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02
11월8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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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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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eNL28mnWEc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이상국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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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삶을 위대하게 사신 예수님!>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삶의 노선이 하나 있으니, 작음에 대한 큰 가치와 의미부여, 곧 작음의 추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 내내 그 어떤 작은 것 하나라도 하찮게 여기신 적이 없습니다.
30년간 지속된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 작은 자로서의 삶을 조금도 소홀히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루를 평생처럼, 순간을 영원처럼, 조용하지만 정성껏, 최선을 다해 나자렛에서의 작은 삶을 위대하게 사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의 대표 격인 어린이들이 당신께 다가오는 것을 언짢아하시며 쫒아 내는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도록 하신 후 한 명 한 명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당시 유다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또 다른 작은이들이었던 장애인들, 악령 들린 이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다가가 정성껏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과정에서도 당대 잘 나가던 큰 사람들이었던 유다 고관대작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이름 없던 학벌 없던 시골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 16,10)
윗분들, 높은 분들, 크신 분들 보면 대체로 큰 것들, 많은 것들, 엄청난 것들에 혈안이 되지, 작은 것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이 통상적인 모습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니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기로 따지면 이 세상 그 어떤 인물보다 크신 예수님이시지만 작은 것들, 작은 사람들, 작은 사건들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시며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시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한 가난한 인간의 작은 외침, 절박한 부르짖음에도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상처 입은 한 영혼의 작은 상처에도 큰 연민과 측은지심을 지니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찮아 보이는 것들, 정말 작은 것들도 그분께는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 너무나 은혜롭지 않습니까? 나같이 보잘것없는 한 인간의 작은 고통도 그분께는 아픔이고 상처라는 사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 하나라도 귀히 여기는 것.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일들, 작은 봉사, 작은 만남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 결국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된다면 크고 대단해서가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어서 구원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작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작아지는 우리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음에 감사하고, 보다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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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가진 무엇은 그저 ‘운’ 때문입니다>
베토벤에게는 크리스토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투기에 열중하여 대단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은 돈으로 땅을 사재기하여 자칭 ‘토지 소유자’라 칭했습니다. 언젠가 베토벤이 돈에 쪼들려 견디다 못해 동생에게 통사정했습니다. 얼마 후에 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습니다.
“지금은 매우 살기 어려운 세상이며 이때를 이겨 나가려면 누구나 있는 힘을 다해 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형님이 선택한 직업은 딱하게도 죽기에는 부족하고 살기에는 더욱 모자라는 수입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형님이 지금과 같은 딱한 처지에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형님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형님을 도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동생, 토지 소유자 크리스토퍼 올림.”
이런 답장을 받자 분을 못 참은 베토벤은 단숨에 다음과 같이 한 줄짜리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네 돈은 필요 없다. 네 설교는 더욱 필요 없다. 두뇌의 소유자 루드비히.”
여러 해 동안 일본 납세액 1위를 달렸던 거부 사이토 히토리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일본 최고 부자이자 성공한 사업가로서 언론에 얼굴 등 자세한 신상이 공개되지 않아 ‘괴짜 부자’, ‘별난 사업가’ 등으로도 불립니다. 그에게 그토록 많은 돈을 번 이유를 물으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합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재물은 ‘운’ 때문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재물 운이 자신에게 오도록 받아들일 자세로 살 뿐이라고 말합니다. 열심히 일하면 재산을 많이 모을 수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운 좋은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을 이깁니다!”
소유는 운 때문입니다. 운 좋으면 받고 운 없으면 못 받고, 운 좋으면 살고 운 나쁘면 죽는 게 인생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생명도 단 1초도 더 늘릴 수 없고, 머리카락 단 한 개도 더 나게 할 수 없습니다.
죽을 때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까지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다시 찾아가시면 그 사람은 자신이 소유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합니다. 가져갈 수 없으니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베토벤의 동생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것으로 형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생은 투기로 번 돈이 자신의 노력으로 합당히 벌었기에 자신이 당연히 소유해야 하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은 형은 가난한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가장 위대한 음악가인 형을 잃었습니다.
무언가를 소유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 여겨서 남에게 주기가 아깝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롭지 않다고 여기면 쉽게 줄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재물을 불의하게 여겨야 나누어줄 수 있고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의하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합당하지 않은데 가지고 있으면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운이 좋아 가진 것들이 불의한 재물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 것이기에 우리 소유는 다 불의한 재물입니다. 주님 것을 내가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김제동 씨가 못생긴 사람이 없으면 잘 생긴 사람도 있을 수 없다면서 조인성 씨 앞에서 그를 면박 주는 강의는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그 얼굴과 그 키와 그 모든 외모를 자신이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사람들이 운이 좋아 더 받은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인정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운 나쁜 것이 그 사람 탓은 아닙니다. 복권에 당첨되지 못했다고 그것을 그 사람 탓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북한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일까요? 내가 굶어 죽는 곳이나 전쟁의 고통 속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의 노력 때문일까요? 다 운이 좋아서 그럴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갈 때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굶어 죽어갈 때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우리를 친구라 여겨줄 수 있을까요? 참다운 나눔은 나의 것이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저 운으로 주어진 불의한 재물임을 알 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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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목수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창고 공사하면서 새롭게 발족한 단체입니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입니다. 형제님들이 자발적으로 본당의 여러 시설에 대해 점검하고, 보수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80개가 넘는 에어컨 필터를 교체하였습니다. 누수가 있었던 세례대의 누수를 고쳤습니다. 누수로 인해 물이 고인 천정의 패널을 교체하였습니다. 낡고 오래된 제의실 옷장을 용도에 맞게 새로 제작했습니다. 회의실 탁자도 용도에 맞게 새로 제작했습니다. 죽은 나무를 뽑고 새로 사 온 나무를 심었습니다. 여기저기 널려있던 공구를 담을 공구함도 만들었습니다. 물이 새는 스프링클러의 호수도 새롭게 교체했습니다. 누수로 인해 변색한 성전 입구의 벽도 깨끗하게 칠했습니다. 고장난 친교실 주방의 수납장도 고쳐 주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성전의 고장난 등을 교체했습니다. 10미터 높이의 천정까지 올라가는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케이스를 교체하면 쉬운 작업이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케이스를 열고 고장난 등을 교체하는 작업이라 어려웠습니다.
시간과 열정을 내어 주신 목수회 형제님들을 위해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모든 일을 진두지휘해 주신 그레고리오 형제님이 있습니다. 일머리가 좋은 안 도마 형제님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작업했던 정 도마 형제님이 있습니다. 목수회의 모든 작업을 조율했던 마르첼리노 분과장이 있습니다. 무거운 공구를 기꺼이 옮겨 주었던 다윗 형제님이 있습니다. 작업대를 세우고, 뒷정리를 맡아 주었던 요셉 형제님이 있습니다. 깨진 성전의 타일을 교체해 주었던 안토니오 형제님이 있습니다. 작업 중에 식사할 수 있도록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 주었던 베로니카, 소피아 자매님이 있습니다. 언제나 격려해 주고, 좋은 술을 준비해 주었던 요셉 회장님도 있습니다. 어려운 작업, 때로는 위험할 수 있는 작업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당의 힘든 일을 기꺼이 맡아서 해 주는 목수회 형제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안부 인사를 하면서 사람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안부를 전한 사람은 13명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보다 먼저 복음을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와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대신 써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직자로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역할은 바오로 사도의 몫이었지만 그 복음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지만 그 뒤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습니다. 반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해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제를 도와주는 복사가 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미사를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재물을 좀 더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의사가 처방전을 주면 약국에 가서 약을 사는 것도 빨리합니다. 건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아플 때,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보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는 일이 재미없고,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즉시 영혼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피정을 가거나, 사제에게 면담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를 묵상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일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영적인 건강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과거의 일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과거 나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오늘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내일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찾아오는 많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일지라도 주님을 위한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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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덧붙이신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라고 하십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무엇일까요? 내 것이 아닌데 마치 내 것처럼 쓰는 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 동창 신부 하나가 오래전에 이런 묵상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단지 돌려드릴 것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가 이룬 것이라 착각하고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을 ‘불의한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일”(16,10), 곧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16,11)라고 물으십니다. 영원하고 충만한 생명, 새 세상을 맡는 일에 견주어 보면 세상의 재물을 쓰고 관리하는 일은 사소하다는 것이지요.
끝으로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16,13). 그러나 재물이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재물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나와 세상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만큼,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만큼 쓰면 되는 것이지요. 다만 그 재물을 하느님 자리에 두는 나의 무지가, 또 그것으로 내 뱃속만을 채우려 하는 나의 욕심이 참으로 문제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하느님이냐 나 자신이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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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9-15: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집사의 비유를 이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9절) 주님은 재물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지 않으신다. 오히려 재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사도 바오로는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우리가 가진 재물, 재능, 시간은 본래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관리자로서 사용해야지, 주인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가르친다: “네가 가진 것은 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너는 단지 관리인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창고가 바로 네 창고다.”(Sermo 86) 우리가 나누지 않는 재물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지만, 사랑으로 나눈 재물은 영원한 삶으로 옮겨져 하늘의 보화가 된다(마태 6,20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는 단순한 인간적 관계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 때, 실제로는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마태 25,4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에게 내어주어라. 그러면 그가 천국의 문 앞에서 네 친구가 되어 너를 맞이할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Hom. XIX) 재물은 사라질 때가 오지만, 우리가 재물로 나눈 사랑은 우리를 영원한 거처로 인도하는 친구가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재물은 본래 선물이지만, 그것이 우상이 될 때 우리는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노예가 된다. 교리서는 경고한다. “탐욕은 우상 숭배와 같다. 재물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하느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2534-2536항 요약) 우리가 재물의 올바른 주인이 되는 길은 그것을 사랑이 지배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선을 통해 재물을 다스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재물의 본래 목적을 일깨워 준다. 재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도구이다. 우리가 재물의 종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재물의 주인이 되어 사용할 때, 그것은 영원한 보화를 준비하는 길이 된다. 나눔 속에서 얻는 참된 자유, 그리고 가난한 이 안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섬겨야 할 한 분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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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사이에서>
루카 16,9ㄴ-15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참모습)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사이에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감사히 품음으로써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
헛되이 사로잡힘으로써
하느님을 잊습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아낌없이 나눠줍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악착같이 움켜쥡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주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서로를 살리는
선으로 자라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섬기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악으로 썩어갑니다
우리는
주시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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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 재물이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9-13)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4-15)
1) 여기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은, ‘세속의 재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냥 ‘세속의 재물’이라고 표현하시지 않고, 굳이 ‘불의한 재물’이라고 표현하셨을까? 그것은 재물에 ‘불의한(악한) 속성’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는 인간을 지배하는 마성(魔性)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악한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3절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이 바로 재물에 숨어 있는 ‘불의한 속성’을 나타냅니다. 재물을 섬기려고 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재물의 힘에 끌려서 재물을 섬기게 되고, 그러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재물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또는 “재물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악하게 사용하는 인간이 악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말은 재물에 ‘불의한 속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9-10)
재물에 ‘불의한 속성’이 숨어 있다고 해서, 재물과 관련된 모든 죄와 악의 책임이 인간에게는 없고 재물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든 일을 생각해 보면, 유혹한 일에 대한 책임은 사탄에게 있고,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책임은 하와에게 있습니다.
그처럼 재물 때문에 짓는 죄에 대한 책임은 죄를 지은 사람 자신에게 있고, 그렇게 하도록 유혹한 것에 대한 책임은 재물에게 있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만 사랑해야 합니다(마태 22,37)
<이 말은 단순히 재물을 의인화시켜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재물’이라는 말의 원문 단어는 ‘맘몬’인데, ‘맘몬’은 재물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재물의 신’을 뜻하기도 합니다. ‘재물의 신’을, 재물을 사용해서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9절의 “친구들을 만들어라.”는, “자선을(사랑을) 실천하여라.”이고, “재물이 없어질 때”는, “이 세상을 떠날 때”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랑을 실천한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재물이 많든지 적든지, 아니면 아예 재물이 없어도, 사랑 실천은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자격 요건입니다.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는, “세속 안에서 살더라도 신앙인답게 살아라.”입니다. <신앙인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신앙인입니다.>
12절의 ‘남의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재물도 목숨도 인생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루다.’라는 말은, 인간은 하느님의 것을 잘 관리해야 하는 관리인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참된 것’이라는 말과 ‘너희의 몫’이라는 말은, ‘구원’과 ‘생명’을 뜻합니다.
3)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재물의 악한 힘에 지배당하고 있으면서,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멀어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위선과 교만을 잘 알고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라는 말씀은, “사람들은 너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보면서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으니 의인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들이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위선과 교만을 대단히 혐오하시는 분이고, 그것을 아주 엄하게 처벌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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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잘 벌어서 절 써야 하겠습니다>
몇몇 분에게 돈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먼저 봉헌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물질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상점이나 식당, 사업장에 오시는 첫 손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그 몫이 얼마가 되었든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하겠다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한 달을 모은 것이라고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 손해를 보지 않았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신부님이 하라 하니까 순명으로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달 매상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재물의 축복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주시는 분을 섬겨야지 주어진 선물 덩어리를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주시는 분은 외면한 채 주어진 선물을 가지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다툽니다.
재물의 용도는 하늘의 거처를 마련하는 도구일진대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의 노예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재물은 분명 이용해야 하는 도구이지 섬겨야 하는 주인은 아닙니다.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내 영혼을 비추어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고 했습니다. 혹여 물질이 우리의 보물, 주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집회서는 재물의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 황금은 그것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고 어리석은 자는 모두 황금에 사로잡히리라. 아무 흠도 없고 황금을 밝히지도 않는 부자는 행복하다.”(집회31,5-8)
이런 의미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불의함조차도 거부하지 않고 만나 모두를 하느님의 충실성 안에 초대하라는 말입니다.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단죄와 판단으로 자꾸만 갈라놓고 제 선함과 의로움을 내세우는 세대 안에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과 한계를 보듬고 살펴 여유와 자비를 갖추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칩니다."(함께야)
물질은 함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선을 만들어 내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이 크더라도, 허물을 안고 사는 죄인이라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제 입맛에 맞는 이들만 찾는다면 신앙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잘 벌어서 잘 쓰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요.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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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성원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봉성체를 나갑니다. 시골이라 노인들과 장애인이 많습니다. 무슨 장애인이냐고 생각하지만 실제 농사를 짓다 보면 의외로 사고 위험이 많다고 합니다.
처음에 봉성체를 나갈 때는 길도 잘 모르는데다 차를 이용해서도 20-30분씩 시간이 걸리는 데 짜증이 났습니다. 그것도 지저분한 방에 들어설 때면 내심 찜찜했고 집 안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는 얼른 예식을 마치고 가야지 하는 생각만을 갖게 했습니다.
'도시에서는 보통 며느리나 딸들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 놓고 봉성체가 끝나면 식사 대접을 하건만...'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가난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던 사제서품 때의 결심은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점점 속물로 변해가는 제게 하느님께서는 정신을 차리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날도 아흔이 넘으신 바오로 할아버지 댁으로 봉성체를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겨우 성당에 나오실 정도고 할머니는 몸이 안 좋아 집에만 계셨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좀 일찍 간 관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아직 식사중이셨습니다. 얼른 상을 치우려는 두 분 사이로 반찬이 보였는데 멸치·오이지·김치가 통에 담겨 있는 그대로 놓여 있었고 하나같이 곰팡이가 피어 있었습니다.
두 분은 상한 음식을 놓고 마주앉아 그렇게 식사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제라는 게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 다음달에도 바오로 할아버지 댁에 봉성체를 갔습니다. 집에 들어서며 “할머니, 봉성체 왔어요. 십자가하고 초를 놓는 상 어딨어요?” 하니까 혼자 계시던 할머니께서 “아유, 어서 오세요. 숟가락도 가져올까요?” 하시더군요. 할머니가 가벼운 치매에 걸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가 참 정겨웠고 참 곱게 늙으셨음이 고마웠습니다. 한 달 전쯤부터 바오로 할아버지가 풍에 걸리셨습니다. 음식도 배에 호스를 꽂아 드십니다. 제가 가면 울기만 하십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다.’ 마치 저에게 하신 말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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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극단적인 선언을 들려주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시니 마음 한 쪽이 서늘해집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들으며 위로를 얻어 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렀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했던 바오로 사도의 삶을 생각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까요.
모든 사람을 향해 따뜻한 희망을 전함으로 마음을 녹여줄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도 가능한 은총입니다. 주님의 향기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힘을 갖고 오직 그분께 의탁함으로 행복해 질 수 있으니까요.
신앙하는 삶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에게서도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향기가 풍겨나기도 할 테니까요. 이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바오로 사도처럼 한결같이 그분을 따를 때 참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하지 않고 “사랑 안에 머무르라”(요한 15,4)고 말씀하신 까닭이라 믿습니다.
요즘 신자 분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느님보다 먼저 예수님보다 먼저 무언가를 하려고 서두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말씀드린 후에도 도무지 그분과 함께 할 여유가 없고 그분 안에 머물 시간을 내지 않으니까요. 이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분께 사랑받는 일임을 잊어버린 탓이 아니겠는지요.
사랑을 받을 시간이 없으니 사랑을 배우지 못합니다. 때문에 자존심 싸움을 하고 하찮은 일에 낙심하기 일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야 하는 기쁜 소식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사도 2장 참조) 그리스도인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진 세월이 자그마치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세계의 4600여개의 언어가 성경 번역본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삶이 얽어매는 모든 사슬을 풀어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한 복음을 살아갈 때 넉넉하고 풍족하게 채워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그 열매가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오늘 주신 단호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기도 방향이 바꾸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겨우, 비천한 처지를 벗어나는 일이나 배고픔을 면하는 일, 혹은 모자란 살림살이가 넉넉해지기를 원하는 따위를 벗어나 참으로 주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바라고 소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그분의 음성이 우리의 영혼을 울리고 가슴에 새겨지는 오늘이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오늘이 되어 하느님 사랑만으로 ‘충분한’ 우리 모두의 삶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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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소유와 위탁의 관계>
오늘 복음에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말씀들이 서로 모여있다. 전체적인 이해를 돕는데는 우선 어제 복음이었던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를 떠올려야 한다. 그 비유가 오늘 복음과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청지기의 편법적인 부정직함을 알면서도, 그러나 약삭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슬기로움을 칭찬한 부자주인의 입장을 은근히 동조하시면서,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청지기가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실직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에서 신속하게 자신의 미래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청지기의 부정직함은 접어두고라도, 그의 행동은 곧 심판의 위기에 직면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즉각적인 회개촉구의 모범이 될만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는 청지기의 부정직함이다.
이 부정직함이 오늘 복음의 세속과 재물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에 비웃음을 보인 이유를 먼저 보자. 그들이 예수를 비웃은 이유는 예수께서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말씀에 비웃음을 보였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재물을 통한 자신들의 넉넉한 생활을 그들의 정직함에 대한 하느님의 보상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야훼 하느님의 전통을 보호하고 전수하며, 율법을 글자 그대로 착실하게 지키는 대가로 재물을 보상받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재물과 하느님을 일치적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보상으로 받은 재물의 소유권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속적 재물과 하느님을 철저하게 따로 떼어 생각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생각에 의하면 재물과 하느님은 각각 서로 다른 주인이다. 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13절)
거듭 말하지만 재물은 세속적이며, 부정직함과 온갖 탐욕을 반영하고 있다. 돈이 있는 곳에 부정부패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세속의 재물과 하느님에 대한 문제에서 어떤 답을 얻을 수 있는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재물과 하느님에 대한 일치적 관점의 태도는 일단 답에서 제외된다. 그것은 그들의 태도가 하느님께 가증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15절)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상으로 주어진 세속적 재물의 주인을 자기자신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답은 소유(所有)와 위탁(委託)의 철저한 구분에 있다.
세속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에 의해 위탁된 것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주어진 재물은 하느님에 의해 맡겨진 종속적인 관계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뿐이시다. 하느님 외에 어떤 무엇도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세속의 재물 또한 하느님의 것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이를 잘 관리하도록 불림을 받은 셈이다.
사람은 적게 맡았던 많이 맡았던 맡은 것에 대한 자신의 소명(召命)과 책임을 잘 완수해야 한다. 여기에는 늘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10절)는 원칙이 적용된다.
맡은 것이 많을수록 비리와 부정부패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기 때문에 이를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아울러 이 땅에 기아에 허덕이고, 재물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며, 인권을 팔아야 하는 일이 있는 한, 우리는 각자의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마음 깊이 깨닫고 뉘우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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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유럽 여행을 신부들과 함께 갔다가 2층 관광버스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타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여행 중인 다른 신부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이층에서 편안히 앉아 주변 경관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신기해. 운전사도 없는데 차가 가고 있어.”
이 신부의 말처럼 운전사가 없는 것일까요? 전자동 자율 주행 차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운전사는 우리가 있는 2층이 아니라 1층에 있었던 것입니다. 1층의 운전사가 보이지 않으니, 운전사 없이 앞으로 가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피조물이 전지전능하신 분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볼 수 있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일 수 없습니다.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팔짱을 끼고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단지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깨닫는 방법은 하느님의 일을 했을 때 가능합니다.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부족해도 조금씩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보다 하느님을 느끼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가 그렇게 하셨고, 실제로 안에서 커다란 기쁨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인 ‘불의한 집사’ 비유에 이어서, 재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를 설명하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루카 16,9)라고 이야기하시지요. 세상의 재물이 종종 불의, 탐욕, 불공정과 연관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대비되는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가리키기에 불의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것으로 친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사라질 이 세상의 재물들을 하느님 뜻에 맞게 자선, 이웃 사랑 등으로 사용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성실하게 다룬다는 것은 하느님 뜻에 맞게 사용할 때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뜻에 맞게 사용할 때, 하느님께서 가장 귀한 참된 것을 맡긴다는 약속하십니다.
세상 삶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려면, 하느님의 일을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보다 세상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참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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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여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날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을 비롯하여 삶의 온 국면이 시장화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시장화 되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돈’이 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돈’이 우상화 되고 신격화 된 것입니다.
이를 교종 프란치스코의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55항)
그래서 교종께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 숭배 풍토를 강도 높게 질책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모는, 소위 말하는 '돈의 제국'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다.”(바실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경제 제도는 극도로 높은 소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려 한다.”(국제민중운동회의, 2014.10.28)고 지적하시며, “사람이 돈을 숭배하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될 것”(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회의)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볼리비아 방문)라고 질타하시고, “인간의 생명을 돈과 이윤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정책을 철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인간 얼굴을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하라.”(파라과이 방문에서 세계 지도자들에게)고 주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혹 우리의 속마음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돈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 꼴이 됩니다.
사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은 재물의 노예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맬 뿐입니다. 결국 '주님을 섬길 것인지, 우상을 섬길 것인지'는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이유는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여 있는 존재이며,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듯이, 재물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재물도 모두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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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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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돈이 아니라 사람이, 공동체가 먼저다” -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시편 145,1)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입니다.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얼마나 부지런한 레오교황인지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못지 않게 근면 성실한 말그대로 하느님의 사람, 교회의 사람입니다. 어제 교황청에서 하루만 만남시 주신 중심 메시지만도 무렷 다섯입니다.
“사업가들이나 전달자들은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중독을 막기 위해 온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찾아야 한다.”
“다스림에서 침체를 피하고, 형제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라.”
“AI(인공지능)은 창조주 하느님의 의도를 반영해야 한다.”
모두가 시의적절한 조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기반을 두라는 말씀들입니다. 어제 만난 피정중인 미카엘라 자매의 삶도 감동적이었습니다. 20대 말 중국땅 연길에서 30대 말 전남 함평의 알콜중독 형제에게 시집와서 4년 방통대도 졸업하고 산전수전 다 겪으며 가족을 다 살리고 성가정을 이루어 사는 자수성가형 주님의 용사같은, “누가 하느님과 같으랴”이름 뜻에 손색없는, 하느님 중심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던 미카엘라 자매였습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었네” 책을 독료했다며 두 시를 곡을 넣어 노래도 불러 줬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
<하늘>이란 시에 이어 노래한 <하늘길>이었습니다. 두 시 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노래한 시입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나무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소나무야!”<2001.4.21.>
자매의 곤고했던 하느님 중심의 삶을 반영하는 시인지 참 진지하게 온 정성을 다해 불렀습니다. 참으로 시종여일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이들은 하느님 친히 보호자, 인도자되어 함께 해 주심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다음 시편도 이를 입증합니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시편23,4)
공자의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덕 대신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좋은 믿음에 좋은 이웃이 계속 연결됨으로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해 강조하는바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의 우선순위입니다. 오늘 복음도 전부 돈과 관계된 것입니다. 재물이나 돈의 거부가 아닌 올바른 사용을 강조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삶에 중심이 둘 일 수는 없습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돈의 거부가 아니라 하느님과 돈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하느님의 중심의 삶에 충실할수록 땅의 현실에도 충실하여 재물 관리에 만전을 기하되 절대 인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람이, 공동체가 먼저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비웃자 예수님의 경고 말씀이 우리에게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형오스러운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자는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돈 중심의 사람은 교만할 수 뿐이 없고, 하느님께는 참으로 혐오스러운 모습입니다.
언젠가 어느 자매가 먹을 것을 예상하며 무엇을 좋아하느냐 묻길래 순간 ‘돈을 좋아한다’ 말할까 하다가 ‘자매를 좋아한다’ 말했고, 즉시 ‘하느님을 좋아한다’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좋아할 때 저절로 초연하고 자유로운 무욕의 품위있는 삶에 분별력의 지혜도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의 교육도 <돈맛>보다는 <하느님맛>을 들이도록 훈련해야 함을 봅니다. 재물을 맘몬이라 불렀듯이 재물은, 돈은 사람을 노예화 중독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옛 고려말 충신 최영 장군의 어록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돈 중심의 <이해관계>로 살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형제애 관계>로, <의리관계>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관계가 참 놀랍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복음 선포 활동을 통해 형제애로, 의리로 맺어진 관계들입니다. 로마서를 끝내며 나누는 끝인사와 권고가 끝이 없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굳건히 하며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우정을 깊이 해줍니다. 마지막 바오로 사도의 장엄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6;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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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16,9ㄴ)
<재물의 올바른 사용인 자선!>
오늘 복음(루카 16,9ㄴ-15)은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곧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참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단어가 '재물'입니다. 오늘 복음은 '재물의 올바른 사용인 자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말씀으로... '내가 살아 생전에 자선을 베풀면, 자선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훗날 나를 기억해 줄 것'이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
재물은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은 하느님께 속해 있는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주인이 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자리에 재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 이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돈과 재물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생각했고, 재물의 소유는 그가 의롭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지런히 돈을 추구했고, 그렇게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재물은 주인이 아닙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종이며,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곧 자선을 통해서 하느님께 되돌려져야만 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자선에는 '물질적인 자선'이 있고, '영적인 자선'이 있습니다. 영적인 자선은 '영적인 것을 나누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너를 위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성월'입니다.
죽은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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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두 마음으로는
한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재물은
우리를 묶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풀어주십니다.
재물은
이와 같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신앙은
기도만이 아니라,
물질의
사용 방식을
통해서도
뚜렷이
드러납니다.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는
신앙은 곧
우상숭배로
빠져듭니다.
재물은
인간의 욕망을
가장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입니다.
재물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익보다 관계가
성공보다 진실이
중요합니다.
재물은 우리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는
삶과 죽음의
여정입니다.
돈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이시며
중심이십니다.
삶의 방향을
바로잡는
감사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통한
마음의 부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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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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