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눌린 건반이 자아내는 잔상들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요
과거는 원음대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고
반음 높거나 반음 낮게 울려오는 도착적 음원이다.
그래서 당신은 마음 놓고 남 몰래 회상이라는 건반을 누를 수 있다.
우리는 피치 못하게,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미필적 고의로 남의 건반을 누르고 있거나 복면한 누군가에 의해 나의 건반은 눌려져서 질식 지경이다.
―「정신의 방위병」 중에서
고전은 누구나 읽어야 할 권위를 지닌 책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어떤 외국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다시 읽고’ 있는 책이라고. 파우스트를 지금 읽는다고 하면 교양을 의심받을 수 있기에 ‘다시’ 읽는다고 퉁친다. 사랑스런 위선이다. 모든 책은, 영화는, 그림은, 심지어 삶조차 ‘다시 읽혀야’ 할 무엇이다. 처음 읽으면서 다시 읽는다고 하는 것은 유치한 앞가림이지만, 들었어도, 읽었어도 그 속에서는 다른 울림이 튀어나오지 않던가. 낯익지만 낯선 이 순간.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중에서
마치 그대의 동의를 얻기 직전까지의 번뇌와 망설임과 괄호 안에 가둔 희열의 순간이 사랑을 생성시켜 주는 것처럼.
나에게 시는 강력한 현실이자 더없는 환상이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그것 없이는 살아도 살아지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시는 언제나 나의 문제가 된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살고 있는 그 ‘나’의 문제일 뿐이다.
시가 사회의 공공재라고 인식되기도 하지만 더 솔직하게는 주인 없는 사유재산임을 나는 더 지지한다. 그렇게 믿고 산다. 나의 우울증은 나의 시, 한국시, 문단의 소셜네트워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데 있지 않다.
문학상을 돌려가며 탄다는 귀여운 질투가 가미된 소문에도 있지 않다. 계 타듯이 돌아가면서 타야지 한 사람만 계속 타면 더 큰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우울증은 한국문학이라는 숲이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말라버릴까 봐 걱정하는 일이다. 젊은 날 파울 클레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듣자. ‘나는 울지 않기 위해 그린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나도 그런가? 나는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나에게 되묻고 있다. 돌아보니, 한국문학은 한 번도 문제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것만이 한국문학의 숭고한 문제일 것이고, 포즈였다고 생각하면서, 밖에 비오는데 이런 잡담할 정신은 아니어서, 마침표를 당겨 찍는다.
―「잡담들」 중에서
네이버에서 헤프다를 검색해 본 날이다
그 말이 동사였음을 알게 된 것은 소득이다
어디 시 잘 쓰는 여자 없냐고 물어오던 과객에게 답한다.
그대가 말하는 시가 뭔지 말해주면,
나도 입을 열겠다.
모든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말.
그런 게 시라면, 나는 지지하겠다.
내가 불가피하게 섬기며 사랑하는 말
어불성설 語不成說
11월의 끝날.
11월은 순수문학이다.
사유의 완전성에 값하는 달이다.
신경증이 없다.
―「시는 여자처럼 미완성 기획이다」 중에서
부처님 오신 전날이군.
종교는 에, 또,
거기 그렇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개발한 택지 같은 거겠지.
그래도, 대자대비하신 이여,
오늘 하루는 자비심도 놓고 쉬시기를.
폐경기 남자처럼 단독으로 서 있는 망루(望樓)
더는 바라볼 게 없는 그대의 인문학
여기에 그대의 서푼어치 외로움을 인용한다.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 어디더라,
이렇게 되겠지.
하여튼 어쨌거나.
술,
담배,
커피,
섹스,
망상,
詩는
자기 파괴에 이르는 완전식품
―「지금 당신 속으로 누군가 들어가고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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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자료는 교보문고에서~
축하 드립니다 잡담을 사러 서점으로 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