이예요just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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