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80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축일입니다.
성인 중에 어쩌면 유일하게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분입니다.
이분의 탄생은 그 자체부터 기적이었습니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란 이름을 짓게 하자
묶여있던 즈카르야의 혀가 풀렸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에 사람들은 모두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며 신기해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의 길을 닦는 예언자가 될 것임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님을 드러내게 될 것인지는 신비에 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가끔 부모의 뜻대로 자녀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2010)은 어머니의 기대가 딸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발레의 여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아기를 갖게 되어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딸을 통해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니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망친 딸로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환상에 시달리며 결국 그 대상을 죽이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엄마의 꿈은 이뤄주었지만, 자신은 자기를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녀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마음 때문에 한 인생이 망가집니다.
인생을 빼앗는 것만큼 큰 도둑질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했을 때 부모는 세례자 요한의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름을 주님 뜻대로 정해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세례 때 경험합니다.
세례 때 세례명은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받은 이는 부모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부모는 그저 “이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저도 책을 몇 권 써 보았지만, 책을 쓰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책은 나의 피를 쏟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내가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책이 자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저는 책 네 권을 교구 출판사에서 출판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쓴 내용을 출판사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출판한 책들은 또한 내가 마음대로 절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쓴 책을 몇 년 지나서 보고 창피한 것이 너무 많아서 다 절판시켰습니다.
지금도 책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인데 벌써 다 써놓고도 몇 년째 수정만 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출판사에 투고해보고는 있지만, 출판을 해 주겠다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저의 것이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는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조금씩 수정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어떤 책이 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분명 지금 쓰는 책이 어느 곳에서 출판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책은 주님을 알리는데, 이전까지 내가 쓴 책들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미칠 것입니다.
김승호 회장은 어렸을 때 자신이 수천 명 가운데서 마이크를 들고 연설하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일곱 번의 지독한 실패에도 ‘이번은 아니구나!’라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천억이 넘는 재산을 가진 부자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단순히 어렸을 때 그렸던 자기 모습이
실현된 것을 보고는 놀랍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렇게 대해야 합니다.
“너는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를 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될 거야.
어떤 식으로 될지는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너를 응원하며 지켜보겠다!”
오늘 복음에서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즈카르야나 엘리사벳이 상상하지 못했던 삶입니다.
그저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을 어떻게 이끄시는지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생각은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한 부모가 자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80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가끔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는데, 저희 남자 수도자들보다 훨씬 침묵을 잘 지키십니다.
사오십 명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는데, 정말이지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잘 적응이 안 되는 저는 소화가 잘 안되, 끼니를 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은 그럭저럭 참을만한데, 일주일, 8박9일, 30일 대 침묵 피정,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괴로움입니다.
특히 차 한 잔 앞에 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술 한잔 씩 들이키며
술술 풀어놓아야 쌓인 것이 풀리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 침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개월간의 대 침묵 피정에 참석했습니다.
그 10개월 동안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요?
억울한 심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타의에 의해서 10개월 동안 말을 못 하게 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런 즈카르야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10개월 만에 혀가 풀리고 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10개월 만에 말을 하게 된 즈카르야가 내뱉은 첫마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 대한 투덜거림이었을까요?
강한 분노의 표출이었을까요?
자신이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강한 벌칙을 주셨냐며, 하느님께 따졌을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즈카르야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 마디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찬가 즈카르야의 노래였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매일 아침기도 때 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바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구약을 완성하기 마지막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이런 희망과 환희와 감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노래와 더불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아침마다 이 노래를 바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 탄생 사화의 결론입니다.
즈카르야 노래의 작곡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작사자는 성령이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신앙고백입니다.
즈카르야의 깨어남은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로 연결됩니다.
즈카르야가 찬미가를 부르는 순간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모든 불신과 의혹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즈카르야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자기중심적 삶을 넘어 참된 하느님의 사제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은 또 다른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를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다시금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새 출발의 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2023. 06. 24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80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세례자 요한을 그리며>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 힘겹게 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늙은 부모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요한!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이름조차 가지지 못하고
부모와 갈라서야 했던 외톨이였습니다.
뭇사람의 존경 받는 가문의 영광도
주님 섬기는 사제의 안정적인 지위도
당신의 몫은 아니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외아들
하지만 따스한 부모의 품이 아니라
거친 광야가 당신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여린 살갗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는 것은
당신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사치요,
단지 성긴 낙타털옷만이
당신을 거칠게 보듬을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빵과 맛난 살코기
몸과 마음을 유혹하는 달콤한 포도주는
결코 당신과 어울릴 수 없는 호사 일뿐
메뚜기와 들꿀에 당신은 생명을 맡겼습니다.
제 생각을 펼치지도
제 목소리를 내지도 않으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기에
당신은 있으면서도 없어야 했습니다.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탐욕을 채우려 혈안이 된 이들에게
위선과 가식을 옷 입은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당신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준엄한 질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애 첫 순간부터 평탄치 않은
비범한 당신의 삶의 여정에 이끌려
수많은 이들이 당신께 찾아와
살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며
오시기로 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당신께 투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자리를 탐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당신께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살기 위해 당신을 찾은
무수한 이들을 참으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은 스스로를 죽이고 죽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마침내 동생의 아내를 탐한 부정한 압제자의
썩은 냄새 진동하는 흥겨운 술판의
싸구려 노리개가 되어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당신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정의의 주님을 드러내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주님을 품음으로써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사라졌지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닮은 많은 이들을 통해서
오늘도 찬란히 부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의 추하고 속된 세상과의 단절을 본받아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기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당신의 비움을 본받아
주님으로 온 삶을 채울 수 있기를,
헛된 명예를 내던져버린 당신의 낮춤을 본받아
주님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들어 높이기를,
부정과 불의에 맞섰던 당신의 정의로움을 본받아
주님의 정의를 온 몸으로 당당히 선포하기를
겸손한 마음으로 다짐하며 기원합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