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 김동출 수필 2.
그리운 추억- 옻닭과 장모님
철없던 막내 사위가 장인, 장모님께 원 없이 받았던 사랑 이야기다. 1979년 늦가을 결혼하여 첫 겨울 방학 휴가 때 부산에 있는 처가댁을 찾았을 때 쪽 찐 머리에 한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장모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 내외를 반겨주셨다. 우리는 기껏 준비한 소주병을 내려놓고 두 분께 큰절부터 올렸다. 마침 그 시간이 점심때였기에 시장기를 알아채신 장모님은 미리 준비해둔 밥상부터 얼른 차려 주셨다.
" 김 서방 이런 거 안 먹어 봤제. 이거 먹으면 몸에 참 좋단다“ 하시며 개다리소반에 국물이 진한 닭곰탕을 그릇 가득 담아주셨다. 낯설었던 그 음식이 바로 그때 처음 먹어 본 옻닭이었다.
뜨거운 국물을 그릇째 들고 후 후 불어가며 목구멍으로 넘기니 금방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마치 바닷가의 진미. 생 복국 국물을 마신 듯 금방 속이 뜨끈하게 시원해졌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시던 장모님께서는 귀여운 막내 사위가 옻 탈까 염려하셨다. 그러나 나는 장모님의 우려와는 달리 어릴 적부터 옻나무가 많은 산에 올라다녀서 옻에 대한 면역이 길러진 터라 주저 없이 장모님 맘에 들게 한 그릇 뚝딱 비웠다. 처가댁 보양식 옻닭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7남매의 막내딸로 자란 아내는 결혼 후에도 연로하신 친정에 두고 온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다. 신혼 초에는 밥상 앞에서도 부모님 생각에 얼른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의 학교 방학을 친정 부모님을 찾아뵙는 기회로 삼았다. 그 몇 년 뒤에 어머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남인 나의 식솔은 아버지가 재혼하신 본가에 정붙이기가 어려워져 자연히 발길을 처가로 돌리기 일쑤였다.
방학이 휴가가 시작되어 우리 식구가 모처럼 처가댁에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처가 이웃에 사는 처형과 처남 가족이 번개같이 달려왔다. 술과 먹거리를 잔뜩 사 들고 모여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얘기하고 놀았다. 처가에서 모이는 그때마다 빠지지 않는 음식이 장모님이 만든 보양식 옻닭과 술안주로 간식 삼아 먹던 가자미식해였다.
무더운 여름방학 때면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몰려가 어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파도타기를 하거나 모래성을 쌓으며 하루를 보냈다. 이듬해 여름방학 때는 피서 장소를 맑은 물이 흐르는 시원한 양산 내원사 계곡 숲 그늘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수박을 먹으면서 어울려 한 여름밤의 추억을 쌓았다.
겨울에는 창녕에서 건축사업을 했던 맏동서가 부곡 온천장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객실을 잡아 놓고 처가 식구들을 초대하였다. 그렇게 처가 식구들은 분담하여 만들어 온 맛난 음식을 풀어 놓고 배불리 먹어가며 온천욕을 즐겼다. 그런 중에 나는 한편으로 본가 동생들 걱정에 맘이 편치 않았다. 우리 집도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형제들이 어울려 이렇게 재미있게 놀텐데 하는 아쉬움 마음이 들어 밖을 나와 서성거렸다.
그 시절에 제일 가난했던 우리는 낯 가려운 줄도 모르고 빈손으로 방문하는 때가 많았다. 요즘 같았으면 쌀가마니 매고 가도 모자랄 판. 생활력 없는 노인이 사는 처가댁에 됫병 소주 한 병들고 찾아가서 꼬박 한 달을 눈치가 없이 빈대처럼 빌붙어 지냈으니 지금 생각하면 오금이 저린다. 건장한 장인 어르신과 비교되는 아담한 체격의 장모님은 눈썰미와 손끝이 야무지고 세상 물정에도 밝으셨다. 징용 가신 남편 따라 일본에서 사는 동안 품삯으로 익힌 바느질 솜씨와 요리 솜씨가 빼어나셨다. 겨울 방학이 되면 도시로 이사 온 우리 집에 장인 장모님이 다니러 오실 때면 정성을 다해 모셨다. 장모님은 그때 한창 유행했던 뜨개질로 모직 털 조끼를 떠서 외손주에게 입혀 주셨다. 어느 해 여름에는 나와 아내의 삼베옷을 지어 오셨다. 그날 저녁에 우리가 어려운 고비를 넘고 있던 시절에 당신들의 막내 사위 가족을 지극정성으로 돌봐 주신 두 분을 백화점 중화요리 전문 식당으로 모셨다. 장인 어르신께서 ‘젊은 시절 일본에서 맛보셨다’라고 자랑하신 <광동요리 전문집>에서 중국요리를 대접하며 감사의 말씀을 올리니 두 분께서 아껴두셨던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셨다.
장인 장모님 두 분 모두 건강하셨을 적에 방학 때에 부산의 처가댁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변함없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장모님 표’ 옻닭을 보양식으로 만들어 주셨다. 장인 어르신께서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왕복 2km가 넘는 새벽 산길을 오르내리시며 약수터에서 맑은 샘물을 길어 오셨다.
건강하셨던 두 분께서는 친가의 어르신보다 더 장수하셨다. 인자하시며 외유내강하신 성품의 장인께서는 88세에 영면하실 때 하늘의 뜻인가 막내 사위인 내게 임종의 순간을 허락하셨다. 경주崔씨 본성의 장인 어르신이 전설 속에 나오는 ‘온달 장군’이라면, 교하 노(盧)씨 성본의 장모님은 ‘평강공주’ 격으로 솜씨와 맵시와 눈썰미까지 뛰어난 장모님께서는 92세로 임종하셨다. 지금과 생각하니 두 분께서 이렇게 장수하셨던 것은 즐겨 드셨던 옻닭과 가자미식해( 처가에서는 '식기'라고 불렀다) 보양식 덕분이 아닌가 한다.
지난 7월 말에 은퇴한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딸이 방학으로 내려 온 날 제 어머니를 보자마자 외할머니가 끓여주셨던 옻닭이 먹고 싶다 하였다. 장모님 어깨너머로 옻닭을 배운 아내는 큰 압력솥을 꺼내서 생닭 2마리와 참옻, 깐 생마늘을 듬뿍 넣고 1시간 넘게 냄비가 눈물을 한참 동안 흘릴 때까지 끓여내었다. 마침내 완성된 국물은 친정어머님한테서 물려받은 진한 국물의 옻닭. 살 녹은 뼈를 가려낸 후 뜨거운 국물을 천천히 식혀가며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처가에서 자주 먹은 옻닭은 여름철 보양식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먹었던 진한 옻닭 국물은 두 어르신께서 우리 가족에게 음식으로 베풀어 주신 고귀한 사랑이었음 인제 와서야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삼가 두 분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2023-08-18.
첫댓글 처갓집하면 씨암닭으로 대변되는데, 불행하게도 저는 그런 대접을 받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욱 읽어 내려가면서 시인님은 참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느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사랑을 받고 사셨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받은 사랑을 또 내리 사랑으로 베풀고 있으니 가문이 중요하지요.
고맙습니다.
대신 어머님께서 52세에 돌아가셔서 평생 한으로 남습니다. 애써 자식 공부시키신 보람으로 친 손 4명 중 2명이 박사가 되었으니 어머님 만나면 어머님의 못배우신 한은 풀어 드린 셈이지요.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